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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65화 (65/110)

00065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싸늘한 금옥은 어둡고 또 습했다.

퀴퀴한 냄새에 피비린내까지 섞여 뭐라 말할 수 없는 악취가 진동을 했다. 여기저기서 간간히 울리는 신음소리까지 더해져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추국장 상석에 앉은 감찰 상궁은 혀를 차면서 화연을 노려보았다.

“저, 저, 독한 년…….네가 진정 고신을 받아봐야 입을 열겠느냐! 어서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감찰 상궁은 마음이 급해졌다. 류 대장이 오기 전 서둘러 자백을 받아야만 했다. 어르신께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백을 받아내라고 하셨지만…….감찰 상궁은 그렇게 까지는 할 수 없었다.

화연의 결백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재상의 딸에게 고신을 가한다면 뒷일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목이 달아날 것이 분명했다.

류 재상이야 어르신께서 붙들고 계시겠다고 했지만 류 대장은 이제 곧 금옥으로 쳐들어 올 터였다. 금위에게 들어오려는 사람은 무조건 막으라고는 지시는 했지만 시간을 길게 끌 수는 없을 것이다.

증거가 있으니 자백만 받아내면 되는데…….마음이 조급해진 감찰 상궁은 들고 있던 봉으로 의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네 입으로 네 것이라고 하지 않았더냐! 헌데, 훔친 것은 아니라니 그게 말이 된다는 말이냐!”

“제 것은 맞지만 훔친 것은 아닙니다.”

추국의자에 앉은 화연은 침착한 태도로 억울해 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시종일관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할 뿐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감찰 상궁은 화연에게 순순히 자백 받는 것은 포기해야 겠다고 판단했다. 20년간을 추국장에서 살았던 그녀는 죄인의 태도를 보면 끝까지 발뺌할 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다. 화연 같은 경우에는 고신을 받다 죽었으면 죽었지 원하는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이런 경우 아까운 시간 버리지 말고 서둘러 대상을 바꿔야 했다.

“시비 년을 의자에 묶어라!”

“예. 마마님”

옆에 시립해 있던 궁녀들이 어디선가 기해를 끌고 와 추국의자에 묶었다. 기해는 반항하다 한 대 얻어맞았는지 입술이 터져 부풀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화연의 눈빛이 스산해 졌다.

기해는 추국의자에 묶이면서도 자신보다는 화연의 안위를 걱정하기 바빴다.

“아기씨! 무릎 괜찮으세요? 많이 아프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곧 어르신께서 오실 거예요.”

“닥쳐라! 흠…….꽤나 아끼는 시비인 것 같은데 이년이 고통의 비명을 지르는데도 네가 버틸 수 있을지 내 두고 보겠다. 저년의 손톱을 뽑아라!”

궁녀들이 기해에게 득달같이 다가가서 기해의 손을 눌러 손잡이에 고정 시켰다.

“잠깐만요! 뭐하시는 겁니까!”

“아기씨! 저는 괜찮아요! 절대 아무말씀도 하지 마셔요. 조금만 버티면 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시면 안돼요. 이상한 말씀하시면 저 이 자리에서 혀 깨물고 죽어버릴 테니까 생각도 하지마세요!”

기해의 단호한 얼굴을 보는 화연의 표정은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태자전하께서 내려주신 거라고 말하면 안 될까. 그 말을 이들이 믿어주기는 할까…….

화연은 그 대답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고신하겠지. 하지만 기해를 저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을 믿어 주기는 하실 겁니까?”

“무슨 말이냐! 또 쓸데없는 소리로,”

“태자전하께서 주셨습니다.”

“…….뭐……?”

“태자전하께서 주신거란 말입니다.”

말없이 가만히 있던 감찰 상궁이 느닷없이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금옥을 왕왕 울리면서 귀를 찔렀다.

“믿을만한 소리를 해야 믿을 것이 아니냐!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그것을 누가 믿는다는 게야! 내 평생 이런 황당무계한 소리는 처음 듣는구나. 지금 시간이라도 끌어 보려고 수작부리는 것 같은데 어림없는 소리!”

화연은 눈을 꼭 감았다. 믿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다시 뜬 화연의 눈에는 생전 처음으로 독기가 서렸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것은 저보다 강한자의 힘을 빌려 제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감찰 상궁은 자백하나 싶어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엉뚱한 소리나 하는 화연을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다 소리를 빽 질렀다.

“아까부터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게야! 네가 정녕,”

화연은 감찰 상궁의 말을 끊었다.

“제 시비를 고신하고 싶으시면 마음껏 하십시오. 다만, 충고하는데 목숨이 중하시다면 저까지 죽이셔야 할 겁니다. 만약 제가 살아남는다면 아버지의 힘을 빌려서라도 제일 먼저 당신을 죽이겠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는 짓이긴 하지만 당신에 대한 증오가 그것을 넘어서는 군요. 어디 한번 해보십시오.”

저 독가시 잔뜩 돋아난 얼굴에 말투까지…….

가소로운 표정으로 화연을 보던 감찰 상궁의 안색은 희게 질려버렸다. 저건 겁주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대로 살아나간다면 재상의 힘을 이용해 자신에게 보복을 할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이었다.

문득,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단 자백을 받아 감옥에 가두면 후폭풍은 어르신께서 막아주시겠다고 해서 시작한 일이었다. 오냐오냐 곱게 컸다고 해서 조금만 겁박해도 벌벌 떨면서 입을 열거라고 쉽게 생각했는데 저렇게 끈질길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돈 까지 받았는데…….

감찰 상궁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궁녀들이 감찰 상궁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신을 시작하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화연의 기세에 눌려 입술만 잘근거리던 감찰 상궁은 팔걸이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화연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들고 있던 봉으로 화연의 머리를 내리쳤다.

기해의 비명소리가 금옥에 울렸다.

“꺄아악! 아기씨!!! 아기씨!!”

화연의 고개가 획 돌아가더니 축 늘어졌다. 머리 한쪽에서 피가 터져 얼굴로 흘러 내렸다.

소리를 지르려던 감찰 상궁은 가슴이 철렁 떨어져 내렸다. 그녀의 동공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어떻게 하지…….너무 흥분한 나머지 손속을 과하게 썼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애써 감추었다. 이미 기호지세(騎虎之勢)의 형국이었다. 절벽으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이제 죽기 아니면 살기다.

“네, 네 이년!!! 당장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죄인 주제에 감히 누구를 겁박하려 드는 것이냐! 오냐,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 년의 정신이 돌아오도록 얼음물을 부어라! 너희는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시작하지 않고!!”

궁녀들이 달려들어 화연을 부르며 울부짖는 기해의 손을 붙잡고 손톱에 벌겋게 달궈진 쇠꼬챙이를 가져다 대었다.

그때.

스르릉-

“멈추어라.”

어느새 추국장안으로 들어선 류 강연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빼들고 감찰 상궁에게 다가가 목에 겨누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칼날처럼 새파랗게 빛나는 눈에는 살기가 눅진하게 흘러나왔다. 표독스러웠던 감찰 상궁의 얼굴이 대번에 겁에 질렸다. 당장이라도 칼날이 목안으로 파고 들어올 것 같았다.

“류, 류 대장님…….”

류 강연은 감살 상궁을 얼굴을 쳐다보다 정신을 잃은 화연과 끅끅 거리며 통곡을 하는 기해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해 앞에 서있던 궁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쇠꼬챙이를 떨어뜨렸다. 그것이 습기로 가득한 돌바닥에 떨어지면서 치- 소리를 내며 연기를 피웠다.

류 강연은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이를 악무느라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지금 이 년을 죽여 버리면 이일을 주도한 사람을 알아낼 수가 없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조금만 참자.

참을 인자를 세 번 읊은 그는 눈을 뜨고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금옥에 무겁게 깔렸다.

“돌았습니까?”

“예……?”

“지금 제정신이냔 말입니다.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으신 가 봅니다. 이따위 짓을 하시다니 말입니다.”

“류 대장님! 그게 아니라…….”

“류 가(家)가 참 우습게 보이셨나 본데…….각오는 되신 겁니까?”

“이, 이건…….폐하께서 내리신 어명에 따라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행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관여하실 자격은 없지 않습니까…….”

“재상의 자녀를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추국하는 것이 적법한 절차라니…….제가 전쟁터에 가 있는 동안 법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감찰 상궁은 속으로 침음성을 내뱉었다. 형세는 이미 저쪽으로 기울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금옥에 도착하자마자 고신을 시작했어야 했다. 이렇게 되면 시작 하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내가 벌집을 건드렸구나.

후회스럽기 그지없었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녀는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자신이 빠져나갈 수 있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감찰 상궁은 서둘러 바닥에 꿇어 앉아 고개를 조아렸다.

“대, 대장님! 저도 대학사 어르신의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류 강연의 뒤에 서있던 궁녀들은 한 대 뭉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었다. 저자세로 변명하기에 급급한 감찰 상궁을 보니 자신들에게까지 화가 미칠 것 같아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궁녀들 옆으로 누군가 스쳐 지나갔다. 류 강연의 뒤로 조용히 다가가는 사람을 흘끔 훔쳐본 궁녀는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급히 틀어막았다.

감찰 상궁은 류 강연에게 사력을 다해 변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제가 아무 이유 없이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사 어르신의 명으로 아가씨 처소를 수색해 보니 정말 미르의 눈물이 나왔습니다. 더군다나 아가씨 스스로 자신의 것이라 말씀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수상한 일 아닙니까. 이 일의 원흉을 엄벌에 처하겠다는 폐하의 어명도 있으셨고요……. 저, 미리 통보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대학사 어르신께서 막으셨습니다. 그, 그래서 어쩔 수 없이......!”

“!!”

“까아아아아악!!”

누군가 류 강연이 겨누고 있던 칼을 뺏어들더니 그대로 감찰 상궁의 목을 내리 쳤다. 감찰 상궁의 잘려진 머리가 추국장 구석으로 대굴대굴 굴러갔다. 목이 떨어져 나간 몸통은 피를 뿌리며 뒤로 넘어가더니 사지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것을 본 궁녀들이 너도나도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앞에 서있던 류 강연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를 고스라니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피 칠갑을 한 채 혼자 서있던 류 강연은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기척 없이 다가와 자신의 칼을 뺏을 만한 사람은 황궁 안에 단 한명밖에 없었다.

“…….태자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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