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비를 맞으며 객사로 돌아온 무영은 옷을 챙겨들었다.
“연아, 나는 다른 욕실에서 목욕하고 올게. 넌 여기서 편하게 해.”
“......예......”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말끝을 늘이며 머뭇거린다. 얼굴도 좀 붉은 게 비를 맞아서 고뿔이라도 걸렸나 싶어 무영은 화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나는 거 같은데...고뿔 걸린 거 아냐?”
“아, 아니에요. 그런 거......아니에요.”
화연은 붉은 얼굴을 숙여 발치를 바라보다 무영의 옷깃을 살며시 잡아 만지작거렸다.
“......왜 그래? 뭐 할 말 있어?”
무영의 질문에 화연은 입만 벙긋 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웃더니 발꿈치를 바짝 들어 무영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화연이 먼저 입을 맞춘 건 감현(縣)에서 술에 취해 했던 걸 제외하면 처음이었다. 화연은 깜짝 놀란 무영의 표정을 보고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서 목욕하고 오세요.”
“......응”
무영은 객실을 나가려다 말고 화연의 팔을 잡아끌어 입을 맞췄다. 마주 부딪쳐 오는 화연의 입술의 온도가 따뜻하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고 엄지로 그 입술을 훑어주었다. 부드러운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화연이 얼굴을 기대왔다. 볼을 감싸고 있는 무영의 체온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눈을 감고 한참을 있더니 옅게 웃는다. 팔목에 솜털 같은 숨결이 느껴졌다.
무영은, 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괜스레 가슴이 떨렸다. 심장이 이상해졌다.
누군가 마구 잡아 흔들어 어지럽게 울렁거리는 것 같았고, 누군가 꽉 쥐어짜 욱신거리는 것도 같았다.
무영은 말없이 손을 대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어쩐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품에 안고서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대로 동상처럼 서있기만 했다.
그녀가 어서 갔다 오라며 등을 떠밀 때 까지 손 베개를 해주고만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객실로 돌아온 무영은 탁자에 놓인 물을 한잔 마시며 창으로 다가갔다. 밖에는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강가를 향해 눈길은 주고 있었지만 무영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물소리.
매일 밤 듣는 저 물소리는 참으로 감미로웠지만 그만큼 무영을 괴롭히는 것도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다가온 처절한 인내의 시간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무심코 시선을 돌린 무영은 동상처럼 우뚝 서서 숨을 멈췄다.
주름하나 없는 침상위에 반지가 곱게 놓여있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한참동안 반지를 바라보던 무영은 침상 가까이로 다가갔다. 분명히 자신이 화연에게 준 황금색 보석이 박혀져 있는 그 반지다.
이 반지를 여기에 올려 뒀다는 것은......
이것은......
“윽-”
무영은 갑자기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에 스스로 놀라 가슴을 움켜잡았다. 여태껏 목욕중이더라도 한번을 빼놓은 적이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을 버릇처럼 만지작거리며 소중하게 여겼었는데...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고 미친 듯이 바랐던 그 의미가 맞는 것 같았다.
지레짐작으로 너무 흥분하지는 말자.
괜히 기대했다가 아니면 실망스러우니까.
직접 나에게 건네 준 것은 아니잖아.
갑자기 너무나 답답해 목욕할 때만 잠시 빼 놓은 걸 수도 있잖아.
갑자기 너무나 마음에 안 들어서 뺀 걸 수도 있고.
진정해.
......
라고 자신을 애써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들뜨는 마음은 감출수가 없었다.
지금 그의 입가는 귀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욕실에서 자그마하게 들려오는 물소리가 오늘은 전혀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듣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동안 내색은 안했었지만 내가 믿음직스럽지 않아 나에게 모든 걸 맡기기는 힘든 걸까. 그런 생각도 했었다. 저번 감현에서 마주친 그 기생의 일로 나에게 정이라도 떨어진 건 아닌지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모른다.
이제까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알 필요도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화연의 마음만큼은 속속 들이 알고 싶었다.
나에 관한 생각이건 아니건 화연의 모든 것은 빠짐없이. 몸까지도. 내 것이어야만 했다. 온전히 다 갖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은 마치 누군가 위장을 쿡쿡 쑤시는 것과 같았다. 충족되지 않은 소유욕은 마음을 좀먹었다.
하지만, 드디어......
무영은 침상 위가 흐트러지지 않게 반지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반지를 꽉 움켜쥔 주먹으로 입술을 눌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를 않았다. 그의 눈동자 안에 엉켜있는 은사가 정신없이 반짝거린다.
무영은 펄떡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가만히 음미하고 있다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창가로 다가가 창을 열었다.
“명.”
......
“명!”
......
“듣고 있는 거 다 알아. 이리 와.”
객사 지붕위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지붕아래 대들보 위에 숨어있던 명은 미간을 접었다.
왜 저러시지.
그림자를 저렇게 큰소리로 부르다니.
조금만 더 있다가는 자신의 존재를 동네사람들이 죄다 알게 생겼다.
뭐 이런 기본도 모르는 태자가 다 있냐.
명은 못 들은 척 하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 무영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마지못해 내려갔다.
무영은 공중제비를 넘어 창안으로 훌쩍 들어오는 명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 가.”
갸웃
다짜고짜 어딜 가라는 건지...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영은 욕실 안, 화연의 인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목소리를 더 낮췄다.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갸웃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끄덕
“오늘밤......아니, 내일 아침...아니, 흠, 흠. 정오까지 이 객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왜?
“......그냥......아!! 이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난화 냄새나는 놈들이 주변에 있는지 알아봐.”
......
아...?
갑자기 생각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저 추임새는 뭐냐.
심지어 이 객사 주변도 아니고......멀리 떨어져서?
이렇게 비가 오는데 무슨 냄새가 난다고? 내가 개야? 그건 개도 못해.
도리도리
“말 좀 들어.”
도리도리
“하라면 해!”
도리도리 도리도리
“......”
고개를 어찌나 휘휘 돌리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펄럭거렸다.
명의 정수리에 칼날 같은 시선을 꽂던 무영의 눈에서 스산한 기운이 일렁거렸다.
역시 이놈을 애초부터 쫒아 냈어야 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더니.
이렇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다니.
이놈은 우리가 머무는 객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분명히 알 것이다.
아무리 객실의 방음이 좋다고는 하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이놈의 귀에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자신의 은밀한 사생활은 누가 보든 말든 전혀 상관없었고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지만 화연은 달랐다.
그녀의 손끝도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고, 숨소리 하나조차 남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는 이 마당에 어떻게 그녀의 신으ㅁ......
아무튼 아무것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명령이야.”
......
아, 정말......태자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따라다니는 것을 눈치 챘으면서도 이제껏 아무 말도 안하다가 갑자기 왜 이러시지?
혹시, 난화는 변명이고 사실은 나 떼어버리고 도망가려고 그러는 거 아냐?
명의 눈초리가 가늘어 졌다.
서로 다른 색의 눈동자가 의심스럽게 빛났다.
남녀상열지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명은 아무래도 무영이 자신이 귀찮은 나머지 따돌리기 위해서 저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는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묵묵히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아무리 눈을 부라리고 협박을 해봐도 알아듣지 못하는 명 때문에 무영은 애간장이 탔다.
이제 물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는걸 보니 얼마 후면 나올 것 같은데...
그전에 이놈을 처리해야 한다.
무영은 먹음직스런 미끼를 손에 들고 명 앞에 흔들었다.
“밀서.”
?
“내가 써준다.”
!!!
“계속 보냈었잖아.”
......그, 그건 어떻게 알았지?
“전서구.”
아차!
그 산장에서 봤었구나.
“너 글 못쓰지?”
명은 고개를 바짝 들고 강하게 저었다. 얼굴에는 자신감이 어렸고 어깨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도리 도리!!
아냐, 나 잘 써! 그림자 중에는 내가 최고야.
“써봐.”
......
아......치사하게......
쫙 펴졌던 어깨가 급한 모양새로 쭈그러들었다. 얼굴에는 침울한 기색이 가득 서렸다.
“그림자가 잘도 쓰겠다.”
......
“내가 써주면 니가 보내. 어때?”
......
글을 써 본적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고 그것도 몇 개의 단어였을 뿐, 문장을 만들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동안 밀서를 보내야 하는 날이 돌아올 때 마다 차라리 칠일 동안 물 한 모금 안마시면서 잠복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골머리를 썩였었다.
하룻밤 정도라면 별일도 없을 테고, 자신을 따돌리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기척을 감지하는 것은 태자도 자신 못지않으니......
미끼를 덥석 물은 명은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폈다.
명의 손가락을 보며 뭔가를 계산하는 듯 생각에 잠기던 무영은 이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진시는 부족해. 적어도 오시는 넘어야지. 정오 넘어서 천천히 와. 그냥 안 오면 더 좋고.”
......
정오 넘어서?
도대체 뭐 하려고 저러는지는 몰라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리나 보다.
아무도 모르게 검술 수련이라도 하려고 저러나.
그렇다면 자신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마음이 이해는 갔다.
원래 수련이란 것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법이니까.
한참을 고민하던 명은 고개를 한번 숙이고 창밖으로 몸을 가볍게 날렸다.
멀어지는 명의 기운을 감지하던 무영은 창을 닫고 몸을 돌렸다.
삐걱-
동시에 욕실의 문이 열리고 밀려나오는 뿌연 수증기 사이로 화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영은 순간 머릿속이 아찔해져 비틀거릴 뻔 했다. 달려드는 화연의 향기에 콧속이 아릿하면서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화연은 여느 때처럼 옷을 다 입고 나온 것이 아니라 무릎까지 오는 실내용 얇은 덧옷만 걸치고 있었다.
모양 좋은 종아리와 덧옷 안으로 비칠 듯 말듯 보이는 부드러운 살결.
가느다란 목과 어깨를 감싸며 내려와 있는 살짝 젖은 머리카락.
그 위에 부끄러운 듯 붉어진 아름다운 얼굴.
화연은 얼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영은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한걸음 씩 다가갔다.
화연은 모로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들어 무영을 마주보았다. 긴장한 듯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이 점차 풀리더니 살포시 웃는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무영은 그 자그마한 손을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몸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 있는 손가락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 아......
무영은 평생 동안 간절히 간구하던 유일신을 목도한 수도승처럼 털썩 무릎을 꿇었다.
떨리는 그 손을 두 손으로 받쳐 올리고 발간 손끝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바닥에도 입술을 깊이 내리 눌렀다.
그리고 시큰거리는 눈을 내려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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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88화와 89화가 하나였으나 수위조절이 필요하거나 신고를 당하면 통째로 들어내기 위해 부득이 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러니 미리보시는 독자님들~ 다음 편은 미리보기로 보지 마시고 노블에서 보세요.
오늘 밤 12시에 업데이트 됩니다.
제목은 꽃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와 무료로 풀리는 날이 서로 다르니 여기까지의 내용을 모르는 다른 독자님들 중 응? 이건 뭐지? 하고 미리 읽으시는 분들이 분명히 계실 거 같은데....이거 정말 고민되네요.
크흑.....미리보기 너무 싫어요. ㅜㅜ
암튼 길 잃지 마시고 잘 찾아오세요~
어린왕자-★님, 유누마마님, 홍홍홍설님, 신비스님, 파비나님, 가루~~님, Moiray님 후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