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미령은 방문을 열자마자 진동하는 지독한 약초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침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도련님. 어서 일어나세요. 일어 나셔서 이것 좀 드셔 보세요.”
“...끙...”
끙끙거리며 침상에서 일어나는 남자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는 붕대로 빈틈없이 감겨 있었고, 옷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몸통까지 빼곡하게 멍으로 도배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방안에서 진동하는 약초냄새의 근원은 이 몸뚱이가 틀림없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도 측은함이 절로 일어나는 몰골이었다.
시퍼랬던 눈의 멍은 노랗게 변해 조금 있으면 없어질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비오는 날에 먼지 나도록... 그것도 동생한테... 쳐 맞은 남자, 류 강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미령이 주는 미음을 받아 들었다.
미령은 숟가락을 든 손이 아픈지 미간을 찌푸리다가 그래도 살겠다고 미음을 꾸역꾸역 먹는 류 강연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련님, 이제 팔은 괜찮으세요?”
“응. 이제 많이 나았어. 뼈는 붙은 것 같아.”
“다리는요?”
“그건 아직......”
“아휴......정말 상이도련님도 너무 하시지......아무리 도련님께서 단매에 쳐 죽일 짓을 벌였다 손 치더라도 그래도 형님이신데 어떻게 이 지경으로 만드실 수가 있으세요. 사람이 사람구실은 하게 해 놔야지요.”
“......”
단매에 쳐 죽일 짓을 한 류 강연은 고개를 수그리고 말없이 미음만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미령은 침상 앞에 쪼그리고 앉아 류 강연의 붕대를 살피며 혀를 찼다.
“아니, 막말로. 듣자하니 태자전하께서 혼자 그 난리를 치신 것도 아니고 우리 아기씨께서도 마음에 있으셨다고 하시던데 그럼 서로 눈이 맞은 게 아니냔 거예요. 물론, 강이 도련님께서 아기씨를 사지로 밀지만 않았어도 시작되지 않았을 일이었겠지만 말이죠.”
“......”
동생을 사지로 몬 류 강연의 고개가 더욱 숙여지며 동시에 어깨까지도 축 쳐졌다.
“시작이 어떻게 됐든 이미 마음이 통한 연인간의 사정은 아무도 간섭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제 말씀은, 도련님을 호적에서 파버리고 싶다는 가주 어르신의 마음도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지만 이게 순전히 도련님 탓만은 아니라는 거죠.”
“......”
가문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인 류 강연은 목이 메여 더 이상 미음을 넘기기 힘들었다.
미령이 얘가 내 두둔을 해주는 건지 아니면 교묘하게 나를 못살게 굴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매일 끼니때마다 빠짐없이 이러는걸 보면 후자 같기도 하고.
“......나 그만 먹을게.”
“그러세요. 안 넘어가시면 그만 드세요. 억지로 넘기셨다가 몸만 더 상하지요. 혹시 쫓겨나시면 그나마 몸이라도 건강해야 먹고 사실 거 아녜요.”
“......”
......후자였구나.
“아, 그리고 그 아가씨 또 오셨어요.”
“누구?”
“그 왜 있잖아요. 예진아가씨인가? 아기씨 친구분말예요. 그 귀신같은 애 데리고 다니는 아가씨.”
귀신같은 애?
류 강연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어......? 호, 호림이?”
“그 귀신같은 애 이름이 호림이에요?”
“응.....”
말끝을 흐리는 류 강연의 볼에는 홍조가 희미하게 어렸다.
꼴에 이름은 예쁘네...하던 미령은 갑자기 따지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그 예진아가씨라는 분 말예요. 그분은 왜 오시기만 하면 상연도련님 처소를 그렇게 쓸고 닦고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몇 번을 말렸는데도 들은 척도 안하시고 그러시던데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지 좀 물어봐 주세요. 아니, 내가 할 일을 왜 자기가 한담? 귀한 집 아가씨면 아가씨답게 얌전히 주는 차나 마시다 가시면 되지. 자기 집도 아니면서...아, 정말 신경 쓰여서 원.”
“......어......알았어.”
자기 영역을 침범당한 것에 대한 짜증을 류 강연에게 한참이나 풀던 미령은 미음 그릇을 가지고 나갔고 뒤이어 호림이 들어왔다.
머리도 신경 쓰고 옷도 예쁘게 입은 호림은 들어서자마자 류 강연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안겼다.
“윽!!”
“헉! 어머! 죄, 죄송해요......너무 기쁜 나머지......”
류 강연은 호림이 신경쓸까봐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하는 가슴을 만지지도 못하고 힘들게 웃었다.
“아, 아냐. 쿨럭, 쿨럭......괘, 괜찮아.”
호림은 류 강연의 불쌍하기 그지없는 몰골을 보다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얼굴을 쓰다듬었다.
“대장님......”
“호림아......”
류 강연은 자신의 볼을 만지는 호림의 차가운 손을 느끼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고 홍조는 더욱 진해졌다.
호림은 그런 류 강연의 얼굴을 뚫을 듯이 쳐다보더니 입술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잔뜩 트고 거친 입술에 호림의 차갑고 퍼런 입술이 마주 닿았다. 호림은 그 건조한 입술을 적셔주려는 듯 부드럽게 핥다가 조심스럽게 머금었다.
류 강연의 입술을 감미롭게 어루만지던 호림의 입술이 한참 만에 츱-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류 강연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호림은 류 강연의 젖은 입술을 훑어주다 노랗게 변하고 있는 눈가의 멍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대장님, 제가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요. 더는 안 되겠어요. 거동이 좀 쉬워지시면 이 집을 바로 나가세요.”
“응? 무슨 소리야? 집을 나가라니?”
“대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아랫것들부터 윗분들까지 죄다 대장님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아요. 이런 분위기에서 요양이 되겠어요? 오히려 병이 도졌으면 도졌지.”
“그래도 그럴 수는 없어. 내가 잘못한건 맞으니까. 아버지 화만 조금 풀어지시면......괜찮겠지.”
“그러니까 그때 까지만 이라도 떠나 계시라고요.”
“어디로? 혹시 궁으로 들어가란 말이야? 하지만 청룡궁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불편해서. 애들 보는 눈도 있고.”
“그게 아니고요. 가람지방으로 가세요. 가셔서 화연아가씨와 같이 돌아오세요. 어차피 협상단이 꾸려지면 거기에 경호 대원들과 합류 하신다면서요. 그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그 전에 가세요.”
“......”
류 강연의 갈팡질팡하는 생각을 훤히 들여다본 듯 호림은 침상에 앉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여기서 더 계시다가는 나을 것도 못 나아요. 거동이 편해지시면 먼저 출발한다고 하세요. 바로 뒤 쫒아간 상이도련님에게 여태껏 아무소식도 없다면 서요. 그러니 직접 화연아가씨를 모셔오겠다고 하시면 재상어르신께서도 아무말씀 안하실거예요.”
“......그래서 연이를 잡아 오라고?”
“아니요. 그건 절대 아니죠.”
“응?”
“그때쯤이면 두 분 사이에 뭔 일이 일어났어도 벌써 일어났을 텐데 도로 잡아와봤자 뭐해요. 이미 두 분의 대례식은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셔야 되요.”
“그럼?”
“끝까지 도와주셔야지요. 두 분께서 하고 싶은 데로 다 할 수 있도록 물신양면으로 도와주세요. 그리고 돌아올 때 같이 돌아오세요. 그리고...”
“그리고?”
호림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하늘같은 내 낭군님을 이렇게 걸레짝처럼 만든 사람들한테 꼭 복수하고야 말겠다.
“화연아가씨에게 이렇게 복날 개 맞듯 맞았다고 꼭 말씀드리세요. 특히 온몸에 든 멍은 꼭 보여주셔야 해요. 걸으실 때도 절뚝거리시고요. 왼쪽 팔은 아프다고 하시면서 아예 쓰지도 마세요.”
“호림아......그, 그건......좀......”
“이 집에서 가장 힘이 센 분은 화연 아가씨에요. 대장님께서 이렇게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걸 아셔야지 돌아오셨을 때 가족들에게 한소리 하실 거 아녜요. 저는 그냥은 못 넘어 가겠어요.”
“......고문이라니...그렇게 까지는......”
호림은 잡고 있던 류 강연의 손을 꽉 쥐었다. 류 강연을 애절하게 쳐다보는 호림의 시커먼 두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대장님. 저는 대장님 손가락에 난 생채기에도 속이 쓰려요. 할 수만 있다면 상이도련님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 심정이라고요. 저의 이런 맘 모르시겠어요? 낭군님......생각하면 잠도 안 온단 말예요.”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그들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아, 호림아......”
“낭군님......”
누가 볼까 두려운 이 바퀴벌레 한 쌍은 다시 한참동안 입을 맞췄다.
*
혼 주황은 아침 일찍 반쪽이 된 얼굴로 비틀거리면서 비단함을 들고 왔다.
아낙네 둘이 쓰러졌는데 손가락이 굽어서 펴지지를 않았다면서 예술의 혼을 불 태웠네 어쩌네 하면서 중얼거리다가 무영이 입 닥치라면서 건네준 주머니를 받아들고는 바로 쌩쌩한 얼굴로 변해서 돌아갔다.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분장까지 마친 화연은 여느 때처럼 무영의 품에 안겨 객잔 앞으로 나왔다.
말 지기 한조가 말 두 마리를 끌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나리, 말씀하신 것처럼 두 마리의 안장을 줄로 연결시켜 놨고요, 짐은 한 마리에 몰아서 실어뒀습니다. 짐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빠진 게 있는지는 나리께서 확인해 주셔야 합니다.”
무영은 대충 훑어보고 한조에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화연은 주변을 둘러보다 물었다. 그새 정들었는지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만조가 안보였다.
“그 종업원 분은 어디 가셨어요? 안보이시네요?”
“어......집에 일이 생겨 오늘 쉰다고 했는데...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전해드릴까요?”
“아, 그냥 그동안 고마웠다고 전해주세요. 참 친절하시더라고요.”
“아! 예, 예. 걱정 마십쇼. 제가 반드시 전해 드리겠습니다.”
무영은 굽실거리는 한조에게 살풋이 웃어주는 화연을 말 위로 올려준 뒤 한조에게 다가갔다. 그의 미간 사이에는 살짝 금이 가 있었다.
무영은 한조에게 낮게 속삭였다.
“전하지 마.”
“예......예?”
“말 못 알아들어? 전하지 말라고.”
“......예......”
무영은 당황스러워 하는 한조에게 손톱만한 은덩이를 던져주고 화연의 뒤에 올라탔다.
“조금 가다가 익숙해지면 말 따로 타요. 너무 민망해요.”
“...음...익숙해지면.”
익숙해져도 따로 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인 무영은 고삐를 끌어 당겼다. 말은 앞발을 약간 들려는가 싶더니 푸르르- 하며 갈기를 휘두르다 발을 앞으로 쭉쭉 내밀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다 한적한 개울가 옆에서 도시락을 꺼내먹은 무영은 졸리다 는 화연을 억지로 말에 태워 출발했다. 이곳에서 더 지체 한다면 산에서 노숙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직 밤에는 쌀쌀했기 때문에 화연에게 노숙은 무리였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데 화연이 너무 졸리다 면서 하품을 연신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뜨다가도 이내 감고 머리를 이리저리 까딱 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그냥 편하게 기대어 자라고 했더니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툭 기대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잠든 사람 한명 태우고 말을 모는 것은 일도 아니라 속도만 줄였을 뿐 계속 달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화연은 잠이 많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달리는 말 위에서 잘 정도로 신경이 무딘 편도 아니었다. 헌데 잠에 빠져든 화연은 한번을 깨지도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
결국 무영은 산 초입, 얼마 가지도 못하고 급하게 말을 멈춰 세웠다.
이 히히힝 투르르-
흥분한 말들이 투레질을 하면서 갈기를 좌우로 마구 휘둘렀다.
무영은 말의 목을 쓰다듬어 주며 진정할 때를 기다렸다가 제 가슴에 기대고 있는 화연의 얼굴을 살폈다.
안색만 봤을 때에는 어디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화연.”
무영이 화연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연아.”
볼을 두드리는 손에 힘을 실어도 화연은 미동도 없었다.
무영의 안색이 변했다.
이건...그냥 잠든 것이 아니다.
“연아! 화연!! 일어나 봐! 연아!!”
무영은 화연을 안고 말에서 급히 내렸다. 짐에서 모포를 꺼내 바닥에 깐 뒤 그 위에 화연을 눕혔다.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화연을 부리면서 이리저리 몸을 살펴보다 안 되겠다 싶어 마을로 다시 돌아가려는데.
그때, 멀리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무영이 고개를 돌려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누군가가 손을 좌우로 휘두르며 고함을 질렀다.
만조였다.
“나리!! 나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요! 나리!!”
무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얼마나 중요한 말이 있다고 여기까지 쫒아온단 말인가. 게다가 혼자도 아니었다. 만조는 예닐곱 명의 남자들과 같이 오고 있었는데 모두 무장을 한 상태였다.
무영은 품 안에서 칼집 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 화연 앞을 막아섰다.
빠르게 달려온 말들이 무영을 반쯤 에워싸면서 멈춰 섰다.
만조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한참을 허리를 두들기다가 무영을 내려 보면서 씩 웃었다.
“니미럴. 진짜 짜증나 뒈지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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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ddfe님 후원 감사합니다.
다음편에는 잔인한 묘사가 많이 나오니 마음을 굳게 잡수셔요.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당~
잔인, 잔인, 잔잔인.
ㅋㅋㅋ
코멘도 안주시고 그냥가시는 무정한 독자님들....
미워잉...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