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3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어?”
품안에 있던 화연이 고개를 바짝 세우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왜?”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요.”
“......음......”
무영은 말없이 안 그래도 빨랐던 속도를 더욱 높였다. 힘 하나는 끝내준다는 주화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덩치 큰 말은 두 명을 태우고도 죽죽 나간다.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목조 건물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금세 화양주의 경계가 나왔다. 주화가 준, 엄청나게 화려한 붉은색 나비가 정신없이 펄럭거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풍경을 감상할 시간은커녕 이러다 나비가 홀랑 벗겨질 것만 같아 끝을 모아 잡기 바쁘다. 길을 떠난 다기 보다는 무언가로 부터 도망가는 것 같은 느낌에 화연은 무영이 쓰고 있던 나비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가시려는 거예요? 협상기일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잖아요.”
“저곳에 한시라도 더 있기 싫어.”
“......피곤하지 않아요?”
“전혀.”
나비를 쓰고 있으니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어서는 정말인 것 같다. 화연은 자신의 배를 강하게 감싸고 있는 무영의 손등에 손을 살포시 올렸다.
가냘픈 몸이 가슴에 기대어 온다.
부드러운 손이 제 손등을 감싸자 약간 낮은 체온이 느껴졌다.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바싹 끌어 당겨 작은 빈틈을 채웠다. 잠시 동안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감회가 새로웠다. 작은 몸은 자신의 몸과 딱 알맞았다.
류 충도 류 충이지만......
무영은 여러모로 마음이 급했다.
두 시진을 내리달려 무영이 도착한 곳은 이런 곳에도 객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은 마을이었다.
새벽인지라 집집마다 불도 다 꺼져있어 어두웠지만 무영은 거침없이 말을 몰아 누군가의 집 앞에 내리더니 대문을 마구 두드렸다. 어찌나 인정사정없이 두드리는지 동네사람 모두 깨어나게 생겼다. 말 위에서 안절부절 하는 화연과는 달리 무영은 더 거세게 문을 두드렸다. 불이 켜지고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놈아! 문부서 지겠다!! 오밤중에 어떤 썩을 놈인지 몰라도, 너 거기 딱 기다려라!”
문이 벌컥 열리고 얼굴이 붉어진 노인이 몽둥이까지 든 채 폭풍 같은 기세로 뛰어 나왔다. 한 참 단잠을 자던 중이었는지 하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베개자국이 선명했다. 손에 침을 퉤- 뱉으며 몽둥이를 들어 올리던 노인에게 무영은 나비를 벗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이 육시랄 놈 같으니라고! 지금이 몇 시인데 이 지랄......!! 아니......저, 전하?!!”
“저번에 우리 묵었던 별채. 깨끗한가?”
“예? 아, 예, 예. 그럼요! 마을 회관으로도 쓰고 가끔 길 잘못들은 여행객들에게 내어 주느라 항상 청소를 해두지요. 그때 묵어보셨잖습니까. 헌데, 거긴 왜......?”
“거기에서 묵어야겠어. 열쇠 내놔.”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 아니지. 누추하지만 들어오십시오. 산속이라 아직 밤바람이 찹니다.”
마치 자기가 맡겨 놓은 것처럼 손을 척 내밀어도 노인은 군소리도 없다. 오히려 목 빠지게 기다리던 손님이라도 맞은 것처럼 수선을 떨며 집안으로 안내했다.
무영은 빨리 열쇠나 가지고 나오라고 하려다 마음을 바꿨다. 화연이 추울 수도 있겠다 싶어 품에 안고 노인의 집으로 들어섰다. 나비를 들어 올려 화연의 얼굴을 보다 볼을 쓸어 내렸다.
열은 없군. 큰일을 당한지라 놀라 열이 오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마음을 굳게 먹었었는지 별 이상은 없어 보였다. 굳건히 견디어준 화연이 고마워 무영은 부드럽게 웃었다. 화연은 자신의 볼을 만지작거리는 무영의 손에 얼굴을 살짝 기대며 마주보고 웃었다.
“여기, 와보셨어요?”
“응. 전쟁 끝나고 환궁할 때.”
“그 때에도 이곳에서 묵으셨어요? 여기는 어떻게 알고?”
“몰랐어. 올라오다 보니 있더라고.”
화연은 헝클어진 무영의 머리를 차분하게 쓸어주었다. 머리에 무엇을 바르고 대충 씻어 낸 건지 감촉이 예전하고 다르다. 군데군데 색깔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입 주변도 약간 붉은 것 같고......어두웠을 때는 몰랐는데 얼굴에 뭔가 반짝거린다. 솔솔 꽃향기도 나는 것 같고......응? 이게 뭐지? 꼭 분가루 같기도 하고......
“이게 뭐에요? 얼굴에 뭔가 반짝이는 게 묻어있어요.”
“......별거 아니야.”
사실대로는 죽어도 말할 수 없어 머뭇거리다 대답을 흘렸다. 괜스레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무영은 화연의 붉은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괴롭히긴 괴롭혔는지 아직도 입술이 부어있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그 입술을 보니 급격하게 허기가 졌다.
음......
입술에 아직도 붓기가 남아있네.
어떤 새끼가 이걸 보지는 않았겠지.
아! 그러고 보니 명, 이 새끼를 그냥 놔뒀군.
무영은 화연의 입술을 집요하게 바라보며 명, 그 새끼를 어떻게 괴롭힐까 고민하다 무심코 말했다.
“배고파.”
입술을 보는 무영의 시선에 화연은 조금 불안했었다. 혹시 그 남자가 만진 자국이라도 남지는 않았겠지. 냄새라든지......물론, 그럴 확률을 극히 드물었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짐승과 맞먹는, 예리한 감각의 소유자인 그라면 알아 챌 수도 있지 않을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귀를 종긋 세우고 있던 화연은 배고프다는 말에 다행이라고 느끼면서도 안쓰러웠다. 끼니도 거르면서 하루 종일 나를 찾아다녔을 텐데 간단하게, 그것도 말위에서 먹은 걸로는 성이 안차겠지. 그 말을 듣고 보니 무영의 볼이 하루사이에 홀쭉해 진 것 같기도 하다. 화연은 무영의 볼을 감싸며 말했다.
“이 밤중에 염치없긴 하지만 음식 좀 얻을 수 있을지 여쭤봐야겠어요. 당신 식사하셔야지요.”
“응?”
밥 생각이 전혀 없던 무영은 갑작스런 화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장하시잖아요.”
“나? 아닌데. 아까 먹었잖아. 배고파?”
무영은 자신이 한 말은 생각도 못하고 화연이 배고파서 그런가 하고 되물었다. 화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입맛이 있을 리가 있나. 말위에서 먹은 게 아직 소화도 안됐다.
“예? 아뇨. 저는 생각 없어요. 배고프시다면 서요?”
“내가? 언제?”
“방금요......”
“방금?......아, 그거......”
“예?”
“배고픈 거 맞긴 맞지.”
“거봐요. 제가 한번 물어 볼게요. 노인 혼자 사시는 것 같은데 고기는 준비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편식하지 말고 그냥 드세요. 내일 맛난 거 먹어요.”
“‘그’ 배 아니야.”
“응?”
저도 모르게 반말을 하는 화연이 너무 귀여워 무영은 그 입술에 입을 쪽- 맞췄다.
“‘이’ 배야.”
“어......”
“난 지금, ‘그’ 배가 고파 죽겠어.”
말의 뜻을 파악하느라 멍했던 화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얼굴이 몸살 나게 예뻐 무영은 입을 다시 맞췄다.
그런 일을 겪은 여자한테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시간도 안주고 너무한 거 아니야!
......라며 뺨을 후려갈겨도 될 테지만 화연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는 것이 좋았다. 무슨 중병이라도 걸린 마냥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게다가 하루였지만 오늘처럼 그가 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의 품에 너무나 안기고 싶었다.
화연은 사람이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까, 장정의 어깨에 짐처럼 실려 갔을 때 들었던 생각은 무슨 일을 당할까 하는 두려움이나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후회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그냥 허락할걸......막일을 한 것도 아닌데 뭐 그리 힘들었다고 엄살을 피웠을까.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다시 그에게 돌아간다면 절대 후회할 짓은 하지 말아야지. 몇 번을 다짐 했었는데......
그때를 회상해 보니 갑자기 얼굴처럼 마음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옷자락만 만지작거릴 뿐 아무 말도 없다. 내리 깐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볼이 붉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운지 넋을 놓고 보다가 노인이 와 있는 줄도 몰랐다. 계면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일부러 인기척을 내는 노인을 향해 무영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흠, 흠......여기 있습니다.”
자신을 안고 있으면서 열쇠까지 들고 있으면 불편할까 싶어 화연은 무영의 손을 톡톡 쳐서 열쇠를 넘겨받았다. 무영은 손에 있던 것을 순순히 넘겨주며 화연의 귀밑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 시선에 애틋함이 줄줄 넘친다.
누굴 그렇게 소중히 보듬어 안고 다니나 했더니 재상어르신의 따님이로군.
한눈에 봐도 흥미로 한번 만나는, 그저 그런 사이가 아니다. 서로 죽고 못 사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간택령이 끝났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노인은 저 분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미래의 황후마마를 내 집에서, 내 눈앞에서 뵙게 되다니......늘그막에 호강하는구먼.
그나저나 분위기 한번 참 뜨겁다.
둘이 남우세스러운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낯이 뜨거웠다.
얼마나 말을 탔는지는 몰라도 이 새벽까지 도착했다면 얼추 짧은 시간은 아니었을 터인데. 피곤하지도 않은지 둘 다 얼굴이 생생하다 못해 날아갈듯 보인다. 얼굴에 보이는 붉은 기운이 예사스럽지가 않았다. 이거, 까딱하다가는 이 집을 내어 드리고 내가 별채로 가게 생겼군. 그 시간동안 참을 수 있을지 걱정 될 정도로......조급해 보였다.
역시 젊으니까 좋구나.
노인은 씨익- 웃으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무영에게 말했다. 분위기를 보니 물어보나 마나겠지만...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
“전하. 진지는 잡수신 겁니까?”
“밥 먹을 시간 없어.”
“......아까 배고프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것도 같은데요......”
“귀도 밝군.”
“제가 늙어 여기저기 고장은 났지만 귀 하나는 아직 쓸 만합니다.”
“들었다고 하니 미리 말해두겠는데.”
“뭘...말씀이십니까?”
“내일 식사를 하라는 둥 문안인사를 드린다는 둥 하며 쓸모없는 짓으로 찾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천연덕스러운 무영의 말에 화연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참, 귀여우시군. 노인은 너털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과장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예, 예. 분부대로 합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진지 드실 시간도 없다 하시다니......매우 바쁘신가 봅니다......?”
“응. 지금부터 바쁠 거야.”
노인의 장난기가 싫지는 않았는지 무영은 맞장구를 쳐주며 피식 웃었다. 화연은 무영의 팔을 꼬집었지만 단단한 팔은 꿈쩍도 안했다.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숙이며 노인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별채로 날아가는 무영의 뒷모습을 보며 노인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
무영은 2층으로 된 아담한 목조건물 앞에 화연을 내려 주었다. 부끄러움에 애꿎은 열쇠만 어찌나 꼼지락 댔는지 쇠로된 열쇠가 뜨뜻했다. 화연은 무영이 내려 주자마자 눈 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당신, 정말 이럴......읍!!”
얼굴을 돌리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무영이 입을 맞춰왔다. 덮치듯 강하게 내리누르는 입술에 뒤로 밀려 등이 문에 부딪쳤다. 나무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덜컹거렸다. 막무가내로 입술을 빨다가 혀를 집어넣는 무영의 행동에 화연은 어깨를 톡톡 밀었다.
“으읍......자, 잠깐......들어가서......으응.......”
노인이라도 볼까 무서워 어깨를 두드리고 팔을 밀어도 끄떡하지도 않고 한참동안 입술을 빨아대던 무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문 열어.”
<자체검열 펑!-노블 '꽃짐'으로 이동하세요>
무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다 조용히 일어섰다. 수건에 물을 적셔서 얼굴부터 닦아 주었다. 발갛게 부어오른 눈가를 보니 안쓰럽다.
이렇게 체력이 약해서야...... 어서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야지 원.
어제 꽃을 꺾어 오기 전 들른 한약방에서 일이 떠올랐다. 의원의 시선은 천년설삼을 달라는 자신을 꼭 미친놈 보듯 했었다. 그거 없으면 백년설삼이라도 내 놓으라고 했더니 시선뿐 아니라 대놓고 미친놈이라고 했었다. 역시 이런 곳에 설삼 같은 건 없나 보다.
무영은 파리한 화연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 며칠 있다가 출발하려고 했던 마음을 바꿨다.
그래, 여기서 더 지체하지 말고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자. 가서 몸에 좋다는 건 죄다 먹여야지. 단련을 좀 시킬까.
“으...응......그만.......”
몸을 조심스럽게 닦고 있는데 그녀가 뒤척이다 옆으로 눕더니 웅크린다. 얼마나 괴롭혔는지 자면서도 인상을 쓰며 그만하란다. 그것이 미안하기는커녕 내 꿈을 꾸는 것 같아 참 기꺼웠다. 뒤척이면서 드러난 그녀의 말간 엉덩이를 보던 무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마음을 바꿨다.
아직 시간 남았는데 먼저 가면 뭐하나. 장인이 눈에 불을 켜며 기다리고 있을 텐데. 보자마자 엄청난 잔소리와 함께 죽어라 방해하겠지.
그걸 생각하니 협상이고 뭐고 그냥 궁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음......조금 더 있다가 갈까?
짧은 고민 끝에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야겠다고 생각한 무영은 질척거리는 이불을 벗겨 바닥에 던진 뒤 화연을 끌어안았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작은 동물처럼 끙끙거리는 화연을 뒤에서 끌어안은 무영은 그녀의 머리에 코를 묻으며 눈을 감았다.
여담이지만.
다들 쉬지 않았다가는 과로로 죽게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쉰 류 충 일행은 전 재산 가지고 도망간, 바람난 여편네 잡듯 미친 듯이 말을 몰아 가람지방을 3일 만에 도착하는 기염을 토했다.
황궁으로 전갈을 넣은 무영과 화연이 답신도 기다릴 겸, 신혼생활도 즐길 겸, 출발 조차하지 않은 거와는 별개로 말이다.
************************
조금 늦었습니다.
피곤해서 자다가 이제 일어난거 있죠.
죄송...헤헤
작가의 다른 글에서 꽃짐을 선택하시면 103편 무삭제본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