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2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류 상연과 기해가 화연과 무영을 따라 잡지 못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멀리 갔을 줄로만 알았던 화연과 무영은 수도를 벗어나자마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춰 섰기 때문이다.
류 상연과 기해는 그것도 모르고 죽어라 달리다 앞질러 버렸으니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커다란 객잔 앞에서 말을 세운 무영은 서둘러 뛰어 내렸다. 자신이 내리자마자 쓰러지듯 옆으로 몸을 기울이는 화연을 품에 안으며 모둘 안을 들여다봤다. 화연의 얼굴은 통증을 참느라 희게 질려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연아, 상처가 아물 때 까지 여기서 머물자. 안 되겠어.”
“저는...괜찮아요. 그냥...가요.”
“안 돼. 말을 타면 두통이 더 심해지잖아. 차라리 다 나을 때 까지 기다리다가 빠르게 가면 돼. 아직 시간 많아.”
무영은 더 이상 화연의 말을 듣지 않고 어서옵쇼-를 크게 외치며 달려 나오는 종업원 만조에게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가장 좋은 객실. 두ㄹ......하나.”
가장 좋은 방을 달라는 무영의 말에 만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이고! 손님. 저희가 방하나는 아주 끝내 줍니다. 저, 근데...후원으로 가면 별채도 있는데 거기는 주변에서 묵는 손님도 없고 아주 조용하지요. 정원도 단독으로 사용하실 수 있고요. 조금 비싸긴 하지만...”
“거기로.”
“넵! 바로 모시겠습니다! 한조야! 한조야!! 아니, 이놈이 어디로 갔어...야! 이놈아! 빨리 와서 고삐 안 받아? 빨리 받아! 아하하. 죄송합니다. 손님들, 이쪽으로 오시죠.”
만조를 따라 객잔 후원으로 들어서니 붉은색 기와를 얹은 소담한 별채가 서있었다.
안으로 들어선 무영은 먼저 침상을 찾아 화연을 눕혔다. 침상에 내려주자 마자 몸을 둥글게 말며 쌕쌕 숨을 몰아쉬는 그녀는 안색이 너무 파리해 보였다.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르고 말 모는데 정신이 팔려 이제야 알아챈 자신이 너무 한심스러워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물”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만조는 그 동안 쌓아온 눈치로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탁자에서 물을 따라 가져다주었다. 무영은 물 잔을 받아들어 화연의 입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었다.
“연아, 물 좀 마셔봐.”
“응...”
“천천히”
무영은 물을 마신 화연을 침상에 다시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준 뒤 언젠 가처럼 배를 토닥거렸다.
만조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저...일행 분이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약을 좀 가져다 드릴까요?”
“그건 됐고... 환초(換草)를 구했으면 하는데.”
“예? 환초요?”
환초는 독초의 일종인데 희한한 효능이 있었다. 많은 양을 사용하면 온몸을 녹여 버리는 독초였지만 소량을 으깨어 물에 섞어 마시면 일시적으로 눈동자를 포함한 체모의 색을 바꿔 주었다.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흐릿하거나 진하게 바꿔주었다.
때문에 어떻게 얼마나 바뀔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애용했었다. 하지만 점차 현(縣)을 몰래 넘어가거나, 죄를 지고 야반도주를 할 때 변장의 도구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불법이현민들의 전유물처럼 되어 버려 금지 약초로 지정된 지 오래였다.
“어이구, 손님. 그러다 걸리면 저희 장사 접어야 합니다요. 그게 금지 약...”
툭-
무영이 던진 주머니가 만조의 말 앞에 떨어졌다. 주머니를 들어보니 묵직한 것이 꽤 많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숙박비용은 따로 주지.”
“...초이지만 요즘 세상에 못 구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저녁까지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좋아.”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식당으로 오시면 언제든지 가능하시지만 가져다 드릴수도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추가 비용은 있지만 번거로움을 싫어하시는 많은 분들이 택하시는 방법입니다.”
툭-
무영이 주머니를 다시 던졌다. 주머니를 들어 안을 슬쩍 들여다본 만조는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나리, 최고로 모시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뭐든지 말씀만 해주십시오. 저희를 종 이라고 생각하시고 마구 부리셔도 됩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식사는 잠시 후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피로를 풀려면 뭐가 좋지? 말을 오래 탔어.”
“말을 오래 타셨으면 전신 안마를 해주거나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해도 좋을 겁니다. 헌데 목욕물은 받는데 시간이 좀 걸리니 급한 대로 족욕 먼저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데...준비해 드릴까요?”
“가져와.”
“예, 예. 그럼요. 가져다 드려야지요. 족욕하실 정도의 물은 금방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머리가 땅에 닿을 것처럼 굽실거리던 만조가 나가고 무영은 화연의 파리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화연은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가득한 걱정의 기색을 읽고 웃으면서 무영이 쓰고 있던 모둘을 뒤로 넘겨주었다. 얌전히 머리를 숙여주던 무영은 모둘에 눌러 숨 죽어있던 머리를 한차례 쓸어 넘겼다.
“답답하지 않아요? 저는 계속 쓰고 있으려니 앞도 보이지 않고 너무 답답하던데...”
“내일이면 깊게는 눌러 쓰지 않아도 되니까 조금만 참아.”
화연은 머리가 깨질 듯 했던 통증이 약간은 가셨는지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하아...지금쯤 난리가 났겠지요? 아버지께서는 얼마나 걱정 하실지...”
화연의 어두운 얼굴을 보던 무영이 나직하게 물었다.
“후회 돼?”
덩달아 어두워지는 무영의 얼굴에 화연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아무래도 효녀는 아니었나 봐요. 걱정은 되지만 후회는 안돼요. 실망하셨어요?”
“아니. 다행이야. 돌아가고 싶다고 졸라도 안 들어주려고 했거든.”
“정말요?”
“응.”
“정말? 제가 간절히 부탁해도요?”
“...응.”
“진짜? 아버지 보고 싶다고 울면서 애원을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 한 화연의 눈빛을 마주보던 무영은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우는 건 반칙.”
아...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너무 귀엽잖아.
생각해보니 23세라는 나이는 연우일 때의 자신을 떠올려 보면 어려도 한참 어렸다. 화연은 웃으면서 무영의 손을 장난스럽게 콕콕 찔렀다.
“음...조금 실망스럽긴 하지만...알았어요. 우는 건 반칙. 앞으로 뭔가를 부탁할 때 울지는 않을 게요.”
무영은 자신의 손등을 간질이는 화연의 손을 잡아 채 꼭 쥐었다.
“돌아간다는 얘기만 아니면 다 들어줄게.”
손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부끄러워진 화연은 손을 뺄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맞잡았다. 연우일 때 자신은 결혼도 하기 전 애도 가졌었는데 이정도가 뭐 어떻다고 피할 까 싶었다.
이제 우리는 여, 여, 연인 사이인데...
자신도 사람인지라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니 손도 잡고 싶고, 입도 맞추고 싶고, 꼭 안기고도 싶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실제로는 손잡은 것만으로 얼굴에 홍조를 가득 띄울 지라도...
무영이 볼을 붉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연에게 모둘을 뒤집어씌우더니 자신도 뒤집어썼다. 화연이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데 문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똑똑-
“저...나리, 씻을 물 대령했습니다. 어디다 놓을까요?”
“이리로.”
“예! 저녁 식사 후에는 아까 말씀하신 그것과 함께 목욕물도 대령해 놓겠습니다.”
무영은 화연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둘이 마주 잡고 있던 손을 흘끔 본 만조는 좋은 시간 보내시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무영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화연의 카울을 벗겼다. 그리고 자신의 카울도 벗어 던지더니 소매까지 걷어 올리고서는 침상위에 있던 화연의 발을 끌어 내렸다.
“어, 왜요?"
“발 씻겨줄게.”
이 남자가 뭐하려고 이러나 했던 화연은 기겁을 하며 발을 들어 올렸다.
“예?! 저, 저는 됐어요!”
“말을 오래 탔잖아. 내일이면 몸이 많이 쑤실 거야. 그전에 족욕을 해 두면 덜 고생한대.”
“그래도 저는 싫어요! 발을 어떻게...”
“왜? 우리는 성혼할 사이인데?”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무영의 질문에 화연의 말문이 막혔다.
아니...그게 그렇긴 한데...
연우였을 때 그 세계에서는 맨발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슬리퍼와 샌들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발을 보이는 것은 알몸을 보이는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곳이라 한여름에도 주선은 꼭 신었다.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인 것 같지만 연인 사이에서까지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정도는 또 아니다. 연인끼리의 비밀스런 사정은 그들만의 것이지 다른 사람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도 큰 실례였다. 화연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무영이 발을 잡아 내렸다.
“어서. 물 식기 전에 해야지.”
“그, 그럼 제가...”
“안 돼. 내가 할 거야.”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질러 나온 그의 단호한 말에 화연은 망설이다가 발에 힘을 슬그머니 뺐다.
무영은 화연의 주선을 벗긴 뒤 치마를 살짝 들어 올렸다. 하얗고 부드러운 조그마한 발과 가느다란 발목이 나타났다. 포박자국이 고르란히 남아있는 부분을 들여다보던 무영은 그 윗부분을 잡아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따뜻한 물속으로 발이 들어가니 화연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눈이 절로 감기며 긴 숨이 나왔다. 발만 담갔을 뿐인데 몸이 노곤 노곤 해지는 게 피로가 순식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발은 부드럽고 아주 말랑거렸다. 아이의 발을 본적은 없지만 딱 이것과 같겠지. 무영은 분홍빛 작은 발가락이 물속에서 꼼지락 거리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다 시선을 올렸다.
눈을 감은 편안한 표정의 그녀는 이것이 아주 마음에 들었나 보다. 민망해 하는 기색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앞으로 매일 해줘도 크게 꺼려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영은 입가를 살짝 올렸다.
“뜨겁지는 않아?”
“응...딱 좋아요. 아..시원하다.”
피식 웃은 무영은 화연의 발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발등을 엄지로 누르다가 발 날을 꾹꾹 지압해주었다. 두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발을 감싸 주물러 주다가 발가락 사이로 검지를 집어넣으려는데 화연의 몸이 크게 튕겨 올랐다.
“으읏....!”
그녀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다가 침상으로 풀썩 쓰러졌다. 양손으로는 이불을 꽉 부여잡고 어깨를 바들바들 떨어 댔다. 방금 전까지 민망해 하던 기색은 싹 사라졌지만 이제는 다른 뭔가가 있었다. 그 갑작스럽고 격렬한 반응에 무영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발을 자세히 살펴봤다.
겉보기에는 상처도 없이 멀쩡한데...속안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무영이 신중한 표정으로 발가락을 다시 건드리자 이번에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면서 참기 힘든 것처럼 얼굴을 이리저리 돌렸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그 반응에 제 귓불이 붉어지는 것도 모른 채 멍하니 구경하다 무심코 그녀의 발바닥에 손끝이 느리게 스쳐 갈 때였다.
끝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 있던 동그란 눈매가 초승달마냥 크게 휘더니 기어코 붉은 입술을 보기 좋게 벌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하하하하하...! 자, 잠깐....하하하...하하....! 아우...아하하하...그만, 그만.....! 으응...그만...하세요!!”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얼굴에서 떨어져 나와 포물선을 그리며 추락했다. 이제 웃는 게 힘든 건지 끙끙거리는 소리까지 간간히 섞여 나왔다. 화연이 터트리는 웃음소리와 묘한 신음성이 무영의 귓가를 간질였다.
듣기는 정말 좋았는데 문제가 생겼다. 그 간질거림이 점차 자리를 옮기더니 심장을 한차례 꽉 움켜쥐고 나서 단전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거세게 쾅쾅 내려치기 시작했다.
멍하던 무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자신의 뼈저린 실책이 무엇이었는지 지금 방금 깨달았다.
같이 궁을 떠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그 후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둘만 있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만 했지 이렇게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어쩐지 화연과 가람지방을 다녀오겠다는 자신에게 괜찮겠냐고 물으시던 아바마마의 기묘한 눈빛과 말씀이 떠올랐다. 좀 늦어도 좋으니 돌아 올 때 셋이 온다면 이 애비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열심히 노력해 보거라. 알았지? 하시며 눈썹을 의미심장하게 들어 올렸었다.
당시 이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가 했지만 마음이 급해서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었는데...
이렇게 멍청할 수가! 정인과 한방에 같이 있는데 어떻게 자극을 안 받을 수 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객실을 두 개 잡을 걸 그랬나...
아니, 그건 안 되지.
그녀 혼자 덩그러니 놔두는 게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옆에 두고서 대놓고 힘들고 말지. 그리고 뭐 어떤가. 화연은 내 것인데.
애초부터 이런 곳에서 쉽게 안을 생각도 없었지만 대례식까지 참는다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무영은 그녀가 원하는 곳에서 적당한 때에 안을 결심을 세웠다.
이제 그녀가 허락해 줄때 까지는 꼼짝없이 인내와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생겼군. 그래. 참을 수 있을 때 까지 참아보자. 지금은 너무 일러. 몸도 성하지 않고.
음...한 닷새정도면 될까?
그때까지는 도를 닦는다는 심정으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화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조금쯤 가라앉았는지 숨을 헐떡거리며 눈물을 닦고 있었다. 부푼 가슴이 빠르게 오르내렸다. 숨을 내 뱉는 붉은 입술은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안으로 더 붉은 혀가 살짝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뭔가를 연상시키는 그 얼굴에서 서둘러 시선을 떼고 아래로 내렸다. 몸부림에 치맛자락이 올라가 종아리가 훤히 보였다. 그 투명 하리 만치 하얗고 모양 좋은 종아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무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의 결심이 풍전등화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닷새는 너무 길었다.
한...삼일 정도면...
후...이거야 말로 고문이 따로 없군.
“......조금만... 참아.”
화연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무영은 입술을 질끈 물고 화연의 발을 다시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안 돼...!! 아하하하하하, 으흑....하하하하...하하하! 아읏......하하하하하.”
화연이 다시 몸부림을 치면서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무영은 울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