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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96화 (96/110)

00096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류 강연은 자신의 말을 들은 채도 안하고 나가버리려는 무영을 붙잡고 자기가 전장의 푸른 늑대였다는 둥, 자신의 기발한 병법으로 륜국과의 5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거라는 둥, 갖은 소리를 다 하며 무영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여 잡아 놓았다.

“어차피 연이에게는 손끝하나 못 댈 겁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너무도 싫지만 그들에게 연이는 소중한 상품입니다. 전하께서 안 계시는 틈을 타 충돌 없이 데려간 것도 상처 없이 데려가기 위해서 일겁니다. 당장 움직이는 것 보다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 한명도 빠짐없이 잡아야 합니다. 무조건 움직이다간 연이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연이를 인질로 잡거나 숨기기라도 한다면...... 전하, 저는 연이의 오라빕니다. 결코, 전하의 마음보다 덜하지 않습니다.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같고요. 하지만 지금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움직여야 합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

“오늘 저녁 초대장을 가져오면 저와 상이와 아버지가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몇 명이나 같이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입장하는 놈들을 덮쳐 초대장을 훔치는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대원들은 여행객으로 변장해 그곳 주변을 포위하고 있겠습니다. 한 놈이라도 빠져나가게 둘 수 없습니다.”

“강아, 인원이 너무 모자라지 않겠느냐? 스무 명 남짓한 인원으로 깡그리 죽일 수 있을까? 여기 현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떻겠느냐.”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작정인 류 충은 놈들 중 누구 하나라도 살아 돌아갈까 봐 걱정스러웠다.

“아버지, 이런 일이 자신의 현(縣)에서 벌어지는데 모르고 있을 리가 없지요. 그 탐....뭐 하는 놈도 관청소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다 한통속이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믿을 사람은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럼, 여기서 가까운 현(縣)이......아! 담하가 공현(縣)에 있지 않느냐! 공가 그놈이 처형당한 뒤 그 뒷수습 하러 외부 감찰단과 같이 파견 나갔었는데.”

“말 그대로 외부 감찰단일 뿐 아닙니까. 아마 마음대로 현(縣)소속 군사를 움직이기는 힘들 겁니다.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알립니까.”

무기를 가졌는데도 쓸 수가 없다. 류 충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궁으로 돌아가기만 해봐.....아주 여기를 싹 갈아엎어 줄 테다! 이 향락의 도시를 고요한 수도원으로 만들어 주마!”

“아버지,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말로만 들었을 때에는 몰랐는데 실제로 와보니 여기 아주 못쓰겠네요.”

“근데......저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너무 인원수가 적은 게 아닌가 싶은데.”

“우리 애들을 너무 물로 보시는 거 아닙니까? 그런 왈패 놈들하고 군대에서 제대로 배운 놈들하고는 차원이 틀립니다. 물론, 쪽수가 너무 차이나면 밀릴 수도 있겠지만 상이가 있지 않습니까. 일단 들어가서 수면초를 피우면 일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이 방법은 전하께서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지만 륜국과의 전쟁 때에도 써먹었던 방법이죠. 그때는 밥에 타서 먹인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아버지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상이를 데려왔으니 잘됐지 뭡니까.”

“그래, 그 아이 말대로 하길 잘했지. 암.”

“예?”

“아니다, 계속 해 보거라.”

“예...혹시라도 수면초가 먹히지 않거나 피울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상대의 수가 몇인지 알 수가 없으니 연이가 최대한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해야지요.”

“그게 뭔데?”

“사는 겁니다.”

“응? 뭘?”

“연이를 우리가 되사오는 겁니다. 연이를 사서 안전하게 나온 뒤 대원들과 함께 그 곳을 덮치는 거지요. 이게 두 번째 방법입니다. 사실, 이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긴 합니다만......”

류 강연이 말끝을 흐리면서 무영의 얼굴을 살폈다. 화연을 다른 사람들 앞에, 그것도 상품으로 내새워야 한다는 걸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미간이 꼬깃꼬깃 접혀있는 게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싫어.”

“그렇죠......전하께서 그러실 거 같았습니다.”

단호한 무영의 대답에 류 강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잡혀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은 주저 없이 이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납치당해서 떨고 있을 사람을 생각해보면 탐탁치는 않았지만 가장 안전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잡혀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화연이었다. 한시라도 거기서 빼내고 싶었다. 느긋하게 일이 다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도 싫었고 놈들의 그 더러운 시선 앞에 화연을 세우는 건 생각조차 싫었다.

류 충도 이 방법은 싫었는지 고개를 젓는다.

“흐음......강아......애비도 그건......연이가, 그 여린 아이가 얼마나 무섭겠느냐.”

“중요한 것은 첫 번째 방법이든 두 번째 방법이든 간에 누군가 연이를 보호하고 있어야 합니다. 혼자의 몸으로 연이를 빼낼 수는 없겠지만 위험을 막아줄 수는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그건 내가.”

“전하께서는 당연히 안 되는 거 아시지요? 그 벌건 머리를 하고 어떻게 들어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잊었어?”

“예?”

“난 태자야.”

“근데요?”

“내가 들어가겠다는데 누가 막아?”

“참내......들어가실 수는 있겠죠.”

“그런데?”

“탐호라는 놈이 전하의 용안을 봤다면서요? 아마 보자마자 꽁지 빠지게 도망갈걸요? 재수 좋으면 혼자 도망 갈 것이고, 재수 없으면 우리 연이까지 데리고 가겠지요. 더 재수 없으면 증거를 인멸한답시고 연이에게 해코지를 할 수도 있고요.”

“......변장을 하면......”

“전하, 변장을 하더라도 이목구비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일을 하는 놈들은 얼굴을 잘 알아본다고요. 그들조차도 전혀 예상할 수 없게끔 상식 밖의 변장을 하면 모를까. 예를 들면 여장 같은 거 말이지요.”

“......”

무영의 눈이 서늘해 졌지만 류 강연은 눈치 채지 못했다. 무심코 꺼낸 자신의 의견이 말도 안돼 보이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참 좋은 방법이라는 걸 깨닫고 눈빛을 빛내기 바빴다.

“오......생각해보니 그거 참 좋은 방법 같은데요? 등치야 저기 저 상국의 어느 부족 여인들이 그렇게 장신이라고 하니 그 부족 출신이라고 하면 되겠고. 어떤 미친 남정네가 여장을 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어지간만 해도 절대 눈치 못 챌 텐데 전하께서는 얼굴만큼은 여인네들보다 곱지 않습니까. 아마, 상상도 못할걸요?”

“......”

“음...아버지의 첩으로 있었는데 이번에 바꾸는 걸로 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처음에는 미색이 고와 등치가 커도 좋았는데 이제 홀딱 질려서 바꾸는 걸로요. 그래서 판다고 하는 겁니다. 그럼 전하께서 노예로 잡혀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시겠지요. 이거 잘하면 우리 연이가 잡혀있는 곳까지 힘 하나 안들이고 편하게 알아 낼 수도 있겠는데요?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화장이야 지워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그러......”

무영은 말없이 칼을 뽑았다. 류 강연은 서둘러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짓 말고, 은밀히 잠입하여 아무도 모르게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구의 눈에도 띠지 않고 접근하는 놈들은 조용히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무력을 가진 놈으로 말이지요. 설사 발각 되더라도 연이와 제 몸은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 정오인가?”

서늘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무영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하자 류 강연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에......그 정도 됐을 걸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무영은 대뜸 일어나 창을 열었다. 그리고 큰소리로 명을 부르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명! 이리......”

무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창 안으로 명 대신 하얀 새가 포로로 날아 들어왔다.

방을 한 바퀴 휘- 돌던 새는 무영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부리로 그의 어깨를 톡톡 쪼았다.

“어? 뭡니까? 전서구 아닙니까? 전서구 치고는 크네요?”

“아바마마께서 붙인 그림자의 전서구야.”

“뭐?!! 연제께서 그림자를 붙이셨다고? 그런데 나한테 말 한마디도 안 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르는 류 충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전서구가 날개를 파드득 떨었다. 저러다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진 류 강연은 서둘러 일어나 창을 닫았다.

“아버지! 좀 고정하세요. 그러다 전서구 날아가면 어떻게 잡아오려고요! 아버지께서 잡아 오실 거예요?”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고 싶은 게냐? 아버지라니요? 누구신지... 한번 해줄까? 엉?”

류 강연의 기세가 단숨에 쪼그라들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얼굴은 침울해 보였다.

“......제가 잡아오면 되지요......”

무영은 전서구의 다리에 매어져있는 작은 통 안에서 작게 돌돌 말려진 밀서를 꺼내들었다.

연제를 향한 욕설과 함께 투덜거리던 류 충과 어깨를 늘어트린 류 강연, 무영에게 쓰려고 챙겨두었던 수면초와, 혹시라도 약발이 안 먹 힐 때를 감안하여 챙겨둔 분진(焚塵 , 조금의 열만 가해져도 쉽게 타오르며 폭발하는 성질이 있는 가루)을 찾기 위해 봇짐을 뒤적거리던 류 상연까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벌떡 일어서 무영에게 다가갔다.

*

그 시각, 객실 문 밖에는 객사장, 가백은 사색이 되어 서 있었다.

가백은 울고 싶었다.

재상을 모시고 객실로 안내하러 간 종업원이 혼비백산해서 뛰어 내려 왔을 때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올라간 가백은 눈앞에 벌어진 참사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는데 결정적으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 따로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허연색 머리였던 그 남자가, 여인 하나를 보물마냥 품에 안고 다니던 돈 많은 그 남자가......글쎄, 온몸을 피로 떡칠 한 것도 모자라 붉은 머리를 하고 서 있는 게 아닌가.

붉은 머리라니.......

그럼 내 객사에 이제까지 황족, 그것도 차기황제께서 거하고 계셨단 말이야?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

그 붉은 머리를 보고 전신의 털이 일어설 정도로 기함을 한 가백은 결국 아침에 먹은걸 계단 한쪽 구석에 게워낼 수밖에 없었다.

멀쩡한 종업원을 무참하게 죽인 이들을 어디에 신고도 못하고 이러고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재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도대체 태자를 어디에다 신고한단 말인가!

게다가 재상과 그 아들들이 둘러싸더니 검푸른 눈을 부릅뜨고 노예상과 연관된 게 아니냐고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들 뒤에서는 태자가 소도를 젓가락처럼 돌리면서 노려보고 있는데 오줌이 찔끔 나올 정도로 무서웠다.

무릎을 꿇고 얼마나 빌었는지 손에서 닭 똥내가 진동을 했다.

죽은 저 종업원이 노예상과 연관된 것조차도 몰랐다.

아니다. 정말 그렇지 않다.

맹세할 수 있다.

정 못 믿겠으면 마누라라도 걸겠다.

그건 됐다고?

그, 그럼......목숨이라도 걸겠다.

애걸복걸 한 시진 넘게 목이 터져라 결백을 주장하니 이제야 믿는 듯해서 겨우 안심했는데 이번에는 재상이 객사를 기한도 없이 통째로 빌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산 넘어 산이었다.

게다가 재상의 아들이 벙어리처럼 입 딱 다무는 게 좋을 거라며 그 핏줄선 눈을 부라리는데 죽을 맛이었다. 내 집에서 발끝으로 걸으며 숨소리도 못 내면서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 이들이 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그리고 그들이 떠날 때까지 얼굴 한번 마주치치 않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신은 내편이 절대 아니었다. 올해까지가 삼재라더니 아주 된통 걸려들었구나.

가백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이 조금 열리더니 문틈 사이로 피곤에 찌들다 못해 귀기까지 어려 있는 류 가(家)의 아들 중 한명이 인상을 쓰면서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중요한 이 시점에.”

“저......소, 손님이......”

“누군데.”

“저, 저도......잘......”

“쯧, 데려와.”

류 강연은 가백을 위아래로 훑더니 말만 툭 뱉고 문을 닫았다. 닫친 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던 가백은 힘없이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

“전하! 탐......뭐시기 그 놈이 온 것 같습니다. 밀서는 나중에 읽어보고요. 일단 몸을 숨기세요.”

“......”

그 놈 이름을 듣자마자 무영에게서 순식간에 퍼져 나오는 살기를 느끼고 류 강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전하! 살기를 죽이셔야 합니다. 그런 놈은 살기에도 예민하다고요. 우리 연이 생각하셔야지요. 아, 어서요!”

류 강연은 욕실 문을 열고 선채로 꼼짝도 안하는 무영을 재촉했다. 등이라도 밀거나 팔이라도 잡아끌고 싶었지만 저런 상태의 태자에게 손끝이라도 잘못대면 바로 목이 잘릴 수도 있다. 류 강연은 고집스럽게 묵묵히 서서 살기만 날려대는 무영이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류 충에게 눈짓을 보냈다. 여기서 무영이 그나마 말을 들어줄 사람은 류 충밖에 없었다.

“전하, 들어가시지요.”

“......”

“저 놈을 잡아 죽이고 싶은 마음 저도 같습니다. 허나, 지금은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 놈 뒤에 누가 있을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

“아니, 계획까지 잘 짜놓고 이제 와서 왜 이러십니까?”

“......”

“진정 일을 이렇게 망치실 작정이십니까?”

“......”

노려보면서 윽박을 질러도 알아듣게 설명을 해도 저놈에 쇠심줄은 끊을 수가 없었다. 류 충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무기를 꺼내들었다.

“휴......연이가 돌아오면 대례식 일정......”

탁-

제 발로 욕실에 들어간 무영은 문까지 손수 닫았다.

그 모습을 보던 류 충의 눈매에 의심스런 빛이 가득하더니 이마에서 핏대가 섰다.

왠지 제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나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간 거 같은데...

저놈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이런, 젠장!!

저 여우같은 놈이!! 지 애비를 닮아서!!!

류 충이 욕실 문을 벌컥 열며 다 무효라고 소리 지르려는데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가백 뒤로 누군가가 따라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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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도 짐승의 머리는 잘도 굴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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