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을 문 짐승-100화 (100/110)

00100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안에서 무슨 소리 안 들려? 응......? 이게 뭐야! 이게 무슨 연기야!!”

“뭐? 어? 뭐, 뭐야!! 빨리 문 열어봐! 어서! 다 타죽게 생겼잖아! 이게 얼마 만에 행사인데!! 위에서 알면 난리난다고!”

“아, 좀 가만히 있어봐! 너 때문에 더 안 열리잖아!!”

급히 열쇠를 찾는 듯 쇳소리가 요란하다. 그 소리에 방안에 있던 여인들은 더욱 소리를 지르며 아우성을 쳤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문을 열자마자 눈앞으로 허옇게 닥치는 연기에 건장한 장정 둘은 손을 휘저으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헌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던 여자들이 저 살겠다고 메뚜기마냥 쏟아져 나올 줄 알았는데 모두 벽에 붙어 나란히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없었고 방 안쪽에는 연기도 짙지 않았다. 표정 또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득 찬, 긴급하고도 처절한 표정이 전혀 아니었다. 차분하고 생기 넘쳤다.

응? 생기가 넘치다니?

잡혀온 뒤로는 항상 세상이 끝난 듯 어둡고 우울한 표정이었는데...

수상쩍음을 느낀 장정은 이내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허리춤에서 방망이를 꺼내며 윽박질렀다.

“뭐야? 니들......지금, 장난 한 거야? 허! 이것들이 상품이랍시고 오냐오냐 해주니까 네년들의 처지를 잊었나 본데. 어디 한번 맛 좀 보여줄까? 한두 명 정도 안 팔아도 우린 손해 아니거든. 누구를 굴려줄까? 조리돌림 한번 당해 볼래?”

“이 짓 한 년 누구야. 빨리 나와!!”

장정들이 허리춤에서 몽둥이를 꺼내 들더니 나란히 앉아있는 여자들에게 성큼 다가가 몽둥이를 높이 들며 내리칠 듯이 겁을 줬다. 누가 이따위 짓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치도곤을 내주마. 아니, 저 연기는 또 어떻게 낸 거야?

그때.

나란히 앉아있던 여자들 중에 평소 눈여겨 뒀었던, 눈물점이 참 예쁜 여자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오싹 소름이 돋은 장정들은 뭔가 꺼림칙한 기분에 뒷머리가 바짝 섰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이년들이 우습게 본다.

“아니 이 년이 웃어?......어......?”

“뭐야?”

흉흉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려고 다가가는데 등 뒤에서 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뒤 돌아선 장정들은 바로 앞에 서있는 카울을 쓴 남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여자들만 잡아놓은 이곳에 남자가 있었다니. 그것을 이제껏 몰랐다는 것도 기함할 일이었는데 남자의 얼굴이 너무 괴기스러웠다. 창백한 얼굴에 꼭 피라도 마시고 대충 닦은 마냥 입술을 포함한 턱까지 온통 벌겋다.

“누, 누구냐!”

“묻는 말에나 대답해.”

짐승의 울음소리마냥 낮고 거친 목소리에 기가 죽은 장정은 순간 머뭇거렸지만 이내 몽둥이를 들어 올렸다.

자신들은 둘이다. 요행을 부려 밖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밖에는 더 많은 장정들이 있다. 그 장정들을 상대하면서 이 미로 같은 지하를 벗어나난다고? 이놈이 얼마나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는 죽었다 깨나도 어렵지.

“이런 미친놈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 올린 몽둥이를 무영에게 내려치려는데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몽둥이를 든 손이 통째로 피를 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저게 뭐지? 하고 멍하니 보던 남자가 제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목이 싹둑 잘려 벌건 피를 내뿜고 있었다. 꿈인가 싶어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몇 번을 감았다 떠도 마찬가지였다. 제 손목이 맞았다.

“으아아.......으읍, 읍!!”

이제야 느껴지는 까무러칠 것 같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려는데 누군가 뒤에서 입을 우악스럽게 막았다. 잘린 손목을 붙잡고 발버둥을 치는데 크게 벌어진 입안에 억지로 천 쪼가리가 가득 쑤셔 박힌다.

사람의 팔목을 자르고 입을 막은 뒤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 낸 명은 시종일관 무표정 했다. 아니, 무료해 보이기도 했다. 사람의 팔목이 아니라 무라도 썬 마냥 아무런 동요도 없다. 명은 칼을 닦아 칼집에 집어넣고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다시 문 앞으로 가 기대어 섰다.

옆에 있던 동료는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리기는커녕 꼼짝도 못했다. 그저 입을 쩍 벌리고 볼 수밖에 없었다. 어, 어. 하는 순간에 손목이 싹둑 잘리고 입까지 막힌 동료를 바로 옆에서 본 남자는 다리를 벌벌 떨다가 몽둥이를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털썩 꿇어앉았다.

“사, 사, 살려.......”

남자가 울면서 빌던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무영은 카울에 묻은 피를 털며 여상스럽게 물었다.

“너 같은 놈이 몇 명이야.”

“살려......예?”

“쯧. 명.”

남자의 머뭇거림이 마음에 안 든 무영이 명을 부르자 남자가 화들짝 놀라며 무영의 카울에 매달렸다.

“마, 말하겠습니다!! 초, 총 삼사십 명 정도 입니다! 제, 제발......”

“그거밖에 안 돼?”

“사, 상품을 조달하는 지부가 아닌......행사장에는 워, 원래...원래 그렇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어서요.”

하긴, 이런 곳에 손님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일을 벌이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일이라고 해봤자 잡혀 온 여자들의 반항이 다 일 텐데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여자들이 반항을 해 봤자 몽둥이만 들고 위협해도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놈이 거짓을 말하는 건지 매의 눈으로 살피던 무영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겁에 질린 남자가 묻지도 않은 말에 술술 대답했다.

“저......따로 모여 있는 대기실이 있습니다. 이 안에서 지킬 곳은 이 방과 행사장 밖에 없어서...... 거기에 있다가 시간되면 교대하는 형식입니다.”

“음. 그래?”

“예, 예. 돌아다니다가 눈에 띠면 괜한 일만 해야 하고.......필요인원이 아니라면 항상 모여 있곤 하지요. 대기실에 없으면 행사장에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대기실이 어, 어디냐면. 이 방을 나가셔서 오른쪽으로 돌아 쭉 가시면 복도 끝에 나오는 첫 번째 방입니다. 행사장 뒤 쪽이지요.”

남자가 눈치를 보며 처음 들어온 사람이라도 한 번에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내부지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무영이 명에게 고갯짓을 했다.

“명. 횃불을 만들어”

명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천 쪼가리를 길게 찢고 마찬가지로 바닥에 굴러다니던 몽둥이도 집어 들었다. 근육이 굳은 건지 몽둥이 끝을 꽉 잡고 있는 잘린 손을 풀어 던진 뒤 천을 칭칭 감았다. 그리고 벽에 걸려있던 연등 중에 하나를 내려 그 안에 고여 있는 기름을 천에 골고루 묻힌다. 어스름해진 방안에서 횃불이 타오르자 다시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보던 무영이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열쇠”

“예? 어......대기실은 안 잠가 놓는데요......”

“그래서 열쇠가 없다고?”

“아, 아! 아니요!! 여, 여기 있습니다. 여기, 열쇠. 여기 이 열쇠가 대기실 열쇠입니다. 거기 그 파란 끈으로 묶여진 열쇠. 그거입니다.”

아무래도 머릿수에서 밀리니 장정들을 감금하려나 보다. 남자는 가만히 있으면 몸성히 있을 수 있는데 괜히 먼저 나서서 팔목이 잘린 비운의 동료를 흘끗 내려 보았다. 멍청한 놈. 그렇게 나서기 좋아하더니 꼴좋다. 남자는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비유를 맞췄다.

“무, 문이 워낙 튼튼해서 잠가버리면 아무도 못나올 겁니다. 네, 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못 나올 테니 천천히 일 다 보시면 되겠네요. 하하하.”

“입구열쇠는”

“어, 어.....거기 하얀 끈으로 묶인...”

“입구가 몇 개지?”

“두개......”

“두 개뿐이라고? 손목 필요 없나?”

“.....아, 하하하. 제, 제가 지하통로를 깜빡했네요.”

“그건 어디로 연결되어 있지?”

“취루의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고는 했습니다. 저도 사용해 본적은 없는지라......그, 그리고 그 열쇠는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 더. 검은머리 여자의 위치.”

“예? 검은...머리요?”

“몰라?”

“아, 아, 압니다! 유명한걸요. 저, 후, 후원자 분께서 미리 보신다고 하셔서....그, 그 방으로 데려간다고 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위치”

“어.....아! 대, 대기실을 지나 왼쪽으로 두 번 꺾으면 나오는 방입니다. 음...네! 거, 거기가 맞습니다. 특실이라 무, 문이 화려하니 한 눈에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저, 저는 말단 중에 말단이라 아무것도 모르고......억!”

들어야 하는 건 다 들었다. 명은 남자의 쓸 대 없는 말을 더 들어주는 대신 뒷목을 수도로 내리쳤다.

남자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자 명은 문밖을 살폈다. 행사시간인 자정이 다가와서 그런지 사방이 조용했다. 무영은 방 한쪽구석에 식수로 마련되어 있던 물동이를 머리에 들이 부었다. 갈색염료가 물에 씻겨나가면서 본래의 붉은 머리가 점점 드러났다. 갑자기 왜 물을 머리에 쏟고 저러나 싶었던 여자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영이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든 뒤 물기를 손으로 대충 털어낼 때까지도 쳐다만 보고 있던 여자들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태, 태자......전하......?!”

“너희들은 이곳에 있어. 나가면 죽을 수도 있으니. 천으로 문고리를 묶던가 해. 아무도 열수 없게. 뭔가 큰 소리가 나면 그때 알아서 도망쳐. 입구가 잠겨있으면 이거로 열고.”

니들 목숨은 니들이 알아서 하라는 성의 없는 말을 끝으로 무영은 하얀 줄로 묶여있는 열쇠를 분리해 바닥에 던졌다. 무영과 명이 밖으로 나가고 방안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꿇어앉은 그대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소리 없이 일어섰다.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자를 포함한 세 명의 여자가 문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문을 조용히 닫았다. 치마를 찢어 문고리를 동여맨 뒤 몇 번 흔들어 보니 여간해서는 안 열릴 것 같다.

모든 준비를 끝낸 그들은 바닥에서 헐떡거리는 남자와 기절해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치마를 모아잡고 다리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신명나게 밟기 시작했다.

*

복도 끝에 나무로 된 문이 보인다.

무영은 그 앞에 서서 품에서 큼지막한 붉은색 주머니를 꺼내 명에게 건넸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검은색 가루가 가득 들어있다. 만져보니 아주 고운 것이 여자들이나 쓰는 분가루 같기도 했지만 냄새는 전혀 향긋하지 않았다. 약간 시큼하기도 하고 텁텁하기도 한 특이한 냄새가 풍겼다. 이게 뭔가 싶어 명은 가루에 횃불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분진(焚塵)이다.”

깜짝 놀란 명은 주머니를 비추고 있던 횃불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저 분진이 가득 든 주머니는 화연을 찾으면 알림용으로 쓰라고 류 상연이 준 것이다. 하지만 무영에게는 다른 생각이 있었다. 저걸 누구에게 쓰려고 저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많은 수의 적을 한 번에 무력화 시키려면 이것만큼 유용한 것도 없다. 편리하긴 하지만 사용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까다로웠다. 첫째, 장소가 협소해야 했고 둘째, 가루가 공중에 날릴 수 있도록 최대한 넓게 흩뿌려야 했다. 지하에다가 손님도 아닌 경호하는 놈들 모여 있는 곳이라 하니 그리 넓지 않을 것은 보나마나 뻔했지만...... 두 번째가 문제다.

이놈들이 가루를 다 뿌릴 때 까지 잠자코 있을 리가 없을 텐데......어쩐다.

“그것을 가지고 이 방 안으로 몰래 잠입할 수 있겠어?”

도리도리

명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를 건넸다.

하긴......잠입을 하더라도 천장에서 수상한 가루가 뿌려지는데 가만히 앉아 구경하고만 있지는 않겠지. 횃불을 가져 갈 수도 없을 테고.

이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기 위해 횃불까지 만들었지만 쓸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은 한가지였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명, 한명 베어버릴 수밖에. 뭐...그것도 괜찮지. 빠르게 도륙을 내준 뒤 화연을 찾으러 가야겠다.

무영은 명이 돌려주는 주머니를 품안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잠깐......

난 태자잖아?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벼락같이 떠오른 무영은 눈을 빛내며 문을 힘차게 열었다.

*

좁은 방안에는 스무 명 남짓한 남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구질구질한 옷과 주선, 먹다 남은 음식냄새에 싸구려 연초연기, 남자들 특유의 꿉꿉한 채취가 섞여 코를 때렸다. 10년 동안 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은 홀아비의 방에서 나는 그것과 같이 지독해 무영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다들 놀음 패를 돌리고 있거나, 도색서적을 읽으며 킬킬거리거나, 자빠져 자고 있는 중이라 누가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눈치다. 무영은 자연스럽게 방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카울을 걸친 장신의 남자의 등장에 이제야 하나둘씩 무심코 쳐다보았다.

“어......?......어......? 헉!!”

뿌연 연기사이로도 확연히 보이는 붉디붉은 머리카락에 그들은 하나같이 눈을 부릅떴다가 사정없이 비벼댔다. 헛것을 봤나 싶었지만 아니었다. 입이 벌어지면서 물고 있던 장죽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무영은 얼어붙은 그들을 여유롭게 지나 방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에 올라섰다. 그 위에 열을 맞춰 놓여있던 놀음패들이 이리저리 흩어지고 밟혔지만 누구하나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에다 머리까지 굳어 무릎을 꿇을 생각도 못했다. 무영은 경악에 찬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다가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한 주먹 꺼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후-”

사방에 잘 퍼지도록 골고루 불었다. 정성을 다해 불어 날리기를 몇 번. 먼지보다도 세밀한 가루들이 공중에 가득 비산하면서 방안이 점차 희뿌연 가루들로 뒤 덥혔다. 한참동안 그 짓을 하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말리기는커녕 뭐하는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장정들의 머리위로 가루가 수북하게 쌓여 갔다. 조금만 뿌려도 충분할 텐데 무영은 이 건물을 통째로 날려버리려는 건지 주머니에 있는 한 톨까지 탈탈 털었다. 적막한 가운데 홀로 들리던 입 바람 소리가 멎었다. 무영은 탁자 아래로 내려서 문으로 유유히 걸어갔다. 문 앞에 서서 어깨에 내려앉은 분진가루를 툭툭 털어내고 머리를 몇 차례 흔들어 가루를 털어내는 것을 끝으로 그때까지도 말없이 자신을 보고 있던 남자들에게 피식 웃어주면서 손을 옆으로 내밀었다.

남자들 중 몇 명은 무영의 손에 들려진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몇 명은 이것이 뭔지 아는 듯 벌떡 일어선다. 그들의 눈에 맺힌 공포를 마주보며 무영은 손에 든 것을 방안으로 던져 넣었다. 호선을 그리며 방 한가운데로 날아가는 횃불의 궤적에 누군가 손을 뻗으며 소리를 질렀다.

“아, 아, 안 돼!!!”

콰콰쾅-!!

문을 닫고 열쇠로 잠금과 동시에 안에서 폭발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거대한 폭음에 귀가 먹먹하다. 뭔가가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도 들린다. 두꺼운 문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들썩 거렸다. 천장에 금이 거미줄처럼 쫙 가더니 그 사이로 흙과 돌가루가 떨어진다.

바닥을 흔들 정도로 거세게 일어난 폭발은 곧이어 안에 있는 것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열기와 함께 아비규환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첫 번째 폭발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남자들이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몸을 부딪쳤지만 폭발에도 끄떡없었던 문이 열릴 리 만무했다. 노예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일부러 제작한 이 튼튼한 문은 제 값을 톡톡히 해냈다.

명 조차도 그 폭음에 귀를 감싸 잡으며 몸을 움츠리는데 무영은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처절한 비명소리를 음악 삼아 문 안쪽의 지옥도를 상상하다가 몸을 돌렸다. 더 듣고 싶었지만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제 이 소리를 신호로 류 충의 무리들과 밖에 있는 대원들이 움직이겠지. 무조건 그전에 빠져나가야 한다. 무영은 붉은 입술을 비스듬하게 올렸다.

내 것을 찾으러 가자.

*

“하, 하륜......”

“......예......”

“하륜아?”

“아, 예. 말씀하세요.”

다언의 계속된 부름에 손톱을 보고 있던 하륜은 건성으로 대답하다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히 입 맞추는 자신의 모습이 잘생겼냐는 그런 미친 질문을 물어보는 게 뻔했다. 어디, 한두 번 이었어야지.

저 꼴을 보기 싫으면 내가 그만둬야하는데......그 놈에 계급이 뭔지.

하지만,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하륜은 무언가를 떠올리며 비밀스런 미소를 지었다.

“하륜!”

“아, 예! 멋지십니다. 입 맞추는 옆모습 까지도 아주 기가 막히세요.”

“하륜!! 그게 아니고. 이, 이거.......”

아, 왜 자꾸 불러. 쯧......

하륜은 미간을 접으며 다언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섰다.

“다언님!!”

방금 전까지 기절해 있던 여자가 언제 일어섰는지 상체를 세우고 있었다. 독기품은 눈을 하고서 어떻게 숨겼는지 알 수 없는 가느다란 흉기로 다언의 목을 찌르기 직전이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칼 한번 휘둘러보지 않은 초보자 같은데 사실, 저런 멋모르는 초보가 제일 위험했다. 섣부르게 자극했다가 쑥 밀어 넣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다언은 여기서 죽으면 안 돼.

하륜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겨누면서 천천히 다가갔다.

“여자, 칼을 내려놔.”

“......”

이을 악 문 화연은 말없이 비녀의 끝을 다언의 목에 살짝 밀었다. 예리한 칼끝 아래로 핏방울이 죽 흘렀다.

“악! 아파! 아프다고!!!”

바늘로 목을 찌르는 것 같은 아픔에 다언이 죽는다고 소리치며 엄살을 피웠다. 그 바람에 화연이 놀라 칼끝을 조금 더 밀었다. 핏줄기가 한줄기 더 생겼다. 하륜은 다언에게 소리를 질렀다.

“다언님! 말씀하지 마세요! 자극하면 안 된다고요!”

“자극은 내가하는 게 아니고 이 여자가 하고 있잖아! 이거 안보여? 어떻게 좀 해봐!”

“그러니까 제가 평소에 놀지 좀 말고 검술수련이라도 좀 해 놓으라고 그렇게 말씀 드릴 때는 안 듣더니...힘없는 여자하나도 제압 못하고 그게 뭡니까? 휘두를 줄만 아는 그깟 양물 그냥 떼 버리시지요.”

“......야!!”

하륜의 말에 다언이 인상을 팍 찌그리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그 바람에 목에 생채기가 길게 생겼다. 사람의 살을 가르고 지나가는 소름끼치는 그 느낌에 화연이 지래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륜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다언의 어깨를 잡아 끌어당기면서 화연을 향해 칼을 겨눴다.

“다언님, 괜찮으십니까? 여자. 칼 버려!”

화연의 칼날이 멀어지자마자 다언은 벌떡 일어나 면경으로 다가갔다. 목을 보니 꽤 깊은 상처가 나있었다. 한 치는 훨씬 넘어 보인다. 다언은 천으로 목의 상처를 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아! 씁......이게 네 눈에는 괜찮아 보이냐? 아, 엄청 아파!! 이 피 봐! 아까운 내 피!!”

“그러니까 고개는 왜 그렇게 휙 돌리십니까? 주의만 흩트리면서 가만히 계셨으면 제가 알아서 한 텐데...으이그. 그 피 좀 닦으십시오.”

“으으......이거 상처 오래가겠는데? 재수 나쁘면 흉이 질 수도 있겠어.”

하륜은 거울을 보면서 법석을 떠는 다언을 흘기다 아직도 비녀를 꽉 쥐고 있는 화연을 바라보았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몸은 궁지에 몰린 작은 동물 같은데 촉촉한 눈에는 독기가 가득하다. 더 몰아붙이면 스스로 자해라도 할 기세라 하륜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이상 여자의 미래는 이미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날뛰어 봤자 다. 이‘방’을 운 좋게 빠져 나간다고 해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다. 불쌍하긴 하지만 힘이 없는 것도 죄다. 하륜은 텁텁한 입을 쩝쩝거리다 독기서린 여자의 눈을 보고 멈칫했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칼을 내렸다.

“어......눈이......”

눈이 검푸르다. 그러고 보니 머리색도 이상했다. 뿌리부분과 끝부분의 색이 확연히 달랐다. 정수리부터 시작된 변화가 천천히 끝을 향해 번져가더니 금세 온통 검푸르다.

분명히 검은색이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자의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바뀐 게 아니다.

왜 하필이면 바뀌어도 저 색으로 바뀌었을까.

검 푸른색 이라면 환제국의 재상, 그의 혈족을 나타내는 색이 아니던가.

환제국의 재상은 본국에서도 그 성질머리 더럽기로 유명했다. 그 소문은 종전협상 때 재상을 직접 봤었던 외무대신의 입에서 나온 거라 확실했다. 그때 외무대신이 재상의 혈족은 다들 검푸른 색이라고 그랬었는데. 그래서 어두운 곳에서 보면 번뜩거리는 그 눈이 꼭 마귀의 눈알처럼 검은색으로 보여 무섭다고......

에이, 설마......

하륜은 여자를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불길한 마음이 들어 물어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륜은 도저히 떼 지지 않은 입을 열었다.

“호, 혹시.......하하하...... 류가의 혈통은 아니겠지......요?”

“맞아. 그녀는 류가의 혈통이야.”

화연 대신 다언이 대답했다. 자신은 놀라 숨넘어가게 생겼는데 너무도 태연한 말에 하륜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언님!! 이게......이게!!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고 이러십니까! 류 재상이라니요! 임무가 끝날 때 까지는 아무 일도 만들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륜의 절규에 그때까지도 면경을 보며 지혈을 하던 다언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납치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수습을 해? 납치한 놈들 잘못이지. 안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예?”

“하륜아, 하륜아. 진정하고 잘 들어보렴.”

“다언님!!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왜?”

“예?”

“나는 납치된 그녀를 도와주는 은인인데? 이곳에 납치된 걸 우연히 알고 수하 한명만 끌고 혈혈단신으로 납치범 소굴에 뛰어든 의로운 타국의 황......아무튼, 그게 나잖아. 근데 재상이 왜 나한테 화를 내겠어. 그리고......우리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을 걸? 나라가 무너지게 생겼는데 혈족 따위 알게 뭐야. 안 그래?”

“......”

“게다가 납치한 놈들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자진하려는 그녀를 가엾게 여겨 책임을 지려고 마음까지 먹은, 어마어마한 은인인데. 그냥 어마어마한 은인도 아니고 앞으로 지가 모셔야 할, 은인. 나 같으면 내 딸 주고 싶어 안달하겠네.”

“......허......”

“나도 이제 혼인을 할 나이잖아. 적국이었지만 지금은 속국인, 재상의 혈족. 혼인상대로는 괜찮지 않아? 속국에다 재상의 직계도 아니니 정실은 좀 그렇고......아무래도 후구ㅇ......음......첩 정도로는 대우해 줘야겠지. 그렇지?”

“......다, 다언님!!”

하륜은 다언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몇몇 단어들에 화들짝 놀랐다.

너 제정신이니?

기밀이 무슨 뜻인지 몰라?

아니면, 저기 저 시퍼런 눈을 부릅뜨고 너를 노려보고 있는 저 여자가 안 보이는 거야? 그런 말을 하려면 기절이라도 시켜놓고 하던가!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된 마냥 설레발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이 불쌍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 하륜은 가슴이 묵직해 졌다. 어렸을 때부터 뒤를 따라다녔던 지라 알게 모르게 미운 정이라도 들었는지 끝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안쓰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하륜은 착잡한 마음을 숨기며 칼을 틀어잡았다.

“다언님. 죽여야 합니다.”

“뭐?”

“죽여야 한다고요. 우리의 얼굴을 보고 대화를 들은 이상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안 돼.”

“예?”

“내가 다 생각 해 둔 게 있으니 걱정 하지 마. 일단,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 일을 마친 뒤 정리될 때까지 나와 함께 본국으로 잠시 가있을 거야. 당장 나라가 어지러울 텐데 지 자식도 아니고 류 재상이 뭘 어쩌겠어?”

“그건 우리의 생각입니다. 나중에라도 지체 높은 가문의 혈족을 억지로 구금한다며 공식적으로 항의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흠......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걸?”

“예?”

“이미 임신 했을 테니까. 그리고 난, 환 제국...아니지, 그때쯤에는 환국으로 바뀌겠군. 환국의 와ㅇ......흠, 흠.....이 될 테니까. 내가 그러겠다는데 감히 누가 반대한다는 거야?”

“......”

환 제국을 점령하는 동안 시간을 끈다는 거로군. 그 사이에 임신도 시키고.

예초부터 불가능한 계획이긴 했지만 그걸 떠나......그런 쪽으로 머리 한번 참 잘 돌아간다.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죽여주는 게 더 자비로운 것이 아닐까. 아무리 저승보다 이승이 좋다고는 하지만 이건 아니다.

하륜은 입안으로 혀를 차면서 화연을 쳐다보았다. 이 얘기를 고스란히 다 듣고 있을 텐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연의 표정은 겁에 질린 표정도, 혐오스러운 표정도, 분노에 가득 찬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얼음장 같은 얼굴로 비녀만 꼭 틀어쥐고 있을 뿐이었다.

화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던 다언은 그 차가운 표정마저도 마음에 쏙 든다고 생각하며 씩 웃었다.

“자, 이제 대충 들었지? 그러니까 그만 튕기고 그거 내려놔. 예쁜 손으로 그런 거 만지면 못쓴다. 칼 잘못 쓰면 다치는 것 몰라? 어서 내려놔.”

“......”

“너도 나이가 다 찬 거 같은데 혼인 상대로 나정도면 괜찮지 않아? 어디 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거든. 내가. 그리고 돈도 많고. 가문도......흠, 흠. 암튼 후회하지는 않을 걸?”

“......”

여전히 차가운 화연의 표정에 다언이 한숨을 쉬며 달랬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내가 어떤 위치에 있고 뭐하는 사람인지 자세히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누군지 알면 저렇게 뻗대지 않을게 분명한데......대충 눈치는 채지 않았을까. 기대감에 화연을 쳐다보았지만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음......첩으로 들이는 것 때문에 그래?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마. 일단, 첩으로 들어가면 정실 되는 거야 쉬우니까. 다 알아서 올려줄 거야. 나만 믿어.”

여전히 미동도 없는 화연을 보며 대놓고 륜국의 태자라는 것을 알려줄까, 아니면 앞으로 환국의 왕이 될 거라고 알려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드디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우선, 세 가지 말씀드리겠어요.”

“어? 드디어 말하는 구나! 크흑!! 목소리도 너무 예쁘다! 뭔데? 뭔데? 세 가지 말고 서른 가지 말해도 돼. 웬만한 건 다 들어줄게. 흠, 흠. 보기에도 그렇겠지만 내가 능력이 좀 있어. 앞으로는 더 있을 테고.”

"첫째. 보시다 시피 저는 류가의 혈족입니다.”

“알아. 환제국의 검푸른 머리와 눈동자는 류가밖에 없잖아.”

“뿐만 아니라 류 재상의 넷째 딸입니다. 그의 직계라는 거지요.”

“!”

얼핏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환제국의 재상은 적국과의 종전협상에서도 자기 딸 자랑을 하는 희대의 팔불출이라며 외무대신이 투덜거렸었다. 그 재상이 말한 딸이라는 여자가......이 여자라는 말인가? 어렸을 때부터 침상에 누워만 있다고 했는데.....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재상의 직계면 비로 맞아도 되겠어.

가만히 머리를 굴리던 다언은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아 씩- 웃다가 이어진 화연의 말에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둘째. 저는 반려가 있습니다.”

“......뭐?!!”

화연은 여미고 있던 옷깃을 벌려 얼룩덜룩한 목을 살짝 드러냈다. 이제껏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다언의 표정이 사라지더니 무표정하게 변한다. 턱을 꽉 물었는지 근육이 볼록 튀어 나왔다.

“그에게 이미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당신은 저에게서 아무것도 취하지 못 할 겁니다.”

“......”

“셋째. 그래도 저를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하신다면 그건 쓸모없는 짓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죽은 여자는 임신할 수 없으니 데려가 봤자 아무소용도 없지 않겠습니까? "

“......”

억지로 끌려가느니 자진해 버리겠다는 화연의 얼굴에는 한 치의 머뭇거림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강제하려 한다면 저 얇은 칼날을 스스로 목에 밀어 넣을 기세다. 다언 대신 얼굴을 굳힌 하륜이 침음성을 내뱉다가 무겁게 말했다.

“다언님......포기하시지요.”

“......”

하륜은 다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화연에게 다가가 칼을 겨눴다.

“죄송하지만......죽어 주셔야겠습니다.”

하륜의 칼이 높이 들렸다. 화연은 그 궤적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노려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화연의 목덜미만 주시하던 다언은 팔을 뻗으며 외쳤다.

“안ㄷ,”

콰콰쾅!!!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거대한 폭발음이었다. 지하 어디 한쪽이 무너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다언의 외침도 이 엄청난 소음에 묻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무너진 중심을 다잡는 사이 화연은 장의자에서 뛰어내려 침상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륜이 뒤 늦게 화연의 발목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쏙 빠져나가 버린다. 침상 아래로 손을 뻗었다가 따끔한 통증에 서둘러 빼냈다. 손등에 난 붉은 상처 사이로 피가 주륵- 흐른다. 하륜은 욕설을 짓씹으며 침상을 들어 올리려 애써봤지만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지 요지부동이었다.

순간, 천장에 금이 가면서 잔해가 떨어졌다. 흙먼지 정도가 아닌 큼직큼직한 것이 낌새가 수상했다.

이거 무너지는 거 아냐? 아니지......차라리 이렇게 된 거 그것도 괜찮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 이곳을 빠져나가기는 어렵겠지. 빠져나간다고 해도 수도까지 올라가려면 시일 꽤나 걸릴 터. 그때쯤이면 모든 것은 끝나있을 것이다.

하륜은 빠르게 일어서서 다언의 팔을 잡아끌었다.

“다언님!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천장에 금이 저렇게 간 것을 보니 머지않아 무너질 것 같습니다!”

“뭐? 안 돼......그녀도 같이......”

“포기하십시오!! 살리더라도 스스로 목숨을 끓을 겁니다.”

“그래도......”

“다언님!! 그럼 타국에서 무너진 건물에 깔려 허무하게 죽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 저 먼저 나가봐도 될까요? 전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요!!”

“......”

“아, 어서요!! 나가셔야 한다고요! 지하라서 대피할 시간도 적다고요! 우리의 계획을 생각하셔야지요!”

“......”

다언이 미적 거리는 그 사이에도 천장에서 흙과 먼지들이 간헐적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륜은 이런 상황에도 여자 하나 때문에 결정을 못하는 다언을 그냥 죽여 버리고 싶었다.

계획만 아니었다만 진즉에 칼로 베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칼이 저 목으로 들어갈 시간은 아쉽게도 지금이 아니다.

[환제국의 태자를 암살한다.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를 잃은 황실이 흔들릴 때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본국에서는 반란군의 성공을 뒤에서 지원한다.

국정을 다스릴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겸허하게 깨달은 반란군이 속국을 자청한다.

본국은 그 요청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삼황자인 자언을 환국의 왕위에 올린다.]

이것이 첫 번째 계획이었다.

잘 진행되어가는 듯 보였던 그 계획은 언젠가부터 점차 틀어지기 시작했다.

가람지방에서 일부러 일으킨 전쟁에 드디어 환제국의 태자가 참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본국은 잔치분위기였다.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드디어 대업을 이루는 거야! 얼마나 기대를 했는지 모른다.

태자가 피에 미친, 악귀 같은 놈이라는 걸 알면서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다.

혼전을 틈타 암살하려고 해도 어찌나 짐승같은지 멀리서 던진 암기도 족족 피해냈다. 게다가 손속은 말도 못하게 악독하고 잔인해 도무지 곁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전쟁중에도 주변에 아무도 없어 다가가면 오히려 눈에 띠는 웃지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진영 채로 폭파시키려 별짓을 다해봤다. 하다못해 보기만 해도 눈물이 절로 나올 것 같은 여자아이에게 폭탄을 들려 보내보기도 했지만 잘려진 아이의 머리만 되돌려 받았다. 그것도 입에 폭탄이 쑤셔 넣어져 있는.

전쟁이 끝날 때 까지 5년간, 독은 셀 수 없이 썼다. 아무리 센 독을 써도 얼마 후면, 아무렇지도 않게 전장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는...장죽까지 물고... 그놈의 모습에 장군들 모두 뒷골이 오싹했다고 한다.

5년 동안의 성과라고는 가슴을 크게 가로지른 상처를 입힌 것, 그거 외에는 전무하다고 봐야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의 커다란 중상이라 기대를 잔뜩 했던 모양인데 며칠 지나니 그것도 멀쩡해 지더란다.

물자는 물자대로 쓰고 아까운 본국의 젊은이만 죽어 나갔다. 결국, 전쟁을 포기하고 노선을 바꿨다. 하지만 이게 웬걸.......독이 통하지 않는 태자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암살뿐이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몇 번이나 내관으로 위장하여 청룡궁으로 들여보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골라내어 족족 목을 잘라 버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환 제국에 심어놓은 반란군의 수장들까지 서로 국구(황제의 장인)가 될 거라며 사사분열 하더니 갑자기 소식이 뚝 끊겼다.

끈도 다 잘리고 암살도 먹히지 않았다.

결국,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환제국 태자는 협상을 하러 온 자국의 이황자를 아무 이유 없이 잔인하게 죽인다. 이 천인공노한 만행에 분노한 륜국은 선전포고를 하고 떳떳하게 보복전쟁을 시작한다.]

이것이 두 번째 계획이었다.

반란군이라는 패를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면서 삼황자가 내놓은 방법이었다.

전쟁명분도 갖고 황실의 수치였던 망나니도 이 기회에 제거해 버리자는 일석이조의 계책이었다.

계획이 세워지니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협상을 위해 황자가 나간다고 하면 환제국에서도 어쩔 수 없이 황족을 내보내야 한다. 전쟁의 폐해를 직접 보며 평화를 다짐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장소도 일부러 국경과 가장 가까운 가람지방으로 정했다.

처음부터 협상은 없었다. 주기로 약속했던 어마어마한 보상금 또한 일절 생각해본 적도 없다. 다언의 죽음을 시작으로 선전포고가 내려지면 국경 바로 앞, 진을 치고 있는 병사들은 바로 진군할 것이다. 현장에서 억류된 환제국의 태자는 황족인지라 재판으로 넘겨지겠지만......당연히 재판은 열리지 않을 것이고 다언, 자신의 차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환국의 옥좌에는 삼황자 자언이 오르게 될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다언은 여기에서 만큼은 죽으면 안 된다.

무대는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이제 다 된밥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는데.....이 모든 것이 지금 다언의 여자 욕심 때문에 실패하게 생겼다. 류 재상의 넷째여식이라면 삼황자가 환국의 옥좌에 오른 후 회유책의 일환으로 비로 맞이하려는 계획이었는데...그것도 이제 틀렸다.

모든 것이 조금씩 비틀어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갑자기 차오르는 불안한 마음에 하륜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데 다언이 한숨을 길게 뱉었다.

“후......내 것이 될 수 없을 바에는 그냥 죽는 것이 낫지.”

“......예?”

“하륜, 앞장서라. 빨리 빠져나가자.”

“예!”

다언은 침상 아래를 한번 돌아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른 남자의 손만 타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데려갔을 텐데......너무 아깝지만......여자 하나 때문에 대업을 망칠 수는 없다. 앞으로 왕위에 오를 몸인데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지.

다언은 감았던 눈을 뜨며 하륜의 뒤를 따라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침상 아래에서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던 화연은 바닥을 기어 밖으로 나왔다. 천장을 올려 다 보니 정말 금이 많이 가 있었다. 당장 바닥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건물의 무게에 못 이겨 무너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화연은 비녀로 머리를 단단히 틀어 올리고 치마를 걷어 허리춤에 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빠져나가자. 나가서, 나를 애타게 찾고 있을 그에게 가자. 화연은 문을 벌컥 열었다.

“!!”

누군가 열려진 문 사이로 튀어나오는 화연을 붙잡더니 꽉 부둥켜안는다. 몸이 들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악력에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숨이 막혀 저절로 신음성이 나왔다.

몸부림을 치면서 비녀를 뽑기 위해 손을 올리려는 찰나, 깊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하아-”

“!”

이제야 그의 거센 심장 박동이 마주 닿아있는 가슴으로 느껴진다. 등을 동아줄 마냥 부여잡고 있는 그 억센 손길에 눈물이 핑 돌았다.

화연은 고개를 들었다.

황금색 눈동자 속, 그 무엇보다 빛나는 은사가 격렬하게 뒤흔들린다. 그것은 어떤 것보다도 아름다워 화연은 괜스레 마음이 울컥 했다. 금안의 주인공은 화연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숙여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거친 숨소리가 이마에서부터 흐른다.

“찾았다.”

화연은 눈을 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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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특집 용량폭탄!!

하아 하아

털썩-

이번 회에는 풀어지는 내용이 많습니다.

화연의 납치는 무슨 의미를 가질까.

단순한 해프닝일까, 아니면 어떤 사건과 연결이 되어 있을까.

륜국의 실제 목적은 무엇일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다언, 쟤 알고 보면 불쌍하다고.

아...짠내.

사실, 너무 길면 집중이 잘 안되잖아요.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잘 안 나고.

나눌까말까 고민하다가 미리보기는 노블하고는 다르게 한번 구매하면 몇 번이고 읽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냥 합쳤습니다.

대신 차근차근 읽어 주세용!

드디어 100회를 맞이했습니다!!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았던 100회가 왔습니다.

100회라니......크흑!!

독자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중간 중간 상처도 많이 받고 마음도 아팠지만

고비를 넘기고 보니 이제는 그냥 웃음이 나오네요.

여러분 싸랑합니다!!

라라라~ 아우웅~ 기분 조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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