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 =========================================================================
연제는 급했다.
어서 그 놈이 오기 전에 이곳을 떠야했다. 삼일 밤낮 시간을 끌었으니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무영, 이놈이 확실한 도장을 찍겠지. 그 동안은 무조건 저 찰거머리 같은 놈을 피해야 했다.
아휴...아들 사랑 한번 이뤄 주겠다고 황제씩이나 돼서 사돈을 피해 다녀야 하다니.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찔리는 게 한 두 가지여야지.
차라리 황명으로 눌러버릴까......
그럼, 이번에야 말로 진짜 역모가 일어나겠지.
황제의 자리에는 미련이 없지만 하나 밖에 없는 친우이자 황후와의 황금 같이 소중한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단 한명의 곁붙이를 잃을 수는 없었다.
“진 내관! 뭘 그리 꾸물거리는 게야! 대충 챙기라니까!”
“폐하...그럼 소신에게 미리 그곳을 단장하라고 명을 하시지...왜 이리 갑자기 서두르시는 겁니까?”
“지금 몰라서 묻는 게야? 미리 명해놨다가 그놈이 눈치라도 채면? 그럼 자네가 책임 질 텐가? 현 상황에서는 거기가 제일 안전해. 그러니까 빨리 챙기라고! 며칠만 있을 텐데 뭘 그리 바리바리 싸는 게야!”
“하오나, 폐하. 집무를 그곳에서 보시려면 챙겨가야 할 것이 많을 것이옵니다. 거긴 아무것도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괜찮다니까 그러네! 모자란 거는 밤에 니가 몰래 챙겨오면 되잖아! 궁녀든 상궁이든 아무에게도 말 안했지? 이 일이 절대로 세어 나가서는 안 되네. 아, 그러니까 시찰 나가버리면 쉽게 해결되는데 이게 뭐냐고! 대학사와 그 떨거지들이 한번쯤 내 앞을 막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발을 걸지는 몰랐다! 그놈들은 아주 끝까지 밉상이지!”
“폐하...지금 역모가 발각되어 나라 안이 어수선한데 이 상황에서 민가시찰을 나가실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거처를 옮기시는데 어떻게 누구에게도 언질을 안 할 수 있겠사옵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그니까 빨리 하라고!!”
대전을 왔다갔다 정신없이 서성거리던 연제가 허공을 향해 이름을 불렀다.
“명.”
연제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온통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까지 뒤집어 쓴 사람이 창으로 날아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넌 지금 무영을 쫒아가라. 가서 내 아들과 며느리를 보호해. 그리고 추격하는 사람이 발견되거든 적당히 방해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는 연제에게 어떤 손짓을 했다. 그것을 읽은 연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상처를 입혀서도 죽여서도 안 돼. 그냥 방해만 해라. 그리고 태자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눈치 채지 않도록 신경 써. 아, 글은 쓸 줄 아나?”
끄덕
“그럼 보고하는 거 잊지 마. 적어도 삼일에 한 번 씩은 밀서로 보내. 특히 둘이 얼마나 진전이 있는지 낱낱이. 알겠나?”
남자는 고개를 깊게 숙이더니 창밖으로 훌쩍 사라졌다.
황제를 수호하는 그림자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 진 내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폐하. 말로만 들었었는데 실제로 보니 재주가 참 신묘합니다. 그림자인데 글은 또 어디서 배웠을까요?”
“내가 어떻게 알겠냐. 쓸 줄 안다니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오호...폐하, 소문에는 말을 못한다던데 그건 사실입니까?”
“성대가 잘렸으니까....근데 너 자꾸 쓸데없는 소리 하며 미적거릴래? 청룡궁 소속으로 바뀌고 싶냐?”
“......지금 다 했습니다. 폐,”
“황제폐하, 재상 류 충 들었사옵니다.”
문밖에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연제가 진 내관을 획 노려보았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진 내관이 어깨를 움츠리며 시선을 피했다.
“너......니가 말했지.”
“폐, 폐하. 오해이시옵니다...전 아무 말도...”
“됐어! 나중에 보자. 흠, 흠......들라하라.”
대전의 문이 열리고 류 충이 들어왔다. 발을 쿵쿵 굴리며 들어온 류 충은 옥좌 앞에 떡 하고 버티고 서더니 예를 성의 없게 올린 뒤 연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폐하, 오래간 만입니다?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그렇게 찾아다녀도 알현 할 수가 없어 저는 어딘가로 몰. 래. 떠나신지 알았지 뭡니까?”
그 강렬한 시선에 연제는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음...그랬나? 좀 바쁘긴 했지. 짐이 요즘 내각 신료 등용문제 라든지 죄인들의 재산 환수 문제도 그렇고 여러 가지일로 바쁘지 않소. 흠...재상, 차라도 한잔 드시겠소?”
“차는 됐고, 다른 걸 주십시오.”
“응? 뭘 달라고 그러시오? 가져갈 거 있으면 가져가시오. 우리사이에 그 정도는 해줘야지”
류 충은 품 안에서 장계를 꺼내더니 진 내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진 내관은 류 충과 연제의 눈치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와 멀찍이서 손을 뻗어 장계를 후딱 들더니 연제에게 건넸다.
“이건 뭐요?”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건 엊그제 짐이 반려한 문건 아니오?”
“예, 그렇지요.”
“근데 이걸 왜 또 가져오셨소?”
“다시 읽어보시고 결재해주시지요.”
“커흠...이건 불가하다 하지 않았소.”
“......폐하, 진정 이렇게 나오시깁니까?”
연제는 한숨을 과장스럽게 푹 내쉬더니 서궤를 두들겼다.
“재상. 재상도 한번 생각을 해보시오. 전쟁협상 마무리를 하러간 태자에게 자국의 군사를 보내 잡아오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남들이 알까 두렵소.”
“폐하! 누가 태자전하를 잡아오라고 했습니까? 제 딸 말입니다! 우리 화연이! 금쪽같은 내 새끼! 우리 연이 데려오겠다고요!!!”
연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대전바닥까지 치면서 강짜를 부리는 류 충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헛기침을 했다.
“어흠, 흠. 그건 이미 보물을 주기로 하고 의전회의에서 통과까지 된 안건 아니오? 게다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태자비 후보 중 한명이니 태자가 크게 틀린 행동을 한 것도 아니지 않소. 원래 마음에 둔 정인이기도 했고. 우리 며ㄴ...연이도 마음이 있으니 따라간 것이 아니겠소. 아니 그렇소?”
류 충의 눈이 가늘어 지더니 연제를 모로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연제가 류 충이 말을 꺼내기 전에 선수를 쳤다.
“그러나! 아무리 지들끼리 마음이 통했다고는 하나, 허락도 없이 일을 이렇게 저지른 것은 잘못된 행동이지. 짐도 태자가 돌아온다면 크게 꾸짖어 주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는 중이오.”
“......그렇습니까? 어쩐 일로요?”
“당연하지 않겠소. 재상이 우리 며ㄴ...연이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는데 이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태자의 월권이 아니오? 짐도 태자가 우리 며...연이를 데리고 협상자리에 갈지는 꿈에도, 전혀, 단 한 번도 생각 못했소. 그 놈이 몸이 달ㅇ...아니,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서 그랬나 본데, 그 심정이 이해는 가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당연히 장ㅇ...재상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게 수순이지. 그렇지 않소?”
“...중간 중간에 굉장히 부적합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제 기분 탓입니까?”
“...기분 탓이오.”
“흠.....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당연히 그랬어야지요. 그럼 그 안건은 허락해 주시는,”
“허나! 그렇다고 해서 한나라의 태자에게 군대를 보내 끌고 올 수는 없는 법. 게다가 이 민감한 시기에 군사가 가람지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륜국에서 안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냐는 말이오. 전쟁이라도 다시 일어난다면 죄 없는 백성들만 죽어나가지 않겠소. 그리고 재상의 셋째 아들이 뒤 쫒아 갔다고 하지 않았소? 얼마 뒷면 협상단도 출발 할 테고. 그때 군사를 딸려 보낼 것이 아니요. 그러니 마음을 좀 가라앉히고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군대운용 만큼은 재상의 권한 밖으로 황제의 승인이 필요했다. 마음 같아서는 군대란 군대는 모조리 보내고 싶었지만 며칠 동안 계속 거부만 하는 연제 때문에 속이 터졌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짐승 같은 놈이 우리 연이를 물고 털이 휘날리도록 내빼고 있을 터인데! 한시가 급한 이 판국에, 당장 군사를 일으켜서 쫒지는 못할망정 무슨 얼어 죽을 ‘조금만’ 이란 말인가!
자신이 직접 추격대를 꾸려 쫒아가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화연에 대한 추문이라도 날까 선뜻 하지도 못하니 류 충은 애가 탈대로 탔다. 할 수 있는 일은 각 현 마다 수상한 자에 대한 수색을 강화하라는 공문을 보내는 것이 다였다.
“조금만, 조금만 하다 삼일이 지났습니다! 상이 놈이 잡았으면 벌써 따라 잡았겠지요! 아직 까지 연락이 없다는 것은 놓친 거지 뭐겠습니까! 폐하! 저 죽는 꼴 보고 싶으셔서 이러십니까!”
“아, 그러니까 둘째는 왜 그렇게 쥐어 패서 사경을 헤매게 만들었단 말이오! 류 대장이 있었다면 대원들을 이끌고 바로 추격했을 거 아니오. 태자의 경호대이니 명분도 충분했을 텐데! 하여튼 그 성질머리 하고는... 쯧쯧쯧.”
류 충은 연제의 타박에 성질을 내기는커녕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눈을 댕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폐하, 둘째라니요? 혹시 상이 말씀하시는 겁니까? 걔는 연이 쫒아 떠나지 않았습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요? 류 상연은 셋째가 아니오. 재상의 둘째아들 류 강연 말이오. 지금 재상의 사가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지 않소. 갑자기 왜 그러시오?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 나이에 벌써 치매라도 온 거요?”
“아! 제 사가에서 잠시 머물고 있는 그분 말씀이십니까?”
“...그분...이라니?”
“폐하, 그분 성함은 류 강연이 아니옵니다.”
“...그럼?”
“그야 저도 모르지요. 헌데 류가는 절대, 절-대 아닐 겁니다. 류가라면 제 혈연이라는 말인데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며칠 전 처음 봤습니다.”
“...그렇소?”
“그럼요. 폐하. 저는 아들이 둘이옵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말하던 류 충은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얼굴을 살벌하게 굳히며 손가락 두 개를 펴서 쭉 내밀었다. 그리고 악다문 이 사이로 단호하게 외쳤다.
“내 아들은 딱 둘!!!”
“......알겠소.”
*
산 속에는 제대로 된 길도 나있지 않았다.
8척은 넘어 보이는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며 빼곡하게 자라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아 산 속은 눅눅하고 어두웠다.
도저히 말을 타고 달릴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말에서 내려 끌고 가던 기해는 마찬가지로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류 상연을 불러 세웠다.
“도련님...이 길이 맞아요?”
“......응......”
“어? 이상하네... 저 방금 그 나무 또 봤어요. 엄청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요. 아까부터 몇 번이나 본거라 눈에 익었단 말예요. 진짜 이 산, 와보셨던 곳 맞는 거죠?”
“......응......그럴...걸?”
“.....그럴걸? 그럴꺼-얼?! 도련님!!! 지금 우리가 산을 헤맨 지 반나절도 더 지난 거는 아세요? 지리는 꽉 잡고 있으니 도련님만 믿으라면서요? 이 산을 넘어가는 게 지름길이라면서 호언장담을 하셨잖아요! 그럼 아침부터 몇 시진을 같은 곳만 뱅뱅 돌았던 거예요? 어쩐지 내가 이상하다고 했어! 산이라 해도 빨리 저물 텐데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음......노숙......?”
“노숙?”
“...응...”
“후- 그래요. 노숙...뭐 할 수도 있죠. 노숙은 그렇다 치고, 이제 도시락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아시죠?”
“...응...도시락... 맛있었어.”
“맛있!! 후-, 후- 침착하자. 그럼 노숙에다 쫄쫄 굶어야 하는 상황인 것도 아시겠네요?”
“......음......그런가...?”
그런가...? 이 사람이 정말! 지금 장난하나! 기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훗- 도련님.”
“...응...?”
“이 산에 그냥 묻어 드릴까요? 우리 아기씨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싶으셔요? 말씀만 하세요. 고통은 잠시뿐. 바로 편안하게 해 드릴 테니까요.”
“......어......? 화났어......?”
“지금 화를 안내게 생겼어요?! 그러게 왜 편안한 길 놔두고 쓸데없이 산은 넘어 가자고 고집을 피우셔서 일을 이 지경에 이르게 만드시는 거예요! 그리고 무슨 사람을 쫒는 이 마당에 삼시세끼는 다 챙겨 드시는 거구요! 아껴먹으면 5일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는데 3일 만에 동이 났잖아요! 우리가 지금 놀러왔어요?”
“...말이 빨리...못 달리니까......그래서...... 흔적을... 못 찾는...... 건가 해서...”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세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이상하다고 엊그제부터 몇 번을 말씀드려요!! 지나치는 마을마다 그런 사람을 본적도 없다는 게 도련님은 이상하지도 않으세요? 저희가 놓친 게 분명한데 무슨 도시락 탓을 하세요! 아기씨 이마 상처 때문에 빨리 못 움직일 거라고 제가 수 백 번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하루, 이틀 정도만 더 가면 남하강 초입인데 벌써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드렸을 때는 듣는 시늉도 안하시더니!”
“......어......그럼, 돌아... 내려갈까......?”
“당연하죠!! 해지기 전에 빨리 돌아가요!”
“......응......”
대답을 한 류 상연은 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는 해를 가늠해 보더니 턱을 만지면서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말고삐를 단단히 움켜잡고 뒤따라갈 준비를 하던 기해는 그 답답한 모습에 소리를 빽 질렀다.
“도련님! 지금 뭐하세요? 어서 돌아가자니까요? 이러다 해 진다구요!”
“......이제......돌아가는...길......찾으려고......”
“......으악!!!”
기해는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건 저주가 분명했다. 우리 아기씨를 짐승에게 던져준 대가로 받은 하늘의 저주. 이럴 줄 알았으면 인사불성인 강이 도련님을 어떻게든 깨워서 데려왔을 텐데. 아기씨 찾기도 전에 먼저 속이 터져 죽던지, 길 찾다 굶어죽던지. 아무튼 머지않아 죽을 것 같았다.
괜히 따라왔나. 이정도면 그냥 놔둬도...아니, 사력을 다해 도와줘도 이번 달 안으로는 절대 못 찾지 싶은데...
사실, 기해는 시간을 좀 끌다가 적당한 때에 만날 수 있도록 훼방을 놓을 생각이었다. 너무 빨리 찾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은 덜었지만 그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상이 도련님이 집으로 돌아 올 때마다 산에 고립되어있었다는 둥 헤매고 다녔다는 둥 하면서 거지꼴을 하고 왔을 때 눈치 챘어야 했다.
산을 탄지 10년이라 대충만 봐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있다며 눈 감고 지도도 그릴 수 있으니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는 소리를 믿었던 내가 미친년이지...
점점 어두워지는 산속에서 쪼그리고 앉은 기해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류 가(家)의 셋째 도령은 길치 중에도 상 길치였다.
****************************
아웅....보고 싶었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