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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87화 (87/110)

00087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쾅-

아힐은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벌써 두 번째잖아! 그물을 펼쳤는데도 두 번이나 놓쳤다는 게 말이 되나?”

“죄송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빠르게 이동할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변명을 하는 도중 아힐의 손이 거세게 휘둘러졌다.

쫙-

“윽”

남자의 얼굴이 훽 돌아가면서 중심을 잃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곧바로 중심을 잡은 남자는 다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남하강 초입에서도 그렇게 놓쳤으면 어제 새벽에 바로 작업을 했었어야지! 꾸물거리는 통에 다 잡은 고기를 놓친 거 아니야!”

“종업원 매수가 늦어졌던 터라......죄송합니다.”

“닥쳐! 내가 그따위 변명 듣자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때, 객실 문이 열리면서 장초를 입에 문 한 남자가 유유히 들어 왔다. 연기를 깊게 들이마시자 남자의 삼백안이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아힐 지부장, 너무 흥분하지는 마시죠. 어차피 그들의 목적지를 알고 있는데 뭐가 그리 문제라는 말입니까?”

“탐호. 자네 같으면 흥분하지 않겠나? 지금 다잡은 고기를 놓친 거란 말일세! 이 느려터진 것들 때문에!”

“너무 성급하게 진행하면 다 잡았다가도 놓치는 수가 생깁니다. 괜히 시간에 쫓겨 어설프게 그물을 쳤다가 그들이 냄새라도 맡는다면 경계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최악의 경우 몸을 숨길지도 모릅니다. 쭉 변장을 하다가 갑자기 나비를 씌운 것도 이상하고요. 눈치를 챘을 수도 있으니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요.”

한숨을 쉰 아힐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품에서 장죽을 꺼내 깊이 들이마셨다. 두 명이서 번갈아 가며 내뿜는 독한 연기로 넓은 객실은 금세 뿌옇게 변했다.

“휴......너무 멀어지면 잡아오더라고 이번 달 행사 날짜에 못 맞출 것 같아서 그러네. 내가 호언장담을 해놨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가람지방까지는 때려죽여도 바로 출발 못합니다. 화양주에서는 반드시 쉴 겁니다. 홍루주가 직접 확인해 준 내용이고요. 이번에 놓친 건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조용히 덮치기 힘들었잖습니까. 게다가 여기서 잡았으면 이동 중에 상품이 상처를 입거나 자진을 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화양주에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화양주야 우리의 앞마당이 아닙니까. 홍루주가 취루를 언급 해뒀다고 하니 그곳을 중심으로 그물을 꼼꼼히 쳐야겠지요. 지금까지야 딱 달라 붙어있어 틈이 없었지만 분명히 기회가 생길 겁니다. 안 생긴다면 만들어야 하고요. 이제 바짝 따라 붙어 있다가 그 틈이 생기는 대로 바로 덮치면 쉽게 해결될 겁니다. 포획과 동시에 지체 없이 바로 경매장으로 옮기면 시간도 절약할 수 있고 흠집도 거의 없을 겁니다.”

아힐은 전신으로 퍼지는 난화의 기운에 눈을 감으며 몸을 늘어뜨렸다.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지면서 기분은 한껏 고양됐다.

“그래, 고가의 상품이니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지 않게 해서 포획해야 해. 그리고 난 지부장이 아닌 본부장으로 올라가겠지. 큭큭큭큭큭. 으음......”

난화에 취해 해실거리며 웃기 시작하는 아힐의 얼굴을 보며 탐호는 조용히 속삭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곧 잡을 겁니다.”

*

강을 따라 파루안 나무가 끝도 없이 줄을 지어 심어져 있었다. 현(縣)에서 막아둔 건지 이곳에는 시끄러운 상인도 점쟁이도, 화공도 없었다. 거리에는 연인들이 저마다 사랑을 속삭이는 소리와 강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조용한 노래처럼 들려올 뿐이었다.

청색의 가느라단 잎이 강바람에 흩날리면서 서로 몸을 비비며 바스락 거렸다. 강에 반사된 달빛에 은색의 나무는 은은하게 빛을 뿌렸다. 띄엄띄엄 떨어져 거리를 비추고 있는 연등이 없었더라도 그것만으로 강 주변을 환하게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꼭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처럼 거리 전체가 낭만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연인들의 거리라는 말은 이곳에 딱 맞는 말이었다.

강가에 앉아 강물에 비친 은빛의 무리를 바라보는 화연의 눈이 몽롱하게 빛났다.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볼에 홍조까지 띄운 걸 보니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하루하고도 반나절 동안 꼬박 고생하며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너무 피곤해 할까봐 걱정했는데 의외로 화연은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무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바람에 흩날리는 화연의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주었다.

“마음에 들어?”

“예......너무 아름다워요. 정말...정말 예뻐요. 궁 안에도 파루안 나무를 심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쉬울 정도로요.”

“궁에도 자룡궁 주변 만 아니면 나무 심을 수 있어. 전에 가봤었잖아. 도화각. 기억나?”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영이 태자라는 걸 알았던 곳이고, 또 그가 쓰러졌던 곳이니 기억하지 않으려야 안할 수가 없었다. 화연은 그때가 다시 생각나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기억해요. 도화각이면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은 건가요?”

“응.”

“아! 맞아. 그때 궁금한 게 있었는데... 거기는 정자 사방에 발을 왜 그렇게 설치해 놓은 거예요? 일부러 나무들을 예쁘게 심어 놓았는데 발을 내리니까 전혀 안보이더라고요.”

무영은 화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거기는 다른 말로 제훤각(帝煖閣)이라고도 불러.”

“제훤각......?”

“황제의 몸을 덥히는 곳. 대대로 그곳에서 황제내외가 자주 연정을 나누었거든. 아바마마께서는 나 태어나기 전까지 어마마마와 거의 그곳에서 사셨대. 정무도 그곳에서 보실 정도라 신료들이 고생 꽤나 했다더군.”

“아......”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이 더욱 붉어진 화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영은 그런 화연의 턱을 올리며 눈을 맞췄다.

“이제는 우리가 그곳에서 살다시피 하겠지.”

“......”

“지금으로써는 까마득하게 먼일 같긴 하지만...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겠지?”

“......”

어쩐지 무영이 말하는 그 날은 제훤각을 이용할 날을 뜻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화연은 강렬하게 쳐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열기 어린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화연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다 그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금방 올 거예요.”

무영은 제 볼을 만지는 화연의 손을 잡아당겨 손바닥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내 것이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자.

그녀 스스로 내게 허락해 줄때까지 기다려야 돼.

.......라고 계속 생각하고는 있지만 무영은 매일 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언제까지 기다려! 라고 해주면 좋으련만.

휴...정말, 힘들다.

재촉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그것만 바라는 짐승으로 보일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다가와 주었으면 했다.

마음속으로 한숨을 삼킨 무영은 화연의 손바닥에 쪽-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이제 배 타러 가자. 여기에서는 뱃놀이를 꼭 해야 한대.”

꼭 누구한테 미리 들은 것 같은 그 말에 화연은 같이 일어서며 물었다.

“누가요?”

“네 둘째오라비.”

“어머, 강이 오라버니가요? 저와 함께 여기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었어요?”

“그건 아니고......여기는 그게 유명하다고 하더라고. 이곳과 화양주는 연인들은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래.”

“......네......”

그의 입에서 연인이란 소리가 나오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화연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영은 피식 웃으며 화연의 어깨를 잡고 강 건너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보이지?”

손가락은 강 건너 붉은빛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모여 있는 화려하게 빛나는 붉은 연등들은 꽃 위에 앉아있는 불나비 같기도 하고 불이 꺼진 후 남아있는 불씨 같기도 했다.

“네, 보여요. 저기가 화양주예요?”

“거기 뿐 아니라 여기까지도 모두 화양주야. 저기는 화양주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고. 원래계획은 내일 모레쯤 저곳으로 이동해서 며칠 쉬려고 했는데 그냥 여기서 있다가 가람지방으로 출발할까 생각중이야.”

“왜요?”

아무렇지 않게 묻는 화연의 질문에 무영은 답지 않게 머뭇거린다. 은근히 눈치를 슬쩍슬쩍 보기도 하고 손톱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음...내가 들어보니 너는 좋아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뭐, 주루나... 기루... 같은 곳 도 많고......저기는 말짱한 놈들보다 술에 취한 놈들이 더 많대. 여자가 갈 만한 곳이 못돼. 볼 것도 없고.”

“흐음......취루에는 안가도 되나요? 거기 꼭 들르기로 약속했었잖아요. 그 월화라는 분과. 들르지 않으면 울 것 같았었는데...”

“......난 약속 안했는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는 무영을 보다 화연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화연도 그곳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떤 곳인지 뻔 한 데 그런 곳에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니, 아무리 좋은 곳이라고 해도 감현(縣)에서 만났던 월화라는 사람을 떠올리면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무영은 과거에 여기까지는 안 와 봤다고는 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저기서 또 누구를 만날지 모르니 그럴 것 같으면 차라리 피해가는 게 상책이다.

내가 생각보다 질투가 심한가봐.

화연은 속으로 피식 웃다가 무영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 거렸다.

“농담이에요. 당신말대로 그렇게 해요.”

화연의 눈치를 살피던 무영은 그녀의 기분이 별로 나쁜 것 같지 않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응”

강가에는 나무배가 줄지어 서서 뱃놀이를 하려는 연인들을 교대로 태우고 강으로 나아갔다 한참 뒤 다시 들어왔다.

화연과 무영은 색깔고운 유등(流燈)을 하나 사 배에 올랐다.

무영이 노를 젓는 방향으로 배는 느리게 출발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주변은 조용했다. 노에 부대끼는 물소리와 배 위에서 조근 조근 속삭이는 연인들의 소리만 간간히 들려왔다.

강 위에는 연인들이 소원을 빌어 띄우는 유등으로 가득했고 그것들은 작은 빛을 뿌리며 배 사이를 구경이라도 하듯 이리저리 오고가면서 천천히 흘러갔다.

화연은 그 사이에 조심스럽게 유등을 띄웠다.

유등은 잠깐 흔들리다가 배에 인사라도 하는 마냥 툭툭 치더니 다른 유등의 무리 사이로 유유히 섞여 들어갔다.

잠시 동안 그것의 움직임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서 작은 나무배 안에 무영과 단둘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이런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그런 큰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있던 화연은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애써 가라앉혔다. 그리고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강바람을 느끼다 입을 열었다.

까만 밤 가득한 별을 가만히 헤어보다가

어느새 다가와 있는 그대의 숨결

바다 저 깊은 곳에서도 느낄 수 있을까.

바람에 섞여오는 그리움의 짠 내에

마음 한구석 버석거리며 외로움을 말할 때

그대 살며시 내 손을 잡아온다.

호수가 품은 단 하나의 달처럼

그대 홀로 내 가슴속에 있지만

흐르고 또 흐르고 넘치고 또 넘쳐 온 세상을 가득 적시네.

나를 온전케 해주는 단 하나의 이유.

그녀의 입에서 들릴 듯 말듯 약하게 읊조리는 노래 소리에 무영은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랑비인줄 알았던 소리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세찬 소나기로 변해있었다. 그 소나기는 순식간에 심장을 묵직하게 적시더니 움직일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이 넓은 강을 가득 채우더니 무영의 귀로 들어와 내부를 강하게 휘젓다 몸속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었다.

무영은 저도 모르게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화연이 노래를 마칠 때 까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따뜻한 물속에 잠긴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긴 숨을 내뱉었다. 자신들이 탄 배에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물위에 뜬 별무리처럼 작게 빛나며 흐르는 유등과 주변을 가득 매우는 은빛의 파루안 나무, 그리고 은은한 달빛에 비친 화연의 모습.

모든 걸 가슴속에 새겨 넣은 무영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은 죽을 때까지도 절대 잊지 못하겠구나.

진정, 내 평생에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무영은 이유 없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힘겹게 다시 삼켰다.

말없이 서로를 마주보고만 있던 그들 머리 위로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봄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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