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꽃을 문 짐승-83화 (83/110)

00083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남하강 상류를 향해 한참을 달리던 말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산 아래에서 급히 멈춰 섰다.

화연과 무영은 오래전 만들어 놓은 듯 세월이 느껴지는 정자에 짐을 옮겨두고 서둘러 겉옷을 벗었다. 4월의 따뜻한 날씨였지만 비를 맞으니 쌀쌀한 한기가 들었다. 한차례 부르르 떠는 화연의 등을 문지르던 무영은 짐에서 젖지 않은 옷을 찾아 화연에게 건네주었다.

“일단 겉옷만 갈아입어. 속곳까지 다 젖었어?”

“아니에요. 빨리 피해서 안에 입은 건 괜찮아요.”

“그럼 얼른 갈아입어. 고뿔든다.”

“당신도 어서 갈아입으세요.”

“응”

무영은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짐에서 아무 옷이나 찾아 대충 걸치고 자신의 젖은 옷으로 화연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분장이 다 지워졌어. 그냥 닦는 게 나을 거 같아.”

“제, 제가 할게요.”

“가만히.”

화연은 눈을 감고 얼굴을 얌전히 맡겼다.

무영은 화연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면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분장을 지운 그녀의 얼굴은 만개한 꽃 같았다.

무영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볼에 작은 홍조가 생겼다.

젖은 머리에서부터 이마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옷으로 훔쳐 주던 무영은 그 동그스름한 이마에 입을 맞췄다.

화연이 작게 숨을 들이 쉰다.

정자 지붕으로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렸다. 낡은 지붕 틈 사이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 졌다. 산에서는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시끌벅적했던 감현(縣)과는 분리된 것처럼 조용했다.

무영은 화연의 이마에 입술을 떼고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녀가 자신의 등 뒤로 팔을 감아 꼭 끌어당긴다.

그 커다란 충족감에 무영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이 조용한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았다.

애틋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너무 힘을 줬는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화연이 꼼지락거렸다.

숨 막히면 막힌다고 말을 하지.

그냥 참고 마는 화연이 더욱 사랑스러워 있는 힘껏 힘을 꽉 주어 끌어안았다. 품안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윽-”

피식 웃은 무영은 화연을 풀어주면서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춘 뒤 바닥에 모포를 깔았다.

기둥에 기대앉은 무영은 손을 내밀었다. 화연은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걸어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무영은 화연을 자신의 다리사이에 앉히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딱딱하게 앉아있던 화연의 몸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무영의 단단한 가슴에 등을 기대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비 내리는 풍경을 함께 바라보았다.

*

비가 점점 가늘어 지는 게 얼마 후면 곧 멈출 것 같았다.

이왕 쉬는 김에 점심까지 먹고 가기위해 도시락을 늘어놓고 식사를 시작하려던 그때 백마 두 마리가 빠르게 정자를 향해 달려왔다.

그들은 정자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미끄러지듯 능숙하게 내려 정자로 뛰어 들었는데 희한하게도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검은색 나비를 쓰고 있었다. 덩치로 보나 키로 보나 남자가 분명했는데 나비를 쓰고 있다니 처음 보는 일이라서 화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말없이 겉옷을 털더니 한쪽 기둥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고 이쪽에는 관심 없다는 듯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비를 쓰지 않은 남자는 나이는 많아 보이지는 않았는데도 눈가에 주름이 잡혀있는 서글서글한 인상이었다.

일어서있던 무영은 화연 앞을 교묘하게 가려 그들의 시선을 막았다. 그는 무영의 얼굴과 도시락을 훑어 본 뒤 생글생글 웃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같이 쉴 수 있을까요? 이 빗속에서 오랜 시간 말을 탔더니 몸이 으슬으슬 하네요.”

“......”

대답을 해줘야할 무영이 아무 말 없이 그 남자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화연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그러라고 하려는데 그제야 무영이 입을 열었다.

“벌써 올라왔잖아.”

“어이쿠! 그러네요.”

남자는 제 이마를 치는 과장스런 행동을 하더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꾸벅 인사했다.

그의 장옷 끝에서 흙탕물이 뚝뚝 떨어 졌다. 그가 움직이면서 여기저기 흘리는 구정물에 무영의 미간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다.

그 표정을 살피던 화연이 슬그머니 무영의 손을 잡았다.

남자의 옷자락에 살벌하게 꽂혀 있던 무영의 시선이 제 손을 잡아오는 화연의 손으로 옮겨졌다. 무영은 한숨을 쉬면서 그들을 감시할 수도 있고 화연을 가릴 수도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아 앉았다.

흙 구정물을 사방에 떨어트리던 남자는 나비를 쓴 남자의 곁에 앉아 있다가 점점 무영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차려진 도시락을 먹음직스럽게 쳐다보면서 침을 꼴깍꼴깍 바쁘게 삼켰다.

무영의 표정이 점점 무표정하게 변했다.

아까부터 굉장히 맘에 들지 않았다. 제 멋대로 정자에 들어와 더러운 물을 질질 흘리고 다니질 않나, 허락 하지도 않았는데 가까이 다가오지를 않나.

마음속으로 정해두고 있던 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칼을 꺼내기로 마음먹고 숨죽이며 기다리는데 화연이 한발 앞서 무영의 손에 젓가락을 쥐어 주었다. 무영이 고개를 돌리니 화연이 눈 꼬리를 늘어뜨리며 웃고 있었다. 마음속에 피어나던 살심이 단박에 숨을 죽였다.

“어서 드세요. 많이 시장하시죠?”

“음”

화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비를 쓴 남자의 시선이 무영에게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는 화연의 동그란 뒤통수에 가서 꽂혔다. 그 시선을 느낀 무영이 젓가락질을 하려다 말고 얼굴을 들었고 그와 동시에 남자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다른 남자는 어쩐 일인지 낭패라는 듯 얼굴을 굳혔다가 빠르게 펴면서 싱긋 웃었다.

“맛있으신가요?”

“......아직 안 먹었는데.”

“딱 봐도 맛나 보이네요. 많이 드세요.”

“......”

“저희는 이제 가봐야겠네요.”

“......”

남자는 좋은 시간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둥, 이것도 인연인데 이제 다시는 못 볼 테니 아쉽긴 하다는 둥 무영이 들었을 때 하등 쓸모없는 소리만 지껄이다 나비를 쓴 남자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가시지요.”

“비가 아직 안 그쳤잖아.”

“이정도면 우리 사는 곳을 생각 해봤을 때 비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난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먼저 설레발이야? 내가 뭐 어떻게 한데?”

“......어떻게 해서도 안 됩니다.”

“어차피 그들에게 주문해놓은 녹색머리 있잖아. 지금은 그 생각뿐이야.”

나비를 쓴 남자의 말이 끝나자 코웃음을 치던 남자는 소리를 더 낮췄다.

“허!......말씀은 참......그들이 진짜 녹색머리를 찾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찾기 힘들 거 같아서 일부러 그렇게 주문해 놓고는...”

“......아, 진짜. 거 참 말 많네. 아무튼 난 웬만해서는 동하지 않는다니까.”

남자는 고개를 뒤로 돌려 식사하느라 이쪽은 신경 쓰지 않는 무영을 살피다 아주 작게 소곤거렸다.

“목소리 듣고 예쁘겠다고 생각 안하셨단 말씀이십니까?”

“......”

“그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하셨겠네요?”

“......”

“그러다 마음에 들면 여느 때처럼 옆에 누가 있든지 말든지 강제로 들이대실 생각도 없으셨고요. 그죠?”

“......”

“여기 우리 땅 아닙니다.”

“......”

무영은 자신의 예민한 청각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한참 속닥거리다 일어서 정자를 내려가는 그들을 예의주시했다. 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녹색머리니 주문이니 하는 게 왠지 기분이 꺼림칙했다.

화연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무영을 물끄러미 보다 그의 등 뒤로 고개를 빠꼼히 내밀었고 말에 오르려던 나비를 쓴 남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비를 쓴 남자가 말을 타려다 말고 갑작스레 발을 헛디뎌 휘청 거렸다. 그 바람에 말 등에다 얼굴을 콱 박은 그를 옆에 있던 남자가 깜짝 놀라며 서둘러 부축 했다.

“윽!”

“전!......어, 어......괜찮으십니까?”

“씁- 방정 떨지 말고 말에 타. 아, 빨리!”

“예......?”

나비를 쓴 남자는 폼 나게 말에 올라 타 고삐를 잡아당겨 그림처럼 백마의 앞발을 들어 올리게 하더니 정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를 한참 쳐다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돌리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면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옆에 있다 백마의 발길질에 흙탕물을 옴팡 뒤집어 쓴 남자는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유유히 말을 모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보다 서둘러 말에 올라 뒤 쫒아갔다.

“아,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갑자기?”

“내가 뭘?”

“아니, 왜 갑자기 똥 폼은......휴......됐습니다.”

나비를 쓴 남자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다 한숨을 연거푸 쉬던 남자에게 물었다.

“하륜. 너 태어나서 검은 머리 본 적 있어?”

이 사람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진 남자, 하륜은 나비 안으로 보이는 청록색 눈을 비뚜름하게 쳐다보았다.

“......봤죠.”

“뭐? 언제, 어디서!”

“오늘, 저기 정자에서요.”

“......어째 니가 점점 기어오르는 거 같은데 이건 나만의 생각이냐?”

“......그, 그럴걸요?”

나비 안에서 푸른 눈이 가늘어 지더니 하륜의 얼굴을 집요하게 위아래로 훑었다. 하륜은 그 집요한 눈초리를 피해 허공을 이리저리 헤매다 한숨을 푹 쉬었다.

“......또,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나비를 쓴 남자는 아무 대꾸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자가 보이지 않자 그는 말을 세우고 나비를 획 벗어들었다. 금실로 만들어진 것 같은 황금색 머리가 나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는 머리를 갈기처럼 흔들더니 한차례 쓸어 올렸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이 하얀 그의 볼에 몇 가닥 달라붙었다가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먼 곳을 보듯 나른했던 시선이 하륜을 행했다.

하륜은 일견 천인처럼 보이는 저 화사한 얼굴 속에 숨겨져 있는 커다란 흥미와 약간의 소유욕을 읽고 눈썹을 모았다.

윽!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가 않다.

“하륜.”

“......예.”

“주문을 바꿔.”

“......어떻게요?”

“녹색에서 검은색으로.”

“......검은색이요?”

“응. 그리고 두 배에서 세배로.”

“세배씩이나요?......아니, 왜 갑자기......”

“난 태어나서 이제까지 본 검은머리는 방금 전 그 여자 딱 한명이야. 너도 그렇지?”

“헌데...”

“그런 상황에서 주문을 검은 머리로 바꾼다면 어떨까?”

“......”

희한한 머리색을 가진 남자의 등 뒤로 얼굴을 빼꼼이 내밀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 놓으라하는 미녀는 다 섭렵해 무뎌질 대로 무뎌진 자신의 가슴조차 단번에 흔들어 놓던 그 커다란 눈동자.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말 타다 자빠질 뻔했을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남자는 씩- 웃으며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륜, 우리 내기 할래?”

“무슨 내기는 그렇게 밥 먹듯이 하세요? 이번엔 또 무슨 내기요?”

“나는 그들이 내게 내려올 주문품이 바로 너와 내가 아는 유일한 한명이라는데 걸겠어. 너는?”

“......아니면요?”

“아님 말고.”

“예?”

“어차피 잠깐의 흥미를 위한 여흥 아니겠어? 아니면 그만. 맞으면...뭐,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것을 맛볼 수 있겠지. 생긴 건 아주 맛있게 생겼던데.”

“여자를 음식에 비유하는 그 시정잡배 같은 말투 좀 고치시라고 제가 몇 번을 말씀드립니까! 어이구......그나저나, 고세 얼굴을 보셨습니까?......하여튼 여자만 관련돼있다 하면 어찌 그리 빠르신지.”

“응. 아주 내 입맛에 딱 맞게 생겼더라고.”

“......그러셨겠지요.”

“얼른 걸어. 내가 지면 저번에 네가 갖고 싶다던 그 보검 줄게.”

그때까지 사람을 두고 내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하륜의 귀가 쫑긋 섰다.

“흠, 흠......그럼, 저는 아니오 에 걸겠습니다. 아무리 검은머리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고 해도 확률이 너무 낮습니다. 그나마 있는 확률도 옆에 있던 남자가 0으로 만들게 뻔합니다. 아까 보셨지 않습니까. 행여 우리가 눈독이라도 들일까봐 꽁꽁 숨기는 거. 여차하면 칼도 뽑을 기세던데요. 게다가 저 남자, 있는 집 자식입니다. 말도 명마에다가 행색을 보니 보통이 아닙니다. 양민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근데? 내가 잡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

“......그렇다고요.”

“음......하나 더. 주문을 바면서 이것까지 말해.”

“뭐라고요?”

“가급적이면 머리색이 희한하며 칼질 잘하게 생긴, 음... 양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런 키 큰 놈과 다니는 검은머리였으면 좋겠다고.”

“......”

“아! 이 근처에서 봤다고도 말해줘.”

“......그것까지요?”

“응.”

“......”

꼭 저 여자가 아니라도 상관없다며.

그냥 대 놓고 저 여자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

천인처럼 나긋나긋하게 생겨서 갖고 싶은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야 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 따로 없다.

또 죄 없는 연인만 욕보게 생겼구나.

집에서 세는 바가지 밖이라고 안셀까.

그의 난봉 짓에 이제껏 단련되어있었던 하륜도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

생긴거에 속지 말자.

robot83님. 권세레나님, jjeebb님, 큐라마녀님, 아이들2님, 곰문곰문곰문님, 안유님, acas님, chesy55님, miticita님 후원 정말 감사합니다.

이러다 부자 될 거 같아요...ㅜ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