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을 문 짐승-99화 (99/110)

00099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류 충과 그 아들들은 안내에 따라 지하로 내려 왔다.

어둡고 아늑한 그곳은 생각보다 꽤 넓었다. 드문드문 달려있는 연등이 적은 수가 아님에도 전체를 다 밝힐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깨끗하고 넓고 아늑했지만 분위기가 영 희한했다.

가운데에 있는 환한 무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열 몇 개의 앉은뱅이 원형 탁자가 놓여있었다. 탁자주변에 무질서하게 굴러다니는 크고 작은 배연과 천장에서 내려와 하늘거리는 휘장,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향기는 모두 어딘지 모르게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무대 정 중앙쯤에 자리를 잡은 류 충은 주변에 듬성듬성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을 두리번거렸다. 경매시작시간이 아직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장해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나같이 검은 나비를 쓰고 있어 누군지 알아 볼 수는 없지만 류 충은 눈에 쌍심지를 켰다. 나중에 보자. 너희들 모두 가만두면 내가 류 황(류 충의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고 연제의 자식이다. 다시는 이따위 짓 못하도록 그 썩을 놈에 양물들을 싹 다 도려내 주마.

류 충은 혹시라도 알아볼 수 있는 놈이 있을까 싶어 주변을 매의 눈으로 훑어보면서도 손은 바쁘게 움직였다.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장죽의 대통에 고운 가루를 뿌린다. 그리고 깊이 빨아들였다. 쓰디쓴 연기가 입안이 바싹 마르게 하더니 속으로 들어가 쓴 내를 가득 풍기고 되돌아 나왔다. 최대한 연기를 삼키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맵고 쓰고 울렁거리는 통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미간이 천 갈래로 갈라진다. 류 충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꾹 삼키며 작게 속삭였다.

“상아, 이거 어쩌냐......생각보다 너무 넓은데? 이곳을 연초연기로 메우려다 애비 먼저 죽겠다. 지금도 입안에 쓸개라도 물고 있는 것처럼 온통 써서 죽겠어.”

옆에서 뻐끔뻐끔 죽어라 장죽을 피우던 류 강연까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하소연을 했다.

“그래, 어후......목구멍까지 쓰라리고 속에서 쓴물이 넘어오는데. 이거 언제까지 피워야 하냐. 이방법이 소용 있는 건 맞아? 그렇게 연기를 뿜어 댔는데 아까 한조란 놈 봐봐. 말짱  하지 않던? 이렇게 넓은 곳에서 이 방법은 아닌 거 같은데....”

“......그건......연초잎과......섞여 있어서......효과가......휴......”

한숨을 쉬는 류 상연도 지금 죽을 맛이었다. 그 라고 이 짓을 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넓고 숨을 공간 하나 없어 보이는 곳에서 정체모를 풀잎을 쌓아두고 훨훨 태운다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 아니던가.

대원들도 데리고 들어올 수 없는 이 마당에 수면초를 의심받지 않고 피울 수 있으려면 아무리 생각해도 장죽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아 원래의 연초 잎에 섞어 쓸 수 있도록 수면초를 가루로 곱게 빻아 가져왔다. 그리고 장죽을 셋이서 사이좋게 물고오긴 했는데......웬일인지 매운 연기만 엄청 나오고 효과는 반감되었으며 그 맛은 몸서리 처질 정도로 너무나도 썼다.

“하아......이렇게 된 이상 수면초는 포기하자. 저거 가루로 만드는데 들인 노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미리 해독초를 먹었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연기를 들이마시는데 그게 배겨내겠냐? 이러다 우리가 먼저 쓰러지겠어.”

“그래. 상아. 이 장죽은 포기하자. 웬만해야 시도해 보지.”

류 충 말이 끝나자마자 징그러운 것이라도 만진 듯 장죽과 주머니를 탁자에 획 내팽개쳤다. 류 강연도 장죽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나비의 뚫린 구멍에서 한숨과 함께 허연 연기가 같이 나온다.

“아버지. 이곳을 싹 잠재워서 한꺼번에 잡는다는 계획은 포기해야겠네요. 이 방법이 힘도 적게 들고 다칠 위험도 없어 좋긴 한데......어쩔 수 없지요. 상황을 봐서 두 번째 방법을 써야겠어요. 돈은 가져오셨지요?”

“가져오긴 했는데......우리 연이, 괜찮겠느냐?”

“휴......태자전하와 그 명이란 그림자를 믿어봐야지요. 전하께서 잘 해주셔야 하는데......계획대로 먼저 찾으면 다행인데......그 성질을 못 참아 일을 그르치는 건 아닌지 걱정 되네요. 저 수면가루만 태울 수 있으면 좋은데. 아까워 죽겠어요.”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얘들은 잘 도착 했을까? 못 찾으면 어쩌냐. 그냥 따라오라고 할 걸 그랬어.”

“아버지, 얘들 얼굴을 그 놈들이 봤잖아요. 쌍둥이 두 놈도 그렇고 너무 눈에 띱니다. 혹시라도 의심받을 수 있을만한 빌미는 주지 말아야지요. 걱정 마세요. 지금쯤 앞에 와 있을 겁니다.”

그때 장정 두 명이 널찍한 항아리를 들고 와 탁자 앞에 내려놓았다. 항아리 안에서 느껴지는 확연한 열기에 류 충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건......뭔가?”

불끈거리는 팔뚝을 자랑하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말했다.

“향로입니다.”

“향로? 이건......왜?”

“이곳은 지하라 아직까지는 밤에 춥습니다.”

“응?”

전혀 춥지 않았다.

춥기는커녕 열 받은 데다 긴장까지 해서 그런지 약간 덥기도 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류 충에게 남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야 의복을 다 갖춰 입고 계시니 그러시지요.”

“그럼......”

“행사가 시작되면 저희 측에서 시중들 여자를 보내 드립니다. 손님들을 위한 저희의 작은 선물이라고나 할까요. 그때......나머지는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아시지요?”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음흉한 미소를 보내는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던 류 충의 얼굴이 점점 붉어 졌다.

“......서, 선물이 참 과하구먼......알았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남자들의 뒷모습을 보던 류 충은 노기로 핏대선 이마를 꾹 누르다가 똑같이 노기로 붉어진 얼굴을 한 류 강연에게 말했다.

“두 번째 방법은 안 되겠는데. 향로를 탁자마다 다 놔준걸 보니 우리에게 뿐 아니라 다른 놈들에게도 그런....를 준다는 거 아니냐. 연이에게 그런 꼴을 보여줄 수는 없어.”

류 강연은 류 충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다가 돌연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르신! 이렇게 귀한 걸 그냥 나눠주라니요! 이건 난화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같은 무게의 금과도 바꾸지 않을 이것을, 피우기만 해도 천상의 꿈을 보여준다는 이것을 왜 나눠 주나요! 우리만 쓰면 되지요.”

“엥?”

“아, 아. 어르신은 너무 마음이 좋으셔서 탈입니다. 이렇게 비싸고 좋은 것을......그냥 나눠! 주라니......저는 아까워서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류 강연의 커다란 목소리에 주변에 앉아서 작게 속삭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 둘 모이더니 급격한 흥미를 보였다. 행사장 내에 보초를 서고 있던 장정들 까지 관심을 가지고 고개를 기웃거렸다. 류 강연이 과장스런 동작으로 탁자위의 주머니를 잡아 소중한 것인 마냥 품속에 넣는데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저......그게 뭔가요?”

“......알 거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거 있으면 같이 좀 압시다. 뭔데 그러시오?”

류 강연은 멍한 류 충의 눈을 바라보며 괜한 신경질을 부리다 남자에게 얼굴을 바짝 같다대고서 주변을 살핀 뒤 엄청난 비밀이라도 말하는 마냥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이미 모든 사람의 주목이 류 강연에게 쏠려있었기 때문에 그의 작은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어르신 때문에 이게 뭡니까. 이 아까운걸...... 별거는 아니고......난화는 아시죠?”

“당연히 잘 알지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백배(의 수면효과)!”

“헉!! 그런 게 있다고? 처음 듣는데?”

“저도 믿을 수 없었는데......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찾는 거죠. 이게 발견 된지 얼마 안 되기도 합니다.”

“그런 게 발견되었다니.....허 허......헌데, 얼핏 듣자하니 어르신께서 나눠주시라고...”

“저희 어르신께서는 항상 그러시지요. 좋은 게 있으면 꼭 나누려고 하십니다. 저 같은 아랫것이야 잠자코 따르기는 한다지만 아까운건 아까운 거라 말이지요.”

“어르신께서 배포가 아주 크시구먼...흠, 흠. 저......염치 불구하고 좀 써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이쪽으로 관심이 참 많아서 말입니다.”

“......그럼......어르신께서만 사용하십시오. 이곳에 계신 모든 분에게 나눠드리기에는 양도 적고 너무 아까워서 말이지요. 자.....이정도 드릴 터이니 향로위에 골고루 뿌리시면 됩니다. 효과를 더욱 좋게 하시려면 연기를 최대한, 잔뜩 들이마십시오. 난화처럼 말이지요. 처음에는 좀 나른할 수 있으나 걱정 마시고 몸을 맡기세요. 분명히 꿈속으로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오오- 꿈속이라. 그거 좋구만. 이 귀한걸... 고마워서 원. 흠, 흠. 어르신 감사합니다.”

“......응......? 음. 좋은 꿈꾸시게.”

류 충의 대답 아닌 대답이 끝나자마자 너도나도 헛기침을 하며 류 강연에게 주춤주춤 다가왔다. 나비 속, 류 강연의 입술이 쓱 올라갔다.

*

무영은 고개를 숙인 명의 귓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을 보며 카울을 천천히 벗었다.

“헉!!”

카울 안에 있는, 상상하지도 못한 흉한 몰골에 방안에 있던 누군가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성이 흘렀다.

무영은 상체를 옭아매고 있는 거지같은 저고리를 벗어 얼굴을 박박 문질렀다. 곱던 화장이 엉망으로 지워지고 입술에 바른 연지가 주변을 벌겋게 물들이며 번졌다.

점점 귀신같은 몰골로 변해가는 무영의 얼굴에 여인들은 이제 숨도 못 쉬었다.

그 고요한 방안에서 아랑곳 하지 않고 얼굴을 대충 닦은 무영은 치마까지 찢어 벗고 저고리와 함께 바닥에 있는 힘껏 패대기쳤다.

“명”

......

“명!”

......

명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 했지만 무영을 쳐다보는 눈길이 뭔가 어긋나 있었다. 직접적으로 마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보는 것도 아닌, 시선이 참으로 희한했다. 눈동자가 가운데로 조금 모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초점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귓불은 아직도 벌겠다.

웃으려면 웃든가 울려면 울든가. 제 딴에는 그래도 태자라 대놓고 웃을 수는 없어 참으려고 노력하나 본데 그 모습이 더 심사를 뒤집었다. 무영은 당장에라도 폭발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계획을 떠올렸다.

화연과 단둘이 이곳을 먼저 빠져나간다.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해서 이따위 우습지도 않은 변장을 했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자신의 힘으로 몰래 잠입은 가능하지만 막상 화연이 있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찾더라도 들키지 않고 들어오기가 요원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이런 어쭙잖은 행색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연이 애교 섞인 부탁을 한다면 모를까.

류 충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무영은 이들을 소탕한 뒤에 다 같이 손잡고 사이좋게 가람지방까지 갈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류 가의 남자들과 같이 간다면 화연과 손은커녕 같은 자리에 앉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다.

나름대로 신혼여행인데 장인에다 처가식구들까지 죄다 끼고 같이 가는 신혼여행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처음에는 눈이 뒤집혀 이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화연이 가까운 곳에 무사히, 그것도 명이 따라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다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죽일 놈들에 대한 처분은 미뤄 두어도 괜찮을 정도다. 류 충과 그의 아들들이 이놈들을 모두 잡아들이면 궁에 들어가서, 또는 돌아가는 길에 천천히 말려죽이던지 삶아죽이면 된다. 당장의 복수보다는 화연과의 오붓한 여행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것에 비하면 복수는 나중 문제다.

...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을 바꿨다.

류 강연의 말만 믿고 이 꼴로 들어왔지만 화연을 찾기는커녕 평생 겪어보지 못한 수치심만 깊이 남았다. 알몸으로 길거리에 서있다고 해도 지금보다는 덜 창피할 것 같다.

그래......이렇게 된 이상 싸그리 죽여주마. 아주 건물 채로 불태워 버리겠다!

무영은 분노를 차곡차곡 접어 넣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막분 있나?”

끄덕

명이 조용히 일어섰다.

방안에 있던 모든 여인들이 그를 주목했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어쩌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사그라졌던 희망이 점점 살아난다. 여인들은 기대어린 얼굴로 숨을 죽이며 명을 바라보았다.

명은 옷 속에서 주머니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 중 검은 주머니의 내용물을 바닥에 걸레 꼴로 버려져 있는, 크긴 하지만 여자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저고리 소매를 찢어 그 위에 조금 쏟고 희한하게 생긴 검은 돌을 연신 탁 탁 비볐다.

방안이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 졌다.

저 검은 돌 어디서 봤더라......

꼭 부싯돌 같기도 하고......

하하하. 설마.

......헉!!

제일 가까이 앉아 명이 뭘 하는지 호기심과 희망 섞인 눈으로 보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것을 선두로 방안에 있는 모든 여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몸을 벽에 바짝 붙였다.

설마 이 좁은 방안에, 그것도 목재로 만들어진 방안에서 불을 내려고 할 줄은 몰랐다. 납치되어 성노예로 팔리는 것도 싫었지만 산채로 불에 타 죽는 건 더 싫었다.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겁에 질린 얼굴로 어, 어 거리고 있는데 검은 돌에서 불똥 번쩍 튀더니 하얀 가루에 옮겨 붙었다.

졸지에 타죽게 생긴 여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지르려다 명의 손짓에 겨우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연기만 나게 하는 가루였던지 불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삽시간에 방안을 채우는 매캐한 연기로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죽게 생겼다.

명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나는 옷 채로 들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는 여인들을 유유히 지나 문 앞에 놓은 뒤 그 옆 벽에 바싹 붙었다. 무영도 카울을 뒤집어쓰고 명의 반대쪽 벽에 등을 붙였다. 명은 목에 두르고 있던 검은 천을 코 위로 올리며 자신을 마냥 보고만 있는 여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그제야 여인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다 입을 벌리고 이구동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

방안을 정신없이 서성거리며 손톱을 잘근잘근 뜯는다. 그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더니 다시 입에 넣고 손톱을 씹었다. 하륜은 품위는커녕 사내의 진중함은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다언의 그 모습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언님. 앉으시는 게 어떠실까요?”

“왜?”

“좀......정신이 없네요. 왜 그러시는 겁니까? 기대 되서 그러시는 건가요?”

다언은 입안에서 느껴지는 손톱의 잔해를 뱉더니 무슨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 거렸다.

“아니. 전혀 기대 안 되는데?”

“......”

“물론, 지금 내 모습이 겉보기에는 그래 보일수도 있어. 하지만 사실은 아니야. 기대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아.”

“......”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은 헤벌쭉 하게 벌어져 있는데다 얼굴 전체에 빨리 보고 싶어 죽겠다! 라고 쓰여 있다. 청 녹색 눈이 기대감에 반짝거리는데 눈이 부셔서 못 볼 지경이다. 하륜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방안을 서성거리던 다언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의자에 앉더니 등을 기대며 거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

“어때? 이제 내가 좀 긴장해 보이거나, 좀 설레 보이거나, 좀 들떠 보이거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 그렇다는 게 아니고 그렇게 보일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하륜은 달달거리며 방정맞게 진동하고 있는 다언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그러네요.”

“차가워 보이면서 남자다워 보이냐? 권위가 느껴져? 막 안기고 싶고 그래? 당장이라도 몸과 마음을 다 내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 생기냐고.”

“......전 남자인데요. 보시다 시피.”

“말 귀 참......그러니까 니가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말 이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니다. 자신이 여자라 해도 저런 허우대만 멀쩡한, 방탕하기로는 나라 제일에다가 가볍기로는 종이한장정도의 무게를 자랑하는, 저런 바람둥이에게 안기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들지 않았다. 몸 주는 것만 해도 100일 밤낮을 마늘만 먹으며 고민해야 하건만 마음이라니? 누구 인생 망칠일 있나.

안기고 싶다고도 그렇다고 안기고 싶지 않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어 하륜은 침묵을 선택했다. 그런 하륜을 한번 노려본 다언은 고개를 획 돌리더니 벌떡 일어나 커다란 면경 앞에 서서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 됐어! 말을 말자. 그럼, 머리는 어떻게 할까? 깨끗하게 올려 묶을까? 아니야......그냥 푸는 게 낫겠지? 야성적으로 말이야. 아, 근데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려면 단정하게 묶는 것도 괜찮은데. 빈틈없어 보이게. 음....근데 그것보다는 남자답고 거친 분위기가 더 잘 먹 힐거야. 반항적인 거 있잖아. 나쁜 남자 같이. 본국 여자들은 그런 걸 더 좋아했었는데 여기 여자도 그럴까? 하륜. 어떻게 생각해?”

니가 미쳤다고 생각해.

......라고 말할 수는 없어 하륜은 다언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보고 있으면 속만 폭폭하다. 하륜은 손톱 주위에 일어난 거스러미를 떼면서 성의 없이 말했다.

“그럴걸요?”

다언은 면경 앞에서 머리를 올렸다가, 풀어 헤쳤다가, 옆으로 모았다가, 뒤로 쫙 쓸어 넘겼다가 하면서 아주 수선을 피웠다.

“나는 이마가 예뻐서 훤하게 드러내는 게 훨씬 낫다고 그랬었는데 말이지. 머리는 그냥 반 정도만 묶고 몇 가닥 늘어뜨릴까? 뭔가 분위기 있게. 응?”

“그러시던 가요.”

요즘 이래저래 신경 쓸 것도 많고 바쁘기도 바빠 손톱 깎을 시간도 없었고만. 많이 자랐는데? 어느새 꽤 자라난 손톱을 보다 하륜은 주변을 살폈다. 여기 손톱가위가 있나 모르겠네.

“나 오늘 괜히 검은색 옷으로 입고 왔나봐. 나비랑 색깔 맞추려고 입고 온 건데......그녀 앞에서 나비를 벗는 것 까지는 생각을 못했어. 아. 난 하얀색이 제일 잘 어울리는데. 어떻게 하지 하륜?”

“그러세요.”

“......”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대답에 다언은 면경 속에 비추어지는 하륜을 보았다. 제 손톱을 자세히 보면서 손가락을 폈다 구부렸다 하는 게 자신의 말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다언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 졌다.

지금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하륜. 그냥 홀딱 벗고 있을까?”

“예, 예. 그렇게 하시는 것도 좋겠네요.”

“......”

손톱가위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하륜은 곧 면경 안에서 자신을 주시하고 있던 다언의 싸늘한 시선과 마주쳤다. 가위를 찾아 헤매던 몸을 바로하고 마치 엄청나게 심사숙고한 것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들 안어울리시겠습니까 마는, 지금 입으신 검은색 의복이 다언님의 남자다우시며 야성적이신 동시에 정제되어있는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어 주지요.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그래?”

“옙.”

다언의 시선이 거두어지고 하륜은 몸을 비스듬하게 돌리며 입을 씰룩 거렸다. 하등 쓸모없는 일에 뭐 저리 유난을 떠는지. 어차피 그 여자의 입장에서 다언은 성노예를 구입하려는 변태, 아니면 납치법과 한패이며 성노예를 구입하려는 변태, 그것도 아니면 성노예를 구입하려는 변태로 납치범에게 납치를 의뢰한 나쁜 놈일 뿐일 텐데. 아무리 잘생겨 봤자, 어떤 좋은 옷을 입어 봤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하륜은 철들면서 부터 의례 그래 왔듯 침묵을 지켰다. 자신이 맡은 일은 다언의 몸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언의 행동을 간섭하는 것은 자신에게 허락 된 일이 아니다. 간섭한다고 고칠 사람도 아니고. 여렸을 때부터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정립된 생각이었다.

하륜은 머리를 비녀로 틀어 올렸다 내렸다 하는 다언을 보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똑똑-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다언은 재빠르게 나비를 뒤집어썼다. 그가 나비를 쓰자마자 문이 열리며 어깨에 여자를 둘러맨 장정이 들어섰다.

“나으리, 주문하신 상품 데려왔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던 행동은 다 어디로 갔는지 관심 없다는 듯 새침을 떠는 다언을 대신해 하륜이 고개 짓을 했다.

“거기 내려놔.”

“예. 저......”

장의자에 여자를 내려놓은 장정은 바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뭔가?”

“탐호님과 지부장님께서 뵙고 싶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만......”

다언을 쳐다보았지만 돌아선 채로 이쪽은 보지도 않는다. 하륜은 솟아오르는 짜증을 달래며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벌써부터 볼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목소리까지 묵직하게 깔고 무게를 잡는 다언의 말투에 하륜은 고개를 돌려 장정을 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필요 없으시다는 군.”

안 나가고 뭐하는 듯 물끄러미 쳐다보는 하륜에게 장정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그, 후원에 대해서 상의드릴 말씀이 있다고......”

장정의 말에 하륜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그렇다는 데요?”

“아직 내가 주문품을 확인도 안했는데 성급하군.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효가 된다는 거 모르나. 확인이고 뭐고 그냥 모두 없었던 일로 해줄까? 난 그래도 상관없는데.”

“들었지? 그대로 전해드려.”

“예......”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을 나가려는 장정을 다언이 불러 세웠다.

“그보다.”

“예?”

“아직... 흠, 흠...정신을 못 차린 건가?”

뭘 말하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장정은 여자를 가리키는 하륜의 눈짓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약이 조금 독했나 봅니다. 체구가 워낙 가늘어서 말이지요. 이제 깨어날 때 다 됐습니다.”

“뭐? 조심 좀 하지!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쯧.”

“에......예?”

장정은 갑작스런 다언의 타박에 어리둥절했지만 하륜의 눈짓을 받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장정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다언은 화연에게 다가갔다. 면경 안으로 비치는 그녀의 모습만으로 가슴이 쿵덕거렸다. 다언은 쓰고 있던 나비를 벗어버린 뒤 화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조심스럽게 두건을 벗겼다.

처음 눈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 지워지지 않던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드러났다. 비록 눈은 감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녀가 맞았다. 말없이 감상하던 다언은 씩 웃으며 화연의 얼굴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 하나를 살짝 들어 옆으로 치웠다.

“......하륜. 내기는 내가 이겼어. 그렇지?”

저번에 준 그 초상화와 비슷하긴 했다. 선녀보다도 곱던 그 초상화를 보고 코웃음을 쳤었는데 실물로 보니까 좀 과장이 섞여있긴 했지만 다언이 왜 그동안 애타게 찾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륜은 어차피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괜스레 입맛이 썼다. 마음이 좀 착잡하기도 하고 기분이 편치 않았다.

“...좋으시겠네요.”

“그다지.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이 여자가 아니었더라도 상관없다고.”

여자의 얼굴에서 눈이라도 떼고 말하던지.

아니면 그 양쪽으로 벌어져 찢어질 것 같은 입술 좀 내리고 말하던지.

하륜은 저번에 본 그 만만치 않아 보이던 남자를 떠올렸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생각하다 내 막막한 앞길이나 생각하자 싶어 고개를 내젓다가 예상치 못한 다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기분이 좋으니 그 칼은 너 줄게.”

“......감사합니다.”

어지간히 좋은가 보다.

내기를 그렇게 했는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졌을 때에도 잘 안주던 내기 상품을 이겼는데도 그냥 주다니.

칼을 얻었음에도 탐탁지 않은 하륜의 마음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엄청나게 감동스러운 다언은 화연의 볼에 흩어져있던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뒤로 넘겨준 뒤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의 느낌에 손끝부터 저릿 거렸다. 달큰한 향기도 풍기는 듯하다. 웃음이 나오면서 한숨도 같이 나왔다.

빨리 눈을 떴으면 좋겠다. 그 커다랗고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웃어준다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이제, 그 눈동자는 나만의 것이 되는 거겠지. 그것은 내가 가진 그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울 것이다.

다언은 엄청난 보물이라도 손에 넣게 된 마냥 가슴이 벅차올랐다. 화연의 볼을 쓰다듬던 손가락은 이내 위치를 옮겨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운 긴 속눈썹을 쓸었다. 그러다 콧등을 거쳐 입술로 점점 내려갔다. 도톰한 붉은 입술 위를 손끝으로 조금 눌러봤다. 참 매끈하고 말랑하기도 하다. 아무것도 발라져 있지도 않고 먹음직스런 윤기도 없었지만 이제껏 맛보았던 어떤 여인의 입술보다 맛있어 보였다. 다언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눈을 감았다.

하륜은 정신을 잃은 여자에게 입술을 가져다대는 다언을 보다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훽- 돌렸다. 정신이라도 차리면 하던가. 저게 뭐하는 짓인지.

화연은 인중 위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살며시 눈을 떴다. 눈을 꼭 감은 금발의 남자와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맨질맨질 했던 화연의 볼에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지나친 혐오감과 과도한 긴장감에 온몸이 싸늘하게 굳는 듯 했다. 화연은 숨을 멈추고 소매 안에서 명이 가르쳐 준대로 잡고 있던 비녀를 소리 없이 꺼내들었다. 남자의 입술이 제 입에 채 닿기도 전, 비녀를 뽑아 그의 목을 향해 칼끝을 들이 밀었다.

감미로운 입술의 감촉을 기대하고 있었던 다언은 별안간 목에서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눈을 떴다. 자신의 눈앞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져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헌데, 이상했다. 뭔가 달랐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피던 다언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이 담겨있었다.

“어......어......?”

눈동자가 짙고 짙은 검은색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저 깊은 바다와 같이 시리게 검푸르고......이루 말할 수 없이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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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용량 폭탄.

하아......

리트머스종이님 꽃짐은 이북으로 나옵니다. ^^

najoo님 그건 저도 잘몰라서 일단 조아라 측에 문의해 뒀습니다. 답변이 오면 쪽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헌데....설마 이중으로 돈을 내진 않겠지요. 상식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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