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8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으응......”
의궁 침상에 누워 있던 화연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을 떴다. 주변을 에워싸고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던 류 충과 류 강연이 바짝 달려들었다.
“연아! 어이구 내 새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더냐! 명률, 그 개잡놈이 내 딸을 이렇게 해놔?!! 내 그놈 목을 아주 따줄게야! 사지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같으니라고! 연아...많이 아프냐?”
“아버지 목소리 줄이세요. 애 머리 아파요. 연아 괜찮니? 일어나려고 하지 마. 당분간 머리가 아플 거야. 무릎에 박힌 파편은 다 제거 했으니 금방 아물 거고. 다행히 깊숙하게 파고 들어간 건 없었다는구나. 천운이었지 뭐니.”
“아버지...오라버니...기해는요? 기해는 무사한가요?”
“기해는 멀쩡하니 걱정 말거라. 네가 걱정이지 기해는 다친데 하나 없어. 네 짐을 싸고 있는 중이니 조금 있으면 올게다.”
“아버지...그럼 제 누명은...벗겨진 건가요?”
“아! 그럼 당연하고말고! 그 썩어죽을 놈이 누명을 씌워봤자 지! 흥! 지금 아주 통곡을 하고 있을게다! 그래도 싸지! 너는 걱정하지 말고 짐 싸서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지금 당장 이놈에 황궁을 나가고 싶지만 지금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해서 내일 새벽에 바로 출발할 게다.”
화연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저...집으로 돌아가다니요......? 간택은...”
류 충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뭔 놈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황가의 보물을 훔친 도적놈이 기류 명률이고 그것을 공 형문과 남궁 평에게 들켜 위험하게 되자 그들이 꾸미던 역모를 발설했다는 건데...역모는 그렇다 쳐도 명률 그 놈이 왜 갑자기 도둑질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쥐약을 처먹은 것도 아닌데...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그 씹어 먹을 잡놈이 내 딸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것도 모자라 고신을 했다고 하니 수상쩍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뒈질 때가 다 되서 제 무덤을 제가 판 게지.
멋모르고 앉은 채 당할 뻔했는데 태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막아줬다고 하니 약간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느닷없이 미친놈의 눈깔을 하고 화연을 달라고 하지만 않았다면 말이지...
자신을 주시하던 그 놈의 눈빛이 떠올랐다.
곧바로 화연이 다쳤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황족을, 그것도 차기 황제를 때려죽인 최초의 재상이 될 뻔했다.
그 놈을 때려죽일 때는 죽이더라도 먼저 내 딸 상태가 중한지라 허겁지겁 의궁으로 달려와 보니 정말, 내 딸이...금쪽같은 내 새끼가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실신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아까운 내 새끼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어찌나 분하던지 이가 갈리고 속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게다가 태자의 경천동지할 그 말의 의미까지 생각해 보면 이건 그냥 횡액도 아닌 엄청난 횡액이 분명했다. 류 충은 무슨 불행이 와도 이렇게 때로 몰려오는지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바로 굿을 올리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간택이고 뭐고 그놈이 뭐라고 한 줄이나 아느냐? 기가 막혀서...황궁 안에 있는 보물로 누구를 달라고? 흥! 누구 맘대로!! 황궁 안의 보물이라고 했으니 공표하기 전에 황궁 밖으로 나가면 그만 이지!”
류 충은 이제 무영을 태자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아무리 화연을 구해줬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무영은 딸 뺏어 가려는 불한당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글쎄 그 짐승 같은 놈이 너를 달라고 하지 않느냐! 어떻게 너를 봤는지는 몰라도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아니, 정인까지 있다는 놈이 다른 처녀에게 홀라당 마음을 뺏겨 그런 말을 하다니...이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난봉꾼 같으니라고...어렸을 때는 그렇게 기방을 제 집처럼 드나들더니 커서도 제 버릇 남 못주고 감히 누구한테 수작을 부려?! 그런 놈에게 내 딸을 줄 성 싶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 윽! 뒷골이야......”
“아, 아버지...”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었지만 지금 이 분위기에서 그 말까지 꺼내면 이번에야 말로 제 옆 침상에 아버지가 드러누우실 것 같아 화연은 머뭇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화연의 이마에 난 상처를 속상해 죽겠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류 충은 계속 신세한탄을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 의회에서 결사반대를 외쳤어야 했는데...그 놈이 그때 일부러 연못이니 우물이니 괜한 말을 꺼내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해놓은 거야. 아주 용의주도한 놈이지. 어쩐지 그날따라 기분이 더러운 게 그 놈이 조만간 사고 한번 크게 칠 줄 내 알았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후려 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 새끼한테 이런 일까지 생기고...이번에야 말로 황궁을 나가면 이제 다시는 황궁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거라. 애비도 사직하면 우리식구 다 같이 테국으로 망명가자. 여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
“아, 아버지...망명이라니요...”
“당연히 가야지! 일단 내일 연제께 상소를 올릴 것이야. 삼간택을 통과한 처자 중 반수가 역모로 인해 탈락하게 되었지 않느냐. 당연히 이번 태자비 경연은 무효화 되어야지. 연이 너는 애비가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요양을 핑계로 테국으로 넘어가거라. 애비도 바로 뒤 따라 가마.”
가만히 있다가는 무영을 보지도 못하고 진짜 다른 나라로 끌려가게 생긴 화연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말씀드리고 허락해 달라고 하려는데 류 강연이 자신의 손을 잡아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넋이 나간 그의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
무영의 얼굴을 떠올리던 류 충은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해져만 갔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놈 눈빛이 보통 기세가 아니었어. 아주 광기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그냥 하루 이틀 마음에 두고 하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는데...일편단심이라던 그놈이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지......? 안되겠다. 뭔가 불안해. 일을 빨리 진행해야겠군. 강아......강아......! 아니, 이놈은 아까부터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게야!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도 부족할 판에! 쯧.”
류 강연은 류 충의 눈치를 받아 죄송하다고 하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등은 그가 흘린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태자가 감찰 상궁의 목을 사정없이 자를 때부터 이상했다. 뭔가 수상한데...하다가 벼락같이 떠오른 생각이 있었는데 차마 말로 꺼내기도 무시무시한 그런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사실이라면 테국에는 연이가 아니라 자신이 가야했다. 그것도 한밤중에 야반도주 하듯 아버지와 상이 몰래. 결국 쫒아오는 추격대에게 잡혀 꼼짝없이 개처럼 끌려가겠지.
류 강연은 펄떡거림이 느껴지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면서 화연을 바라보았다.
단매에 쳐죽어도 시원찮을 어마어마한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손에 죽는 건 둘째 치고 상이는 쉽게 죽이지도 않을 거다. 천천히 공들여 고문하면서 서서히 말려죽이겠지. 화연을 보는 그의 두 눈에는 생을 통틀어 가장 큰 간절함과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류 강연은 화연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실었다.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제발
화연은 류 강연의 시선에 미안한 듯 그리고 부끄러운 듯 웃어보였다. 류 강연은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 비틀거렸다.
“윽!”
“응? 강아. 너 갑자기 왜 그러냐? 아까부터 이상한 게...어디가 아픈 게야? 너도 충격을 받아서 그러는 거냐? 애비도 하마터면 우리 연이 두고 황천 갈 뻔 했지 뭐냐. 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아버지...
제가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요......어쩌다 보니 제 손으로 연이를 짐승 굴에 넣어줬어요.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던 처녀가 아무래도 우리 연이였나 봐요. 근데 제가 진짜 알고 그런 것은 절대, 절대로 아니거든요. 그 짐승의 마음속에 우리 연이가 들어앉아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저도 짐승한테 깜빡 속은 거나 마찬가지라구요. 저도 피해자에요.
그러니......죽이시려거든 단 칼에 죽여주시면 안 될까요. 라는 마음을 담아 류 강연은 입을 열었다.
“...아, 아무것도...”
“근데 너 왜 우냐?”
“예? 아,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구먼. 참 나, 하품이라도 한 게냐? 이 런 때에 넌 맘도 편하다. 암튼 넌 여기를 지키고 있거라. 나는 연제와 담판을 짓고 와야겠다. 오늘 길에 국문장에 들려 그 우라질 놈 상판대기도 보고. 그래야지 분이 좀 풀리지 안 되겠어. 태자 그 놈이 저한테 맡겨달라고 했으니 어떻게 해놨나 지켜 서서 감독도 해줘야지. 대충 하는 시늉만 하다 귀찮다며 그냥 다 죽여 버린 거 아니야? 그랬기만 해봐 아주...죽일 때 죽이더라도 손톱정도는 죄 뽑아놔야지!”
손톱을 뽑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손끝부터 무딘 칼로 얇게 저몄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한 류 충은 제 딸 다치게 한 도적놈이 쉽게 죽었을까 그게 걱정이 되어 서둘러 의궁을 나갔다.
류 충의 분기충천한 뒷모습을 보던 화연은 류 강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연아...”
“...죄송해요.”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짐승의 흉계를 알아채지 못한 이 오라비가 죽일 놈이지.”
“강이 오라버니...그러지 마세요.”
“다만...오라비가 죽거든... 시신만은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다오.”
“오라버니...”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길었던 27년간의 삶. 하얗게 불태웠다.”
“오라버니...울지 마세요.”
“크흑...”
화연은 류 강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마땅하다며 울먹이는 류 강연을 화연이 말리고 있는데 작은 보따리를 든 기해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눈이 퉁퉁 부어있는 것이 방금 전까지 계속 울었던 것 같았다.
“아기씨...”
“기해야, 몸은 괜찮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아기씨...다친 건 아기씨뿐이잖아요! 그러니까 왜 그러셨어요! 제가 그러면 좋아 할 거라 생각하셨어요? 아기씨 돌아가셨는지 알고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세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구요. 그걸 생각하면 손톱 몇 개 정도 그냥 뽑히는 게 나아요. 어차피 다시 자라날 텐데 그깟 게 뭐라고 그런 일까지 당하고...제발 그러지 좀 마세요...시비를 감싸느라 화를 자처하는 상전이 어디 있어요.”
기해는 눈물을 다시 흘렸다. 정말 놀라긴 놀란 모양이던지 눈물을 닦는 손이 벌벌 떨렸다.
“내가 말했잖아. 시비일 아니고 친구일 이라고. 난 괜찮으니 이제 그만 울어. 더 울다가는 앞도 보이지 않겠다. 지금도 엄청 부었어.”
“제 눈이 부었다고 해도 아기씨 이마 상처만 할까요......흑......관련된 놈들 죄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요!”
“기해야 난 괜찮다니까. 다 해결됐잖아. 그만 하자. 응?”
“...알았으니까 눈썹 올리지 마셔요. 이마 아프시잖아요. 강이 도련님, 궁의께서는 뭐라 하셨어요? 흉은 안 남을 것 같대요? 무릎은요?”
“나아봐야 알겠지만 큰 상처는 안남을 것 같대. 무릎도 당분간 움직임만 조심하면 금방 아물 거라고 했고. 그건 걱정 마.”
“......천만 다행이네요. 아...참, 도련님...가주 어르신께서 찾으시던데요?”
“뭐? 방금 나가셨는데? 언제?”
“어...요, 요 앞에서 마주 쳤어요. 도련님께 대전으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하셔서...”
“그래...? 알았어. 그럼 연아, 오라비 금방 다녀올 테니 기해와 잠시만 있어.”
“예. 오라버니 다녀오세요.”
“응. 기해야 부탁한다.”
“...예...”
어딘지 미심쩍은 데가 있는 기해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류 강연은 나가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잠깐!”
“에... 예? 왜...그, 그러세요?”
류 강연은 뒤돌아서서 기해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해의 가슴은 두근두근 방망이질을 쳤다. 설마...눈치 채신 건 아니겠지...
“아버지께서 화난 표정이 시디?”
“......예?”
“아버지 표정 말이야. 뭔가를 눈치 채고 진노하신 기색은 아니었냐는 말이다.”
그럼 그렇지...기해의 조마조마 했던 표정이 단박에 식어버렸다.
“......아닌 것 같던데요......”
“아, 그래? 어휴...알았다. 그럼 연아, 오라비 빨리 갔다 올게.”
류 강연이 손을 짧게 흔들고 나가버리고 그와 동시에 기해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씨, 제가 여쭤 볼게 있어요. 숨김없이 대답해 주셔요. 그럴 수 있으시지요?”
“뭔데? 뭐가 그렇게 거창해?”
“태자비가 되고 싶으셔요?”
“아니.”
“예? 그럼...”
“난 태자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 그저... 그의 옆에 있고 싶을 뿐이야. 그 방법이 태자비가 되는 길 밖에 없다면... 하는 수 없지.”
“가주 어르신은요? 내막을 잘 모르셔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 결사반대를 하시는데 극복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설득해야지. 지금은 반대하시지만 내가 그를 사...조, 좋아한다는 것을 아신다면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으실 거야.”
우리 아기씨는 참 순진하셔.
기해는 류 충이 끝까지 반대 한다 에 자신의 보물1호, 화연이 사준 비녀를 걸 수도 있었다.
방금 전, 의궁으로 들어오면서 류 충을 만나기는 했었다. 류 강연을 대전으로 오라고 시키지는 않았었지만 대신 다른 일을 시켰었다.
테국으로 갈 차비를 해두라며 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꾸리라고 하셨었다. 지금 류 충은 태자비 경연을 어떻게든 무효화 시키고 화연을 빼돌리고도 남을 기세였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아기씨는...
어휴...정말 자신의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화연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아기씨...그건 힘들,”
기해가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주려는데 의무실의 문이 활짝 열렸다.
“화연.”
“!!”
무영이었다.
그가 들어서는데 피 냄새와 함께 노릿한 탄내가 훅 밀려들어왔다.
기해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허둥대다가 무릎을 꿇었다.
“저, 전하...제가 먼저 상황 설명을 한 뒤에 들어오시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돼.”
병상에 누워있던 화연이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숙이는데 무영이 급히 다가와 얼굴을 들어 올렸다.
“고개 숙이지 마. 상처 다시 터질 수도 있어.”
화연은 오랜만에 지척에서 보는 무영의 얼굴에 볼을 붉혔다. 어의께서 금방 일어나실 거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데 너무 기쁘고 반가웠다. 반면, 대면식에서 자신이 무영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생각하니 부끄럽고 왠지 어색하기도 했다.
“전하...언제 일어나셨습니까? 옥체는 괜찮으시옵니까? 몸도 편찮으신데 부르시지 여기까지는 어인 일이시온지...”
무영의 대답은 화연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었다.
“연아. 나와 같이 가자.”
“예? 어디를...”
“나 얼마 후에 가람지방에 갔다 와야 돼. 물론 첩지는 너에게 내려질 테지만 재상이 그전에 이번 간택령 자체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릴 거야. 무효화 하기는 어렵겠지만 시간을 끌기에는 충분해. 내가 없는 동안 류 재상은 나와 네가 만날 수 없도록 갖은 수를 다 쓰겠지. 그걸 막으려면 너와 내가 같이 가야돼. 지금은 그 방법 밖에는 없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화연의 단호한 표정에 무영은 가슴이 덜컹 하면서 애가 탔다.
“내가 태자인 걸 말 안 한건...어쩔 수 없이...”
“그 문제 때문에 화가 난 것은 맞습니다만 지금은 아닙니다.”
“추문이라도 생길 것 같아서 그래? 걱정하지 마. 혹시라도 그런 말이 나온다면 내가 다 막아줄게. 날 믿어.”
“추문 따위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차분하게 무영의 말을 듣던 화연은 조용히 물었다. 전부터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전하께서는 제가 태자비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십니까?”
“응”
“이유가 무엇입니까.”
“......”
“전하,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여기에 그대로 남아 있겠습니다.”
“나......난...”
화연은 말없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무영은 화연의 검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아름다운 눈동자 안에는 잔뜩 긴장해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 자신이 담겨 있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했다.
“연아...난...”
“......”
“난...... 이 세상사람 모두가 죽어 없어져도 관심 없어.”
“......전하.”
“사실, 이제까지 거치적거리는 것은 다 없애버리기도 했어.”
“......”
“누군가... 내 눈앞에서 죽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일 뿐이야. 그것이 갓난아이일지라도”
“!”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 이렇게 살다 죽어버려도 미련 같은 건 전혀 없었지.”
“......”
“나는 그래. 그런 놈이야.”
“......”
화연은 그가 무슨 말을 해줄까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동시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었는데 일순간 쏙 들어갔다. 대신 온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면서 무영의 입을 막고 싶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라면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을 후회 할 것만 같아 그만하라고 하려는데 무영이 손을 잡아왔다.
그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했지만 뜨거웠다.
“전하.”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 삶은 그랬어.”
“!”
“...그냥......그냥, 사막 같았어. 모래로 가득한 사막.”
“...전하...”
“그런데...”
“......”
“모래만 가득했던 그 안이 이제는 너로 가득해. 그것이 나를 얼마나 어지럽게 만드는지 너는 모를 거야.”
“......”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처음 겪어 봐서...나는...”
무영은 손에 고여 있던 땀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말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다른 말이 있을 것 같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다였다.
“......난 너를 원해.”
“......”
“너 말고는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아.”
“......”
“너만 있으면 돼. 오로지 너만.”
무영은 넘쳐흐르는 이 마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뜨면서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감정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널......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떨리는 황금색 눈동자, 입이 마른 듯 혀로 자꾸 축이는 입술, 꽉 쥐고 있는 손......그리고 약간 붉어진 귓불.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 어디에도 없었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다른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말없던 화연의 눈에서 애처로운 것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그것은 잘게 떨리는 입술을 적시며 안으로 스며들어갔다.
“전하...저도...저도......”
무영은 손을 들어 올리다 말고 제 옷에 쓱쓱 비벼 닦더니 화연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나랑 같이 가자. 그렇게 하자. 나는 네가 어디에 있더라도 반드시 너를 찾아 올 거야. 그건 장담할 수 있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떨어져 있기 싫어.”
엄살을 피우는 것 같은 그의 말투에 화연은 눈물을 흘리다 웃음을 터트렸다.
무영은 화연의 볼을 감싸 안더니 이마의 상처 주변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입술을 진득하게 누르고 있다 그대로 속삭였다.
“같이 있자. 연아.”
화연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다시 흘러 나와 턱 끝에 맺히더니 툭- 떨어졌다.
참으로 훈훈하고 달달한 풍경이었다. 답지 않게 긴장해서 안절부절 하는 짐승의 모습까지 볼 수 있으니 참으로 신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해는 불안해서 가만히 꿇어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누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태평하게 그러고 있을 때냐!!! 하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계급이 웬수라 그러지는 못하고 슬며시 일어서서 조용히 끼어들었다
.
“저...방해해드려서 죄송한데요...서두르셔야 하지 않나요? 모든 내막을 들으신 재상께서 미친 황소처럼 달려 오실지도 모르는데요...”
그 말을 들은 무영의 얼굴에 조급한 기가 실렸다.
“연아, 지금 가야해. 네 짐은 이미 말에 실어 놨어. 나와 가자.”
“하지만...아버지께서...”
“아기씨, 태자전하와 평생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어르신의 화도 언젠가는 풀어지실 겁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태기가 있다고 하시면 바로 풀리지 않을까 싶네요. 뭐 확실하다고 봐야죠. 그러니 여기는 걱정 마시고 하고 싶은 데로 하셔요. 아기씨 인생이잖아요. 어서, 이 카울을 걸치셔요.”
기해가 작은 보따리에서 검은색 카울을 꺼내 건넸다.
화영은 카울을 받았지만 이래도 되나 싶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얼굴이 아른거리니 더욱 마음이 무거워 졌다. 이런 방법 밖에는 없을까.
“아기씨, 어르신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시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사람은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때가 있잖아요. 정 불편하시면 잠깐 요양하러 가시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기해가 화연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어깨를 보듬어 주다가 카울을 직접 걸쳐준 뒤 무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태자전하...이 천것이 전하께 꼭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저희 아가씨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제게는 목숨보다 소중하신 분이니 모쪼록 아무 탈 없도록 아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 천것이 이 일을 후회하지 않도록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무영은 알았다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화연의 눈치를 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시킨 일이나 잘해. 두 개 모두 챙겨 놨지? 정확한 장소에 가져다 놔야 한다. 재상의 침소 깊숙한 곳에. 알았어?”
비장한 표정이던 기해의 얼굴이 난처하게 변했다. 카울을 걸치며 궁금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화연을 흘끔 보다 조용히 말했다.
“......챙겨는 놨는데......꼭 그렇게 까지 하셔야......”
“예단을 주고받았다고 해야 빼도 박도 못하지. 미리 받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받는 사람이 받았다는 걸 모르는 예단이 어디 있나요...”
“잔말 말고 하라면 해. 청화궁(靑花宮, 태자비의 궁)상궁이 되고 싶지 않나봐?”
“전하! 맡겨만 주십시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깊숙한 곳에 숨겨두겠습니다.”
“좋아.”
카울을 걸친 화연이 다가왔다. 무영과 기해는 빛을 주고받다가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키웠다.
“그럼 아기씨를 부탁드리옵니다. 전하.”
“알았어.”
화연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기해는 자신이 부탁하려고 했던 것이 번뜩 생각났다. 중요한 거였는데 빼먹을 뻔 했네...그런데 이걸 어떻게 말한담...기해의 볼이 점점 붉어 졌다.
“참!! 어...그리고...저...”
“뭔데.”
“음...저...그게...”
기해가 뜸만 들이고 좀체 말을 하지 않자 무영이 윽박질렀다.
“빨리 말해! 시간 없다고 한건 너잖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기해는 눈을 꼭 감고 큰소리로 물었다.
“대, 대례식 이전까지는...차, 차, 차, 참아주실 거지요? 그, 그렇지요?”
“......”
“어머, 기해야!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전하...? 손톱에 뭐 묻으셨습니까?”
얼굴을 붉히며 기해를 타박하던 화연은 갑자기 손톱을 들여다보는 무영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어디서 많이 보던 행동 같은데...
“아니야...얼른 가자.”
무영은 화연의 엉덩이 밑에 팔을 걸쳐 아이 들듯이 들어 올렸다. 화연은 반사적으로 무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가 깜짝 놀라 팔을 떼면서 작게 투덜거렸다.
“저 걸을 수 있어요. 창피하게 왜 이러세요. 애도 아닌데...”
“안 돼, 무릎 다쳤잖아. 걸으면 안 좋아.”
걸을 수 있다고는 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통증 때문에 걷는 건 무리라 못이긴 척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화연은 괜스레 볼을 붉히다 기해를 쳐다보았다.
“기해야......미안해.”
“아기씨, 여기는 신경 쓰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저는 아기씨만 행복하시면 돼요.”
“나 금방 갔다가 올게...걱정하지 말고. 응?”
“예, 미안하시면 오실 때 선물이라도 사가지고 오셔요.”
“응. 알았어. 잔뜩 사올게.”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기해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앞으로 한두 달 못 보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모르겠다. 마치 오랫동안 못 볼것만 같은 느낌에 눈에 고였던 눈물이 결국 떨어졌다.
기해는 흐르는 눈물을 서둘러 닦았다. 무영에게 안겨 걱정스레 쳐다보는 화연에게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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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뒤 다음 편. ㅋㅋㅋ
오늘 불 토 잖아요~ 캬악!!
외로운 작가는 이렇게 같이 놀자고 구걸...
duckfly님, 유누마마님 후원 감사감사 합니다.
무영도 실수는 했지만 너무 욕하지 말아요.
70회 될 때 까정 뽀뽀만 한 쟤도 지금 몸에서 사리나올 지경.
2부에서는 욕망을 좀 해소해주려고 하는데...그럼 수위가...훌쩍
하지만 욕망덩어리 짐승 무영과 30세 여자의 인생까지 겪은 화연의 마음이 이제야 통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손가락만 빤다는 건 좀...
아웅 고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