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1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같은 건물 3층, 귀빈실에서는 아힐을 포함한 세 명의 지부장들이 한창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벌어질 행사에 대한 기대가 큰 건지 분위기가 참 화기애애하다. 지부장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폈다.
귀빈실로 들어선 탐호는 과연 그 검은 머리가 얼마에 팔릴까에 대해 논하던 지부장들 사이에 조용히 앉았다.
“음...자네 왔구먼.”
“예, 아힐님. 헌데...본부장님께서는 안 오십니까? 오늘 행사에 대해 기대가 크셔서 꼭 오실 줄 알았는데......”
“아직 륜국에 계시네. 그쪽에 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예상보다 늦어져서 시간을 못 맞추셨나본데...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더군.”
“생각보다 일이 많은 모양이지요?”
“그쪽에는 첩이 당연시 되어있어서...비밀스럽게 구매하고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터를 잡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래서 그쪽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걸세.”
“듣자하니 황가의 상징이 붉은 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뀔 거라는......”
“씁- 자네! 입조심 하시게!! 한번 크게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가!!”
“죄, 죄송합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게! 말이란 어디로 세어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걸세.”
“예. 명심하겠습니다. 저는 그냥......대면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셔서.”
“황자 아닌가. 그러니 아무래도 우리 같은 장사치들과 얼굴 트기는 싫으시겠지. 그래, 상품은 가져다 드렸나?”
“가져다 드리면서 뵐 수 있을까 싶어 의중을 여쭤보라고 하긴 했는데 거절하셨답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좀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경매가 끝나면 대금을 치루기 위해서라도 보게 될 터. 너무 흥분하지는 마시게. 음......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손님들과 인사도 나누려면 지금 내려가야 얼추 맞을 거 같은데?”
불만스러운 표정을 펴며 탐호는 지부장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그럼 저는 상품들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먼저 내려가 자리 잡고 계시지요.”
“그러지.”
*
느긋하게 지하로 내려간 지부장들은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행사장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보인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지부장들은 어이가 없었다. 경비라고 세워놨더니 입구에 세워져 있는 기둥 양쪽에 등을 기대고 퍼질러 앉아 있지 않은가.
“허......이것들이 미쳤나!! 당장 일어나지 못해?!!”
어깨를 흔들고 뺨을 때리다 발로 차기까지 했는데 장정들은 축 늘어질 뿐 일어날 기미가 없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지부장들은 서로를 마주보다가 길게 늘어져 있는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 있는 무대를 중심으로 손님이던 경호를 서고 있던 장정들이건 단 한명도 예외 없이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이 해괴한 광경에 그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아니......!! 이게...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다들 왜 이러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어찌된 일인지...”
놀란 표정으로 우왕좌왕하던 그들은 서둘러 다가가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손님!! 손님!! 정신을 좀 차려 보세요! 손님!!”
아힐은 정신을 잃은 채 배연에 기대어 손님의 어깨를 흔들다 들리는 소리에 자신이 잘못들은 건가 싶어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작지만 분명했다. 이건 코 고는 소리다.
이 믿을 수 없는 일에 아힐의 표정이 망연자실해졌다.
“허......이거 아무래도......자는 거 같은데?”
“......이 손님도 그런 거 같은데? 왜, 다들 이렇게 된 건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의 시선에 가느다랗게 연기가 피어오르는 향로가 들어왔다. 아힐은 미심쩍은 얼굴로 향로 앞으로 가서 연기를 조심스럽게 들이마셨다.
“응? 이건 무슨 냄새지? 무슨 풀냄새 같기도 하고......어디서 많이 맡아봤던 냄샌데......”
“무슨 냄새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향로에서 그런 냄새가 왜나는지 알아봐야하지 않겠나! 혹시 손님들에게 난화라도 제공한 건가?”
“그럴 리가 있겠나. 아직 경매도 시작 안했는데......이건 난화의 냄새도 아니지 않나. 어? 저기 누군가 정신을 차리나 본데?”
“뭐?”
아힐은 지부장 중 한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행사장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쓰러져 있던 장정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서고 있었다.
“으으으......”
“거기, 자네! 이봐! 이게 어찌된 일인가!”
“저도.....으으...아, 머리야......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여기서 일어난 일인데 모르다니 말이 되는 가! 생각을 좀 잘 해보게! 뭐 기억나는 것이 없는가?”
“어......그러고 보니 누군가 수상한 가루를 나눠주긴 했습니다. 손님들이 향로에 그걸 피우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어질어질하더니 향로 가까운 곳에 있는 손님이 하나둘 드러눕더라고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 주변에 서있던 얘들까지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대번에 큰일 났다 싶었죠. 저도 주저앉아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고 했는데.....뒤통수가 깨질듯 아프더니 그 뒤로는 생각이 안 납니다.”
“아니! 그럼 누가 일부러 앙심을 품고 이랬다는 게 아닌가! 혹시 다른 쪽에서 손을 쓴 거 아니야?”
“이 놈들이 남에 장사를 말아먹어도 유분수지......근데 문지기 관리를 어떻게 하기에 그런 놈들이 들어 온 거야?!”
장정의 말을 들은 지부장들이 발끈하려는데 아힐이 손을 들었다.
“잠깐 조용히 좀 해보게! 이봐, 누군가 가루를 줬다고?”
“예, 예. 맞습니다.”
“가루라......? 뭘 피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힐은 장정을 물끄러미 내려 보며 물었다.
“그런데 자네만 멀쩡하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상하지 않은가? 이 사람들이 죄다 쓰러질 정도에다 아직도 깨어나는 사람 하나도 없는걸 보니 그만큼 효력이 강했다는 건데.....왜 자네만 멀쩡할까?”
“어르신.....,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예?”
“아니. 의심하는 게 아니고 확신하는 거다! 니가 꾸민 일이지! 그렇지? 이놈아! 누구에게 사주를 받고 이런 짓을 꾸민 거냐!”
아힐은 장정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장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도리어 의심을 받다니. 아힐의 그럴듯한 의심에 다른 지부장들 까지 도끼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이놈, 가만히 두지 않겠다! 아힐 지부장, 내 지금 경호원들을 불러 오리다. 이런 놈은 아주 양 다리를 잘라버려야지!”
“그러시오! 이놈은 내가 잡고 있을 테니 어서 갔다 오시오. 이 죽일 놈! 네 명은 오늘로 끝났다. 이놈아! 누가 보냈냐! 어서 말하지 못할까!!”
“아니....어르신! 제가 뭘 어쨌다고 이러십니까? 사주를 받다니요! 저 모르십니까? 여기에 몸담은 지 횟수로만 5년째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전 정말 아닙니다! 정말 아까 한 말이 다 라고요!”
“그 말이 맞아.”
아힐은 뒤에서 들려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화를 버럭 냈다.
“맞긴 뭐가 맞아! 내 말에 맞장구 쳐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는 건가? 경호원 불러 온다며? 어서 갔다 오기나 하시게!”
“싫은데?”
“뭐?! 아니, 자네!!”
기대하던 행사가 이렇게 됐는데 저런 태평스런 어투라니...... 자기가 주도한 일이 아니라 이거지......자신이 이 행사의 책임자나 마찬가지였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분통이 터졌다. 얼굴을 걸레처럼 일그러뜨린 아힐은 뒤를 획 돌아보았다.
“!”
눈 바로 앞에 예리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눈동자에 박히기 일보직전이었다. 아힐은 눈동자에 파고들 정도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칼끝을 보다 침을 삼켰다. 몸을 움직이기는커녕 눈도 깜빡거릴 수 없었다.
“아쉽다. 조금만 뒤로 고개를 돌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죠. 아버지?”
다른 지부장의 목덜미에 소도를 대고 있던 류 충은 점잖게 말했다.
“강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냥 쑤셔 넣거라.”
경호원들을 부르러 가겠다고 하던 지부장의 목을 한손으로 붙잡고 있던 류 상연이 말했다.
“죽여.”
“음......두 명이나 남아있으니......그럴까? 그럼?”
심드렁하게 말한 류 강연은 칼끝을 들이밀었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다 칼끝이 스쳤다. 부릅뜬 그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린다. 바지 사이가 순식간에 노랗게 젖었다.
밑에서 올라오는 악취에 흘끔 시선을 내렸던 류 강연이 씩- 웃었다. 겁만 주려고 했을 뿐인데.....쯧. 이런 일 하는 놈 치고는 간이 너무 작은 거 아냐?
류 강연은 이놈들을 쉽게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일단 연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게 한 뒤에 밖으로 나가서 천천히 말려죽여야지. 그냥 죽여 버리면 너무 아깝잖아. 내가 알고 있는 고문의 기술을 모두 보여줘야 하는데.
류 강연이 손에든 소도를 뒤로 물리려는데.
콰콰쾅-
푹-
“으, 으......크아아아아아악!!”
“앗! 실수.......”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중심을 잡으려던 류 강연이 저도 모르게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필 소도를 쥐고 있던 손을.
잘 갈린 소도의 날은 두부에 칼을 꽂아 넣듯이 부드럽게 아힐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갔다. 깜짝 놀란 류 강연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칼을 빼냈다.
피가 터지는 눈을 감싸며 아힐이 뒤로 넘어갔다.
“야, 야. 안 죽어. 뭐 이정도 가지고 엄살이야? 그럼 이런 짓 하면서 이정도 고통도 못 느낄 줄 알았어? 너무 맘 편히 있었던 거 아냐? 쯧쯧쯧.”
여상스런 목소리로 나무라다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던 류 강연은 무심코 칼에 시선을 돌리다 멈칫했다. 칼끝에 아힐의 눈알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걸 본 류 강연이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 칼에 박혀있는 흉물스러운 그것을 빼내서 바닥을 뒹구는 아힐의 손에 억지로 쥐어주었다.
“아.....미안. 좀 아프긴 했겠다.”
류 강연은 느긋하게 쪼그리고 앉아 칼에 묻은 피를 아힐의 옷에 닦았다. 이 소리는 무영이 화연을 찾았다는 신호로 낸 것이 틀림없었다. 예상했던 것 보다 너무 거대했지만...아무튼 이제 한시름 놨다. 이제 둘이 떠날 수 있도록 시간만 좀 끌어주면 되겠군. 휘파람까지 부는 류 강연에게 마음 급한 류 충이 물었다.
“강아! 이게 그 소리 맞느냐? 전하께서 연이를 찾으신 게야. 그렇지?”
“하하하. 그럼요, 아버지. 당연하지요. 연이 찾아서 데리고 나가셨을 겁니다. 이제 우리만 밖으로 나가면 되겠네요. 애들하고 합류해서 밖에 있다가 도망치는 놈들까지 싹 다 잡아야지요.”
“그냥, 죽여.”
“상아. 나도 그러고 싶다만 뿌리를 뽑으려면 더 캐내야 하지 않겠냐. 여기 말고 다른 곳에도 이렇게 차려놨을 수 있잖아. 이놈들이 제일 나중에 내려왔으니 뭔가 알고 있는 게 많을 거야. 차림새도 좀 봐라. 아주 번쩍번쩍하지 않냐. 모르긴 몰라도 중요한 위치에 있는 놈들일걸?”
연이를 찾았다는 희소식에 환한 미소를 짓던 류 충은 머리위로 뭔가가 떨어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방으로 나있는 금, 그 사이로 흙모래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류 충은 여유로워 보이는 류 강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근데, 강아......이거 어째 흔들흔들 하는 것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아버지도 참......그 주머니에 있는 것을 다 쓰지 않은 이상 무너질 일은 없습니다. 걱정 마세,”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폭발음이 들리더니 이번에는 바닥이 흔들린다. 천장에 복잡하게 얽혀있던 금이 금세 커지면서 안 그래도 아슬아슬 하게 걸려있던 연등이 아래로 투두둑 떨어졌다. 기름 냄새가 확 퍼지며 순식간에 붉은 융단위에 불이 옮겨 붙었다.
류 강연은 삽시간에 번지는 불을 가만히 보다 욕을 짓씹으며 벌떡 일어섰다. 시간 끌어주다 깔려죽거나 타죽게 생겼다. 하여튼! 도와주고 싶어도 일을 이렇게 만들면 어떻게 도와줘?!!
“젠장! 아무래도 전하께서 몽땅 쓰셨나 봐요. 아버지 빨리 나가야겠습니다!”
“뭐?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놈은 어쩌면 그렇게 제대로 하는 일이 한 가지도 없는 게냐! 연이 들고 내빼기 만 할 줄 알지! 으이구!!”
“아버지, 나가서 말씀하시고요. 서두르세요. 이거, 천장이 안 무너져도 타죽게 생겼습니다.”
류 충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던 류 강연은 이내 침음성을 뱉었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쓰러져 있는 사람 중 누구 하나 일어나는 사람이 없고 대피하라고 외치는 사람도 없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적막한 가운데 아힐의 신음성만 간간히 들렸다. 물론, 좋은 거라고 하니 욕심껏 수면향을 들이마셨던 이유도 있겠지만 수면초 효능이 지나치게 강력했다.
공포에 질려 난동을 부리는 것보다는 좋긴 한데......이거 어쩐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드러누워 있는데 어떻게 밖으로 내보낸다는 말인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류 충의 표정도 난처해졌다. 업어 옮긴다고 해도 한두 명이어야지 엄두가 나지. 나비 쓴 놈들만 해도 스무 명 가까이 되고 경호를 서다 쓰러진 장정들까지 합하면 서른 명은 훨씬 넘었다. 자신들에다 잡고 있는 이놈들까지 합해도 몇 번은 옮겨야 할 판이다. 류 강연은 아연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류 상연에게 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지? 애들 들어와서 옮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거 같은데. 상아. 이 사람들 바로 깨어나게 할 수 있겠냐? 그런 약 있어?”
“있어.”
“그래? 그럼, 어서 그거 쓰자! 천장을 보니 시간이 얼마 없어! 무너지기 전에 어서 대피시켜야지.”
“싫어.”
“형한테 반 나눠......뭐?”
“싫다고.”
“응? 싫다고?”
“응”
“그럼.....이 사람들 다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어차피 나중에 다 죽일 거 아냐?”
“......그, 그렇지......만......”
“난 이 놈들 살려주고 싶은 마음 전혀 없는데... 형은 있나봐?”
“......나도 없긴......없지.”
류 강연은 류 충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는 아들의 시선에 류 충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잠든 사이에 맞는 편안한 죽음이라니......이놈들에게는 너무 아깝긴 하다만......”
일일이 나비를 벗겨서 그 얼굴을 보며 고문을 하고 싶었는데.....괜히 수면초를 썼나......
하지만 저 커다란 폭음이 날 때부터 왠지 서둘러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어떤 예감과도 같았다. 그것도 아주 불길한 예감. 그리고 대부분 이런 종류의 예감은 어김없이 들어맞는다.
곰곰이 생각하던 류 충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쓸모없는 일에 낭비할 시간 없다. 어서 나가자.”
류 강연은 일찍 깨어나는 바람에 괜한 의심을 받아야 했던 경호원에게 일어나라는 눈짓을 했다. 납죽 엎드려 눈치만 보던 경호원이 살았다는 표정으로 주춤 일어났다. 류 강연은 그 경호원을 앞장세워 나가며 류 충이 겨눈 칼에 벌벌 떨고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 뒷목을 움켜잡았다.
“여기서 죽여줄까? 아니면 밖으로 나갈래.”
“나, 나가면......”
“고문은 좀 받아야 할 거야. 하지만 아는 것이 많으면 살수도 있어. 어떻게 할래? 아, 얼른 골라! 지금 다 무너지게 생겼어. 그냥 여기서 죽을래? 한 놈 있으니까 너는 죽고 싶으면 그냥 죽어도 돼.”
“아,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지부장 두 명과 경호원 한명을 전리품으로 챙긴 류가의 세 남자는 빠르게 밖으로 향했다.
*
류 충이 들어간 입구 앞에는 스무 명 정도의 남자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호객하던 기생들이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엉덩이를 흔들며 다가가다 그들이 뿜어내는 암울하고도 농도 짙은 살기에 더 다가가지 못하고 몸을 돌렸다. 하나같이 벌건 눈을 희번덕거리며 좌우를 노려보는데 석 달은 잠도 못자도 밥도 못 먹은, 꼭 아귀 같은 몰골이었다.
실제로 대원들은 체감 상 석 달은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은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보다 더 피곤했다.
3일 동안 제대로 된 잠도 못자고 달려왔는데......이제 좀 쉬나 싶었는데 그 탐호란 새끼가 이런 짓을 벌여 쉬지도 못했다. 미친놈이 죽으려면 지 혼자 죽지 감히 누굴 납치해서 우리를 쉬지도 못하게 해!! 며칠만의 휴식이었는데!! 억울하고 원통했다. 남이 벌인 미친 짓에 저들만 죽어 나가게 생겼다.
눈은 벌겋다 못해 피가 나올 것만 같다. 뜨고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사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이 뭔지 언뜻 기억이 안 났다. 머리도 잘 안돌아가고 혀는 더 안돌아갔다.
으드득으드득
반드시 이 억울함을 풀고야 말겠다. 반드시!
스무 명의 남자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그들이 뿜는 살벌한 기세에 멀찍이 돌아갈 정도로 악에 받쳐있었다.
한동안 이를 갈며 희번덕거리던 그들의 눈이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륵 감겼다. 악에 받친 건 받친 건데..... 너무 나도 졸렸다. 졸음을 참지 못한 대원들이 하나 둘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데 갑작스럽게 엄청난 폭음이 들려 왔다.
화연아가씨를 찾았구나!
대원들은 화색이 만발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들었다. 사실, 이렇게 기다릴 바에는 안에 들어가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내부 상황에 대한 정보가 너무 적었다. 기절할 것 같은 몸을 억지로 깨워 일각을 천년 같이 기다렸다. 드디어 태자전하께서 화연아가씨를 찾았으니 일은 벌어 진 것이 분명하고, 이제 우리는 저 폭음에 놀라 밖으로 튀어 나오는 놈들만 잡아들이면 된다. 누구든지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아주 꼬치로 만들어 주마. 니들은 다 뒈졌어.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열쇠소리가 들리더니 건장한 장정 세 명이 사색이 되어 튀어 나온다. 대원들은 씩- 웃으며 그들에게 칼을 들이 밀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이것을 시작으로 많은 놈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한참이 지나도 장정 두 셋과 헐벗은 차림세의 여자들 몇이 더 나왔을 뿐 더 이상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영과 화연은 진즉에 나왔어야 했는데 감감 무소식이다. 어떻게 하지?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우리 들어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 아무래도 안 되겠다. 더 늦기 전에 들어가 보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좁혀졌을 무렵 다행스럽게도 류 충 일행이 나왔다. 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류 충 일행을 반겼다.
주 아랑은 류 강연에게 지부장을 인계받으며 문 안쪽을 두리번거렸다. 류 충 일행이 데리고 나온 사람은 남자 세 명과 나오다가 발견한 벌벌 떨고 있던 여자 몇 명이 다였다.
“어? 대장님. 화연아가씨와 전하는요?”
“뭐?”
“화연아가씨와 태자전하 말입니다. 언제 나오시냐고요.”
“......아직 안 나오셨어?”
“어......예. 아직......”
“아, 아니......그럴 리가 없는데? 나오셔도 벌써 나오셨어야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오자마자 화연을 찾던 류 충이 이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함을 질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데리고 나갔을 거라며!! 그럼 아직 저 안에 우리 연이가 있다는 게냐? 응? 그런 거야?”
“아, 아버지...잠시 만요. 그럴 리가 없는데......분명히 그 폭음은 연이 찾으면 내기로 한 거, 아버지도 아시잖습니까.”
“아니야.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무슨 사달이 나서 그 분진을 먼저 쓴 것이 분명하다고!! 안되겠다. 다시 들어가 봐야겠어.”
류 강연은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류 충의 허리를 붙잡았다.
“아버지! 잠깐 있어 보세요. 그리고 지금 들어가시면 위험해요. 천장이 다 내려앉게 생긴 거 보셨잖아요!!”
“그럼 내 새끼를 저기다 그냥 놔두자는 거야? 그리는 못한다! 이거 놓아라! 어서 놓으래도!”
둘의 실랑이를 보던 류 상연은 묵묵히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게 아니라 뒷문......어? 상아! 너 어디가!! 야! 뭐해? 저놈 잡아!”
“......예!”
대원 두 명이 서둘러 말렸지만 류 상연은 그들을 양쪽에 메달고도 묵묵히 걸어가다 류 강연의 고함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뒷문! 거기 누가 가있어?”
“예?”
“뒷문 말이야! 노예 들여보내는 그 문! 건물 뒤쪽에 있을 텐데......거기에는 누가 가있냐고!”
“어......”
서로를 쳐다보는 대원들의 표정은 어리둥절했다. 밀서를 해독한 류 강연이 말해준 위치로 와서 대기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자신들이 뒷문이 있는지 옆문이 있는지 어떻게 알겠나. 물론 이들이 평소 같았다면야 건물의 입구란 입구는 모두 파악해 그쪽에도 진을 치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피곤에 지친 이들의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자기 이름도 가물가물한데 뒷문의 존재를 생각해 냈을 리 만무했다.
류 강연은 대원들의 멍청한 표정에 욕을 뱉으며 뒷문으로 달려갔다. 류 충 또한 아까부터 뒷목을 찌르는 그 불길한 예감에 얼굴을 굳히고 류 강연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예상대로 건물 뒤쪽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여자들이었는데 모두 맨발로, 움직이기 편하게 치마를 동여맨 상태였다. 허벅지까지 훤하게 드러나 있는 여인들 사이에서 류 강연과 류 충은 화연을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화연은커녕 무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는 십 수 명의 여자들과 누군가에게 맞았는지 쌍코피에다 얼굴이 얼룩덜룩 난리가 난 남자와 손목이 잘려 다 죽어가는 남자뿐 이었다.
류 충은 여자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펴보다 화연의 얼굴을 찾을 수 없자 다시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혔다. 저 건물 안에 화연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불길한 예감이 아니었다. 왠지......내 새끼를 그 씹어 먹을 놈이 또 물고 도망쳤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불길한 예감이었다.
류 충은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천불을 잠시 가라앉히며 앞에 있는, 눈 밑에 애교점이 매력인 여인에게 물었다.
“이보게. 혹시, 자네들 말고 나온 사람은 없었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여자는 류 충의 머리를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 저희도 이제 막 나와서요. 저 남자들을 깨워 데려나오느라고 지체했거든요. 저......혹시 그분을 찾으시는......어머! 당신도 나왔군요!! 같이 가신 그... 그 분은 어디 계시나요?”
다소곳하게 말하던 여자는 류 충의 뒤 어딘가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기뻤는지 손뼉을 마주치면서 환하게 웃는다. 흡사 생명의 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찌나 유난을 떠는지. 중요한 질문을 하고 있는 이 시점에 어떤 놈이 방해해고 난리야? 류 충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응?”
참 희한하게도 생겼다. 양쪽 눈동자 색이 다르다니. 허, 참 별스럽구만. 류 충은 이런 사람을 처음 봤다. 신기한 생각에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 눈이 쎌죽 가늘어 지더니 꾸벅 인사를 한다.
“뭔가? 나를 아냐?”
명은 목을 두르고 있던 천을 내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뚱한 표정으로 상처를 보던 류 충의 표정이 이내 밝아졌다. 류 충은 명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네가 연제께서 보내셨다는 그림자구나! 그렇지?”
끄덕
“우리 연이는 어떻게 된 게야. 몸 성히 나왔느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끄덕
“오오.....다행이야. 다행이다!! 어디 있는 게야? 응? 우리 연이 어디 있는 게냐?”
명은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류 충의 손을 풀어 작은 쪽지를 쥐어 주었다. 그리고 인사를 꾸벅하며 어딘가로 사라진다. 말없이 사라지는 명의 뒷모습을 쫒던 류 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야, 이놈아! 어딜 가는 게야!! 우리 연이 어디 있는지는 말해줘야 할 거 아니야!! 이놈아 거기 안서냐......!! 하여튼 그 밥에 그 나물이라고 연제 밑에 제대로 된 놈이 있을 리가 없지!!”
“아버지, 그 쪽지나 펴 보세요. 말 을 못하니 우리 연이가 있는 위치를 거기 적어서 준 거겠지요.”
“음? 아, 그렇겠구나!”
류 충과 류 강연, 어느새 온 류 상연까지. 세 명의 시선이 작은 쪽지에 달라붙었다.
장인어른.
가람지방에서 뵙겠습니다.
궁에서 뵈면 더 좋고요.
-사위 무영
참, 여자들은 취루로 보내시면 됩니다.
쪽지를 보던 류 강연은 식은땀을 흘리다 눈알을 옆으로 굴렸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류 충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운 열기가 풀풀 풍기는 것도 같다. 희끗한 턱수염이 바르르 떨렸다. 이마에 이어 목에도 핏대가 바짝 섰다. 가까이 있다가 괜한 불똥이라도 튈까 싶어 슬금슬금 몸을 뒤로 숨겼다.
류 충은 들고 있던 쪽지를 마구 구겨 입에 넣고 잘근잘근 씹었다. 누구라고 생각하고 아주 너덜너덜 해지게 있는 힘껏 씹어 꿀꺽 삼켰다.
“꺼어억-”
분노의 트림까지 거하게 한 류 충은 주먹을 불끈 쥐고 동네가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무영!! 이 짐승 보다 못한 놈!! 가만 두지 않겠다!!! 너에게 내 딸을 줄 것 같으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준다!! 절대로!! 절-대-로!!”
이 불을 뿜는 사자후에 안 그래도 아슬아슬 서있던 건물은 결국,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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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충을 데려가고 싶었으나.....
둘만 있게 해줘야 여러분들과 제가 원하는 그런 전개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흠, 흠
뭐, 원하시는 스타일 있으신가요?
예를 들어,
짐승을 올라탄 꽃이라던가, 꽃을 올라탄 짐승이라던가.
아, 이건 원래 그랬지.
아무튼 그런 거 있으심 말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