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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95화 (95/110)

00095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철썩-

“아, 아버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던 류 충이 드디어 무영의 뺨을 후려갈겼다.

무영은 류 충이 힘껏 휘두른 손에 맞아 획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뺨이 점점 붉어졌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태를 주시하던 류 강연은 화연이 없어진 데서 오는 분노를 표출하지도 못했다. 우려하던 일이 터지자마자 빠르게 일어나 류 충과 무영 사이를 막아서기 바빴다. 예상대로 무영에게서 살기의 매운 내가 물씬 풍겼다.

이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모양인지, 아니면 느껴지는데도 분노가 극에 달아 이판사판인건지 류 충은 벌떡 일어나면서 류 강연의 등을 옆으로 밀치고 무영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실제로 류 충은 태자고 뭐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붉어진 이마에는 핏대가 솟았고 수염이 잘게 떨렸다.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이놈을 찢어 죽이지 못하면 내가 류 충이 아니고 유충이다!

“제 멋대로 내 딸을 데려갔으면 책임지고 보호했어야 할 거 아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뭐? 납치 된 거 같다고?”

“......”

“왜 아무 말도 없는 거냐!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알았다고! 너와 엮여서 좋은 꼴 못 볼 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 연이 어떻게 할 거냐 이놈아! 목숨 같은 내 딸 어떻게 할 거냐고!!”

“......”

당장은 무영이 말없이 눈만 내리깔고 있을 뿐이지만 언제 일어서 칼춤을 출지 모른다. 류 강연은 그가 류 충에게 칼을 휘두르면 막을 수 있을 만한 위치로 자리를 슬며시 옮겼다.

“아, 아버지 고정......하시긴 힘드시겠지만......”

“닥쳐!! 지금 고정하게 생겼어? 연이를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고것을 어떻게 살렸는데! 이 썩어 나자빠질 놈이 들고 내빼더니 일을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니, 근데 이놈은 왜 계속 내 앞을 막아!! 저놈 편드는 거냐?”

저놈 편이 아니고 아버지 목숨을 편드는 거예요.

저놈이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언제 칼을 뽑을지 모른다고요.

저 놈 눈깔이 획 돌아간 거 안보이세요?

“아버지......그, 그게 아니고......”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리 비켜라 이놈아!”

류 충은 류 강연이 휘청거릴 정도로 획 밀어버리고 무영에게 다가서 다시 뺨을 후려치더니 그것도 모자라 멱살을 잡아 올렸다. 류 강연이 그 모습을 보고 놀라 류 충의 손을 잡아떼려고 했으나 딸을 잃은 부모의 억척스런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태자전하세요. 아버지!”

“태자? 허!! 태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 딸 잘못 되기만 하면 태자고 뭐고 없어! 분명히 말해두겠는데 우리 연이, 그 금쪽같은 내 딸 못 찾는다면 이 나라의 대는 끊길 것이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고 끊어 놓을 것이야!!”

“......”

차기황제를 죽여 나라의 대를 끊어 버리겠다는 류 충의 악에 받친 소리에 방 밖에서 기웃거리던 대원들까지 숨을 삼켰다. 주 아랑은 서둘러 계단으로 달려가 누가 이 엄청난 소리를 엿듣지는 않는지 망을 보았다.

류 충은 장승같이 서있는 무영의 멱살을 잡고 끙끙 힘을 썼지만 흔들리지도 않았다. 얼굴만 시뻘겋게 달아오른 류 충은 소리만 고래고래 지를 뿐이었다.

“납치? 납치라고?!! 납치라니!!! 이런, 썩을......어어억!!”

“아버지!”

류 강연이 뒷목을 잡는 류 충을 부축해 자리에 앉혔다.

무영은 류 충의 욕설도 삿대질도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몇 번이나 후려쳤지만 뺨에는 아무 느낌도 없었다. 폭주하지 않기 위해 정신을 다잡기도 벅찼다. 뺨 몇 대 맞는 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그는 머릿속에 종업원이 털어 놓은 얘기만 반복적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순서를 맞추고 사건을 배열하고 단서를 잡는다.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고 싶은 살심을 어렵게 가라 앉혔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다.

경거망동해서 일을 그르치면 안 돼.

무영은 미칠 것처럼 요동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내리 누르며 류 충이 주는 모든 수모를 고스란히 당해주었다. 엉켜있던 머릿속을 정리한 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던 무영은 조용하게 물었다.

“다 하셨습니까?”

“뭐?”

“다 하신 거냐 물었습니다.”

“뭐라고? 이놈이......다하긴 뭘 다해?! 아직 멀었다 이놈아!! 아직 시작도 안했어! 이정도로 끝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다!”

“그럼, 나머지는 갔다 오면 하십시오.”

“......뭐......?”

“그리고 걱정은 마십시오.”

“뭐?”

“연이를 못 찾는 다면 이 나라의 대는 제 손으로 직접 끊을 테니 그건 걱정 마십시오.”

“......”

황금색 눈이 광기로 번뜩 거린다.

그것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인 거대한 폭탄처럼 보였다.

이제야 무영의 심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류 충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순식간에 100년은 늙은것처럼 보이는 류 충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보던 류 강연은 제 할 말만 툭 던지고 밖으로 나가려는 무영을 보고 불러 세웠다.

“전하! 어디를 가십니까?”

“내 거 찾으러.”

의자에 등을 기대고 탈진한 사람마냥 축 늘어져 있던 류 충은 단박에 몸을 일으켰다.

“연이? 연이 말하는 거냐? 그럼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단 말이야? 어딘데? 거기가 어디란 말이냐!”

“저 놈이 이름을 불었습니다.”

“저 놈?”

류 충과 류 강연이 무영의 고개 짓에 따라 시선을 돌렸다.

나비표본처럼 벽에 고정되어 죽은 남자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고문을 당하느라 흉측하게 난도질 되어있는 곳에서 아직도 진득한 피가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나무 바닥에 스며들어 넓게 퍼져있는 핏자국을 보다 이제야 자신들이 시체와 한방에 있다는 걸 깨달은 류 충과 류 강연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전하......저 놈은 누구입니까? 이 객사 종업원으로 보이는데 납치범들과 한패 입니까?”

“응”

“불었다는 그놈은 누구입니까?”

“탐호. 납치한 새끼.”

“납치한 이유는 우리에게 돈을 요구하기 위한 겁니까?”

“그들은 연이가 류 가(家)인 것도 몰라.”

돈을 요구할 것도 아닌데 산 속같이 인적 드문 곳도 아닌 이런 곳에서 종업원까지 매수해가며 굳이 납치 했다면 목적은 하나뿐이다.

황궁에 고위 관료들 사이에 퍼져있던 그 소문을 류 강연 또한 들은 적 있었다. 류 충이 진행하고 있는 일 중에서도 그들의 뿌리를 뽑기 위한 작전도 있었지만 본거지를 찾을 수가 없을뿐더러 역모다 뭐다 일이 계속 생기는 바람에 몇 달이나 미루고 있었는데.

“혹시......노예상 인겁니까?”

“......”

“전하, 무조건 저희와 같이 움직이셔야 합니다.”

“거치적거려.”

“전하, 이런 객사의 종업원까지 매수할 정도의 놈이면 치밀한 놈입니다. 십중팔구는 혼자가 아닐 겁니다. 만약 규모가 큰 노예상인 경우 전하 혼자서는 절대 역부족입니다. 그들의 본거지를 찾다 놓치는 수도 있습니다.”

“이 근처라고 했어. 샅샅이 찾으면 돼.”

“그렇다면 더욱 치밀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찾더라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게 해 놨을 겁니다. 아무리 전하께서 실력이 좋다고 하더라고 막아서는 머리수가 많으면 어렵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연이만 찾아오는 건 가능해. 놈들은 나중에 죽여 버리더라도 일단 연이먼저.”

단체행동의 ‘ㄷ’도 모르는 저 독불장군의 성격!

혼자 행동할 때가 있고 같이 행동할 때가 있는데 아주 제 멋 대로다.

그러다 우리 연이 다치면 지가 책임 질 건가?

류 강연은 속이 터져 소리를 버럭 질렀다.

“전하!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연이를 무사히 데려오려면 혼자서는 안 된다고요! 혼자서 어떻게 숨어 들어가 그 놈들 모르게 연이를 데려 온단 말입니까? 깡그리 죽여 버리면서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해코지라도 할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다 제 동생 다치기라도 하면요? 저 절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전하라 할 지라도요!!”

“......”

“전하, 저도 급합니다. 제 마음도 당장 쳐들어가 모두 죽여 버리고 싶다고요. 하지만 참으셔야 합니다. 연이를 생각하면 참으셔야 한다고요. 일단 저희와 함께 작전을 짜고......”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야!!!!!!”

창이 바르르 떨렸다.

귀가 먹먹하더니 이명이 울렸다. 무영이 이렇게 소리를 높이는 건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류 강연은 너무 놀라 멍하니 입을 벌렸다.

고통으로 가득한 황금색 눈동자가 바르르 떨렸다. 부표를 잃은 황금색 배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다 표류한다. 무영은 지금 중심을 잃고 망망대해에 홀로 떠다니는 것 같았다. 화연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가 온몸에 엄습했다.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감당할 수가 없었다. 무영은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움켜잡고 고함을 질렀다. 심장을 잡아 뜯어 버리고 싶었다.

산 채로 미쳐가는 기분이 이런 거로군.

정말 그랬다.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잔뜩 엉켜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두통이 일었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지금 이 순간에도 연이한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사납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다. 저건 분노보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눈동자와 흡사했다. 어쩌면 자신을 비롯한 가족보다도 더 아슬아슬해 보여 류 강연은 할 말을 잊었다.

이대로 연이를 못 본다면......환 제국 최초로 미친 황태자가 생겨나겠군.

“저, 전하......고, 고정,”

“그런데...그런데 가만히 앉아 빌어먹을 작전이나 짜고 있으라고?”

“......”

“피가 빠져나가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막지 말라는 거냐?”

“......”

“차라리 그냥 죽으라고 해.”

“전하......”

그 말만 남기고 방을 나서려던 무영의 앞을 류 상연이 막아섰다. 무영은 저도 모르게 칼을 휘두르려다 겨우 참고 류 상연을 노려보았다.

“비켜.”

“당신에게 더는 내 동생 못 맡겨.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잠자코 있어. 아니면 궁으로 돌아가던지 가람지방으로 내려가. 지금 거치적거리는 건 당신이야.”

“헉! 사, 상아!!”

정상적인 말의 속도는 둘째 치고 너무나도 방자한 동생의 말투에 류 강연이 놀라 류 상연의 팔을 잡았다.

앞을 막고 있는 류 상연을 노려보다 비켜가려는데 그가 팔을 뻗었다. 무영은 순간적으로 그 팔을 피하면서 칼을 반쯤 뽑았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이 일어날듯 한 일촉즉발의 상황에 류 강연이 발을 구르면서 둘 사이를 막아서려다 문 밖에서 서성거리던 주 아랑의 속닥거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응? 탐호? 어디서 많이 들어본......아! 아까 길에서 마주친 그 치 아니야? 어르신에게 이상한 헛소리나 지껄이던 그놈. 기분 나쁜 삼백안! 난화냄새 풀풀 나던 그놈 기억 안나? 그놈이 제 이름을 탐호라고 했던 거 같은데......아닌가?”

옆에 있던 주 해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그런가? 아까는 너무 졸려서 잘 못 들었어. 그놈 이름이 탐...뭐라고 했었던 것 같긴 하다. 그 냄새가 난화냄새였어? 어쩐지 지독하더라니! 난 무슨 연초냄새가 그렇게 독한가 했잖아.”

“그거 난화냄새 맞아.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맡아봤었잖아.”

“응, 맞아. 맞아. 근데 그거 일반인한테는 금지된 거 아니었나? 걸리면 교수형이라고 들었는데......”

“어......? 그러게......그 놈은 대체 뭐냐.”

류 강연과 무영, 류 상연의 고개가 그들에게 획 돌아갔다. 쏟아지는 시선에 주씨 쌍둥이가 주춤거리더니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왜 말하다 말아?! 다시 말해봐!”

“아, 그게...대장님, 아까 오다가 마주친 그놈 기억나십니까? 어르신께 친한 척 주절주절 거리다 저희에게 이 객사를 추천해주던 그놈 말입니다.”

“......기억난다. 그놈......”

“예, 그놈 이름이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제가 가까이 있어서 들었었습니다.”

“그래? 난 못 들었는데......상이, 너는 들었어?”

“...못 들었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류 충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벌떡 일어섰다.

“맞아! 그 놈! 그 구리 구리한 냄새를 풀풀 풍기던 그놈! 나한테 초대장을 보낸다는 둥 어쩐다는 둥 하던 그놈! 그 놈 이름이 탐호다!”

“정말이세요. 아버지? 정말 들으신 겁니까?”

“그래. 이름한번 요상하다고 생각했거든. 뭔가 변태스러운 기운이 느껴졌어. 그래서 기억이 난다. 훤한 대낮에 무슨 남자 놈이 마차를 타고 다니나 했는데......!!”

뭔가를 깨달았는지 입을 벌리고 얼굴을 굳히는 류 충에게 류 강연이 물었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연이가 언제 납치당했다고?”

“얼마 안됐다고......”

“그럼 그 마차에......어쩐지 남자 놈이 무슨 마차인가 싶었는데!! 거기에 우리 연이가 있었어!! 내 딸을 납치해서 거기에 가둔 거라고! 이런 찢어죽일 놈을 봤나. 감히 내 눈앞에서 내 딸을 훔쳐가? 뭐 이런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다 있어!! 내 당장!!”

“그놈이 초대장......아, 아버지! 잠시만 계셔보세요! 그 놈이 분명......아버지! 좀!!”

펄펄뛰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인 류 충을 류 강연이 억세게 붙잡았다. 뭔가 생각날 듯 말듯한데 류 충의 고함에 자꾸만 생각이 흐트러져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주씨 쌍둥이의 말을 들은 무영의 머릿속에 수도 근처에서 봤던 그 변태 남색가 놈이 단박에 떠올랐다.

삼백안에 난화냄새라면 그 놈이다.

엊그제 남하강 중순에서 화연이 봤다고 했는데......

설마 여기까지 따라 온 건가?

역시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결국,

후환을 남겨둔 내 탓이군.

꽉 틀어쥐고 있던 주먹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무영은 피식 웃었다.

화가 치밀어 오르다 더 이상 오를 데 없이 높아지면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지들끼리 쑥덕이던 주씨 쌍둥이도, 화가 나서 방방 뛰던 류 충도, 뭔가를 생각하다 환한 얼굴로 입을 열려던 류 강연도 전신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무영의 기운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류 상연만이 가라앉은 눈으로 무영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영의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류 상연에게 향했다.

“비켜.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류 상연은 미동도 없이 깊은 눈으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연의 오라비고 뭐고 눈앞에 보이는 것도 없는데 이 새끼 팔 한 쪽 정도 잘라 버려도 될까......칼을 틀어잡으면서 고민하고 있는 사이 류 강연의 외침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전하! 잠깐만요!! 아주 좋은 수가 생각났습니다.”

천천히 돌아선 무영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류 강연은 씩- 웃었다.

“전하, 돈은 많이 가져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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