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5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가람지방은 환 제국 끝에 자리하고 있는 비옥한 곡창지대이다.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지만 일교차가 크고 특히 남하강에서 흘러오는 강줄기가 닿아있어 물이 아주 풍부하다. 비가와도 홍수가 나지 않고 그렇다고 가뭄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농사 수확량이 다른 지역의 3, 4배 많고 그 질도 우수한, 유명한 다수확 지역이다.
륜국은 기후가 높고 습하며 겨울에 춥지 않으니 곡물이 자라기에 좋은 기후가 아니었다. 토질도 좋지 않아 수확량도 적고 곡물의 질도 나쁘다. 그나마 자라는 곡물은 잦은 비에 홍수로 떠내려가기 일쑤라 곡물을 대부분 수입해오는 륜국에서는 시시탐탐 노리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 넓은 가람지방 중심부에 세워진 커다란 막사를 경계로 양쪽으로 나뉘어져 진영이 구축되어 있었다. 오십 보 정도 떨어진 각 진영에는 크고 작은 막사가 줄을 이어 세워져 있었고 한쪽에는 자룡이 수놓아져있는 붉은 깃발이 반대쪽에는 백호가 수놓아져있는 황금색 깃발이 서 있었다.
붉은 깃발이 꽂혀있는 중앙막사에서 엄청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막사 앞에 서있는 보초뿐 아니라 진영 내를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랄 정도였다.
뭔가 큰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귀를 쫑긋 세웠던 보초, 주씨 쌍둥이는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왜 저 말씀을 안 하시나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터져 나오는 노성은 이제 안 들으면 허전할 지경이다.
주씨 쌍둥이 중 형, 주 해랑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귓구멍을 후볐다.
“아우, 귀 따가워. 연세도 있으신데 목청 참, 좋으셔.”
“형, 여기 도착하자마자 화연아가씨 찾는다고 진영을 헤집어 놓으시는 거 봤잖아. 우린 허리에 힘이 안 들어가 말에서 내리지도 못했는데. 체력이 보통이 아니셔.”
“맞아. 바람처럼 휑- 하고 뛰어 내리시더니 여기저기 들쑤셔 놓으셨지. 내 딸-을 부르짖으시면서.”
“그랬지. 그러고 나서 펄펄 뛰시던 거 기억나?”
“기억나지......난 태자전하께 그런 쌍욕을 퍼붓는 분은 처음 봤잖아. 저쪽에서 들을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주 아랑은 주 해랑의 말에 기억을 되돌린 듯 큭큭 웃더니 소리죽여 말했다.
“그래도 말야......통쾌하지 않았어? 누가 그렇게 대놓고 욕을 하시겠어. 우리는 짐승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안 그래?”
“저번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짐승의 싸대기를 날리시는 거 봤지? 그것도 두 번 씩이나! 크윽.....나 하마터면 울 뻔 했잖아. 요 근래 그렇게 감동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어. 그날 일기도 썼다.”
주 아랑은 형의 말에 감격스러운 눈으로 보다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형......역시 우리는 형제야. 나도 그랬는데. 그날의 일기 마지막 문장은 ‘난 이제부터 재상어르신을 무조건 존경하기로 했다’ 야. 하아......이번에는 얼마나 멋진 모습을 보여주실까. 벌써부터 막 기대되는 거 있지. 저번보다는 좀 더 세게 때려주셨으면 좋겠다. 발로 막 차고. 머리끄덩이도 잡아 흔들고. 분위기를 보면 가능 할 것 같기도 한데...”
주 해랑은 주 아랑의 모습을 보면서 깊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훗- 하고 웃더니 눈썹을 들어 올렸다.
“동생아. 형의 예상에 따르면 그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두고 봐.”
뭔가를 확신하는 것 같은 주 해랑의 말에 주 아랑이 고개를 획 돌렸다. 두 눈이 기대감으로 눈부시게 빛났다.
“왜? 형, 뭐 들은 거 있어?”
주 해랑은 음모를 꾸미는 얼굴로 씩- 웃더니 주변을 살핀 뒤 작게 속삭였다.
“들은 게 아니고......어르신께서 펄펄 뛰실 때 내가 뒤에서 슬며시 칼을 쥐어드릴 생각이야. 어르신께서 칼을 휘둘러 봤자 얼마나 휘두르시겠어? 대충 휘두르시면 화도 풀리실 테고 덩달아 우리의 울화도 풀릴 테고. 일석이조잖아. 어차피 짐승은 웬만한 상처에도 끄떡없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어때? 이 형의 생각이.”
주 아랑은 눈을 부릅뜨며 환호...아니, 비명이 나올 것 같은 입을 막았다. 그리고 이 얘기를 들은 사람이 없는지 주변을 서둘러 살폈다.
“헉! 형! 그건 너무......용기 있는 일이잖아!! 역시 나의 형이야!! 정말 대단해! 형처럼 간작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했어?”
“삼일 동안 세시진 자봐. 없던 간도 커져.”
“아아.....나는 기껏해야 밥에 독 탈 생각밖에 못했는데. 역시, 형은 형이었어.”
“쯧- 독이 먹혀야 타지.”
“상연 도련님께서 곰도 쓰러뜨리는 독을 가져오셨다잖아. 이번에야 말로 꼭 쓰신 다던데? 어떻게 있는 거 죄다 쓰면 조금은 통하지 않을까 해서...”
“조금만 이상해도 안 먹는 거 모르냐? 몇 번이나 경험해놓고도 그래. 예전에 그 공조서장께서 보내주신 수면제, 그거 밥에 섞어 드렸다가 대장님 얼굴에 퉤 뱉었었잖아.”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 민 결이 정말 그렇게 맛이 이상한가 싶어 먹어 봤었지?”
“그랬지. 그날이 몇 달 동안 따라다니던 사옹서(司饔署, 황제의 식사와 황궁 안의 식사 공급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부서) 궁녀와 겨우 만나기로 했었던 날이었는데 하루 종일 자는 바람에 뻥 차였잖아. 웃긴 건 뭔 줄 알아? 밥맛만 아주 좋았더란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대. 에구, 멍청한 놈. 쯧쯧쯧.”
“지가 짐승인가. 언감생심 그걸 구분하려 들다니. 개도 밥에 섞으면 모르고 그냥 먹는데. 인간주제에 말야. 그치?”
“그러니까 말이다. 걔는 항상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보고 판단하려 하더라. 신중한 건지, 미련한 건지.....그나저나 상연도련님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팔은 괜찮으시데?”
“뭐......막사하나 때려 부순 것 치고는 양호하다고 하던데? 의술을 배우셔서 그런지 후딱 고치시더라고.”
“다른 분들과는 다르게 상연도련님은 말도 없고 얌전하신 줄만 알았는데……화연아가씨 없다는 걸 알자마자 막사하나를 걸레로 만들다니......역시 재상어르신의 핏줄이었어.”
“그 피가 어디 가겠냐.”
주씨 쌍둥이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오늘 밤 칼을 좀 갈아 놓자는 말까지 하고 있는데 막사 안에서 다시 거대한 노성이 터져 나왔다.
“협상이 낼 모레인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아니, 협상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짐승 같은 놈이 내 딸을 날름 물고 갔으면 후딱 데려와야 할 거 아냐!! 왜 소식이 없어!! 왜 소식이 없냐고!!”
주씨 쌍둥이는 어깨를 움츠리면 서도 류 충의 분노가 점점 커지는 것 같아 참 기분이 좋았다. 아, 정말 이대로라면 짐승의 피를 보는 것이 헛된 희망으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 이따 상황을 봐서 칼을 잡는 법이라도 슬며시 알려드려야겠다. 어디에 칼을 맞으면 제일 아픈지도 알려드려야지.
류 충의 노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주씨 쌍둥이의 미소도 커졌다. 이제 화를 내다 못해 쌍욕을 하는 류 충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아, 재상어르신. 만수무강해주세요. 영원히 따르겠습니다. 라며 몽롱한 눈으로 류 충의 늠름한 기상을 떠올리고 있는데 문득 주변이 조용해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껏 막사 주변에 모여 류 충의 목소리를 들으며 키득거리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막고 있었다. 주 아랑은 왜들 저러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번에는 진짜 비명이 나올 것 같아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킥킥 거리던 주 해랑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웃느라 헤벌쭉 입을 벌리던 주 해랑은 주 아랑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벌어져 있던 입을 확 오므렸다. 몸을 굳히고 자세를 바로하면서 언제 웃었냐는 듯 표정을 지우는데 막사 안에서 화통을 삶아먹은 류 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 씹어 먹을 놈!! 오기만 해 봐! 내가 아주 온몸의 털을 죄다 뽑아 삶아 버릴 테다! 가만히 놔 둘 줄 아냐? 흥!!”
“......”
“아주 싹수 노랗기가. 아니지, 빨간가? 아무튼 지 애비를 닮아서 뒤통수 후려 칠 줄만 아는 이 능구렁이 같은 놈. 그런 쪽으로는 머리 돌리는 거 보면 이놈은 글렀어. 영 글렀다고!”
“......”
“아이고, 내 딸!! 우리 연이! 그 착한 애가 쓰다달다 말도 못하고 그놈한테 억지로 끌려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할꼬.”
“......”
“그 짐승 놈, 내 딸에게 엄한 짓 하기만 해봐! 다시는 사내구실도 못하게 내가 아주 거시기를 터트려 줄 테다! 아니면, 잘라버리던가!!”
“아, 아버지......그럼 연이는 어떻게 하고요. 그건 결과적으로 연이한테 안 좋을 거 같은데요......손녀를 꼭 봐야겠다고 하셨잖아요. 저번에는 꼭 보신 것처럼 생김새에 대해 자세히도 말씀하시며 신나하시더니.......”
류 강연이 같이 있었는지 그의 난처한 목소리까지 작게 들려왔다. 주씨 쌍둥이는 눈앞에 인물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그, 그럼......팔을 자르던가......하여간에, 그런 일을 안 만들면 될 거 아니냐! 엉? 우리 연이가 어떤 아이인데 대례식도 안 치르고 홀랑 가지려고? 절대 그렇게는 못하지! 내가 절대로 그건 허락 못한다! 그랬기만 해봐! 대례식이고 뭐고 연이 데리고 상국으로 망명 갈 테니! 그렇게 참을성 없는 놈에게는 우리 연이 절대로 못준다! 암, 그렇고말고!”
“......아버지, 서, 설마......그랬을......까......요......?”
뭔가 자신 없는 것 같은 류 강연의 말에 류 충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아무리 생각이 없기로 서니, 지도 사람이면 그렇게 까지는 안하겠지. 암.”
“하하하. 그, 그렇겠지.....요.....?”
“어휴- 연아......어디 있는 게냐. 애비 숨넘어가기 전에 어서 오거라.”
장탄식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동상처럼 서서 식은땀만 주룩 주룩 흘리던 주씨 쌍둥이는 눈동자를 굴려 앞에 서있는 사람들, 우뚝 서있는 남자와 그의 품에 아기마냥 안겨있는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무영의 표정은 여전히 희한했고 화연은......터지기 일보직전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무영에 대한 욕을 하는데 너무 심혈을 기울였는지 온몸에 진이 다 빠졌다. 류 충은 막사 안 간이 침상에 누워 막사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우리 연이, 금쪽같은 내 딸.....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거기서 몸 성히 탈출한 것은 맞는지. 다친 데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걱정이 되고 불안한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은 딸이 성하다는 걸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화연의 모습에 류 충은 눈 위로 팔을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으휴......연아......”
“네, 아버지.”
얼마나 보고 싶으면 환청이 이토록 선명하게 들릴까. 이럴수록 그 짐승 놈에 대한 분노가 눈덩이마냥 몸을 불린다. 으득- 두고 보자. 류 충은 이를 갈다가 화연이 걱정스러워 다시 한숨을 쉬었다.
“후- 몸은 괜찮은 게냐. 아프면 안 되는데......애비가 보고 싶지도 않은 게야?”
“......저는...... 아픈데 없어요.”
화연의, 울먹이는 듯 떨리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이 정말 사실 같아 류 충은 팔을 내리고 벌떡 일어섰다.
"!"
바로 눈앞에......
그렇게도 그리던 화연이 바로 눈앞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 차오른 물기가 볼로 또르륵 흘러내렸다. 눈물을 흘리던 화연은 류 충의 거칠거칠한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내 딸......”
믿기지 않은 듯 멍하니 보고만 있던 류 충의 입에서 탄식처럼 나온 말에 화연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화연은 류 충의 손바닥에 볼을 부볐다. 그 보드라운 느낌에 이제야 실감이 난 류 충은 화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작고 마른 몸이 품안에 쏙 들어왔다.
“연아.....!? 연아!! 아, 아. 내 새끼 구나. 내 새끼 맞아! 내 새끼가 돌아 온 거야. 애비 품으로 성히 돌아왔어. 연아......”
꼭 감은 류 충의 눈 꼬리 끝에서 새어나온 눈물은 깊어진 주름을 타고 수척해진 볼로 흘렀다.
드디어, 내 딸이 돌아 왔다.
*
화연을 되찾은 류 충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 걱정은 없었다. 협상만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사실 자신이야 협상이 끝날 때까지 있을 필요는 없이 당장 올라가고 싶었지만 화연이 무영과 같이 돌아가기를 원했다.
돌아가자는 말에 머뭇거리다 얼굴을 붉히며 ‘전하와 같이 가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는 제 딸을 보니 류 충도 정말,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딸이 저 짐승 놈에게 진짜 마음을 줬구나.
짐승 놈이야 내 딸에게 마음을 주든지 말든지 상관없었지만 화연까지 저 놈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모른 척 하고 싶어도 둘 사이에 얼마나 뜨거운 기운이 흐르는지 도저히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었다,
저 우라질 놈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아서......황태자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꽃 같은 내 새끼의 마음까지 가져가고 말이지.
류 충의 탁탁치 않은 시선이 거만하게 앉아있는 무영에게 향했다.
어휴......저 꼴 좀 보라지.
사내놈이 무슨 색기를 저렇게 풍기고 그런담?
기생오래비도 아니고 말이야. 쯧.
전에는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어째 더 짙어 진 것이 여인들이 환장을 하며 달려들 것 같았다. 잠시도 화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저 꼴을 보니 쉽사리 한눈팔지는 않겠지만 또 모른다. 여렸을 때부터 워낙 기생들이 달라붙었기 때문에 맘을 놓을 수가 없다.
달려드는 여자 마다하는 남자는 없지.
류 충의 눈이 가늘어 졌다.
다른 여자 손끝이라도 만지는 그 순간. 그 날이 너의 제삿날이다.
류 충의 눈에서 살기를 느꼈는지 무영의 눈이 류 충에게로 돌아갔다.
장인어른, 쓸데없는 걱정 마시고 연이나 내려놓으시지요.
피식 웃은 류 충은 품에 안은 화연을 보란 듯이 꼭 끌어안았다.
내 딸이거든?
무영의 눈이 가늘어 졌다.
내 것입니다.
둘의 신경전으로 막사안의 기온이 뚝 떨어지는 것 같다.
가운데 끼인 화연이 난처한 얼굴로 류 강연을 쳐다보았지만 류 강연은 화연을 보고, 아니 화연의 목쯤을 바라보며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왜 저러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화연은 자신의 몸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곱게 틀어 올린 가녀린 뒷목이 훤히 드러났다. 하얀 뒷목 정 가운데 떡하니 나있는 붉은 화흔 까지 고스란히. 그 것을 본 류 강연의 눈은 더욱 커졌다. 크게 벌어진 그의 동공이 정신없이 떨린다. 입을 꽉 다문 류 강연은 무영을 노려보다 목을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 화연에게 다가갔다.
“아직 밤에는 바람이 차. 목을 따뜻하게 해야지 고뿔 안 걸린다. 이거 두르고 있어.”
남쪽이라 바람은커녕 이제 슬슬 더워지는데도 화연은 군말 없이 천으로 목을 감쌌다. 설마 화흔을 가리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은 못하고 오라비가 자신을 참 생각해주는 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예. 오라버니. 고마워요.”
자신을 보며 구김 없이 환하게 웃는 화연을 보니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류 강연은 시선을 훽- 돌렸다. 무영에게로.
목에 천을 둘러준 류 강연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 챈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 손톱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는 여러모로 형세가 불리했다. 화연 뒤에서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류 상연의 눈초리도 예사스럽지 않았다.
정말 밥에 독이라도 타고 자신이 쓰러져 있는 동안 화연을 데리고 도망갈 수도 있기 때문에 무영은 웬만하면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화연과 밤을 보낸 건 환궁하기 전 까지는 절대 비밀로 하자고 다짐했다.
한쪽에 쪼그라져 이 상황을 보고 있던 천인장 유윤은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저......이 와중에 죄송하지만......륜국을 어떻게 하실지 상의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 그렇지.”
이제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무영이 화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연아, 네가 들은 걸 그대로 말씀드려.”
“응? 륜국이라니? 뭘 어떻게 해? 연아, 이게 무슨 말이냐?”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연은 차분하게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입은 점점 벌어졌다.
정말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들은 것처럼 류 충과 류 강연의 표정은 어처구니없이 변했다.
“허......미친놈들!”
“별......참내, 아버지 이게 말이 됩니까? 속국으로 만든다니, 정말 그런 짓을 계획했을까요......저 놈들 바보 아녜요?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말처럼 쉬운 것도 아니고. 그것도 우리나라처럼 황권이 발달 되어 있는 나라에서 말이죠.”
“그러게 말이다. 음......어째 좀 이상하구나.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법이야 몇 가지 없지 않느냐. 반란을 일으키거나 역모를 꾸미거나. 하지만 거의 불가능 할 텐데......”
“아니면, 협상을 핑계로 불어낸 하나밖에 없는 제국의 후계자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거나.”
툭 끼어들은 무영의 말에 류 강연과 류 충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화연의 말을 듣고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낸 결론이었다. 가람지방과의 협상을 생각하면 제일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얼굴을 심각하게 굳힌 류 강연은 이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얼핏 들었을 때는 그럴듯하지만 사실, 그것도 말이 안 됩니다. 당장 혼란스러워 지기는 하겠지만 연제께서 버젓이 계시잖습니까. 아직 후사를 보는 것이 가능한 나이시고요. 그것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아, 그리고. 말이야 바른말이지 어디 죽인다고 쉽게 죽여집니까? 그렇게 쉬울 것 같았으면 제가 벌써 죽였겠......흠......아무튼, 그건 아니라는 거지요.”
헛기침을 하는 류 강연을 가느다란 눈으로 노려보던 무영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럼 나를 죽이고 역모를 일으키도록 뒤에서 조종한다면?”
“흠......그건 좀 타격이 있겠네요. 후계가 없는 황권은 역모가 일어나기 좋은 구실이니까요. 하지만......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둘째 치고도 누가 역모를 꾸미겠습니까? 그럴만한 힘을 가진 인물 중 역모를 일으킬 사람은 없습니다. 있었는데 저번에 싹 죽이셨잖습니까. 남은 사람은 우리 아버지 밖에 안 계시는데요? 아버지, 역모를 꾸미실 생각 있으세요?”
“흐음.....그러고 보니 그것도 괜찮은 생각 같구나. 전하, 좋은 방법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수틀리면 써 먹어야겠군요.”
수틀리면 연이 빼돌리고 넌 죽여 버릴 거야.
하는 류 충의 시선을 무영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별말씀을요.”
수틀리면 황제 자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연이만 들고 튈 거야.
둘의 시선이 다시 살벌하게 부딪쳤다.
류 강연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요. 분명히 무슨 계획을 세워 놨으니 그런 말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연아, 더 말해 줄건 없어? 스치듯이 들은 거라도 좋아.”
당시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하던 화연은 더 생각나는 것이 없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퍼뜩 들었다.
“저도 당시에 너무 긴장해 있어서.......나중에서야 잘 들어놔야겠다 싶어 새겨듣기는 했는데 앞에는 잘 못 들었거든요. 아! 그 황금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아버지를 두고 나중에 자신을 모셔야 할 거라고 했어요. 음......맞아요. 맞아. 이제 생각나네요.”
“황금색? 머리가 금빛이었어?”
“네. 아주 빛나는 황금색 머리. 그리고 청록색 눈동자였어요.”
류 강연의 눈이 류 충에게 돌아갔다. 륜국의 황가를 상징하는 황금색 머리라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그 놈은 륜국의 이 황자가 틀림없었다.
류 충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졌다.
“협상하러 온다는 놈이 남에 나라에서 여자를, 그것도 납치된 여자를 산답시고 기웃거리다니......이거, 미친놈 아니야? 방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황가의 수치라더니 그 소문이 과장된 것은 아니었구나. 그런 놈을 협상에 내보내다니......그렇게 교활하던 륜국의 왕이 뭘 잘못 먹었나.”
“저는 처음부터 그 이 황자가 협상자리에 온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 이 황자가 주색잡기에나 능통하지 정치나 외교에 대해서 뭘 알기나 안답디까? 아니, 그들의 계획대로 다 이루어졌다고 쳐도 그 놈을 왕으로 올린다니......이게 말이 됩니까? 애들 소꿉놀이도 아니고 왕위가 무슨 장난인가. 참 어처구니가 없네요.”
“내말이 그 말이다. 삼 황자가 명석하다던데 나 같으면 협상자리에 그 놈을 보내겠다. 협상을 하겠다는 건지 안하겠다는 건지. 지들의 잘못으로 전쟁이 벌어졌으니 그저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겠다는 뜻인가? 쯧쯧쯧. 아무래도 륜국의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나봐.”
“그러면......결국에는 태자전하를 시해한 후 반란을 일으키던지 역모를 꾸미던지 수를 써서 황궁을 장악한 뒤 이 황자를 왕으로 추대한다는 말인데요. 계획의 성공 유무를 떠나서 구멍이 너무 많습니다. 누가 이런 어설픈 계획에 넘어가겠습니다. 그들도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우리와 전면전을 면치 못 할 텐데 말이죠. 안 하니만 못하죠.”
“그러니까 내 말이 맞다니 까. 륜국 왕 노망 설.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돼. 늙은이가 이제 살만큼 살아 갈 때가 된 게지.”
류 충의 품에 안겨 가만히 듣고 있던 화연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아버지, 혹시 태자전하를 인질로 삼고 전쟁을 벌이려는 건 아닐까요? 이 가람지방도 그들이 아무런 선전포고 없이 마음대로 침범해서 전쟁이 벌어진 거라면서요. 전에는 가람지방을 점령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이제는 나라전체를 점령하려고 침략 할 수도 있잖아요. 태자전하를 인질로 삼는다면 우리가 공격을 못 할 테니까요.”
류 충은 순진한 화연의 말에 허허 웃었다.
“연아, 어이구 순진한 내 딸.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도 없겠지만 만약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공격할 거란다.”
“예? 태자전하께서 인질로 잡혀 계신데요?”
“태자전하 한명 살리겠다고 나라를 잃을 수는 없지 않겠니. 안 그러니? 오히려 분노에 차서 맹공격을 하면 모를까.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가 스스로 자진할거야. 그러니 그럴 일은 없어.”
부드럽게 웃으며 바라보는 무영의 시선에 화연은 얼굴을 굳혔다. 가능성 없는 일이었지만, 말만 들었는데도 가슴이 철렁 거렸다. 류충은 그런 화연의 표정을 보며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딸,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란다. 국지적인 소요도 아니고 나라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명분도 없이 침략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네 개의 나라는 서로 견제하면서도 긴밀한 협조로 균형을 이루고 있단다. 그런 균형을 누군가 마음대로 깨버리고 침략한다면 다른 나라 또한 침략 당할 수 있지 않겠느냐. 당연히 위기감을 느낀 나라들이 연합을 해서 공격을 하겠지.”
굳은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던 화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버지......그럼 이상한데요? 저들이 태자전하 시해를 시작으로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면 그거야 말로 명분을 우리에게 주는 거잖아요. 우리가 저들을 침략할 수도 있는 거 아녜요? 왜 우리가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 하는 거죠?”
“당연히 모르게 하겠지. 지들이 죽인 것을 모르게.”
“아버지, 그게 더 이상해요. 륜국과의 협상에 참가한 태자가 갑자기 죽었다. 그런데 누가 죽인 줄 모른다니......당연히 상대국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아요?”
“......그, 그렇네.”
화연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류 충은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지 류 강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류 강연이라고 떠오르는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모를 알아차리기에는 가지고 있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일단, 정리를 하자면......이곳에서부터 일이 시작되는 건 맞을 겁니다. 하지만 역모나 반역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중심에 설만한 인물도 없습니다. 그럼 다음 방법으로는 침략전쟁인데......가장 중요한 명분이 없습니다. 명분 무시했다가는 환제국군이 아니라 삼국연합군과 맞서야 할 테니 이것도 아니겠고요. 모두 여기에는 동의하시지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머리를 굴리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화연이 말했다.
“명분이 없어 침략할 수 없다는 말은......바꿔 말한다면 명문이 있다면 침략할 수 있는 건가요?”
“어? 그렇지. 명분이 있다면......그렇긴 하지. 하지만 우리가 명분을 줄 리가 없지 않니.”
“우리가 준 것은 아니지만...... 저들이 우리가 줬다고 우기면요?”
“뭐?”
“아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잖아요. 태자전하께서 인질로 잡히면 우리가 손 놓고 있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우리 쪽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저쪽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이곳에는 태자전하 뿐 아니라 륜국의 황자도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저쪽의 황자를 인질로 잡는다면? 그러니까, 저들이 황자를 어딘가에 숨기고 우리가 납치했다고 우기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류 강연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화연을 보다가 애가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정치를 좀 가르쳐 줘야지 안 되겠어. 그러니 저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지. 이제 태자비에 오르면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니 공부를 시켜야겠다. 그 핑계로 저 짐승하고 좀 떼어 놓고.
“후.......연아, 정치란 말이야 그렇게 우긴다고 되는 게 아니란다. 뭐든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어야 하지. 그 증거가 사실이든 아니든. 조작이 됐던지 안됐던지 간에 말이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그런 증거도 없는 연극 따위에 속을 리가......!!”
한숨을 쉬며 말을 하던 류 강연은 입을 닫았다. 벼락같이 떠오른 생각을 정리 하느라 머릿속이 정신없이 돌아갔다.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류 강연이 답답할 만도 했지만 아무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라도 될까 숨까지 죽이고 기다렸다.
허공을 보던 류 강연이 멍한 어투로 물었다.
“연아, 네가 아까 그랬지?”
“뭘요?”
“협상에 참가한 태자가 갑자기 죽었다면......누구를 범인으로 생각할까.”
“당연히, 상대국......어머!!”
화연의 대답을 끝으로 생각을 정리한 듯 크게 숨을 쉬던 류 강연이 눈을 꼭 감았다 뜨면서 씩- 웃었다.
“머지않아 저쪽에서 누군가 살해될 겁니다.”
“......”
“저는 그 누군가가 이 황자라는 데 전 재산을 걸겠습니다.”
“!!”
류 강연이 던진 돌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모두들, 심지어 무영까지 입을 쩍- 벌렸다. 모두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가장먼저 회복한 류 충이 입을 열었다.
“......강아......너 재산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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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륜국과의 일도 정리가 되어 가네요.
요즘 왜이렇게 피곤한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약속한 시간을 자꾸 놓치네요.
죄송합니다. 꾸벅.
후원쿠폰 주신 독자님들 한분한분 닉넴 말씀드리고 싶은데 후원자 창이 안열리네요ㅜㅜ
하지만 제 맘 아시죠?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