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9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epilogue
...혹은 prologue
황금주점의 주모 이 황금은 입구 앞에 앉아 한산한 거리를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황궁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바람에 사람들이 외식뿐 아니라 술 한 잔 하는 것도 자제해 손님이 뜸해도 너무 뜸했다.
주점생활 20년 동안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요즘처럼 장사가 안 된 적은 없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생겼는지 파리만 날리는 주점 내부를 휘 돌아본 이 황금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런 이 황금의 눈치를 보면서 애꿎은 탁자만 닦고 있었던 견 환우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휴...장사가 너무 안 되네요. 제가 들어온 뒤 이런 적은 처음인 것 같아요. 오늘이 가장 심하네요. 듣자하니 황궁에서 또 난리가 났다면서요?”
“그러게 말이다...쯧, 무슨 우환이 겹쳐도 이렇게 겹치는지 태자전하께서 쓰러지시게 엊그제인데 이제는 역모라니...어떤 개잡놈이 그런 대역죄를 저질렀는지 몰라도 할 수만 있으면 내손으로 직접 목을 따고 싶은 심정이야.”
“금군에 있는 제 친구 말을 들어보니 그 놈들이 대학사와 내각 신료들이라고 하던데요? 황궁 국문장에는 해질녘까지 그들의 신음소리로 요란했답니다. 문초 받다가 반나절 만에 누가 죽었다는 소리도 있었고요.”
“허이고! 대학사 라면 기류 명률 아니냐? 아주 악독하기로 소문난 그치 말이야. 내 친구가 기류 현(縣)에서 살다가 류 현(縣)으로 몰래 넘어왔지 않니. 그 놈이 양민들의 등골을 어찌나 쥐어짜는지 몰래 넘어오다 걸려 죽는 게 낫지 싶더란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걔는 그나마 성공해서 류 현(縣)에서 지금 애도 낳고 잘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넘어오다 걸려 맞아죽는 일도 부지기수라 하더라.”
“그 놈이 황제폐하의 보물까지 도적질 했다가 들켰다던데요? 왜, 그 있잖아요. 미르의 눈물하고 미리내의 별이요. 그거 도난당해서 난리가 났었잖아요. 그 놈이 훔친 거랍니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관상을 보니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게 제 명에 못살 것 같더라고. 그런 죄를 저지르다니 제 명을 지가 단축시킨 거지 뭐겠니. 지가 황제폐하도 아닌데 언감생심 그런 보물을 노리다니 말이나 되는 일이냐? 하여튼 사람이란건 제 분수를 알아야 하는 건데...쯧쯧쯧.”
“근데 친구 놈 말을 들어보니 그것뿐이 아니라던데요?”
“뭔데? 그 짓 말고도 또 뭔 짓을 벌인 거야?”
“태자비로 예정되어 계신 분 옥체를 상하게 했대요. 누명을 뒤집어 씌워서 고신하다가 현장에서 딱 걸렸다고 하던데요? 그에 진노한 태자전하께서 피바람을 일으켰다고 하더라고요.”
“어이구, 미친놈들이 죽으려고 발악을 했구만......태자전하께서 어떻게 알고 때 맞춰서 일어나셨구나.”
“예, 못 일어 나셨으면 나중에 더 큰 피바람이 불었을 텐데 그게 다행이지요. 태자전하의 성정에 관련된 놈들만 죽이셨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관련자 뿐 아니라 막지 못했다는 죄명으로다가 주변 사람까지 깡그리 씨를 말렸겠지요. 폐하께서도 노발대발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대요.”
“뭐라고 하셨는데?”
“내 며느리 건드린 놈들 모조리 육시를 내주겠다! 오늘 저녁수라에 그 놈들로 담근 육젓을 올려라!......이렇게요.”
“거, 말씀 한번 시원하게 잘 하셨다! 제 식구 건드리는 놈들은 가만히 놔두면 안 되지. 본때를 보여줘야지. 암, 역시 우리 폐하셔.”
“상황이 이지경이니 당분간 장사는 안 된다고 봐야겠네요. 모두 몸을 사리느라고 술은커녕 밥도 잘 못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의궁에는 체증을 호소하는 신료들로 바글바글 하대요.”
“어휴...그렇겠구나. 환아, 오늘은 이만 접고 마감해야겠다. 더 있어 봤자 뭐하겠니.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도 않은데...속만 터지지.”
“그럴까요? 그럼 마감준비 해야겠네요.”
“그래. 그러려무나. 뒤뜰 우물뚜껑 덮는 거 잊지 말고.”
“예, 예. 그럼요. 제가 그거 잊은 적 있나요.”
견 환우는 씩 웃으면서 나가려다 주점 입구에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멈춰 섰다.
검은 카울을 뒤집어 쓴 장신의 남자는 마찬가지로 검은 카울을 뒤집어 쓴 사람을 아기 안듯이 안아들고 있었다. 몸집을 봐서는 어린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왜소한 어깨나 카울 밖으로 나와 남자의 어깨를 꼭 쥐고 있는 고운 손을 보니 여자가 분명했다.
거, 어지간히 아끼나 보군. 제 발로 걷는 것도 아까워 안고 다니다니......
부러워 죽겠네. 나도 연애하고 싶구나. 쩝...
견 환우는 그들을 부러운 눈길로 보다가 영업용 미소를 띠우며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음식을 준비해 줬으면 하는데. 한 10인분 정도.”
남자의 금속성이 섞인 낮은 목소리를 듣는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견 환우는 5년간 주점에서 일하며 익힌 눈치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예사인물이 아니군. 어디의 거물이시려나.
그나저나 10인분이라면 오늘 장사 공친 건 아니구나. 견 환우는 더 환하게 웃으며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말하려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10인분은 너무 많아요. 가져가려면 힘들기도 할거구요. 그치요?”
물음과 함께 머리에 뒤집어쓴 모둘이 이쪽을 향했다. 모둘 밑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새하얀 턱과 앵두 같은 붉은 입술이 보였다.
어이구, 미인이시구만. 그러니 저렇게 보듬어 안고 다니겠지. 게다가 목소리까지 옥구슬 같네...
근데, 나에게 묻는 건가?
“예? 저에게 물어보시는 말씀이신가요?”
“예, 10인분을 포장한다고 하면 부피가 엄청 크지 않을까요? 조금만 가져가도 될 것 같은데요?”
“......크지요.”
10인분은 포기해야겠군. 젠장.
남자는 여자의 모둘을 더 깊게 내리눌러 입술까지 가린 뒤 견 환우에게 물었다.
“먼 길 가야하는데 음식을 넉넉히 준비해 가야지. 안 그래?”
“예? 어...그, 그렇지요. 먼 길 가시려면 뭐니 뭐니 해도 음식만큼은 준비를 잘하셔야지요.”
앗싸!! 10인분이면 얼마지? 돈에 연연할 것 같지는 않은데...
“가다가 다른 곳에 들르면 되잖아요. 가람지방으로 가는 길에 식당이 많지 않나요? 유명한 관광지라고 들었는데.”
“...예...많긴 많은데......”
가람지방으로 간다면 남하강을 지나겠구나...
남하강이야 나라 제일의 관광지니 깔린 게 주점이고 그중 태반이 맛 집이다. 견 환우의 얼굴이 금세 침울해졌다.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 하루아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야.”
“그럼요! 여기서 말을 달려도 남하강 상류에 들어서는 것도 며칠이 걸립니다. 맛 집은 남하강 중간까지는 가야 제대로 된 게 많고요.”
견 환우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생선 종류는 빼고 준비해야겠군.
“그 사이에 다른 마을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2인분만 싸가요.”
“그, 그렇지요...마을이...있긴 있지요...”
“마을 주점에는 제대로 된 음식이 안 나올 수도 있어. 풀 때기만 나오면 나 안 먹어.”
“맞습니다! 작은 마을에 가면 찬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지요. 저희는 고기 위주로 찬을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그게...좀...비싸긴 하지만...”
“거봐, 내말 들어. 너는 가본 적도 없잖아. 도중에 시시한 마을에 들려 시간 버리지 말고 빠르게 남하강으로 가는 게 나아.”
“......”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견 환우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아자를 외쳤다. 큭! 고기반찬으로만 10인분! 이게 웬일이냐! 탁주 한 사발씩 파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다. 이 황금에게 시선을 흘끔 돌리니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다 엄지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역시 너는 최고야. 우리 끝까지 같이 가자.
견 환우는 어깨를 한번 추켜 올린 뒤 자랑스러운 얼굴로 가까운 자리를 가리켰다.
“시간이 좀 걸릴 예정이오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 주시,”
여자가 갑자기 머리를 만지며 엄청나게 어색한 말투로 외쳤다.
“........앗! 머, 머리가...가, 갑자기 아프네....”
“......”
풋-
꾀병인 거 너무 티 나는 거 아냐? 자기 말을 안 들어 준다고 투정부리나 보네. 그것 참 귀엽긴 하다. 헌데, 거짓말 한 경험은 별로 없으신가 보군. 쯧쯧쯧. 연기가 너무 어색해. 저걸 누가 믿겠어. 바보도 아니고. 4살짜리 내 조카도 안 믿겠다.
견 환우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기 바보에다 4살짜리 어린아이 보다 못한 한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뭐?! 머리가 아프다고? 얼마나 아파? 많이 아파?”
“으응......조, 조금.......”
남자가 안절부절 못하다 여자의 머리를 닿을 듯 말듯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어떻게 하지? 약 먹을까? 그냥 갈까? 아니면 숙소 잡아서 좀 누울까? 어떻게 해줄까? 응?”
누가 보면 단순한 두통이 아니고 머리에 금이 쫙 가서 피라도 철철 흐르는 줄 알겠네. 누가 봐도 꾀병이구만 웬 호들갑이래. 그 덩치와 목소리가 아깝다.
어휴...여자한테 꽉 잡혔구만.
견 환우는 5년간의 주점 생활로 감이 왔다. 그는 풀죽은 목소리로 주문을 넣었다.
“고기반찬으로 도시락 2인분이요......”
동시에 저쪽에 앉아 있던 이 황금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오늘도 황금주점은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주모인 이 황금은 작금의 사태를 야기한 그 죽일 놈들에 대한 원망으로 아침부터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 동원해 쌍욕을 날려주고 있었다. 옆에 앉아 욕 장단을 맞춰주던 견 환우는 주점으로 들어서는 남녀 한 쌍을 발견하고 화색을 지으며 다가갔다.
여자는 훌쩍한 키에 눈이 확 뜨이는 얼굴미인은 아니었지만 나올 데 많이 나오고 들어갈 데 잘 들어간 아주 흐뭇한 몸매 미인이었다. 등에 커다란 봇짐을 진 남자는 6척은 훌쩍 넘는 장신에다 회색빛의 머리였는데 그 모양이 참 해괴했다. 어쩌다 홀랑 태워먹었는지 밤송이처럼 짧은 것이 망측스럽기도 했다.
“어서옵쇼! 아침 식사 잘나오기는 이 주변 식당 중에는 저희 집이 최고지요. 간단한 식사로 준비해 드릴까요?”
“......어......음......아니......”
“예?”
남자는 머뭇거리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 너무 느렸다.
뭐지? 바본가?
그때 여자가 남자를 밀치더니 톡 쏘았다.
“상이도련님, 제가 주문할게요. 도련님께서 하시다간 오늘 중으로 우리 못 떠나요. 어젯밤만 하더라도 강이 도련님을 죽기직전까지 줘 패 시면서도 잘만 말하시더니 왜 하룻밤사이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셨데요......저희요, 도시락 10인분 싸주세요.”
견 환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도시락 10인분이나? 어제 공친 게 다 이유가 있었구만. 아침부터 대박이구나!
“도시락이 푸짐하기로는 이 주변 식당 중에는 저희를 따라올 곳이 없지요. 잘 선택하셨습니다. 그럼 조금만...”
멀뚱하게 서있던 남자가 느려터진 말투로 딴죽을 걸었다.
“....너무......많은데......무거워...그치?”
“예? 저, 저한테 여쭤보시는 건가요?”
“......응......”
견 환우는 어젯밤에 겪었던 일이 뇌리를 스쳤다. 뭐, 뭔가...어제일의 반복 같은데...이 황금을 힐끔 보니 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10인분이면 무게가 좀...”
그때 여자가 다가오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서 지고 가실 것도 아니고 말에 실을 거잖아요. 그리고 먹으면 줄어들 텐데 많기는 뭐가 많아요. 그죠?”
“아! 그렇지요. 맞습니다! 음식이란 게 먹으면 없어져 버리니까요. 그럼, 찬은 어떻게 맞춰드릴까요?”
“......무거우면....말이......빨리... 못 달리잖아.”
“어......그, 그렇긴 하죠...빨리 달리기는 좀...”
“도련님! 식사한다고 도중에 식당 들르는 게 더 시간 걸려요!”
“그럼요! 맞습니다. 차라리 도시락을 챙겨가서 바로바로 드시는 게 훨씬 낫습니다. 암요!”
“......그래도......2인분만......어차피... 이삼일 정도면....잡을 거야......”
“......”
오늘도 날이 아닌가 보다.
견 환우가 이 황금의 눈치를 보니 이미 포기했는지 똥 씹은 얼굴로 고개도 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입 모양을 보니 대학사란 놈한테 다시 욕을 퍼붓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 손님들 나가면 소금이라도 뿌려야지 이거 원.
어깨를 늘어뜨리고 주방에 2인분의 도시락을 주문하려 몸을 돌리려는데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도련님 혼자 한 끼에 2인분을 드시면서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굶으라는 말씀이세요? 10인분을 사가더라도 이틀이면 다 먹어 치울 텐데요? 이틀 안에 못 잡으면요? 자꾸 이러시면 아기씨 만났을 때 도련님이 저 쫄쫄 굶기면서 끌고 다녔다고 말씀드릴 거예요! 우리 아기씨께서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는 아시죠?”
“......알지.......”
느리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시무룩했다.
“여기요!”
견 환우는 혹시나 싶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자신을 당차게 부른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기, 10인분...아니 15인분 싸주세요!”
“헉!! 15인분이요?! 예, 예!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그때까지 심드렁한 얼굴로 욕설을 날리던 이 황금이 자신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올렸다. 자랑스러운 얼굴로 개선장군 마냥 당당하게 주방으로 걸어간 견 환우는 늠름하게 외쳤다.
“도시락 10인...아니, 15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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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뷰님 소리도령님...아우...이 후원 연참능력자들...이리와 내 품에 안겨
[꽃짐 1부 완결]
같이 달려주시느라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코멘 먹고, 추천 먹고, 선작 먹고, 후원 먹고 하느라 작가는 돼지가 되었답니다.
그게 아주 꿀 맛 이더라고요. 중독되었답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코멘에 일일이 답해드리지 못 한점...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네요.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읽는 다는 거 기억해 주세요.
9월쯤 꽃짐 2부 <짐승, 꽃과 함께 사라지다>로 찾아뵙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시는 먹이 받아먹으러 최대한 서두르려구요.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참, 먼 얘기기는 하지만 개인지를 원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른 작가 분에게 물어보니 설문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완결이 나면 설문 후 방향을 정하겠습니다.
꽃짐 독자님들, 깊이 애정 합니다.
라고 말해 놓고 내일 외전 한 편 더 올립니다.
오늘 다 올이고 싶었지만 아시다 시피 하루에 두편만 가능해서......털썩.
그리고, 팬아트 당첨자 분들 쪽지 주세요. 엉엉엉 한분밖에 안보내 주셨어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