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저녁 무렵, 어김없이 명의 밀서를 받은 연제는 심드렁했다.
읽을 수도 없는 놈에 것 봐서 뭐하냐.
속만 터지지.
연제는 명의 밀서가 도착했다는 것을 보자마자 한쪽 구석으로 몸을 숨기려는 진 내관에게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진 내관.”
“......예, 폐하.”
“뭐해? 안 가져가고.”
“......예.”
진 내관은 처음 밀서를 받은 그날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괴롭히는 연제를 딱 한 대만 제대로 때려주고 싶었다. 오늘은 또 무슨 해괴한 글...을 빙자한 괴상한 그림을 그려 보냈을까....생각만 해도 가슴이 묵직해지고 체기까지 느껴지는 듯 했다.
진 내관은 최대한 느리게 걸어 밀서를 받고 돌아서면서 한숨을 쉬었다. 생각 같아서는 박박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고. 하여튼 입이 왠수지......진내관은 자신의 입을 원망하며 돌돌말린 밀서를 폈다.
“.....!!”
평소와 같이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이 아니라 어리둥절하고도 놀란 표정인 진 내관의 얼굴을 보고 연제는 피식 웃었다.
“뭐야?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발로 썼든? 그럴 바에는 그냥 암호로 적던가. 쓰지도 못하는 거 왜 아득바득 글로 적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하여튼 그림자의 생각은 알 수가 없어.”
“그, 그것이 아니오라......폐하......이것 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심드렁했던 연제의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서궤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받친, 전혀 품위 없던 자세를 바로 하고 눈을 빛냈다.
“왜? 오늘은 읽을 수 있어? 뭐라고 썼는데? 이 놈 이거 드디어 글을 좀 배웠나? 어디서 배웠지? 줘 봐! 아, 어서!”
진 내관은 겁먹은 표정으로 후다닥 다가가 연제에게 밀서를 올리고 다시 후다닥 물러났다. 어딘가로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자룡궁 구석에서 눈을 꽉 감고 귀를 꼭 막았다.
연제는 밀서를 받자마자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짧았지만 순간 무슨 말인지 접수가 안 된 연제는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화색을 띄던 그의 얼굴이 점점 무표정하게 굳더니 이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화양주
화연 납치
-무영
밀서를 잡은 연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언젠가 그랬듯이 서궤가 부서져라 내리친 연제는 벌떡 일어나 자룡궁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기로 붉어진 황제의 용안에 다리가 풀린 진 내관이 자룡궁 바닥에 철퍼덕 엎드려 벌벌 떨었다.
“감히......감히......감히!!! 내 며느리에게 뭐가 어쩌고 어째?!!!”
“폐, 폐하.....고, 고정......”
“내 이것들 모두 육시를 내주마!!! 사지를 갈가리 찢어 죽여주겠다!!! 당장 화양주가 속한 현 뿐 만아니라 그 주변 가문......아니지, 병부상서를 비롯한 모든 신료들 모두를 불러들이고 군총부 장군들 다 집합시켜!!! 환제국 최대의 위기라고 전해라!!! 지금 당장!! 어서!!!!!”
*
기절했다가 일어나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화연의 소식을 들은 기해는 탈진할 정도로 눈물 콧물을 흘렸다. 한참동안이나 화연을 부르며 대성통곡을 하던 기해는 류 강연의 종용으로 겨우 정신을 차리더니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그 잡아 죽일 놈들을 향해 쌍욕을 퍼부었다. 바싹 올라간 눈 꼬리에는 눈물이 아니라 시커먼 독기가 가득 맺혀있었다. 하지만 불량배 저리가라 욕을 퍼붓는 거친 입과는 달리 손길은 부드럽고 바쁘게 놀리는 중이었다. 그 옆에 바짝 붙어 선 류 강연은 진중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여기저기 수정할 곳을 지시하고 있었다.
“거기를 좀 더 진하게 해봐. 색깔이 그거 밖에 없어? 좀 진한 거 없어? 뭐 이렇게 다 흐려?”
“도련님, 정말 뭘 모르시네요. 무조건 진하게 한다고 해서 좋은 줄 아세요? 이정도가 딱 좋다고요.”
“그래도 여기를 이렇게......”
손가락 끝에 연지를 묻히던 기해가 손을 획 내리더니 류 강연을 신경질 적으로 노려보았다.
“아! 자꾸 옆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실 거면 저리 좀 가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언제 해보기나 하셨어요? 제가 우리 아기씨 어떻게 꾸며드리는지 못 보셨어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아는 척은......”
“야, 연이는 원래 본판이 예쁘잖아! 그리고 원래 이런 건 남자가 더 잘 보거든? 내 눈에 괜찮아야지 다른 사람 눈에도 괜찮을 거 아냐. 좀 더 화려하게 해봐, 막 색기 줄줄 흐르게.”
“제가 보기에는 지금도 괜찮구먼 왜 자꾸 그러시는 건데요? 너무 그렇게 하면 색기가 아니라 촌티나 싼티가 흐른다고요! 지금 무슨 술집 작부 만들일 있어요? 트집 좀 그만 잡으시고 그거나 이리 주세요!”
기해는 류 강연에 들고 있던 카울을 잡아채어 무영의 넓은 어깨에 걸쳐준 뒤 앞을 꼼꼼히 여몄다.
“아......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맞는 옷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너무 아쉽네요. 하긴, 이 몸에 맞는 옷을 쉽게 구할 수도 없었겠지만......그러니까 카울은 웬만하면 벗으시면 안 됩니다. 어르신께서 그 놈들에게 미리 언급은 하겠지만 혹시라도 벗으라고 한다면 그 눈으로 확 노려봐 주세요. 그 무시무시한 기운을 가득 담아서요. 아셨죠? 자 일어나 보세요.”
“......”
카울을 걸친 무영은 천천히 일어섰다.
류 충의 얼굴이 못 볼 것이라도 본 마냥 와락 일그러졌다. 류 상연은 말없이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획 돌렸다.
“아들......꼭 이렇게 까지 해야겠느냐? 이건 너무......”
“아버지, 저를 믿어 보시라니까요. 그래도 꽤 괜찮지 않나요?”
“아니......얼굴이야 본판이 있으니 그렇다 치는데...... 옷까지 저렇게 입힐 필요가 있느냐. 너무나 보기 흉측하구나.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몰골 아니겠느냐. 아무래도 이거 안 통할 거 같은데......정말 상국 부족 중에 이렇게 커다란 여인들이 있다는 게야?”
“옷은.....혹시라도 카울을 벗길 수 있으니 그렇지요. 그리고 상국은 원래 남자들 보다 여자들의 등치가 크지 않습니까. 그 왜, 창이 형님에게 목매는 상국 공주,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그 공주도 등치가 곰 만하다고 하지 않던가요. 힘도 엄청 세다고 하더라고요. 한번 손목을 잡히면 옴짝달싹도 못한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당한......흠, 흠. 아무튼 거기 부족 중에 이렇게 등치 큰 여인들만 사는 부족이 있다고 했습니다. 창이 형님께서 말씀해 주신거니 확실한 거죠.”
“그래? 뭐 그런 부족이 다 있다냐. 근데......아무래도 이거 내 수준을 너무 우습게 볼 거 같은데. 상아, 안 그러냐?”
“......아......씨......”
웬만하면 인상 쓰는 일도, 신경질을 부리는 일도, 거친 소리를 하는 일도 없는 류 상연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만큼 지금 무영의 몰골은 영 봐주기가 힘들었다.
저 검은 카울 안에는 가백을 달달 볶아 급하게 공수한 펑퍼짐한 아낙네의 옷이 무영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었다. 비록 어깨와 가슴이 금방이라도 찢어질듯 했지만, 팔목과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 있어 아낙의 옷이 아니라 여자아이 옷을 입은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튼 얼추 맞기는 했다.
갈기 같던 붉은 머리카락은 차분한 갈색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는 고운 분칠이 되어있었고 볼은 발그스름하게 변했다. 붉었던 입술은 더욱 붉어졌고 표면에는 뭘 발랐는지 반들반들 윤기까지 흘렀다. 눈두덩이 에는 반짝거리는 진주가루와 꽃잎이 섞인 연한 빛깔을 자랑하는 가루가 발라져 있었는데 그것이 깊은 눈매를 더욱 고혹하게 만들었다. 살짝 올라간 숱 많은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면 그 눈매에서 사람을 홀리는 기운이 줄줄 흘렸다.
얼굴만 봐서는 깊은 눈매를 자랑하며 고고한 염태와 은근한 색기를 풍기는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저 잔 근육으로 이루어진 장신의 몸에서 폭풍같이 뿜어 나오는 살기만 없다면.
정성들여 고운 화장을 한 무영의 얼굴은 일견 무표정 해 보였지만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심지어 기해까지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무영은 분노의 칼춤을 추기 직전이다.
맞지도 않는 여자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 무영은 실제로 칼을 덜그럭 거리고 있었다.
무영의 옆에 가까이 있던 기해와 류 강연은 그 덜그럭 거리는 소리를 듣고 무영의 공격범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칼을 잡아 빼려다 결국 포기하고 신경질 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려는 무영에게 기해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기해는 류 강연 뒤에 숨어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전하! 머리 만지시면 안돼요!! 그거 잘 지워지니 만지지도 마시고 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머리에 물이라도 떨어지면 단박에 표 나요. 땀도 흘리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어디 비비셔도 큰일 납니다!”
“......”
손을 내리고 입술을 즈려 물려는 무영에게 기해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전하! 기껏 칠해 놨는데 입술 다 지워지잖아요! 물지 마세요!”
“......젠장!!”
“전하! 여인이 그런 거친 말을 쓰시면 어떻게 해요? 조신하셔야지요. 그럴 바에는 그냥 말을 하지 마세요. 목소리도 너무 거칠고 낮으니 차라리 그게 낫겠네요.”
“......”
방금 전까지 자신의 입으로 내뱉던 걸쭉한 쌍욕은 기억에서 사라졌는지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며 무영을 나무란다.
무영은 눈을 꼭 감아 화를 참으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다리 모으시고 앉으세요! 아무리 속에 바지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여자가 그게 뭐예요. 보기 흉해요.”
“......”
무표정한 무영의 얼굴에 퍼런 귀기가 서렸다.
화연이 남장하기를 왜 그렇게 싫어했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남자는 남장은 여자는 여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내가 왜 이 꼴을 해야 하지?
연이가 어떤 고초를 당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변장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그것도 여장을!!!
이 상태로는 잠입에 성공을 해도 문제다. 이 꼴로 어떻게 연이를 본단 말이냐!!!
결국 무영은 벌떡 일어서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입고 있는 카울과 이 거지같은 옷을 사정없이 패대기치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는 회생할 수 없도록 조각조각 난도질 하려고 맘먹었다. 그리고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류 충이 다가와 어깨를 짚었다.
무영을 보는 그의 표정은 뭔가에 감동이라도 한 듯 했다. 귀신의 그것 마냥 잔뜩 충혈 된 눈동자는 축축이 젖어 있었고 잔잔하게 흔들리며 온화한 기운을 풍겼다. 류 충이 이렇게 따사롭게 무영을 쳐다보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하, 전하께서 우리 연이를 이렇게 깊이 생각하시다니 소신은 한편으로는 참 감개무량합니다. 이런 볼썽사나운 꼴도 마다하지 않으시다니...제가 전하를 그동안 조금 오해 했었나 봅니다. 아무리 우리 연이를 마음에 두셨다 하더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꼬락서니는 당연히 거부하시면서 칼부림을 내실 거라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참아주시다니......소신은 정말, 정-말 감동스럽기 그지없습니다.”
“......”
볼썽사납고 어처구니없는 꼬락서니를 한 무영은 칼집이 부서져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반쯤 빠져나왔던 칼이 스르륵 칼집으로 몸을 숨겼다.
힘없이 자리에 털썩 앉은 무영의, 여인의 그것보다 곱디고운 앵두 같은 입술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카울만은 절대 벗으면 안 되겠구나.
무영은 카울의 앞섶을 꼭 부여잡았다.
*
한조는 자기보다 한참 위에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젖혔다. 깊이 눌러쓴 모둘에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살갗이 따끔따끔한 것이 몸을 사리게 만드는 기운을 풍기는 남자였다.
“저......어......출입은 세분만 가능하신데......이, 이 ......분은......”
류 충은 입에 물고 뻐끔거리던 장죽을 힘껏 빨아들여 그 연기를 한조에게 후- 뱉었다.
“내 첩.”
“예? 콜록, 콜록......첩......? 첩이라고요? 그, 그럼, 이분이 여자란 말씀이신가요? 정말요? 여자?”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을 동그랗게 뜬 한조는 남자, 아니 남자 같은 여자의 모둘 안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리 예쁘다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저 광활한 어깨 좀 보라지. 내가 올라타도 남겠네 그려. 등판에서 노름을 해도 될 정도야. 여자 보는 취향이야 각자 다르다고는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여자가 맞긴 한 거야?
류 충은 한조의 눈빛에서 의심을 읽고 류 강연에게 턱짓을 했다.
“모둘을 넘겨주어라.”
“......제가요?”
“그럼, 애비가 하리?”
“......예”
류 강연은 무영의 뒤로 돌아가 멀찍이 서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아슬아슬하게 모둘 꼭지에 닿았다. 류 강연은 모둘 꼭지를 잡아 내린 뒤 재빠르게 뒤로 몸을 날렸다.
모둘이 벗겨지고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께름칙하던 한조의 눈이 멍하게 변했다. 하얀 얼굴에 깊은 눈, 붉고 반질거리는 입술은 딱 여인의 그것이었다. 내리 깔고 있는 속눈썹은 어찌나 길고 풍성한지 깜빡거리면 바람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염태와 색기가 공존하는 그런 여인으로 얼굴만 보고 있어도 절로 입이 벌어졌다.
“와......”
이, 이정도면...데리고 살만도 하다.
의외로 재상은 몸매보다 얼굴을 엄청 따지나 보다.
한조가 무영의 얼굴을 보며 말을 잇지 못하자 류 강연 입에 물고 있던 장죽을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를 정도로 깊게 빨아들인 후 연기를 내뿜었다.
“후- 어때? 예쁘지? 등치가 좀......그렇긴 하지만 얼굴은 죽이잖아. 안 그래?”
“콜록 콜록! 그렇긴 하지만......첩......이셨다고요? 쿨럭. 그런 말씀은......”
“왜? 우리 아버지 처...흠, 흠...첩이라는데 뭐 문제 있어? 너한테 다 알려 줘야해? 저기, 저, 상국에서 데려와서 몰래 숨겨 둔거야.”
“어, 예......근데, 첩을 여기까지는 왜 데려오신 건지......아무리 첩이라고는 하나 같이 들어가는 건 안 되시는데요.”
첩이란 단어가 나올 때 마다 무영의 앙 다문 턱 근육이 실룩거린다. 여기서 더 미적거리다가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분노의 칼춤을 보게 생겼다. 무영의 안색을 살피던 류 강연은 서둘러 말을 꺼냈다.
“니들이 사.”
“예?”
휘둥그레진 한조의 얼굴에 류 강연이 장죽을 깊게 빨아들였다가 후- 내뱉었다.
“저 여ㅈ...여ㅇ....저 사람, 니들이 사가라고. 등치는 좀 있지만 저만하면 예쁘잖아?”
“아, 아니......켈록 켈록.....!! 아우...”
매운 연기에 기침하는 한조에게 류 충이 가까이 다가가 얼굴 바로 앞에서 연기를 뿜었다.
“후우- 나도 양심이 있으니 많이 받을 생각은 없어. 알아서 적당히 쳐주게. 내 체면도 있으니 적당히. 알겠는가?”
“예? 자, 잠......컥컥!! 쿨룩, 쿨룩!! 아이고.”
류 강연이 연기를 뱉으면서 어깨를 짚었다.
“우리한테 잘 보이면 니들도 좋을 거 아냐. 안 그래? 후우우-”
“그, 그건....그렇지만....쿨룩 쿨룩!! 저, 저기 장죽 좀......”
“아무튼 니들이 사. 그리고 저 카울을 웬만하면 벗기지 마라. 저거 벗기면 죽어라 안 떨어질 거다. 저 여...흠, 흠...사람이 살던 곳은 카울을 벗기면 3년 동안 같이 살아야 한다는 전통이 있대. 우리 아버지도 그 것 때문에 코 꿰였거든. 같이 살고 싶으면 벗기던가.”
“예? 아니, 그게 무슨......컥, 컥......아이고.....이 연기 좀......”
“그래도 말은......잘 들을 거야. 보기에는 저렇게 보여도......야, 얌전해. 아, 아주 고분고분하지. 바, 밤일도......자, 잘하고......근데 여기 입구가 몇 개지?”
“예? 갑자기 무슨......콜록 콜록 콜록!! 오메.....컥.....켁켁......두개요......나으리, 장죽 좀.....”
“우리가 들어가는 입구 말고 또 있어?”
“케엑!! 어이구 눈 매워!! 하, 하나는 상품이 들어가는 문......하이고 나으리. 컥, 컥. 흐흡.....”
“어디에 있는데?”
“뒤쪽......켈록 켈록. 아우, 나으리!”
입구에 대해서 집요하게 묻는 류 강연이 수상할 법도 한데 한조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첩이고 뭐고......한조, 그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연초향기가 이렇게 독하냐......이걸 무슨 맛에 피우지? 꼭 쓰디쓴 약초를 태우는 것처럼 연기가 맵고 썼다. 매운 고추를 눈에 비빈 것 같아 눈조차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한조는 눈물을 주륵 주륵 흘리다 손을 저었지만 자신을 양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류 충과 류 강연 때문에 연기는 흩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얼굴에 모여들었다. 기침이 절로 나오고 눈물이 줄줄 흘렀다. 게다가 다른 연초 같지 않게 연기도 엄청 나온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바쁘게 손을 휘휘 젓는 한조에게 류 상연이 성큼 성큼 다가가 코 바로 앞에서 연기를 훅 쏟아 부었다. 한조는 따끔거리는 눈을 부여잡으며 기침을 거하게 했다.
“컥!! 콜록, 콜록, 콜록!! 어이고!! 나으리......저 죽겠습니다요. 컥 컥. 쿨럭, 쿨럭, 쿨럭!!”
“죽어”
“......콜록......”
취루에 나타난 류 재상과 그 아들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하나같이 장죽을 입에 물고 나타났다. 객사에서 봤을 때에는 장죽은커녕 연초냄새도 안 났었는데 왜 갑자기 저러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어디서 등치가 산만한 여인네를 데리고 나타나서는 첩이었다며 다짜고짜 막무가내로 사란다.
곱긴 참 곱지만 저 등치로는 잘 안 팔릴 텐데......사봤자 손해 볼 것이 뻔했다. 하지만 한조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세모꼴로 빈틈없이 둘러싸고 쉼 없이 연기를 뱉는 류가의 남자들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어째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것도 같다.
후원자가 될지도 모르니 가능한 한 모든 요구를 들어주면서 최고로 대접하라는 탐호의 말을 되새기며 눈물을 닦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리던 한조는 취루 옆 하얀 건물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에게 눈짓을 보낸 뒤 류 충과 그의 아들들을 들여보냈다.
류 가(家) 부자들은 무영의 얼굴을 흘끔흘끔 보다가 도망치는 것처럼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사실, 뛰어들어 갔다기 보다는 무영의 살기에 밀려들어 갔다는 게 맞았다. 그러고 나서도 그들의 장죽사랑은 끊이지 않았다. 나비를 쓰고 암호를 알려주는 그 잠시 동안에는 쉴 법도 한데 쉬지 않고 그 독한 연기를 사방팔방 뱉어댔다.
연초피우다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나비의 입 부분에 커다랗게 구멍까지 억지로 뚫어 그 사이로 장죽끄트머리를 집어넣고 입에 문다. 구멍이 어찌나 큰지 입주변이 죄다 보였다. 문지기가 이러면 나비를 쓴 의미가 없다며 누가 알아보시면 어쩌려고 이러시냐고 아무리 말려도 막무가내다. 순식간에 입구는 뿌연 연기로 뒤 덥혔다.
쓰다달다 말도 못하고 고스란히 연기를 뒤집어 쓴 문지기의 얼굴이 옴팡 찌푸려졌다. 남일 같지 않아 문지기를 측은하게 보던 한조는 혼자 멀뚱히 서있는, 처치 곤란한 덩치여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얼굴은 참 예쁜데......
저 놈에 덩치가......
그래도 곱기는 하니 사려는 사람이 있겠지.
응......?
근데,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어디서 봤지? 하고 고민하던 한조는 웬일인지 아까부터 쏟아지는 졸음에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이거고 저거고 졸려 죽겠네.
요즘 너무 피곤했나 보다.
멍청한 얼굴로 눈을 껌뻑거리던 한조는 다시 하품을 하면서 뒷문을 열고 가만히 서있는 무영에게 귀찮은 듯 손짓을 했다. 한조를 따라 어두운 문 안으로 들어가는 무영의 황금색 눈에는 분노와, 분노와,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
화연은 욱신거리는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리니 팔목이 같이 묶여있는지 다른 손까지 따라온다. 더듬거리며 얼굴을 만져보니 부드러운 천의 촉감이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서둘러 머리를 만져보니 자신이 틀어 올렸던 그대로다. 삐죽이 느껴지는 비녀의 감촉에 작게 한숨을 쉬던 화연은 두건을 들어올렸다.
아직도 코끝에 그 지독한 약초 냄새가 남아 있는 듯하다. 눈앞이 핑 돌더니 천천히 시야가 돌아온다.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니 주변이 점차 뚜렷하게 보였다. 어두울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밝았다. 사방이 조용해 혼자 있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주변에는 열댓 명 남짓한 여자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체념한 듯 우울한 얼굴을 잔뜩 수그려 무릎사이에 묻고 있거나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있다. 간간히 침통한 한숨을 내뱉는 그들 사이에 화연은 상체를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입주변이 당겨져 아팠다. 입을 가로질러 묶여있던 천을 느슨하게 하기위해 잡아당기고 있는데 팔목이 묶여 있어서 그런지 잘 되지 않았다. 한참 끙끙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대신 매듭을 풀어준다.
“아.....감사합니......어?”
화연이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서로 다른 색의 선한 눈동자가 보인다. 어디서 많이 보던 사람이다. 그 산지기였다.
“어머! 명.....님이시지요? 여긴 어떻게......”
명은 말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화연은 마주 고개를 꾸벅 숙이다 그의 눈동자를 보니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 같았다. 연우일 때, 그 세계에서도 오드아이는 특별한 존재였다. 여기서는 말 할 것도 없겠지. 저 다른 색의 눈동자 때문에 잡혀 온 거구나......
얼마나 신기했으면 여자들만 잡혀온 이곳에 그 혼자 남자다. 그의 처지를 측은하게 생각하던 화연은 자신의 처지도 같다는 것을 깨닫고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 머리를 한번 털었다.
무영이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대해 자세히 알면 알수록 좋을 테지. 화연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아세요? 저는 화양주에서 잡혀 왔는데......거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가요?”
도리도리
“그럼 가까운 곳이에요?”
도리도리
“응?......그럼......”
“이곳이 바로 화양주예요. 저도 이 근처에서 잡혀왔어요.”
옆에 있던 여자가 듣고 있다 대답해 주었다. 울었는지 부운 눈에 지친 얼굴이었지만 눈 밑에 눈물점이 돋보이는 갈색머리의 미인이었다.
무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화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눈에 힘을 주었다.
무영이 이곳을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찾더라도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게다가 벌벌 떨면서 무서워 해봤자 현재로써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화연은 버릇처럼 반지를 만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였다.
나는 나를 지키고 있으면 돼.
그것만 생각하자.
화연은 반쯤 걸치고 있던 두건을 벗어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비녀를 빼냈다. 그리고 양쪽을 잡고 당기니 한 번도 쓰지 않은 예리한 칼날이 드러났다. 반자 정도 되는 날선 소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화연은 손잡이를 꼭 잡으며 날을 들여다보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이것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누구에게 해를 입혀본 적은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무영, 그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목숨이 다 할 때 까지 그와 함께 살고 싶었다. 이제 겨우 행복해 졌는데 가만히 앉아서 빼앗길 수는 없었다. 화연은 이를 꽉 물었다. 비녀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갔다.
그때, 명이 화연의 손을 잡더니 꽉 쥐고 있던 비녀를 단 번에 빼앗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별 힘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허무하게 칼을 뺏긴 화연은 눈만 크게 뜨고 있다가 뒤늦게 손을 뻗었다.
“왜....왜 그러세요? 안 돼요! 이리 주세요! 그거 주세요!!”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화연이 소리를 높이며 팔에 매달리자 명은 엄격한 표정으로 화연을 앉히더니 칼끝을 위로 향하게 잡아 찌르는 시늉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팔까지 교차하면서 고개를 강하게 젓는 그의 행동에 화연은 흥분을 가라 앉혔다.
칼을 뺏으려는 게 아니었다.
칼 쥐는 법을 가르쳐 주려나 보다.
명은 차분하게 자신이 하는 행동을 주시하는 화연의 손에 칼을 거꾸로 쥐어주었다. 칼끝을 아래로 향하게 쥐어주고 엄지손가락을 비녀 끝으로 옮기더니 꽉 누른다. 그대로 잡고 내려찌르는 시늉을 몇 번 보여주었다. 그러다 한번 혼자 해보라는 듯 손을 떼더니 고개 짓을 한다. 화연은 칼을 잡고 몇 번 아래로 내려찍었다. 뭔가 어색하긴 한데 하다보니까 손에 익는 것도 같았다.
“이, 이렇게 하는 거라고요?”
끄덕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 화연의 모습을 보며 모여들더니 하나둘 참견했다.
“저도 어디서 들은 것 같아요. 그렇게 들어야지 손을 다치지 않는다는...근데 이분은 남자분이신데 이제까지 함께 계신 줄도 몰랐네요.”
“전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몰랐어요. 재주가 좋으신 거 같은데 어떻게 잡혀 오신건지......이 놈들 아주 악독한 놈이에요. 이런 남자 분까지... 다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욕을하며 웅성거리는 여자들 사이에서 화연은 날카로운 눈을 한 명의 주도하에 자세를 익혔다. 한참을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명이 비녀를 뺏어 분리되어있는 부분을 씌우며 머리를 정리하라는 손짓을 한다.
화연은 머리를 다시 틀어 올리려다 말고 비녀를 소매 속으로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명이 소매안의 비녀의 위치를 조정해주고 두건까지 씌워주고 나니 때마침 문 밖에서 잘그락 거리는 열쇠소리가 들렸다. 명은 눈에 띠지 않는 구석으로 가서 고개를 푹 숙였고 그 앞을 가리며 여자들이 둘러앉았다. 화연은 처음 모습 그대로 다시 누웠다.
나무문의 삐걱거리는 소리,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건 쓴 저 여자지? 근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 같은데?”
“이상하네......약이 너무 강했나?”
“몸이 약한 가 본데...이거, 뭐 문제 생긴 건 아니겠지?”
“어차피 문제생길만한 약이 아니잖아. 그것보다 저 팔목에 끈 말야......천을 대긴 했지만 아무래도 자국 남을 거 같은데. 괜찮겠어?”
“저거 뿐 아니야. 지금은 두건으로 안보이지만 혀라도 끊을까봐 입도 묶어 놨어. 특별상품이잖아. 어차피 구매자도 정해져 있는 상황이니 자국정도는 괜찮지 뭐.”
“나 원 참, 상전을 모시는 건지 상품을 다루는 건지 모르겠군. 얼른 데려가자.”
“아 제길. 귀찮게 말야. 뭐 그리 보고 싶다고 안달복달을 하는지. 어차피 잠깐만 기다리면 볼 수 있을 텐데. 쯧.”
“먼저 확인하고 싶다 잖어. 윗분들 까지 모두 그 손님한테 굽실대는데 우리가 별수 있냐. 아, 얼른 들어 올려 봐.”
한 남자가 화연을 들어 올리더니 다른 남자의 어깨에 올렸다. 화연은 복부를 짓누르는 남자의 어깨에 숨이 막혔지만 기절한 듯 늘어져 있었다.
화연을 어깨에 들쳐 멘 그들이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쇠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다시 열렸다.
“하-암......들어가.”
“......”
무영은 하품을 하는 한조를 서늘한 눈으로 보다가 잠자코 문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은 화연이 먼저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확인한 뒤 한꺼번에 목을 날려도 괜찮겠지.
하지만 방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혹시나 해서 방안에 있던 사람 얼굴을 차근차근히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다.
이곳에는, 적어도 이 방에는 화연이 없다.
무영의 미간이 사정없이 접혔다. 날카로운 이가 꽉 물리더니 바득바득 갈린다. 그 안에서 무겁고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류......강연......죽여 버리겠어!!”
방안에 있던 여자들은 굶주린 육식동물을 앞에 둔 초식 동물들처럼 한쪽 구석으로 몰려 바들바들 떨었다.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뒷골이 절로 오싹해지는 기운을 마구 풍기는 저 장신의 여자가 너무나 무서웠다. 빨간 앵두 같은 입술사이로 나오는 목소리는 남정네의 그것보다도 낮고, 짐승의 그것보다도 거칠었다. 그런데 얼굴은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고왔다. 그 엄청난 괴리감에 여자들은 더욱 겁에 질렸다.
파들거리며 떨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명은 익숙한 기운과 목소리에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곱게 화장한 요염한 눈과 마주쳤다.
“......”
......
명은 조용히 고개를 무릎사이에 다시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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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라이즈~
용량이 좀 많죠?
연참도 좋지만......딱지도 돈이잖소.
해서, 두 편을 하나로 묶었소.
이번 편은 연참을 원하시는 악처아지매님에게 바치겠소.
콩그레츄레이숑!! 이벤트 당첨자!!
두구두구두구!!
짜잔-
도깹2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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