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3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무영이 난데없이 쓰러지고 황궁 전체는 비상이 걸렸다.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뜸하던 청룡궁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약방궁녀와 어의가 교대로 드나들었다.
새벽 경호당번인 주 아랑과 주 해랑은 이제야 겨우 조용해진 청룡궁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신세한탄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쌍둥이 중 먼저 태어난 형 주 해랑이 허공을 응시하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죽여도 죽을 것 같지 않던 짐...께서 쓰러지셨다니...이게 가능한 일이냐고.”
그 말을 용케도 알아들은 동생 주 아랑이 동조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 난 함정에 빠진 기분이야. 사실은 쓰러지신 게 아니지 않을까? 지금도 어디선가 눈을 노랗게 빛내며 우리를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아.”
“아냐. 쓰러지신 건 확실해. 아까 아침에 제갈 명이 대장님에게 보고하면서 봤는데 진짜 정신을 놓고 누워계시더래. 근데 그 모습도 무서웠다고 하더라.”
“이대로 못 깨어나시면 어떻게 하지? 애들이 그러는데 우리도 같이 순장 될 거라고 하던데...”
“순장은 안 할걸?”
“진짜?”
“응. 순장은 아무나 되는 줄 아냐. 우리는 그냥 목만 잘려 쓰레기처럼 버려질 거야.”
“......”
잘하면 살수도 있겠구나 했는데...주 아랑의 마음속에 생긴 희망의 불씨가 빛의 속도로 꺼졌다.
둘이 똑같이 한숨을 쉬다가 찾아드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용한 전각 주위에는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분위기가 영 께름칙한 것이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꾸만 뒤통수가 당겼다.
주 아랑은 별로 추운날씨도 아닌데 팔에 돋은 닭살을 쓸며 주 해랑에게 말했다.
“형. 오늘 분위기 정말 이상하지 않아? 뭔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동생의 말에 주 해랑이 몸을 움찔거리며 겁에 질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야! 조용히 안할래? 안 그래도 아까부터 자꾸 소름이 끼쳐 무서워 죽겠는데 그런 말 할 거야!”
그때 어디선가 스산한 여자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저기요...”
“으억!”
“...!!...”
주 해랑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형보다는 담이 좋은 주 아랑은 칼머리에 손을 얹으며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의 손은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누, 누, 누구냐!......헉!”
허연 옷을 입은 여자였다.
연등에 비춰진 그 여자는 입은 옷만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눈 밑은 누구한테 얻어맞은 마냥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고 입술은 푸르딩딩한 것이 귀신의 형상이 따로 없었다. 주 아랑의 얼굴에 닭살이 오소소 솟았다.
“누, 누구냐! 저, 정체를 밝혀라!”
복장을 봐서는 궁녀는 아닌 것 같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때 까지 몰랐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그 여자는 가까이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가까운 것 같은데 여자가 한 발자국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주씨 쌍둥이는 질겁하여 뒤로 두발자국 크게 물러서면서 칼을 빼들었다.
“멈춰!! 가, 가까이 오지 마라!”
다가오려던 여자는 멈칫하더니 입 앞에 손을 모아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너무 멀지 않아요? 들리시겠어요?”
“아주 잘 들린다! 거, 거기서 말해라!”
여자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내렸다.
“그럼, 죄송하지만 류 대장님 좀 불러주세요.”
주씨 쌍둥이는 행여 저 귀신같은 여자가 다가올까 두려워 발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여자의 말을 뒤늦게 알아들었다.
“...뭐? 류 대장님?”
“네. 류 강연 대장님이요. 퇴궁 안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계시지요?”
“휴우-”
주씨 쌍둥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칼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짐승을 마중 나온 온 귀신은 아니었다. 더 이상 이 섬뜩한 여자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주 해랑은 자기가 전하겠다며 바람처럼 뛰어 들어가고 혼자 남은 주 아랑은 아직도 벌렁거리는 심장에 인상을 쓰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장님 만나시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지금 주무시고 계시다면 못 만나실수 있습니다. 원래는 안 된다는 거 알고 계시지요?”
“꼭 전해 드려야 할 말이 있어서요...... 늦었다는 건 알지만 너무 중한 일이라 지체할 수 없어 이렇게 왔습니다.”
“아니, 그럼 처음부터 당당히 말씀하시면 될 것을 왜 몰래 다가오신 겁니까? 간 떨어지게 스리...그러다 잘못하면 칼 맞습니다.”
소복을 입은 여자, 호림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하곤 하던 말을 다시 꺼냈다.
“저...아까부터 여기 서있었는데요.”
*
장옷을 걸치고 터덜터덜 걸어 나온 류 강연은 호림을 보자마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그는 호림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못 찾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기함을 하면서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응? 누가 이 밤중에 찾아왔나 했더니 호림이 아니야? 어? 연릉각은 어떻게 빠져 나왔냐? 몰래 나왔어?”
이름까지 기억해주시네...호림의 창백한 볼에 아주 미세한 홍조가 떠올랐다. 역시 이 일을 나한테 맡겨 달라고 조르길 잘했어.
“아니요... 이제 시비의 출입까지는 크게 간섭하지 않아요.”
“그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넌 무슨 여자애가 겁도 없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야?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황궁 안이라고 너무 맘 놓고 다니는 거 아니냐?”
류 강연의 걱정하는 듯 한 말투에 호림은 마주잡은 손을 배배 꼬면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다 조신하게 말했다.
“저...긴히 드릴말씀이 있어서요...시간 좀 내주실수 있으세요?
“무슨 얘긴데 이 오밤중에 해? 낮에 하면 안 돼?”“낮에는 저도 우리아가씨 옆에 있어야 해서요. 대장님께서도 낮에는 시간 없으시잖아요.”
“아...그렇긴 하지. 그럼 날씨도 아직 쌀쌀한데 청룡궁으로 들어가서 얘기할까?”
“아니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재수 없다는 소리를 엄청 많이 들었거든요. 태자전하께 옮기면 안 되잖아요. 저기, 저쪽으로 가면 여기서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얘기할 곳이 있어요.”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여자애한테 그런 말을 해? 너도 그런 소리 일일이 새겨듣지 마. 쯧......어디라고? 저쪽?”
“네. 저기요.”
“그래. 가자.”
호림의 등 뒤를 보호하듯 걷는 류 강연의 행동으로 인해 그녀의 창백한 볼은 아주 조금 더 불그스름해졌다.
주씨 쌍둥이는 그들의 신형이 점점 멀어지다가 사라질 때까지 넋을 놓고 보았다. 뭔가 무시무시한 광경을 본 것 같은 기분에 한차례 진저리를 치던 주 아랑이 갑자기 몸을 훽 돌려 청룡궁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에 주 해랑까지 기겁을 하면서 고개를 급히 돌렸다. 짐승의 아가리처럼 시커멓게 보이는 청룡궁 입구는 적막하니 스산한 기운만 맴돌 뿐이었다.
“야! 갑자기 왜 그래! 깜짝 놀랐잖아!”
“...뒤로 뭔가 지나간 것 같았는데... ”
“이 놈이 아까부터 진짜...! 지나가긴 뭐가 지나갔다고 그러는 거야! 그런 소름끼치는 소리는 하지도 말어!”
청룡궁 입구를 주시하던 주 아랑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기척을 느꼈는데... ... 너무 예민해졌나 보다.
“아닌가......아휴- 알았어! 형, 방정 좀 그만 떨어! 짐승이 이대로 안 깨어나면 목이 잘리게 생겼는데 지금 귀신 무서워 할 때냐?”
“응.”
“......”
하여튼 겁은 드럽게 많아가지고...
주 아랑은 죽는 것 보다 귀신이 더 무섭다며 팔에 철썩 붙어서 수선을 떠는 형, 주 해랑을 측은하게 보다가... 팔을 거세게 털어냈다.
“아! 쫌 저리가!”
*
“휴- 들키는 줄 알았네...”
밖의 동태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기해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크게 한숨을 뱉었다. 그 옆에 서 있던 화연이 기해의 목소리에 놀라 서둘러 주의를 주었다.
“기해야. 쉿-”
“앗! 죄송해요 아기씨. 근데 우리 어디로 가야돼요?”
“전에는 3층에 계셨는데...지금은 모르겠어. 일단 한번 올라가봐야지.”
“그럼, 어서 올라가 봐요.”
기해는 화연의 손을 끌면서 발끝으로 계단을 올라가면서 소근 거렸다.
“아기씨 시간이 없어요. 최대한 빠르게 만나고 나오셔야 해요. 호림이가 강이 도련님을 붙잡고 얼마나 시간을 끌어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잖아요.”
“아까 밤새도록 붙잡을 수도 있다고 그러지 않았어?”
“흥! 하여튼 걔도 말은 참 청산유수야. 아기씨 생각을 해보셔요. 아기씨 같으면 호림이랑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있고 싶겠어요? 벌벌 떨다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지나 않으면 다행일걸요? 전 돈을 준다고 해도 싫으네요.”
“왜 그래...호림이도 자주 보니 귀엽던데. 얼굴도 예쁘고.”
“아기씨, 정말 뭘 모르시네요. 처녀 귀신이 못생겼다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못 들어 보셨죠? 처녀 귀신은 다 예뻐요. 그래서 처녀귀신이라구요. 어...? 쉿-”
작게 투덜거리던 기해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쉿-”
검지를 입 앞에 세우고 한 동안 가만히 있던 기해는 화연을 끌고 2층의 계단 옆 기둥 뒤로 숨었다.
“아기씨. 어떻게 된 거예요. 3층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위층에 누가 있어요.”
기해의 귓속말에 어깨를 움츠리던 화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았다.
“정말? 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으...! 맞다...태자전하께서 쓰러지셨으니 그 앞을 지키고 서있을 것이 당연한데 그 생각을 못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궁녀 의복이라도 어디서 훔쳐오는 건데...이제 어떻게 하죠? 그냥 돌아가시겠어요?”
화연은 가만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기해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수는 없잖아.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갔다 올게.”
“아기씨! 어쩌시려구요. 잘못하면 금옥에 끌려갈 수도 있어요. 우리 그냥 나가요. 예?”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아. 부탁하면 들여보내줄 거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기해는 제 손을 꼭 잡아준 뒤 계단에 올라서는 화연을 붙잡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발만 굴렀다.
“흠, 흠...저...”
“누구냐!!”
계단을 오르면서 일부러 낸 화연의 기척소리에 무영의 침소 앞을 지키고 있던 제갈 명은 칼을 잡으면서 빠르게 말했다. 여차하면 칼을 뽑을 기세였던 그는 3층에 올라서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칼집에서 손을 떼었다. 실내가 어둡긴 했지만 확실했다. 그냥 여자도 아닌 아주 예쁜 여자다. 제갈 명은 어깨를 쫙 피며 목소리를 깔았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습니다. 못 본 걸로 해드릴 테니 어서 나가십시오. 아, 돌아가시기 전에 어디 소속인지 말씀은 해주고 가셔야 합니다. 흠, 흠...방문자는 기록을 해놔야 해서...커흠.”
화연은 제갈 명 앞에 서서 머뭇거리다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예...? 저를 아십니까?”
이렇게 예쁜 여자를 봤다면 기억에 없을 리가 없는데...제갈 명은 화연의 얼굴을 유심히 보면서 눈썹을 모았다.
“제가 나비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은 못 보셨겠지만 얼마 전까지 점심때마다 찬합을 들고 방문했었는데...기억 안 나세요?”
제갈 명의 눈이 번뜩 뜨였다. 매일같이 짐승의 먹이를 챙겨주던 그 아가씨 구나. 한동안 오지 않기에 드디어 짐승의 실체를 알고 도망갔구나 싶어 대원들 모두 실망했었는데...
“아! 그 분이 아가씨였군요? 그 동안 왜 안 오셨습니까?”
“네. 일이 좀 있어서요...저, 근데...이런 시간에 죄송한 부탁이지만 전하를 뵐 수 있을까요?”
반색하던 제갈 명은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불가능 합니다. 어의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어명이 계셨습니다. 게다가 만나실 수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제갈 명의 말에 화연의 안색은 대번에 어두워 졌다.
“그렇게 위중하신가요? 어디가 얼마나 편찮으신 건데요?”
“죄송하지만 그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화연은 제갈 명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절실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저 왔다고 말씀이라도 전해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갈 명은 난처해 졌다. 어명도 어명이었지만 실신해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달라는 말인가.
“저...그게 아니라.”
“밖에 누군데 이렇게 소란이냐!”
제갈 명이 화연에게 상황설명을 하려는데 침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의가 나와 호통을 쳤다. 고단한 얼굴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딱하다는 시선으로 화연을 보던 제갈 명이 그녀 앞을 막아서면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별일 아닙니다. 어서 들어가시지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리 비켜보게! 이 밤중에 누가 여기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어의는 있는 성질 다 내면서 제갈 명을 밀어내고 그 뒤에 있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너는 예가 어딘 줄 알고...!!!”
뒤에 서있던 화연의 얼굴을 본 어의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욕을 퍼부으려 크게 벌렸던 입을 곱게 다물고 찌를 듯이 뻗어있는 손가락을 얌전히 접었다. 그리고 납작 엎드리며 외쳤다.
“태자비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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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의의 이름은 박 준명
이 사람 기억 하시죠? 자다가 짐승에게 습격 당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