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자네...돈 필요하지는 않은가?”
화연은 숨을 참고 있다가 거리를 살짝 떨어뜨렸다.
“무슨...... 돈이요?”
남자는 주위를 돌아보더니 더 작은 목소리로 은밀하게 말했다.
“남하강에는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은데 노잣돈이야 넉넉하게 있는 것이 좋지 않냐는 말이야. 모처럼 흔치않은 머리색에다 외모도 곱상한데 그냥 놀리는 것도 아깝고.”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라는 말씀이세요? 저는 싫,”
남자는 화연의 말을 듣자마자 큰소리로 웃더니 등짝을 팡팡 두들겼다. 화연이 고개가 앞뒤로 휘청 거렸다.
“아이고, 자네 참 재미있구먼. 내가 그런 푼돈 벌자고 이러겠나?...그런게 아니고, 음...그러니까 매달 화양주에서 열리는 일종에 고위관료들의 사교 모임인데 자네 같은 젊은이들은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시중이라고 해 봤자 크게 힘든 일은 아니지만 관료 분들 인심이 넉넉하셔서 일이 끝나면 큰돈을 만질 수 있거든. 어때? 생각 있나?”
화연은 남자의 입에서 풍기는 악취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두통마저 다시 생길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코를 틀어막으려다 너무 큰 실례라 겨우 멈췄다.
“아뇨, 생각 없는데요.”
“생각이 없다니? 허, 이 친구 참 답답 하구만. 자네가 물정을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절대 아니야. 모임의 성격상 단정한 외모가 필수적이긴 하지만 요즘 저잣거리에 나가면 잘생긴 청년들은 발에 차일정도로 많지 않은가?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 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청년들이 수두룩하다고. 허나, 자네의 특이한 머리색이 참 맘에 들기도 하고 분위기도 묘한 데가 있어 인심 써서 권해주는 거야.”
도대체 무슨 일인데 외모를 따지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연은 이 남자에게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저는 괜찮으니 다른 분에게 기회를 주세요.”
“아니, 왜? 이건 횡재한 거나 다름없다니까? 어차피 남하강으로 여행을 하는 중이라며? 그럼 화양주를 지나갈 거 아닌가. 며칠만 일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고. 재미있게 놀려면 돈이 있어야지.”
남자가 자꾸 끈질기게 굴면서 악취를 풍기니 화연도 기분이 나빠져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횡재 필요 없으니 됐다고요.”
“어허! 큰돈이라니까? 돈 필요하지 않아? 자세한건 말해줄 수는 없지만 그 돈이면 한 달 정도는 황체처럼은 힘들겠지만 태자처럼은 살 수 있을 걸?”
그 말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혹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태자와 같이 있는데 태자처럼 사는 것이 부러울 리 없는 화연은 전혀 관심 없었다.
“저희 돈 있으니 필요 없어요.”
남자는 화연의 행색을 유심히 살피는 척 하면서 머리를 굴렸다.
차림새를 봐서는 있는 집 자식은 아니다. 헌데, 손을 보니 굳은 살 하나 없는 게 크면서 돈 걱정 안하고 곱게 자란 손이다. 게다가 아까 등을 쳤을 때 남자 특유의 단단함이 아닌 여자의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마, 돈 좀 있는 양민의 집에서 고생 없이 자라다 남자와 눈이 맞아 밀월여행을 온 게 분명했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봐 이런 변장까지 하면서.
그놈 말이 맞았어.
검은머리 여자가 굴러들어 왔다고 해서 이게 웬 떡이냐 했는데.
관청도 없는 산간오지 마을이라면 이곳에서도 꽤 거리가 있을 테고...
변장까지 한 것을 보면 떳떳한 여행은 아니라는 의미일 터.
주변사람들에게 말도 안 하고 도망치듯 몰래 왔을 확률이 크군.
결론은......
횡재했구나!!
남자는 귀 아래까지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억지로 내리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인가? 정말 필요 없다고?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네, 네. 정말 이예요...그러니까 제발 그만 가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머리가 좀 아파서요...”
“흠...그래...? 아프다니 할 수 없지. 알았네. 그럼....어?”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으니 돌아가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야겠군...
남자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는데 눈앞에 커다란 남자가 우뚝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넌 뭐야.”
남자는 한걸음 뒤로 재빠르게 물러섰다.
가까이서 본 남자는 아까 전 멀리서 봤을 때와는 딴 판이었다. 사람을 짓누르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냉기가 흘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회색눈동자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전신에서 잔인하고도 고압적인 분위기가 풍겨 엄청난 미남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티가 안 났다.
남자는 이런 사람을 알고 있었다.
이놈은 살인을 해본 놈이다. 그 것도 여러 번.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군.
“별거 아닐세. 관청에서 나온 사람인데 자네 아우에게 뭘 좀 물어봤을 뿐이네. 요즘 탈주자가 있다고 해서 검문을 강화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거든.”
무영은 남자를 묵묵히 내려 보다 화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이런 일이 생겨나는군...화연 앞에서는 가급적 피를 보지 않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누군가 계속 방해하는 것 같았다.
“맞아?”
틀리다고 하면 백주대낮 거리 한복판에서 끔찍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화연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맞아요.”
“근데, 표정이 왜 그래?”
이렇게 두껍게 변장을 했는데 표정이 보이세요?
화연은 한숨을 쉬며 머리가 아파서요...하고 변명을 했다.
남자는 둘을 번갈아 보더니 뭔가를 깨달았는지 제 이마를 탁 치더니 무영에게 짓궂은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왜? 내가 자네 아우에게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을 까봐? 나 원 참. 이보게, 청년. 난 관청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맞네. 용건도 아까 말한 게 다고. 그리고 이래봬도 내가 눈이 좀 높네. 자네 아우가 곱상하기는 하지만 나이가 많아 내 성에 차는 건 아닐세. 그렇게 잔뜩 경계를 세울 필요는 없으니 눈에 힘 좀 풀게. 거, 무서워서 말이나 걸겠나? 어흠, 흠.”
“......”
뭐? 나이가 많아 성에 차지 않아? 이 중독자 새끼가...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게다가 남자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펄쩍 뛰지도 않는다. 이 새끼는 어린남자에게 발정하는 놈이다.
남자는 화연이 남장을 했기 때문에 장단을 맞춰 준 것 뿐이었지만 무영이 입장에서는 변태로 이런 상변태가 없었다.
무영의 눈이 가늘어 지면서 눈빛에 살기가 실려 나올 때쯤 종사하는 일의 성격상 위기감지 능력만큼은 탁월했던 남자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 횡재수를 빨리 보고 하기위해서라도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
“험, 험.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네. 여행 중이라고? 재미있게 즐기시게.”
무영의 차가운 눈이 대답도 듣지 않고 뛰듯이 걸어가는 남자의 등에 꽂혔다. 왠지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쫒아가서 죽여 버릴까 고민하고 있는데 화연이 자신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필요하신 건 다 산거예요?”
“...응”
“그럼 얼른 돌아가요. 저녁 때 다 됐잖아요. 식사 전에 씻고 싶어요. 아까부터 얼굴이 간지러워 혼났거든요. 그래도 긁지는 않았어요. 저 잘했지요?”
자신의 기분이 안 좋은 걸 느끼고 애교스럽게 말하는 화연을 보니 마음이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어차피 내일 아침 일찍 떠날 테니까......저 새끼를 손봐주는 건 갔다 오면서 해야겠군.
봐주자는 생각은 절대 안하는 무영은 화연의 허리를 감아 안아 올렸다.
“잘했어. 머리 많이 아파?”
화연은 엉덩이를 받치는 무영의 단단한 팔에 얼굴을 살짝 붉히다 풋-하고 웃었다.
“사실, 아까 그 남자 분 구취가 너무 심해서 머리까지 아프더라고요. 이제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돌아가면 약부터 먹어.”
“정말 괜찮은데....알았어요.”
화연은 무영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객잔으로 돌아왔다. 만조가 무영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튀어나왔다.
“나리! 필요하신 건 다 구하셨습니까? 제가 다 구해드릴 수 있다니까요 왜 힘들게 나가십니까. 아우 분 몸도 편찮으신데...”
“다 샀어.”
“예, 내일 아침 식사는 하시고 가실거지요? 도시락도 준비해드려야지요?”
“사인분 정도”
“예, 아침에 준비해서 배달 온 물건들과 함께 말에다 실어놓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씻을 물은 지금 가져다 드릴까요?”
“응”
“예, 나리.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별채로 돌아온 무영은 주머니 안에 든 것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저 말 많은 종업원의 말을 들어보니 임자 있다는 표시로는 이것이 최고라고 해서 구하긴 했는데 마을이 작아서 그런지 고르고 골랐지만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고에서 하나 가져올걸...
화연은 물을 한잔 마시고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무영에게 다가갔다.
“아까 시장에서 먹었던 당과가 너무 달았나 봐요. 목은 안 마르세요? 물 좀 가져다 드릴까요?”
무영은 대답 없이 화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볍게 당겨진 화연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무영의 허벅지 위로 풀썩 주저앉았다.
화연은 앉자마자 엉덩이에 불이라도 난 듯 벌떡 일어서는데 무영이 허리를 감싸 안아 다시 주저 앉혔다. 그의 탄력적이면서도 탄탄한 허벅지가 고스라니 느껴졌다. 화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왜, 왜 그래요...이거, 이거 놓아 주세요!”
“가만히 좀 있어.”
“놓고 말하세요! 어서요!”
움직이면 이렇게 할 거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무영의 팔이 화연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 당겼다. 엉덩이가 빈틈없이 밀착됐다.
그의 허벅지가 점점 더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치마였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지금은 한 겹의 바지만 입었을 뿐이었다. 온 몸의 신경이 엉덩이로 쏠렸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화연은 다시 놓으라고 말하려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
뭔가 꿈틀거렸다.
정말....뭔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설마......이거......그건 아, 아니겠지.......아니겠지......아닐 거야......
꿈틀-
그것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얏!!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화연이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어 있는데 무영이 한숨을 쉬면서 화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후...그러니까 움직이지 말랬잖아. 이런 상황에서는 움직이면 더 안 좋아. 조금만 더 가만히 있어.”
“......”
화연은 고개를 돌리다 그를 자극할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돌려서 무영을 쳐다봤다. 어깨에 이마를 대고 무언가를 인내하던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이마를 들어 올렸다. 화연은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그는 어색하게 굳어있는 화연의 얼굴을 조용히 살펴보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싫어?”
화연은 울고 싶었다.
질문이 뭐 이렇게 불친절해......너무 포괄적이잖아. 뭐가 싫은지 주어정도는 얘기해 줘야지!
“......어......뭘.......”
“알잖아.”
몰라요! 모른다구요! 엉엉엉......
정말이지 이러고 싶었다.
자신이 실제로 18살 이라면 그랬겠지. 하지만 나는 18살 어린애가 아니다. 게다가 그와의 관계가 변한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을 그가 알아서 해주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연인 관계라는 건 서로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상대방이 다가오면 나도 같이 다가 가야한다.
그리고...... 사실은 싫지 않았다.
화연의 대답을 기다리는 무영의 얼굴에는 아주 드물게 긴장이 흘렸다.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해서 설득시켜야 할지 앞길이 막막했다. 집에서만 곱게 자란데다 대부분을 병상에 누워 지냈으니 정말 제 얘기가 뭘 뜻하는지 모를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칠 자신도 없었지만 가르친다 하더라도 어디서부터 알려줘야 할지 계산도 안 섰다. 그전에 제가 말라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
“싫은 거야?”
“......아, 아직...준비가......”
긴장이 일시에 풀리며 무영의 입에서 안도의 긴 숨이 터져 나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도 알고 그게 싫은 것도 아니니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래. 준비가 안 된 거지 싫은 건 아니야. 그렇지?”
“......”
끄덕
“준비가 되면 이걸 나에게 건네줘.”
무영은 시장에서 산 그것을 꺼내 화연의 앞에 들어올렸다.
그것은 반지였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투명한 보석이 박혀있었지만 그다지 휘황찬란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단순하고 소박했다.
화연의 심장이 쿵 떨어지며 한 박자 쉬더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찾아봤는데...이런 곳에는 검푸른 색의 돌이 박혀 있는 건 없대.”
“...너무... 예뻐요. 꼭 당신 눈동자 색깔 같아.”
“맘에 들어?”
“...네... 정말, 정말 맘에 들어요.”
무영은 화연의 반응이 좋았는지 피식 웃으며 반지를 끼워줬다.
화연은 반지를 낀 손을 쫙 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꼭 결혼반지 같았다.
연우일 때에도 껴보지 못했던 거였는데...마음이 벅찼다.
이 남자, 정말 나를 사랑하는 구나..
감동스러운 마음에 반지만 한 없이 보고 있으려니 무영이 작게 속삭였다.
“그게 빨리 내 손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
“......”
끄덕-
화연의 고개가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저도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무영은 참지 못하고 볼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입술에도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화연이 입을 가리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무영의 입술을 문질렀다. 손가락 끝에 어두운색 분가루가 잔뜩 묻어나왔다. 그녀의 울상이 더욱 짙어졌다.
“이거...화장...엄청 묻었어요...”
몸살 나겠군.
울상을 하느라 굵게 그려진 눈썹이 八자 모양 마냥 아래로 축 내려가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무영은 화연을 꽉 끌어안으며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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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지적 마구 해주세요~
코멘 좀 주세요...그거 읽는 낙으로 사는뎅...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