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2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기해는 화연의 침소 문 밖에 서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화연은 태자와의 대면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운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얼굴로 들어와 자신까지 내몬 뒤 침소에 틀어박혀 두 시진 째 나오지를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정말 속상해 죽겠네...어휴...”
“여기서 뭐해?”
“어마! 깜짝이야!......야!! 나한테 말 걸기 전에 기침소리라도 먼저 내라고 내가 말 했어 안했어!”
화들짝 놀라며 벽에 등을 붙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은 기해 옆에 호림이 으흐흐흐 웃으며 같이 쪼그려 앉았다.
“너무 반가워서 그랬지...미안”
“어? 근데 너 왜 여기 있어? 예진아가씨도 삼간택 통과하셨어?”
“응. 화연아가씨도? 우리 아가씨가 대면식 때 화연아가씨 없었다며 탈락하셨나 보다고 우울해 하셨는데...”
“뭔 소리야? 우리 아가씨 점심 드시고 대면식 갔다 오셨는데?”
“응? 점심? 대면식 점심 전에 했었는데...대면식 한다고 갔더니 화연아가씨는 안계시고 그 재수탱이 삼총사만 쪼르르 앉아 있더래. 아침에 먹은 게 올라오는 줄 알았다고 아까 오만 짜증 다 내셨는데...그럼 화연아가씨만 대면식을 따로 했다는 거야? 왜?”
“내가 그걸 어찌 알겠냐. 안 그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대면식 갔다가 얼굴이 아주 안 좋아져서 오셨어. 우셨던 것도 같고. 나도 못 들어가고 이러고 있는 거 보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겠냐. 말씀이라도 좀 해주시면 좋으련만...”
“이상하네......분명히......음?”
기해의 한탄을 들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호림은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더니 갑자기 웃으면서 손뼉을 쳤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얘기 들었어?”
“야...여기에 너랑 나밖에 없거든? 작게 말해도 다 들려. 좀 조용히 말해. 시끄러워 죽겠네.”
기해의 신경질적인 면박에 호림은 씩 웃더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전하께서! 쓰러지셨대!”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르는 호림의 목소리에 기해가 귓구멍을 막으면서 맞고함을 질렀다.
“아, 좀 조용히 하라니까! 짐...께서 쓰러지셨든 말든 지금 그게 먼 상관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난 관심 없거든!! 지금 우리 아기씨 상태가 더 심상치 않다고!”
기해의 열 받아 붉어진 얼굴을 보면서 흐흐흐흐-하고 웃던 호림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순순히 사과했다.
“으음...알았어. 미안해.”
기해는 갑자기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웃고 갑자기 사과하는 호림을 뜨악한 얼굴로 보다가 어깨에 손을 올려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너 진짜 의원 한번 가봐. 너는 잘 모르겠지만 가끔...아니, 자주 이상하다니까. 언니 말 들어서 나쁠 거 없다. 출궁하면 언니랑 같이 가볼까?”
호림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을 두 손으로 가리면서 큭큭큭- 하고 웃었다. 호림의 어깨를 쓰다듬던 기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슬며시 떼더니 치마에 쓱 닦았다.
*
연릉각의 식당은 더 이상 운영하지 않았다. 궁녀가 직접 가져다 준 저녁식사를 탁자위에 차리던 기해는 침상에 멍하니 앉아있는 화연의 얼굴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태자전하와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러실까…….어떤 험한 말씀을 들으셨기에 눈물바람으로 오셨을까. 기해는 속이 상해 목이 메었다.
“휴우- 아기씨, 식사하셔야지요.”
멍하게 있던 화연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응......?”
“......식사하시라고요.”
“어”
젓가락으로 밥만 새 모이처럼 떠서 기계적으로 입에 넣는 화연과 그런 화연을 보며 밥 대신 한숨을 더 많이 삼키는 기해로 인해 식탁분위기는 더없이 우울했다.
똑똑
먹는 둥 마는 둥 입맛도 없어 대충 식사를 마치고 그릇을 치우고 있는데 누군가 처소 문을 두들겼다. 기해가 나가 보니 예진과 호림이 당과상자를 들고 서있었다.
“기해야. 화연님 아직도 기분이 별로시니? 우리 돌아갈까?”
“아녜요.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속 터져 죽을 것 같았는데 잘됐네요. 도대체 왜 저러시는지 저 대신 좀 물어봐 주세요. 아무리 여쭈어 봐도 저한테는 도통 입을 안 여시니 이대로 숨넘어가게 생겼어요. 지금. 어휴, 진짜.”
예진과 호림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화연의 처소로 들어섰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화연은 예진을 망연하게 바라보더니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예진이 다가가 화연의 얼굴을 가슴에 꼭 안았다.
“화연님…….”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화연을 보던 기해가 차오른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발까지 구르면서 치마를 꽉 움켜쥐는 것이 속상해 죽겠다고 온몸으로 외치는 것 같았다.
“정말 아까부터 왜 그러시는 거예요! 말씀 좀 해보시라고요! 계속 그렇게 울기만 하실 거예요? 저 그냥 여기서 혀 깨물고 콱 죽어버릴까요?”
기해의 눈물어린 호소에 화연이 몸을 바로 하더니 기해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서둘러 부여잡은 기해가 화연 옆에 꿇어 앉아 울면서 애원했다.
“아기씨…….제발 말씀 해보세요. 저한테 말씀 못 하시겠으면 예진아가씨에게라도 말씀하셔요. 그렇게 울지만 마시고요…….네? 아셨지요? 아기씨 저 나가 있을게요.”
눈물을 닦으며 일어서려는 기해를 화연이 잡았다.
“기해야. 나가지마…….얘기 할 테니 그만 울고.”
그 뒤로 화연의 눈물의 고백이 장시간 동안 이어졌다.
울먹거리며 화연의 얘기를 듣던 기해는 눈물이 쏙 들어가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얘기를 마친 화연은 다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보던 기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구, 궁에서 남자를 만나서 어쩌다 보니 마, 마, 마음을 주게 됐는데…….그, 그, 그…….사람이…….짐, 태자 전하였다고요? 그, 태자전하요? 우리나라 태자전하? 붉은 머리에 키 큰 그 분? 사람을 무 썰듯이 썰어버린다는 그? 예의도 없고 상식은 더더욱 없다는?”
“…….그렇게 까지는…….응…….”
“어제 대면식에 갔더니 그분이 계셨다고요?”
“응…….”
“붉은 머리를 보고도 여즉 모르셨어요?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응”
“그 분께서 여기를 제집처럼 드나드셨고요?”
“.......응”
“혹시 그 천ㄴ…….인삼, 태자전하께서 주신 거예요?”
화연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기해야!!”
기해가 머리를 감싸더니 비틀거렸다. 게슴츠레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가리면서 이 놀라운 얘기를 듣던 호림이 휘청거리는 기해를 부축해 탁자 앞에 앉혔다.
기해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던 예진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화연님. 화연님께서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세요. 모른다는 것을 알고도 말씀을 안 하신 태자전하의 잘못이지요. 그러면 어제 대면식 도중에 태자전하께서 쓰러지신 건가요?”
“아니에요. 제가 나올 때 까지는 괜찮았는데......”
“흠…….그럼 대면식 끝나고 바로 쓰러지셨나 보네요.”
화연은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망연자실하게 앉아있는 기해의 얼굴을 힐끔 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저…….어디가 편찮으셔서 쓰러지신 건지…….”
예진도 기해의 얼굴을 살그머니 보다 작게 대답했다.
“듣자하니 궁 안에 있는 궁의, 어의 할 거 없이 하나같이 쓰러지신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고 하셨답니다. 어의 중 한분께서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서 그러신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욕만 실컷 얻어먹었다는 얘기도 있고요. 어젯밤 연제께서 호통을 치시면서 삼일내로 정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모두 목을 자르겠다고 엄포를 놓으셨대요. 그래서 지금 황궁 안은 살얼음판이라고 하던걸요.”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기해가 갑자기 탁자를 내려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 그러면 그건 뭐야! 태자전하께서는 연모하는 아가씨가 있다면서요. 그럼 그 말은 무슨 말이냐고요……! 설마, 지금 우리아기씨 가지고 노신 거예요? 그런 거예요? 맞죠? 맞죠!!”
화연의 고개가 다시 푹 숙여지고 예진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기해에게 물었다.
“전하께서 연모하시는 아가씨가 있다니?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기해는 아차 했지만 이 마당에 숨길게 뭐가 있냐 싶었다.
“가주 어르신께서 그러셨어요. 그 분께서 연모하시는 분이 이미 계시다고. 해서 우리 아기씨 마음 놓고 황궁에 들여보내신 거란 말예요. 제 짝도 있으면서 우리 아기씨한테 수작을 걸었다는 말이잖아요! 우리 순진한 아기씨는 그것도 모르고 맘까지 죄다 줘버린 거구요! 아니, 뭐 이런 개자식이 다 있어?! 천ㄴ…….삼만 던져주고 가면 다야!!”
예진은 붉은 얼굴로 태자전하에게 욕까지 내뱉으며 금방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성질을 내는 기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고 있는데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태자전하께서 마음에 두신분이 정말 화연님이셨구나! 그래서 어제 우리와의 대면식 때 그렇게 행동하셨던 거야. 어쩐지 이상하다고 했어.
*
어제 대면식을 위해 자신이 연미정에 들어서니 화연님은 안계시고 그 재수탱이 삼총사만 쪼르륵 앉아 있었다. 얼굴을 팍 일그러트리고 자리에 앉는데 서로에게 보내는 그들의 눈초리가 참 자신만만하고 기세등등한 게 누가 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첩지를 받기로 정해놓은 사람들 같았다. 어우…….정말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어 아침에 먹은 국까지 올라오겠다며 중얼거리고 있는데 태자전하께서 납시었다는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서서 예를 올린 뒤 고개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는데 태자는 앉으라는 말도 없이 혼자 털썩 앉더니 팔을 뒤로 짚고 등을 비스듬히 하는 방만한 자세로 연초를 피우기 시작했다. 네 명이서 멀뚱거리며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태자가 말했다.
“앉아.”
“감읍하나이다.”
네 명이서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앉으려는데 태자가 다시 말했다.
“늬들한테 한 말 아닌데.”
“…….예?”
“너희들은 서있으라고.”
“......예, 전하......”
예진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힘들게 감추고 얌전하게 앉았다. 태자는 연초를 피우며 가만히 앉아 있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친구가 요즘 기분이 안 좋다며?”
갑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닌 친구의 기분을 묻다니…….친구, 누구? 혹시 화연님 말씀하시는 건가? 그건 어떻게 알았지? 예진은 영문을 모르겠는 와중에도 일단 대답했다.
“예, 전하. 요즘 그렇습니다.”
“많이 안 좋아?”
“…….예…….얼굴이 많이 상했기는 합니다만…….그건 왜…….”
“흠…….”
그때 눈치만 보던 남궁 진류가 코맹맹이 소리로 아양을 떨며 말했다.
“전하…….소녀 다리가 아프옵니다. 앉아서 전하를 마주 봬오면…….”
“그거 조금 서있었다고 다리가 아파? 살 좀 빼.”
남궁 진류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공 혜민이 그런 남궁 진류의 얼굴에 비웃음을 던지더니 태자에게 교태를 부렸다.
“전하. 연약한 소녀에게는 연초의 향기 독하게 느껴지옵니다. 조금만…….”
“그럼 꺼져.”
“예?”
“독하다며. 그럼 꺼지라고.”
나를 위한 말씀이신가? 공 혜민이 성은이 망극하다고 해야 할지 송구하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는데 차가운 눈으로 그녀들을 지켜보던 기류 미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전하, 저를 기억하십니까?”
“흠…….언제 본적이 있나?”
앞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태자의 말투에 기류 미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예, 과거 소녀가 13세일 때 전하를 뵌 적이 있사옵니다. 당시 전하께오서는 참으로 늠름하였었지요.”
“그럼…….내가 16살 때?”
“예, 그러하옵니다.”
“그럼, 어린남자랑 살아.”
“예……? 아, 아니, 그런…….”
“그만, 모두 닥쳐.”
태자는 당황한 기류 미란의 얼굴에는 시선한번 주지 않고 차갑게 일갈한 뒤 예진에게 계속 물었다.
“근데 말이야…….그 친구…….자신을 속인 사람을 이해해 줄까?”
왜 이런 걸 자꾸 물어보는지는 몰라도 예진은 답답했던 속을 뻥 뚫어준 태자에게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작정하고 속였느냐, 본의 아니게 속였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 사료 되옵니다. 전하.”
“음…….처음에는 작정하고, 나중에는 본의 아니게 면?”
“전하. 꼭 이해를 받으셔야 하옵니까? 명령하시면…….”
“안 돼.”
“......그럼 당연히 본의 아니게 로 밀고 나가셔야지요. 전하께서는 처음부터 ‘본의 아니게’ 속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셨던 겁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전하, 그렇지요?”
“......생각해 보니까 그렇군. 네 말이 맞아. 처음부터 ‘본의 아니게’였어.”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제 친우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을 물고 늘어져 끝까지 고집을 피울 사람이 절대 아니옵니다. 사리분별이 아주 정확하고, 또 너그럽지요. 그 누구누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말입니다.”
말을 끝낸 예진은 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태자의 시선도 함께 돌아갔다.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들은 태자의 시선을 받자마자 눈웃음을 치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보는 태자의 미간이 못 볼 걸 본 마냥 잔뜩 구겨졌다.
*
예진은 자신의 입을 가리면서 호림을 쳐다봤다. 어쩐지 무슨 대면식에서 후보자에 대한 질문도 아닌 후보자 친구에 대한 질문만 줄줄이 물어보시나 했다. 게다가 이해를 받아야 하고 명령해서는 안 된다니…….그건 동등한 관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호림은 내말이 맞지? 하는 표정으로 예진을 마주보았다. 호림이 아무래도 태자전하의 심중에 화연님이 있으신 것 같다고 운을 띄우긴 했었는데…….그럼 두 사람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이잖아?
어머…….너무 낭만적이다…….
분통을 터트리는 기해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연, 그 사이에 있는 예진의 볼에는 불그스름한 홍조가 떠올랐다.
헌데, 왜 화연님은 모르실까. 나도 단번에 눈치 챘는데…….
하긴, 커다란 그림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이것이 무슨 그림인지 모를 수도 있겠지. 그럼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말을 해줘야 할까.
“그럼, 그 행정 관료의 여식은 대체 누구란 말이야! 내 누군지 알기만 하면...!!...”
당장 달려가서 누워있는 태자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이던 기해는 고개를 획 돌려 예진을 노려봤다.
“설마…….예진님이세요?”
기해는 독기서린 얼굴로 예진을 노려보더니 조용히 일어나 문 앞을 막아섰다.
그 행동 하나로 예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동안 우리가 아무리 친하게 지냈더라도 그 여자가 자신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이 방을 곱게 나갈 수는 없겠구나.
예진은 서둘러 손사래까지 치며 변명했다.
“어? 나? 나 아니야!! 정말 아니야!! 난 태자전하 어제 처음 봤어. 황궁도 처음 와 본건데? 알잖아. 우리 집 두메산골인거. 그리고 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기해는 의심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예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울분을 토했다.
“그럼 그 년은 도대체 어떤 년이란 말이야!!!”
너 네 아가씨 같은데…….
예진은 호림을 쳐다봤다. 둘이 오해를 풀기 전에 누가 나서면 일이 꼬일 수도 있으니 이걸 얘기해 줘야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섰다. 예진의 난처한 표정에 호림이 기해의 옷을 살짝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저기…….그 사람이 누구일지 모르는데 욕은…….좀 자제하는 게 어떨까.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주 가까이.”
그 말에 잡힌 옷을 거칠게 털어내면서 너는 누구 편이냐며 발끈하던 기해는 호림을 보고 멈칫했다. 호림의 눈알은 화연을 향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응? 그치? 응? 응?”
기해는 호림의 눈짓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녀ㄴ…….그 분, 우리 아기씨구나.
기운이 쫙 빠진 기해는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아 화연을 쳐다봤다.
고개를 푹 숙이고 몸과 마음과 돈까지 다줬는데 한 순간에 뻥 차인 처녀의 몰골로 앉아있는 처량한 모습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생각 같아서는 어르신께 말해서 태자고 뭐고 당장 짐 싸서 집으로 가자고 하고 싶었다. 그래도 태자가 얼씬거리면 이번에야 말로 테국으로 망명가는 거지 뭐.
그런데…….세상 무너진 듯 슬퍼하는 저 얼굴을 보니 다 잊고 집으로 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미 마음까지 다 줬다는데 도로 가져오라고 할 수도 없고…….이래서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소리가 있는 거로구나.
아니, 근데 그 놈이 뭘 어쨌기에 내 딸…….아, 아니지, 우리 아기씨 눈에서 눈물까지 흐르게 해!!
“어휴……”
내 팔자야. 역적 짓을 내 손으로 직접 하게 되다니…….
“아기씨”
“…….응”
“만나 보셔요.”
“…….누구를?”
“이 시점에서 누구긴 누구겠어요. 태자전하지요.”
당황스런 표정이던 화연은 이내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 만날 이유 없어.”
기해는 이런 말로 설득까지 하면서 우리 꽃 같은 아기씨를 그 짐승태자에게 주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하는 기해의 얼굴은 똥 씹은 얼굴마냥 구겨져 있었다.
“아기씨, 지금 경황이 없어서 조사가 안 나온 것 같은데요. 태자전하께서 며칠만 더 저렇게 누워계신다면 급해진 사람들이 경위를 조사할거예요. 조금만 알아봐도 아기씨와 대면식 후 쓰러지셨다는 걸 알게 되겠죠. 그렇게 되면 아기씨를 황족 시해범으로 몰아갈걸요? 그럼 우리 모두 반역죄로 끌려가겠지요. 반역죄는 삼대를 멸한다는 거 아시죠? 그전에 가셔서 오해를 푸셔야지요.”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은 기해의 말에도 화연은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갈팡질팡하는 화연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예진까지 기해의 의견에 합세했다.
“제 생각도 그래요. 가셔서 오해를 푸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차근차근하게 말씀을 나눠보세요.”
아직도 갈등하는 화연에게 호림이 쐐기를 박았다.
“저는 반대에요. 그렇게 꼴 뵈기 싫으시면 가지 마세요. 듣자하니 조금 있으면 승하하실 것 같다 던데 뭐 하러 가시게요. 어차피 증거도 없는데 가만히 계시다가 돌아가시면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 떼시면 되죠. 게다가 오늘내일 하신다면 가셔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아요. 가지 마세요.”
화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쓰러졌다는 말만 들었는데……. 그렇게 위중한 상태라는 말인가. 반면에 기해는 호림의 말에 일말의 희망이 보여 반색을 하며 물었다.
“뭐? 승하하신다니? 그거 정말이야? 누가 그런 말을 해? 언제 돌아가신다는데? 금방 돌아가실 거 같대? 언제쯤? 내일쯤?”
“......”
짜게 식은 호림의 표정을 살피던 기해는 단박에 시무룩해졌다.
“…….미안…….난 그냥…….혹시나 해서…….”
그들은 금위의 교대시간인 자정에 연릉각을 빠져 나가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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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화에 짐승이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는데 아무도 '짐승 어떻게....ㅜㅜ'하시는 분이 없었음...모두가 빵 터져서 난리였음...짐승...지못미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