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6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협상은 1차로 서로의 의견을 내놓고, 2차로 조정하며, 3차로 확정하는 절차로 예정되어 있었다.
어스름한 새벽, 하륜은 자신의 막사를 나오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혔다. 크게 들이킨 숨을 길게 내 쉬어 심호흡을 하고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후우-”
드디어 때가왔다.
2차 협상이 끝난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다. 더군다나 오늘 아침에 있었던 2차 협상자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서 나왔었다. 자신에게도 괜히 쌀쌀 맞게 대하며 혼자 막사에 틀어박혔다. 저쪽의 분위기 또한 좋지 않았다.
다언을 쳐다보는 환 제국 태자의 눈초리가 살기등등했었는데......
분명히 의견조율이 실패한데다 뭔가 서로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일을 도와주는군.
태자와 다언의 사이가 좋지 않을수록 일은 더욱 수월해 진다.
하륜은 다언의 막사를 지키고 서있던 보초에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전하께서는 취침중이신가?”
“네!”
“쉿! 깨시잖은가. 조용히들 하게. 음......헌데, 자네들 시장하지는 않은가?”
“예......? 어......”
아무리 저녁을 든든하게 먹었어도 이 시간쯤에는 으레 출출했다.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리는 보초 두 명에게 하륜은 고기주먹밥을 건네주었다.
“먹으면서 하게. 이 새벽에 누가 본다고 그러나. 어허, 어서 받게.”
“가, 감사합니다.”
하륜이 자신들을 한 번도 살뜰하게 보살펴준 적은 없지만 그래도 다언에 비해서는 품행이 똑바르고 어질다는 소리를 듣던 지라 보초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주먹밥을 받아 쥐고 꾸벅 인사를 했다.
편히 주무시는지 살펴보고 오겠다며 막사로 들어가는 하륜을 보며 충성심 한번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보초들은 주먹밥을 덥석 물었다.
막사로 들어가니 침상에 누워있는 다언이 보인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있어 머리꼭지만 보였지만 어둠속에서도 그 황금색 머리카락은 확연하게 보였다.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다가간 하륜은 칼을 소리 없이 뽑아 들었다.
"잘 가시오."
숨에 맞추어 느리게 오르내리고 있는 가슴 위에 시퍼런 칼이 내리 꽂혔다.
*
륜국의 외무대신 해술은 3차 협상시간이 다가오자 점점 초조해졌다.
그는 스스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언의 막사를 정신없이 서성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일어나자마자 받은 보고에 드디어 시작했구나 싶어 헐레벌떡 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막사밖에는 다언을 지키던 보초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고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핏자국도 보이고 칼자국도 여기저기 나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 것 같긴 한데......문제는, 분명히 일은 벌어졌는데 다언의 시체는커녕 하륜도 찾을 수가 없다는데 있었다.
거기서 오열을 하며 범인을 환 제국으로 몰아가야 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됐다. 죽었다고 하기에는 핏자국이 너무 적었고 그렇다고 별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죽인건지 도망친 건지 어떻게 된 건지 않아야 전서구를 날릴 텐데 상황을 알지 못하니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원래는 아침에 다언의 시체를 발견하자마자 날리도록 약속되어있었는데 이런 예상치 못한 일로 고민하다 정오가 되어 가는데도 여즉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괜히 섣부르게 신호를 줬다가 무단 영토 침입으로 독박을 쓰는 수도 있는데......
더 이상 고민만 할 수는 없었기에 해술은 막사를 다시 훑어보았다. 다언이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상을 입은 건 확실하다. 핏자국도 그렇고 여기저기 잘려 흩어져있는 황금색 머리카락도 이를 뒷받침 해준다.
다언은 부상을 입고 도망친 것이고 하륜이 그 뒤를 쫒아가 죽이느라 늦는 것일까? 시체가 있었다면 더 확실히 할 수 있었지만......없어도 상관없다. 협상에 나온 황자가 갑자기 실종됐다면 첫 번째 유력한 용의자는 당연히 상대국에 있다. 다언이 이대로 돌아오지만 않으면 처음 계획과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다.
이내 결심한 해술은 전서구를 날려 보낸 뒤 중앙 막사로 향했다.
보자마자 화부터 내야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절대 좌시하지 않겠다고 해야지. 협상 탁자를 거칠게 내려치는 게 더 극적으로 보이겠지. 눈물도 좀 흘릴까? 아냐......너무 인위적으로 보일수도 있으니 글썽글썽하게 보일정도로만 하자.
해술은 보좌관을 대동하고 중앙 막사로 들어갔다.
12첩 병풍을 배경으로 방만하게 앉아있는 붉은 머리의 태자가 보인다.
언제 봐도 소름 돋는 얼굴이야. 순간 치미는 진저리를 꾹 참은 해술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분노의 연기를 시작하려다 태자 옆에 앉아 자신을 멀거니 보는 류 충을 보고 순간 멈췄다.
“류...재상.......? 이, 이곳에는 어인일로.....”
“오래간만이군. 해수. 잘 지냈나?”
“......해술입니다.”
“아, 그랬나? 이름이 뭐 중요 하겠나. 우선, 거기에 앉게.”
“예? 예.......”
류 충만 만나면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면서 휘말린다. 이번에도 류 충에게 말릴 뻔 한 해술은 자리에 앉으려다 벌떡 일어섰다.
“이, 이게 아니고! 지금 우리 쪽에 어떠한 참사가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류 충은 탁자위에 팔꿈치를 척하고 올리더니 손으로 턱을 괴었다. 계속해보라는 듯 건성으로 턱짓을 하는 류 충의 행동에 울컥한 해술은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강경한 어조로 외쳤다.
“어젯밤 이 황자께서 변을 당하셨습니다! 살해 당하셨을 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아니, 살해당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크흑! 도대체 어느 누가 협상을 하러온 타국의 황자를 해했단 말입니까!”
타국의 황자라......류 충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일을 저지른 사람은 환 제국 쪽에 있다고 암시하는 외교적 언어까지 쓰고 말이야. 꼴에 외무대신이라 이거지. 뭐......장단을 좀 맞춰줄까.
류 충은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탁자를 부서져라 내리쳤다. 뒤에 앉아있던 륜국의 보좌관의 좁은 어깨가 화들짝 움츠러들었다.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 황자께서 살해당하셨다니! 그럼, 그 시신은 어디 있다는 겐가!”
“시......시신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하, 하지만...... 막사가 엉망으로 뒤집어져 있었고 핏자국이......!!”
시신얘기에 주춤하던 해술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마치 피가 몇 양동이는 사방에 뿌려져 있는 그런 잔인한 장면이라도 본 것 마냥 얼굴을 파랗게 굳혔다.
“오오. 핏자국이. 헌데, 시체는 없었다는 건가?”
“그, 그건 그렇지만......그런 상황에서 살아계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왜 자국의 이 황자를 살해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환제국에서는 이 참사를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다 턱을 꽉 문다. 멋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는 줄 알겠다.
호오......이제 은근히 죽음을 기정사실화 하는데다 우리가 죽인 거라고 단정 짓는 군. 저놈 참 많이 컸네. 연기도 엄청 늘었고.
속으로 웃던 류 충은 짐짓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무겁게 말했다.
“해수, 자네 말이야. 심정은 알겠는데 너무 속단하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시해되셨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은데 말이야. 게다가 우리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증거가 있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해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한지에 곱게 쌓여진 그것을 류 충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늘 이 황자님의 막사에서 떨어져 있던 겁니다. 제 보좌관이 샅샅이 조사하다가 겨우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해수가 아니고, 해술! 입니다!”
한지를 펴본 류 충은 이번에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지 안에는 붉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들어있었다. 뿌리 끝부터 완벽하게 붉으며 한지에 색이 묻지 않은 걸 보니 염색을 한 것이 아닌 진짜 무영의 머리카락이다.
별걸 다 준비했군. 이런 건 어떻게 구했지? 대단하구만. 긴가민가했는데 정말 무영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군. 까딱하면 당할 뻔했어. 이런 것 까지 치밀하게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필시 청룡궁을 단장하던 공조서 소속 궁녀나 내관 중에 간자가 있었던 게지. 싹 갈아엎던가 해야지 안 되겠어.
류 충은 보고 있던 그 머리카락을 무영에게 쓱- 밀어 넘겼다. 무영이 그것을 흘끔 보더니 피식 웃는다.
너무나 평온한 반응에 해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범인이 다른 사람이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펄쩍뛸지는 몰라도 저 피에 미친 태자라면 혹시...? 하며 한번 쯤 의심을 해야 맞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범인으로 태자를 지목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저 놈이라면 했을 수도......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환 제국에서 태자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저런 증거까지 떡 하니 있는데 저렇게 반응이 없을 수가.
혹시......어젯밤 둘이 같이 있었나?
뭔가 해괴망측한 생각을 떠올린 해술은 서둘러 머리를 저었다. 아, 아니......그럴 리가. 류 재상은 부인과 사별한지 오래토록 독신으로 지내서 지금은 취향이 변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 태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해술은 당황스러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무영을 노려보았다.
“태자전하! 어찌 웃으신단 말입니까! 사실, 저는 그런 명확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전하의 성정에 대한 흉측한 소문이 있다고는 하나, 소문은 소문일 뿐. 무턱대고 이런 참사를 벌이지 않을 거라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지만! 전혀 놀라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이제는 정말 의심스럽군요.”
무영은 해술의 분개한 표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느긋하게 물었다.
“그래서? 내가 했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저희 륜국에서는 이 일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겠습니다! 이의는 당연히 없으시겠지요?”
“당장이라니?”
“때마침 국경근처에서 군사훈련을 하기위해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불러들였습니다. 자국의 황자가 살해당한 만큼 이보다 더 위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고 나아가 황권까지 장악하려는 음모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바로 이 때야 말로 군대가 필요한 것이지요. 나라를 위협에서 지켜야 할 것 아닙니까!”
“허......”
장황한 해술의 웅변에 류 충은 입을 쩍 벌렸다.
오오, 그럴듯하다.
얼굴에 애국심이 철철 넘쳐흐른다. 황자의 죽음에 진실로 비통해 하면서도 나라가 진짜 위협이라도 당한마냥 방어하기위한 거라며 군대를 움직이는 것에 당위성을 부여하는군. 그러면서도 군사훈련을 위해 국경근처에 있었을 뿐이라는 걸 강조하기까지.
누가 들으면 이 황자가 후계라도 되는 줄 알겠네. 그려. 내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어버버 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세월 참 빠르다. 꽤 잘 컸는데 저놈 내가 데려가면 안 될까? 써먹을 때가 많을 것 같은데......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보는 류 충의 반짝이는 시선에 해술의 눈동자가 불안감에 떨리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전혀 아니었다. 다시 한 번 강경하게 포고를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영이 웃고 있었다. 적막한 가운데 거친 웃음소리만 낮게 흐른다. 해술은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오싹함에 양팔을 감싸 안으며 마구 비비고 싶었다. 눈동자 안에 은실이 번쩍번쩍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소름이 끼치면서 불길했다. 해술은 팔을 비비는 대신 불현듯 한기가 느껴지는 뒷목을 쓰다듬었다.
나지막하게 웃던 무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해술에게 물었다. 이제는 형식적인 존댓말도 없었다.
“그러면 지금쯤에는 내 영토로 들어왔겠네? 너네 마음대로. 그렇지?”
“......그, 그렇겠지요......?”
“그쪽에서 먼저 침범했으니 공격은 이쪽에서 먼저 해도 되겠지?”
“침범이라니요?! 우리는 당연히 자국을 보호하기위해서......!!”
무영의 말에 반박을 하려던 해술은 절대로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어에 순간 말을 멈췄다.
“......공격? 지금 공격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별건 아니고......우리도 요- 근처에서 주둔하던 군대가 있어서 말이야. 군사훈련을 위해. 마침. 딱 맞춰서.”
강조하는 것처럼 딱딱 끊어서 말하는 무영의 말에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됐던 해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구, 군대?!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근처에?”
“응.”
“왜, 왜.....?”
“말했잖아. 군사훈련을 위해서 라고. 가람지방이 땅이 넓어서 군사 훈련 하기 참 좋아. 너희도 군사훈련을 하기위해 경계 근처에 주둔하고 있었다며. 평화협정을 맺으러 온 나라치고는 참 상반된 행동이지만.”
“그, 그건.......아, 아무튼, 이건 적반하장 아닙니까? 자국의 이 황자를 살해해 놓고 사건을 조사하기위해 파견된 자국의 군대까지 공격하다니요!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해 놓고도 규탄을 받지 않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응.”
“에? 응......이라니요?”
“듣자하니 그 동안 너희도 내심 이 황자가 없어졌으면 했다며? 만약, 네 말대로 우리가...아니, 내가 한 일이라면 나한테 감사하다고 공물이라도 바쳐야 하는 거 아냐? 똥을 치워 줬잖아.”
너무도 태연한 무영의 대답에 해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 다시 강력한 어조로 성토했다.
“에? 아, 아니......어느 누가 그런 망발을 한단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헛소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타국에서 시해되신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자국을 공격한 것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공격......아하하하하”
갑자기 크게 웃는 무영과 쓴웃음을 짓는 류 충의 모습에 해술은 진심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이 상황에서 웃다니......현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거 아냐? 이 사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안다면 저렇게 웃을 수는 없을 텐데.
“전하! 이 일을 어찌 그리 가볍게 생각하십니까! 이 일은 명분 없는 정복전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모르신단 말입니까! 본국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이일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환 제국에서는 그 이 일을 절대 그냥 덮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음 협상은 삼국연합군과 하시게 되겠군요. 준비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군대를 준비해 뒀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지만......정치적 상황이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다. 이것까지 이용해서 환제국은 자국을 침략할 준비를 마친 뒤 다언을 살해한, 마치 무차별 정복 전쟁을 시작하려는 것처럼 말을 바꾸면 그만이다. 그러면 연합군도 더 빨리 모일 테고.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인다.
무영은 머리 돌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해술을 빤히 보다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일어섰다. 시종일관 벌떡 서서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저놈을 올려보느라 목이 좀 뻐근했다.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리는 그의 목에서 뚜두둑 뚜두둑 하는 뼈 맞춰지는 소리가 들렸다. 장신의 남자가 우뚝 서서 목을 돌리니 그 분위기가 정말 살벌했다. 해술은 쪼그라들려는 간을 억지로 잡아 펴면서 간신히 비분강개한 표정을 유지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린 무영은 해술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판은 다 벌어진 것 같으니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사실, 너희 군대의 이동속도가 너무 느려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지루하던 참이었어. 우리 애들은 진까지 구축하고도 시간이 남아 한숨 푹 자고 일어났는데 말이야.”
“......판?”
“현재 상황을 보면 너희 군대가 내 영역을 무단으로 침략한 거야. 그치?”
“무단이라니요! 저희는 국가적 위협에 맞서,”
무영은 손을 들어 해술의 입을 막았다.
“나와.”
“?”
이해 못할 소리를 늘어놓다가 말도 못하게 끊어 버리더니 이제는 다짜고짜 나오라고?
물음표가 떠있던 해술의 얼굴은 이내 경악으로 굳었다.
병풍 뒤에서 다언이 쭈뼛 쭈뼛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저, 전하......?!”
“......”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다언을 보며 해술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전하.....!! 저들에게 인질로 잡혀계셨던 겁니까? 그렇지요?!”
다언의 앞에 꿇어앉은 해술은 필사적으로 눈빛을 보냈다.
어서, 그렇다고 해! 아니라고 하면 모든 게 끝장이야! 제발!
그의 절실한 시선을 멀거니 보던 다언은 침울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내가.....어젯밤 환제국의 태자를 암살하려다 사로잡혔어.”
“헉!!”
“하륜과 짜고 덮쳤다가......실패했고, 하륜은 그 자리에서 사살됐어.”
“전하!! 그게...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갑자기 전하께서 실성하신 것도 아닌데 그러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혹시 협박당하신 겁니까? 그런 거지요?”
“......같이 온 태자의 반려를 보고......빼앗고 싶어서......”
“!!”
해술은 말문이 막혔다. 다른 사람이 저런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말라고 호통을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언은 했을 것도 같다. 설마 그 정도로 생각이 없을까 싶었지만......여자라면 환장하는 저놈은 그랬을지도 몰라. 하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해술은 힘이 빠져 뒤로 털썩 엉덩이를 내려앉았다.
넋을 놓은 표정이 멍했다.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이제...졸지에 상대국 태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군대까지 움직인 그런 상황이 되어버렸다.
저들의 영토만 침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수습을 할 수 있을 텐데......이제 남은 방법은 막무가내로 전쟁을 밀어 붙이거나 막대한 보상금을 주거나 둘 중에 하나다. 전쟁을 시작한다면 이미 만반에 준비를 하고 있을 환제국만 해도 벅찬데 곧 연합군과도 싸워야 하겠지. 국경지대를 시시탐탐 노리는 상국에서는 얼씨구나 좋다하며 환제국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먼저 참전한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보상금을 준다고 해도 이미 5년 전쟁으로 주기로 약속한 보상금이 어마어마했다. 애초에 줄 생각이 없었으니 과하게 정한 것이 화근이었다. 거기에다 이번 보상금까지 더해진다면 나라를 통째로 넘겨야 할 판이다.
망했구나......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해술의 얼굴에 무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일갈했다.
“이제 협상은 끝났다. 준비할 시간은 줄 테니 돌아가. 미리 충고하는데, 돌아가자마자 전쟁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아, 미리 해뒀을 텐데 내가 괜한 충고를 했군.”
연민의 눈으로 해술을 보던 류 충도 일어나 품에서 붉은 비단으로 된 장계를 꺼냈다.
“이건 공식적으로 보내는 선전포고문일세. 잘 가지고 가시게나. 아, 자네만 돌아갈 수 있다는 건 알지? 혹시 도망칠 생각들은 하지 말게. 이미 이곳을 포함한 국경까지 우리 기마대가 포위를 하고 있거든. 괜히 도망치다가 잡히면 개망신 아닌가. 어차피 빠져 나갈 구멍도 없고. 서로 면 팔리는 일은 하지 말자는 말일세.”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무영과 류 충의 뒤를 다언이 시무룩한 얼굴로 터덜터덜 쫒아 간다. 해술은 다언의 바지를 움켜잡았다.
“전하! 정말......정말 그러셨습니까? 아니지요? 예? 다 거짓이지요? 왜 그런 거짓을 말씀하십니까! 자국의 부모 형제들을 다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침잠한 청록색 눈동자가 바들 떨리더니 눈 꼬리가 뾰족하게 섰다. 이를 악문 다언은 해술의 손을 인정사정없이 뿌리쳤다.
“이거 놔! 부모, 형제? 하! 그들이 나를 죽이려고 세운 계획,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차라리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고 죽어달라고 하지 그랬어! 그랬다면 나도 이렇게 까지는 안했을 지도 모르지.”
“저, 전하. 그것은......”
“부모 형제한테는 버림받았는데 오히려 저들에게 목숨이 구해진 내 심정은 얼마나 비참한줄 알아?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들을 버리지 말라고?”
“......”
“왜? 니들은 나를 버릴지라도 나는 니들을 버리면 안 되냐? 내가 왜? 내가 왜! 난 이렇게라도 살아야겠어! 이렇게라도 살고 싶다고!”
“전하.....”
마지막 말에는 비통한 절규가 섞여 있었다.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눈시울을 붉히던 다언은 이내 고개를 휙 돌리며 막사를 나갔다.
막사 안에 남은 해술은 다언을 붙잡기 위해 들었던 손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
가람지방으로 희희낙락하게 쳐들어온 륜국의 군사는 환제국의 선전포고와 함께 가람지방을 포위한 수천의 기마대에 쫓겨 국경을 넘은지 하루 만에 돌아가야만 했다.
환 제국을 포함한 삼국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압박에 륜국은 이 황자와 절연선언을 했지만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고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미 5년 전쟁에서 주기로 한 보상금에다 더 큰 보상금이 더해지니 그 금액이 나라를 팔아도 모자를 지경이라 결국, 환제국의 속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500년간 이어진 륜국의 비참한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영화, [황제의 비(妃)] 드디어 크랭크인 임박!!
이안 메이슨의 출현이 결정되면서 화제가 되었던 [황제의 비(妃)](이하 황비)의 크랭크인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황비는 <일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각색한 영화로 일일 전쟁이란 가람지방에서 있었던 환 제국과 륜국의 전쟁을 말한다.
평화 협상을 위해 가람지방에 갔던 륜국의 이황자가 광제(光帝)와 함께 있던 황후 류씨를 보고 연정을 느끼면서 모든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결국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벌어졌지만 이 황자에 대한 륜국의 절연선언으로 인하여 전쟁은 하루 만에 막을 내렸고, 이 사건은 륜국이 500년간 환제국의 속국으로 전략하게 되는 수치스러운 역사의 시발점이 되는 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환 제국 최고의 성군이라고 손꼽히는 광제와, 제국 역사상 다시없을 황제의 사랑을 받은 황후 류씨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다루어 졌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일전쟁과 얽혀진 이 역사적인 사건은 그 드라마틱한 요소로 인하여 그동안 수차례 영화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친숙한 사건이다.
...중략.
한동안 넷상을 뜨겁게 달궜던 가상 캐스팅에서 광제와 가장 어울릴 배우로 항상 1위에 올랐던 배우 이안이, 기존 스케줄을 모두 마치고 귀국 일정을 앞당기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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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의견 총 1056개
liju**** : 카아아아악!! 이안느님!! 드디어 결정해 주셨어. 드디어!! 내 소원은 이루어 졌다. 이제 죽어도 좋아.
201X.11.07 오후 10:41 신고 0
blac**** : 이건 보나마나 싱크로율 백퍼. 그의 금안은 아무도 따라올 수 엄슴.
201X.11.07 오후 10:42 신고
sjd0**** : 다른 영화에서는 매일 렌즈끼고 촬영하고.....눈 충혈 되어 있을 때 보는 내 눈에선 피 눈물이.... 이제는 그런 거 엄따! 만세!!
201X.11.07 오후 10:43 신고 0
ruk**** : 드디어 같은 땅에 있을 수 있는 건가요.ㅠㅠㅠㅠㅠㅠ크랭크인 장소 공개하라!!
201X.11.07 오후 10:44 신고 0
ddom**** : 아아.....털썩. 엄지척! 윗분 같이 가요. 멀리서 냄새라도 맡고 싶다.
201X.11.07 오후 10:45 신고 0
mika**** : 윗분 저도.....저는 발자국 떠오려고요.
201X.11.07 오후 10:46 신고 0
tab7**** : 저는 머리카락이라도.
201X.11.07 오후 10:47 신고 0
qkrg**** :저는 코딱지라도.....
201X.11.07 오후 10:48 신고 122
sjkk**** : qkrg****님 울 이안느님에게 그딴 건 없슴돠.(단호) 신고 꾹.
201X.11.07 오후 10:49 신고 0
gaga****: 신고 꾹. 2
201X.11.07 오후 10:50 신고 0
jua****: 신고 꾹. 3
201X.11.07 오후 10:51 신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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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짐승, 드디어 꽃을 물다>
챕터로 넘어가겠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