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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66화 (66/110)

00066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대학사, 도대체 무슨 중요한 용건이 있다고 아침댓바람 부터 부른 것이오! 피곤해 죽겠고만. 어제 퇴궁도 못하고 행궁 집무실에서 잔거 알면서 그러시오! 쯧.”

류 충의 불평에도 대학사 기류 명률은 태연했다. 그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류 충에게 말했다.

“재상,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재상을 아침부터 보자고 했겠소? 당연히 중요한 일이니 그런 것이 아니겠소. 나도 어제 퇴궁도 못하고 궁에서 침수를 들었소. 재상 혼자만 바쁜 거 아니오.”

“아, 그럼 빨리 좀 말하던가! 아까부터 뭘 그리 꾸물거리는 것이오!”

“다 절차가 있는 법인데 그 급한 성격은 좀 어떻게 안 되오? 잠깐만 기다리시오.”

그 때 저쪽에서부터 뛰어온 궁녀가 기류 명률에게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찾았다고? 잘했다. 명 상궁 말이 맞았군. 그럼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전해라.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강도를 높여 속전속결로 가는 것도 괜찮겠지.”

“예, 어르신.”

궁녀가 급하게 어딘가로 뛰어가 버리고 류 충은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뭐요? 무슨 일 있소?”

“재상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오. 일단, 폐하께 알현을 청해놨으니 자룡궁으로 갑시다.”

“이 아침에 알현을 청해놨다고? 아니, 무슨 큰일이기에 그러시오?”

궁금한 표정의 류 충을 잡아끄는 기류 명률의 얼굴은 10년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간 듯 반들반들 하니 참 좋아 보였다.

*

“폐하, 재상 류 충과 대학사 기류 명률 들었사옵니다.”

“들어오시오.”

의관을 정제해주던 상궁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자 연제는 보료에 앉아 장침에 팔을 기대었다. 무영의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터라 낯빛이 좋지 않았다.

“대학사, 무슨 일인데 재상까지 대동하고 짐을 보자고 한 것이오? 지금 아침 수라도 받기 전인 것은 아시오?”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시급을 요하는 일이라 지체할 수가 없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고개를 숙이는 대학사를 못마땅하게 보던 연제는 류 충에게 물었다.

“재상, 무슨 일이오?”

“저도 알지 못하옵니다. 다짜고짜 끌려온 터라…….”

“폐하, 소신이 이른 시간부터 알현을 청하였던 것은 저에게 이런 서찰이 도착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학사는 품 안에서 서찰을 꺼내들어 연제에게 공손히 바쳤다.

“이것이 뭔데 그러시오?”

서찰을 받은 연제는 붉게 충혈 된 눈을 비비더니 서찰을 읽기 시작했다.

서찰을 읽던 연제는 장침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하더니 바로 앞에 있던 서궤를 부서져라 내려쳤다. 부릅뜬 눈에는 노기로 가득했다.

쾅-

“대학사! 이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이오!”

“예, 폐하. 사실이옵니다. 실은 저에게 그 서찰이 도착한지는 좀 됐습니다.”

“그럼 왜 이제야 고한단 말이오!”

“그때 서신을 받자마자 폐하께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섣부르게 들쑤셨다가는 빠져 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여, 확실한 증거를 잡기위해 시일이 지체되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럼 그 확실한 증거는 잡았다는 말이오?”

“예, 폐하. 증거도 증인도 다 확보해 뒀으니 소신에게 맡겨주신다면 자백까지 받아내겠습니다. 국문을 열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삼일주겠소.”

“충분 하옵니다. 폐하. 그 날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과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소신을 믿어주시옵소서.”

머리를 조아리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대학사 기류 명률이 일을 시작하겠다며 나가고 류 충과 연제만 남았다. 연제는 기류 명률이 나가자마자 언제 노기를 드러냈느냐는 듯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뭔데 그러십니까? 저도 좀 보겠습니다. 폐하.”

“보시게”

연제는 귀찮은 물건 떠 넘겨주는 것처럼 서찰을 휙 하고 밀어 던졌다.

류 충이 그 서찰을 받아 읽어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이게…….뭔 소리입니까? 폐하?”

“뭔 소리긴 뭔 소리야. 적혀있는 그대로지.”

“의미가 너무 중의적이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대상이 누구라는 겁니까?”

“누구긴, 짐에게 줬으니 짐이겠지.”

“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기껏해야 저를 대상으로 하면 모를까…….설마, 이걸 곧이곧대로 믿으시는 것은 아니시지요?”

“당연히 아니지. 그래도 조사는 해봐야 할 거 아니오.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겠소.”

“조사 해보나 마나 물밑 작업을 죄다 해놨을 텐데요? 그게 아니더라도 별거 다 끌어와 끼워 맞추겠지요. 구린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까요. 장단에 맞춰주려는 생각이십니까?”

서궤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연제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썼다.

“그래야지, 뭐…….대학사는 태자도 저러고 있는데 시기를 골라도 꼭 이런 때를 골라서…….하여튼 맘에 안 들어. 쯧. 어쩌다 그들이 갈라섰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그토록 눈엣가시 같던 둘을 치워 버릴 수 있지 않겠소? 그나저나 아쉽겠소. 재상. 재상이 기껏 마련해 놓은 계책은 써보지도 못하게 생겼으니.”

“저야 뭐 일이 줄어들었으니 상관없기는 한데 말입니다…….기류 명률이 꾀만 많지 일 처리는 시원찮지 않습니까. 확실하게 작업은 해 놨는지 그게 걱정입니다. 덮치려면 빠져나갈 구멍하나 없는 상태에서 덮쳐야 하는 법인데요. 어쩐지 요즘 기류 가(家)에 사람들이 엄청 드나든다고 해서 무슨 일을 벌이려고 저러나 했었는데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 군요.”

“그 정도 준비도 없이 터트렸겠소? 알아서 하겠지. 후임자도 아직 정해놓지 않았는데 머리가 다 아프구려. 어디 생각해 놓은 사람은 있소?”

“쩝…….뭐, 그 놈이 그 놈이라……. 고관능평 치루고 나서 추려지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오. 조수라 같이 하겠소?”

“그럴까요? 헌데 이번에도 저번처럼 나오는 거 아닙니까? 저번에 그거 먹고 하루 종일 속이 부대껴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거, 아직 나이도 한창 때인데 벌써부터 속이 그렇게 약해서 되겠소? 쯧쯧쯧…….보약 한 첩 지어줄 테니 그거 먹으면서 행궁에만 앉아있지 말고 운동도 좀 하시오.”

“아니, 아침부터 고기반찬만 그득한 밥상을 받고 누가 속이 편하답니까? 보약은 됐고 이번 간택이 끝나면 우리 연이 데리고 저기 남하강 구경 좀 하다 오려니 휴가나 보내주십시오.”

“흠…….”

“......왜 그러십니까? 손톱이 아프십니까?”

쓰러지기 전 무영이 가끔 하던 행동이었다. 볼 때에는 그럴 듯 했는데 자신이 하니 이상한 모양이었다. 멋쩍어진 연제는 슬그머니 손을 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아니오…….흠, 흠. 그리고 그건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요. 긍정적으로 검토해 볼 터이니 그만 좀 하시오.”

“그럼 믿고 있겠습니다. 이제 태자전하께서만 일어나시면 되는데 말입니다…….쓰러지신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참…….걱정이 크시겠습니다.”

“이 애비가 이리 맘고생 한다는 걸 안다면 금방 일어나겠지.”

조수라를 함께한 연제와 류 충이 사이좋게 차를 나눠 마시면서 쓰러진 무영에 대한 걱정을 나누고 있는데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에 질린 듯 목소리가 벌벌 떨리고 있었다.

“폐, 폐하…….태, 태자전하 납시었습니다.”

“뭐......?! 누가 왔다고?”

연제와 류 충은 눈이 휘둥그레 뜨며 서로를 마주보았다.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고하라고 명하려는데 자룡궁의 문이 열리더니 진짜 무영이 성큼성큼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태자!!”

“전하!?”

연제는 벌떡 일어나 주선발로 뛰어나가 무영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얼굴을 살폈다.  입술도 죄 터져있고 안색도 여전히 좋지 않아 보여 속이 상한 나머지 무영을 나무랐다.

“태자! 어떻게 된 일이냐! 어젯밤까지 정신을 놓고 누워있는 것을 봤는데……. 이제 괜찮은 것이냐? 더 아픈 곳은 없는 게야? 한 번도 이런 일로는 걱정 끼치지 않던 네가 왜 갑자기 애비 속을 썩이는 게냐! 이런 불효막심한 놈!”

“죄송합니다. 아바마마.”

류 충도 벌떡 일어나 무영을 살펴보았다. 왜 쓰러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정신을 차렸으니 한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응?”

무영을 위아래로 살피던 류 충이 눈을 크게 뜨더니 가까이 다가갔다.

“어…….전하. 우선 쾌차를 감축 드리옵니다. 헌데…….옷에 묻은 그것은 무엇이옵니까? 꼭……. 피로 보입니다만……?”

연제가 깜짝 놀라 무영을 훑어보았다. 정말 여기저기 뭔가가 튄 흔적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눈치를 채고 보니 피비린내까지 솔솔 풍기는 것이 뭔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태자…….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무영은 연제의 질문에 아무 말 없이 바닥에 꿇어앉아 머리를 숙였다.

“아바마마. 소자의 청을 지금 이루어 주시옵소서.”

“태자, 몸도 성치 않은데 무슨 죄인마냥 그렇게 있누. 고개를 들고 편하게 앉아 말해 보거라. 무슨 청 말이더냐.”

“며칠 전 의전에서 저에게 약조해 주셨던 청 말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류 충이 연제에게 다가와 말했다.

“폐하, 보물을 달라고 했던 그 청 말씀하시는 모양입니다.”

연제는 무영을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일어나자마자 어디서 뭘 했는지 여기저기 피는 잔뜩 묻혀 와서는 기껏 하는 말이 보물을 달라고……? 애비가 제 걱정으로 피 말라 갔다는 건 생각이나 할까.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 게 애비생각은 눈곱만큼도 안하는 구나.

아…….황후,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구려…….

“…….휴…….그래 약조는 약조이니 들어주마. 그래, 이 상황에서도 말해야 할 만큼 가지고 싶은 그 보물이 도대체 무엇이냐.”

무영은 고개를 들어 연제가 아닌 류 충을 쳐다보았다.

수척하니 창백한 얼굴에 황금색 눈만은 형형히 빛났다.

피딱지가 앉아있는 입술은 멀찍이서 보면 피가 점점이 묻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잔뜩 굶주려 광증까지 내보이는 짐승과 마주하고 있는 느낌에 류 충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긴장감이 급격히 솟아올랐다.

류 충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영은 류 충을 향한 시선을 고정하고 입을 열었다.

“황궁 안의 보물, 류 화연을 제게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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