00107 짐승, 드디어 꽃을 물다 =========================================================================
담하는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추적추적 옮겼다.
재상의 사가에 관련된 일 때문에 심부름 차 주항서로 가는 길이었는데 오늘따라 그 심부름이 정말 싫었다.
물론, 재상이 개인적인 업무를 시켜서는 아니다. 뭐, 한 두 번이어야지.
비서실장이 되고 얼마 후, 업무에 관련된 명령만 하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자신을 앉혀놓고 재상은 자신의 마음이 편해야지 일도 빠르게 처리 될 것이며 그렇다면 니가 할 일도 적어지지 않겠냐는 식의 괴변을 한시진이나 늘어놓았었다. 내용은 둘째 치고 바빠 죽겠는데 한시진이나 같은 소리 반복하는 통에 다시는 그런 요구는 안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부터 담하는 재상의 비서실장인지 개인머슴인지 알 수가 없는 자신의 모호한 정체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만 아프지.
아무튼, 담하가 멀리보이는 내궁의 지붕을 보며 한숨을 쉬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새로 임명된 주항서인이 문제였다.
담하는 도무지 그 노파에게 정이 안 갔다.
그 주름진 눈꺼풀사이로 요상하게 번뜩이는 갈색 눈이 요러-고 쳐다볼 때면 자신이 꼭 궁지에 몰린 쥐 같았기도 하고, 발가벗겨져 저잣거리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기도 했다.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대체 태자전하께서는 그런 노파를 어디서 주워... 아, 아니, 데려왔는지......
태자전하께서는 보기만 해도 께름칙한, 그런 출신성분도 모를 노파를 궁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주항서 소속도 아닌 주항서인으로 떡하니 천거까지 하셨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아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그 노파는 주항서인에 앉자마자 연제와 재상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태자전하께서야 지금 똥줄이 타니 매일 주항서로 출근하시는 거야 이해가 가지만 연제와 재상은 왜 저러시는 건지. 매일 셋이서 무슨 작당을 하는지 밥도 같이 먹고 차고 같이 마시고 산책도 같이 나갔다.
진 내관에게 슬쩍 물어보니 만나도 별 말씀 나누는 것도 아니라고 하던데......무슨 날짜가 어떻고 셋째가 어떻고 넷째가 어떻고 여자아이가 어떻고. 도통 무슨 얘기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했지만 담하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분명, 화연아가씨와 관련된 말씀을 하시는 것일 테지.
“하아......낙이 없구나.”
담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음속으로 모시고 있던 단 하나의 여신인 화연아가씨에게 짐승이 침을 덕지덕지 발랐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입맛도 없고 기운도 없다. 사는 것도 재미없고 의욕도 없다.
돈 벌면 뭐하나. 써줄 여자도 없고 자식도 없는데.
누구는 그렇게 짐승처럼 빈둥대며 살아도 배필 하나 잘만 만나는 데다, 최근에는 륜국과의 일 때문에 명성도 더 높아져만 갔다. 나는 뼈 빠지게 일해도 배필은커녕 만나는 사람은 중년남자 아니면 냄새나는 젊은 남자 아니면 무서운 노파다.
취향을 바꿔보라는 하늘의 뜻인가.
아, 인생 참 덧없다.
전각을 올라가는 담하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문을 앞에 두고 한숨을 쉬는데 안에서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담하구먼. 들어와.”
아....이런 거 너무 싫다.
매번 인기척을 안내는데도 어떻게 알까. 짐승은 청룡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발소리를 구분 한다던데... 자기가 짐승이냐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담하를 위아래로 훑던 노파는 이내 어깨에서 무언가라도 본 것 마냥 시선을 그쯤에 두고 피식 웃었다.
아....저런 것도 너무 싫다.
괜히 오싹해 지면서 뒤를 한번 돌아봐야 할 것 같은 이 기분.
담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어깨를 툭툭 털면서 노파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자리로 가서 앉았다. 가만히 자신을 주시하는, 너무 맑아서 더 괴이쩍게 보이는 그 갈색 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허공으로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담하는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뭔가?”
“재상께서 전해드리라는 겁니다. 아마......첫째 도련님 길일에 관련 된 거 같던데요? 상국 공주의 처녀단자 같기도 하고요.”
“흠......”
겉을 감싸고 있는 비단을 펴보니 한지가 곱게 접혀져 있다. 그것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노파를 보며 담하는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저......뭐 하나 여쭤 봐도......”
“있어봐.”
“예?”
“진득하니 좀 있어보라고. 그럼 만날 테니까.”
“......누구를요?”
“누구긴? 니가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만나고 싶어 한다고요? 제가요? 어......? 그런 사람 없......앗! 혹시 화, 화연아가씨께서 오늘 궁에 오십니까?”
먹을 묻힌 붓을 들고 가만히 생각하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종이에 써내려가던 노파는 이게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담하를 보다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도 빨리 죽고 싶은 게야? 행여 근처에 갈 생각은 하지도 말어. 보더라도 멀찍이 돌아가. 잘못하다 걸리면 아마 곱게는 못 죽을 걸? 륜국 이 황자, 그놈 봤지? 그 수하라는 놈하고 개고생 하는 거 알면서도 그러고 싶냐?”
화양주를 화연주로 바꾼 뒤 그곳은 지금 한창 변화의 바람이 거셌다. 기루가 싹없어지면서 그 자리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한 복지시설을 짓고 있다. 그 두 사람은 책임자로 보내졌다고는 하는데.......뼈가 빠지게 일을 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을 보면 사실, 책임자는 핑계이고 막일꾼으로 보내졌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담하도 그 소문을 듣긴 했었다.
하지만 듣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불쌍하다거나 안쓰럽다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그 소리를 듣고 어찌나 미친 듯이 부럽던지.
젠장! 배부른 놈들. 하여튼, 운이 좋은 놈은 뒤로 넘어져도 여인의 무르팍으로 넘어지는 구나.
그 곳은 특성상 여자가 바글바글 하단다. 그것도 왕년에 한 가락 했던 기녀들이 많아 꽃밭도 이런 꽃밭이 없다고 했다. 어차피 여기서도 개고생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나도 지금 뼈가 빠지다 못해 삭을 정도로 일하고 있다고! 이왕이면 그런 꽃밭에서 뼈가 빠지고 싶단 말이다! 무슨 이런 차별대우가 다 있지? 나 같은 애국자는 이런 홀아비 지옥에서 개 고생하는데, 나라도 버리고 도망친 놈들은 꽃밭에서 뒹굴다니. 그놈들은 뭐가 그렇게 운이 좋단 말이냐!
지금, 행궁의 젊은 관료들은 어떻게 하면 화연주로 갈수는 없을까 얼마나 기도하는지 모른다. 특히 이 황자가 그 곳의 총 책임자인 주화라는 여자한테 잡아먹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기도뿐 아니라 뇌물에 청탁까지 오고간다고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잡아먹히고 싶다. 뼛속까지 통째로.
담하의 생각을 눈치 챈 건지 노파는 혀를 차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평생 기 한번 못 펴고 죽어지내야 할 텐데 그것이 그렇게 부럽냐?”
“......”
부럽다. 엄청. 배가 아플 정도로.
담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도장자국이 나있는 자신의 시커먼 손을 물끄러미 보다 류 충이 신신 당부했던 말이 생각나 고개를 들었다.
“아, 저기......재상께서 대례식 기일을 최대한 미뤄달라고 하십니다. 아직 아가씨께서 익혀야 할 것이 많다고.”
“흐음......그럼 곤란 할 텐데?”
“예?”
“아무튼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전해드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말야. 나도 내 목숨 중요하거든.”
“그게 무슨......”
그때, 인기척도 없이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영이 성큼 들어왔다.
담하는 화들짝 놀라며 바닥에 끓어 앉았지만 노파는 예상했었는지 천천히 일어서면서 고개를 숙였다.
“또 오셨습니까?”
무영은 담하를 보지도 않고 노파에게 다가서자마자 손을 척 내밀었다.
“날짜.”
“무슨 날짜 말씀이십니까?”
“대례식 날짜 말이야! 빨리 내놔!”
“흐음......아직 기일이 안 잡혔는데요.”
“장난해? 그럼 아무 날이나 잡으라고 했잖아! 궁으로 돌아 온지 한 달이 다되어 가는데 왜 아직도 날짜가 안 나와! 거기 앉혀 놨으면 일을 해야 할 거 아냐!”
“전하, 대례를 아무 날에나 치룰 수는 없잖습니까. 느긋하게 기다리시,”
쾅!
무영은 책상이 부서져라 주먹을 거세게 내리쳤다.
궁에 돌아오자마자 대례식을 치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무슨 기일을 잡아야 하고 교육을 받아야 하고 절차를 치러야 하고. 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화연을 데려오는데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한 달 째 화연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혼례를 치루기 전에 얼굴을 마주하면 안 된다는 풍습으로 인해 재상의 사가는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자신의 방문을 거절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어 스승님께 여쭤봤더니 정말 그런 풍습이 있다는 게 아닌가! 무슨 그런 거지같은 풍습이 다 있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얼굴을 못 보는 건 아니다. 몰래 들어가서 볼 거는 다 봤다. 하지만 내가 왜! 내 것을! 몰래! 도둑질 하듯! 봐야 하냐고!
자꾸 자리를 비운다는 것을 눈치 챈 류 강연이 도끼눈을 뜨면서 감시했다. 나가려고만 하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아, 방해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이러면 돌아온 의미가 없잖아. 차라리 그 작은 마을에 있을 때가 훨씬 좋았다.
화연을 빨리 봐야 하는데. 그 고운 얼굴을 보고 입 맞추고 끌어안고 보듬어 만지고......하고 싶단 말이야!! 더 한 것도!! 할 게 얼마나 많은지 니들이 알아?
남은 애가타서 죽겠는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는 너무 태평했다. 심지어 화연까지도. 몰래 찾아가면 기뻐하긴 하지만 그게 전부다. 집이라서 그런지 입 한번 맞추기도 어렵다. 돌아갈 때도 그리 아쉬워하는 표정이 아니다.
무영은 불안했다.
이러다가 화연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하면......그때야 말로 모두에게 생지옥을 보여 주겠다!
책상을 내리친 무영은 칼을 조금 빼들었다.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번뜩거리는 시퍼런 칼날이 드러나더니 한기를 풀풀 뿜는다.
“다 뽑을까?”
너무나 치사스럽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 행동에 노파는 잠자코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세달 쯤 뒤는 어떠십니까?”
스르릉- 칼이 반쯤 빠져나오고 노파의 손가락 하나가 서둘러 접혔다.
“......두 달은......”
스르릉- 칼날이 다 빠져나오기 일보직전이다. 노파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무영의 눈앞에 척 내밀었다.
“한 달! 더 이상은 안 됩니다. 때려죽여도 못 당깁니다! 앞선 날짜를 정해도 준비할 것이 많아 어차피 미뤄질 겁니다. 마마의 사가에서도 준비 못 할 것이 분명하다고요!”
미심쩍은 눈초리로 노인의 손가락을 노려보던 무영은 칼을 집어넣었다. 칼이 칼집으로 스르륵 들어가고 노파의 입에서는 커다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당장 아바마마께 길일을 보고 드려. 그 날이 손녀 보기 가장 좋은 날이라고 해.”
“......예”
황제에게 거짓을 말하라는 그의 표정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다. 당장 내일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원하는 것을 얻었다. 이제 화연을 보러 가야지. 무영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담하를 본 척도 안하고 나가버렸다. 노파는 그 벌건 뒷머리를 보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말했지? 내 목숨이 중요하다고.”
“.....”
자리에 앉은 노파는 어깨를 스스로 통통 두드리면서 담하에게 종이를 건넸다.
“재상께 말씀드리게. 더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노라고. 휴우- 그나저나 전하의 기운이 더 세지셨구먼. 어이구, 힘들어.”
“......예”
*
기해는 화연의 머리를 곱게 땋아주다 멈칫했다. 한 대 모은 머리카락 사이로 목덜미에 붉은 화흔이 보였다.
또 오셨군. 어제 또 오셨던 게야.
아니, 무슨 놈에 신랑이 혼례를 앞둔 신부의 사가에 이렇게 뻔질나게 드나드냐고. 이게 말이 돼? 뭐, 이런 기본도 예의도 없는 신랑이 있을까. 혼례 전에는 신부 얼굴 보는 거 아니라는 소리도 못 들어 봤나? 그리고, 올 거면 좀 얌전히 있다가 가던지! 꼭 이렇게 왔던 흔적을 남기고 간다. 영역표시도 아니고 말이야. 남우세스러워서 원.
“에휴......”
꾸벅꾸벅 졸던 화연은 기해의 한숨소리에 눈을 떴다.
“기해야, 왜?”
“......아니에요. 아기씨 졸리세요? 제가 너무 오래 붙들고 있지요?”
짐승이 문지방 닳도록 드나든다는 것을 안 이후로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평소보다 꼼꼼히 단장을 시켜드렸다. 오지 말라고 한다고 안 올 사람도 아니고, 아니지...오지 말라고 하면 수틀린다고 아기씨만 홀랑 들고 어디론가 내 뺄 수도 있다. 차라리 모른 척 하는 게 낫지.
그래도 신랑 될 사람인데 어여쁜 모습만 보여드리기 위해 좀 오래 붙들고 있었더니 무료한가 보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는데 피곤 할만도 하지...한숨을 삼키며 화흔이 남아 있는 목을 살며시 감싸 조물조물 주무르고 있는데 화연이 괜찮다며 손을 두드린다.
“아니야, 괜찮아. 어제 잠을 좀 못자서.”
“왜요? 악몽이라도 꾸셨어요?”
“아니, 전하께서 자꾸......!!......아, 아니야.”
머리채 사이로 금세 벌겋게 달아오르는 귀가 보인다.
어제도 새벽까지 버틸 만큼 버티다 가셨구나. 어림잡아도 떨어져 있는 시간보다 같이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같이 사는 거랑 도대체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아니, 같이 사는 부부보다도 더 붙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기해는 모른 척 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전하께서 꿈에 나오셨나 보지요?”
“......으응......”
“무슨 꿈이셨는데요?”
“그, 그냥 뭐......”
“다음에 나오셔서 또 괴롭히면 발로 뻥 차주세요.”
“응?”
“에휴.....아니에요. 오늘은 머리를 올리지 말고 내려드릴게요.”
“......응......”
화연은 민망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역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해는 눈치 챈 것 같다.
요즘 간식도 차도 두 배로 준비해 주고 식사 양도 두 배로 준비해 준다. 점심 식사는 항상 같이 먹었었는데 요즘에는 바쁘다면서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밥상을 보면 식기는 항상 두벌이 놓여있다.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몸이 더워져 화연은 손부채질을 했다. 기해가 씩-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올렸다.
“더우셔요? 오늘 전혀 더운 날씨 아닌데?”
“음....조금 덥네.”
기해는 화연의 머리를 정리해 주며 중얼거렸다. 혼잣말 같은데 혼잣말 아닌 혼잣말 이었다.
“흐음.....왜 더우실까? 거참 이상하네......뭐가 더울만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하아- 뭐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나도 덥고 싶다. 정말 덥고 싶다. 더워 죽었으면 좋겠다.”
“......기해야”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화연의 얼굴을 보며 기해는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아기씨께서 언제 이렇게 크셨담. 그 작은 손으로 당과를 꼭 쥐어주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감회가 새로웠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왜냐고? 자신은 아기씨를 따라 갈 거니까! 미령과 세령이 이 소식을 듣고 삼일 밤낮을 복통으로 끙끙 앓았다지? 아우- 꼬숩다. 짐승에게 우리 아기씨를 제물로 바쳤다는 둥 아가리에 밀어 넣었다는 둥 하며, 그렇게 나를 구박하더니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지들도 어떻게 끼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모양인데......흥! 어림도 없다! 아기씨 옆에는 나만 있을 테니까!
“큭큭큭큭큭.....”
음흉한 표정으로 음산하게 웃던 기해는 뜨악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화연에게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창가로 다가가 창을 활짝 열었다.
“아기씨, 날씨 정말 너-무 좋......에구머니나!”
“!”
창밖에 멀뚱히 서있는 무영을 보고 자지러지게 놀란 기해가 뒤로 벌렁 뒤로 나자빠지더니 엉덩방아를 찧었다. 화연은 서둘러 다가가 기해를 부축해주면서 무영에게 타박을 줬다.
“전하......제가 이 시간에는 기해가 있을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시간 지나서 오시라니까......”
“그 시간 지나서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내가 언제 왔다 갔다 하는지 시간까지 자세하게 일러드렸구나. 오시기 편하도록. 아......정말 서럽다. 기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휴, 가슴이야......전하, 이렇게 대놓고 출입을 하시다 발각되는 날에는 가주 어르신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올 겁니다. 혼례 전에 신부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인 것을......”
무영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창을 훌쩍 뛰어 넘어 가 화연을 일으켜 품에 달랑 안았다. 그리고 싫다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화연의 얼굴을 억지로 잡아 여기저기 입술을 쪽쪽 맞췄다.
이 사람이, 정말! 벌컥 화를 내는 화연의 손을 자신의 머리위로 올려주었다. 세게 잡아당겨도 된다고 한 뒤 기해에게 시선을 돌리려던 무영은 진짜 머리카락이 당겨지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울컥한 화연이 입술을 질끈 물더니 내가 못 할 줄 알고? 라며 머리를 제법 꽉 쥔다.
자신을 대하는 게 점점 거리낌 없어진다. 그것은 흡족하면서도 참 달달한 기분을 들게 했다. 가끔씩 반말을 할 때도 있는데 저도 모르게 나온 건지 저가 하고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귀여운지 통째로 씹어 먹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다.
무영은 세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큭큭 거리다 다시 입을 쪽 맞췄다. 머리카락을 잡은 작은 손이 움직인다. 차마 세게 흔들지는 못하고 슬쩍 밀기만 하는데 아프지도 않고 간지럽기만 하다. 그것도 아픈 척 아- 하며 눈썹을 꿈틀거리니 바로 놓고는 걱정스레 올려본다. 눈썹을 八자로 내리고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죽겠네. 정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점점 열기를 띈다는 것을 느꼈는지 화연이 단박에 얼굴을 홱 돌려 모른 척 한다. 그래도 붉어지는 귓불은 감출수가 없었다.
저 붉은 귓불을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으면 얼마나 달까. 이미 그 맛을 아니 더욱 침이 고였다. 귓불 뿐 아니라 귀 전체를 핥으면 화연은 어깨를 움츠린다. 귓구멍 속에 혀를 넣으면 진저리를 친다. 목을 길게 핥으면 허리를 활처럼 휘지. 애간장을 절절 녹이는 소리를 내면서.
꿀꺽-
침을 삼킨 무영은 화연의 벌건 귓불에 꽂힌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기해에게 말했다.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몰라. 이 말은 즉, 이 얘기가 흘러나간다면 그 범인은 너라는 거지. 그렇게 된다면 청화궁의 최고상궁은 다른 사람의 몫이 될 테고. 입이 싼 상궁은 필요 없거든.”
“......예......”
아직도 멍하니 앉아있는 기해에게 무영은 제 집인 마냥 거만하게 말했다.
“나가.”
*
“이런 빌어먹을!!”
문에 들어서자마자 관모를 땅에 집어 던지는 류 충에게 총관 한 얼은 차분한 표정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가주, 돌아오셨습니까? 오늘은 퇴궁이 빠르셨군요.”
“퇴궁이고 뭐고.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나? 응?”
한 얼은 땅에 떨어진 관모를 툭툭 털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드디어 대례식 일정이 잡혔단 말일세! 예단도 아직 주고받지 않았는데 무슨 대례식이냐고!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이야?”
“언제로 잡혔습니까?”
“한 달도 안 남았어! 내달 중순이란 말일세!”
한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만사 급한 것도 어려운 것도 없이 느긋한 그에게 단하나 꺼려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이렇게 쫒기 듯이 뭔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르긴 하군요......그럼 절차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가주말씀만 믿고 예단은 준비도 안 해놨는데요. 납채(納采, 신랑 댁에서 신부 댁에 혼서지를 보내는 행위)는 그렇다 쳐도 납징(納徵, 혼인 허락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 신부 댁에 예단을 보내는 행위, 이것에 대한 답례로 신부 댁 에서 예단을 준비하기도 한다)도 없습니까? 이거 곤란한데요.”
“지금 곤란한건 그런 게 아니야! 내 새끼가 내 집에 같이 있을 날이 한 달이 채 안 남았다고!”
류 충이 펄펄 뛰든 말든 한얼은 제 할 일을 위해 머릿속을 정리했다.
“가주, 그럼 예단을 서둘러 준비해야겠네요. 그래도 황가와의 혼사인데 여염집처럼 신부 측 예단을 생략할 수도 없고...... 형식적으로나마 준비는 해둬야겠습니다.”
“예단은 무슨 놈에 예단을 준비해? 내 딸 주는 것도 모자라 또 뭘 줘? 그 쪽에서도 아직 숟가락 하나 못 받았는데? 됐어! 다 필요 없어!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게!”
“하지만......그랬다가 아기씨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요? 몸만 덜렁 왔다고 흉을 본다거나.....”
류 충은 마치 한 얼이 그런 것 마냥 눈을 부라리며 삿대질을 했다.
“어느 놈이! 그랬단 봐! 이번에야 말로 파혼이라는 제도 한번 이용해보는 거지! 황가 최초 파혼한 황태자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흥!”
그러면 제 딸 또한 파혼한 여자로 전락할 테지만...그렇게 된다면 내가 평생 끼고 살면 된다! 내가 파혼 따위 무서워서 절절 길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혼례 후에도 구박에 'ㄱ'자만 들렸단 봐라. 그 날이 바로 내 딸이 내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될 테니.
딸을 뺏기기 직전, 류 충의 황가에 대한 분노는 이 정도였다.
“아무튼 그쪽에서도 예단 보내려면 시일 꽤나 걸릴 거다. 연제만 봐도 3개월은 걸쳐 준비하던데 한 달이라니 턱도 없는 소리. 음.....그래.....그걸 빌미로 날짜를 미뤄야겠어. 이렇게 쉽게 보물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니...그 놈도 애가 닳아 생각이 무뎌졌군. 날짜만 떡 하니 잡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가만히 생각하니 날짜는 날짜일 뿐. 얼마든지 미뤄질 수도 있다. 실제로 예단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번이고 혼례를 미루는 일도 비일비재 하다. 잘됐다. 연제의 예단보다 적기만 해봐. 바로 퇴짜 놓아야지. 아니, 많아도 퇴짜 놓아야지.
제 생각이 꽤나 마음에 들어 류 충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붉은 관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류 충의 장원으로 들어왔다.
“류가의 가주께서는 황가의 납징을 맞이하시오.”
“엥?”
오늘 혼서지를 받았는데 바로 납징이라니? 시간이 없었을 텐데......설마, 미리 준비해 둔 것인가? 그런 것 치고는 그들이 두 손으로 받들고 있는 것은 작은 목함, 그거 하나뿐이었다. 고개를 갸웃 거리던 류 충은 일단 그들이 바닥에 깔아놓은 붉은 비단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내밀었다.
“류가의 가주, 류 충.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묵직한 목함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불그스름한 윤기가 흐르는 것이 척 봐도 예사스러운 물건이 아니었다. 귀한 보물이라도 들었나 보군. 하지만 연제의 예단을 바로 눈앞에서 본 류 충에게 이 정도가 성에 찰리가 없다. 목함을 두 손으로 받은 류 충은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면서도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안에 황궁의 보고 열쇠가 들어있지 않은 이상 퇴짜는 따 놓은 당상이구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내려잡으며 진중한 표정으로 목함을 연 류 충은 안에 있는 내용물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
이게 뭐지?
옥으로 만든 묵직한 그것은 꼭 도장처럼 생겼다. 옥쇄처럼 생기기도 했으나 밑면을 보니 용이 음각되어 있는 것이 옥쇄는 아니다. 손바닥 만했는데 무겁긴 오지게 무겁다. 그걸 들어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 앞에 서있던 관료가 눈을 부릅뜨더니 숨을 들이켰다. 그들도 목함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몰랐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데 기분이 뭔가 찝찝했다.
아무튼 납징의 절차는 끝났으니 허리를 펴고 무릎을 툭툭 털었다. 이제 남은 건, 방으로 돌아가서 이딴 거 하나 달랑 주고 내 딸을 데려갈 생각을 하다니 니들 미쳤냐? 라는 의미의 글을 은근슬쩍 돌려서 구구 절절 써서 보내면 된다.
류 충은 서신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몸을 돌리려다 아직도 귀신이라도 본 듯 굳어있는 관료에게 물었다.
“뭐하나? 일 끝났으면 가야지? 퇴궁 안 해?”
“아, 아니.....재상어르신 그게......”
“왜? 뭐가 또 남았어?”
“그것도 그러 하온데......그것보다......”
“아, 그럼 빨리 말 하고 가든지! 나 바쁘다고. 내 딸과 저녁도 먹어야 하고, 차도 마셔야 하고, 산책도 가야하고, 야참도 먹어야 하고, 간식도 먹어야 한다고. 일각이 아쉬운 마당에 장문의 글까지 써야 한단 말일세. 내 일정이 얼마나 바쁜지 알겠지?”
그냥 주구장창 딸과 놀다가 자기 전에 잠깐 글 좀 쓰겠다는 말이잖아. 전혀 바빠 보이지 않은 일정이었지만 관료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류 충의 한 손으로 들더니 들었다 올렸다 하며 팔운동의 도구가 되어버린 그것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리다가 서둘러 손 전체로 공손히 가리켰다.
“저, 저...그거 그렇게 하시면......아, 아......”
“뭐? 읏차! 이거 꽤나 묵직하니 팔 단련이 좀 되겠구먼. 손잡이도 딱 이고. 내가 나이에 비해서는 몸이 좀 좋지 않나. 읏차! 자, 팔 한번 만져 볼 텐가?”
“어, 어르신......그거 내, 내려 놓으시.....”
“응? 왜? 한번 만져 보라니까?”
류 충 스스로 이두근을 만져 보더니 만족스러운지 굽혔다 폈다 호들갑을 떨다가 손에 든 것을 그만 떨어뜨렸다. 근수가 꽤 나갔었는지 바닥을 푹 파고 들어간 그것에 흙이 잔뜩 묻었다. 그 모습에 관료는 흡사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무릎을 털썩 꿇으며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후계의 인장이!!”
“뭬야?!!”
옥쇄만 봤지 후계의 인장은 류 충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걸 그놈이 쓴 적이 없으니 있는 줄도 몰랐다.
예단으로 후계의 인장을 주다니......
항상 느끼던 거였지만 오늘 또 다시 확신이 들었다. 역시 그놈은 제정신이 아니었어. 연제는 지 아들 미친 거 아나 몰라. 하필 미쳐도 내 딸에게 미치다니......어쩌면 이렇게 재수가 오지게도 없을까.
인장을 주는 것은 나라를 넘겨주겠다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예물에 류 충은 감격스럽기는커녕 심술이 나 입을 꾹 물었다. 이건 도저히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할 수가 없는 예단이었다. 아니, 거절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은데 이 나라에 사는 이상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일부러 이걸 노렸을 것이 분명해...하아...미친놈은 미친놈인데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간다.
이렇게 되면 꼼짝 없이 한 달 뒤에 화연을 뺏기게 생겼다. 어떻게 하면 날짜를 미룰 수 있을까 고심하던 류 충은 번뜩 떠오르는 생각에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이런 중한 건 절대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되돌려 주고 납징일을 다시 잡자고 해야겠다. 한 세달 뒤쯤?
화색 가득한 얼굴로 운을 띄우려던 류 충은 이것은 2차 납징이라는 관료의 말에 코웃음을 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불안한 마음에 머리를 굴리던 그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오만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방을 쑥대밭을 만들던 류 충은 문갑 저 안쪽 깊숙한 곳, 꽁꽁 숨겨져 있던 것들을 보고 숨을 삼켰다. 그 것들은 속곳사이에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리내의 별과 미르의 눈물을 양손에 들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류 충은 결국, 황족 최고의 보물을 방바닥에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이.....이.....이, 여우같은 놈!! 이건 또 언제 숨겨둔 게야!!!”
마지막 틈새까지 차단해 버린 무영의 철두철미한 계획으로 인해 대례식은 미뤄지는 일 없이 예정대로 성큼 성큼 다가 왔다.
*****************
69편, 무영이 화연을 데리고 황궁에서 나오기 전
기해에게 숨겨두라고 했던 것이 바로 저것이었지요.
이제야 행방이 드러났네요.
*
노블에 올린 두번째 밤이 첫번째 밤에 비해 피드백이 한참이나 적어 친우 올리브영작가에게 한탄을 했었더랬죠.
솔땀 : 망했어. 망했다고! 너무 야했나봐. ㅜㅜㅜㅜㅜㅜ수위를 올려달라고 할때는 언제고......배신자들! 크흑......변태작가 라고 오해하는거 아냐?
올리브영 : 진정해. 절대 그럴리 없어.
솔땀 : (차가운 그녀가 오늘따라 왠일인지 다독여줘 마음이 풀린다) 저, 정말?
올리브영 : 너 원래 변태잖아. 다들 그걸 깨달았을 뿐. 오해란 있을 수 없지.
솔땀 : .......
올리브영 : 뭐.
솔땀 : .......
올리브영 : 왜.
솔땀 : .......
올리브영 : 틀려?
솔땀 : .......아니.......
올리브영 :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내가 말한 연제랑 류충 붕가나 적어.
솔땀 : ......
뭐, 그랬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