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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61화 (61/110)

00061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명 상궁의 말에 따라 처소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연은 궁녀의 기별을 받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연릉각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상궁은 화연을 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네? 다른 분들은 아직 안 오셨는데요?”

“다른 분들은 시간차를 두고 각자의 장소로 이동하셨습니다.”

“아…….예. 그럼, 부탁드립니다.”

다른 처녀들과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따로 가는 것은 물론 장소도 각자 틀린 것 같았다. 예진이 통과했는지 궁금했는데…….화연은 말없이 상궁의 뒤를 따랐다.

화연이 도착한 곳은 연릉각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상궁이 가리킨 곳은 담으로 둘러싸인 전각이었다. 마른 담쟁이가 어지럽게 얽혀져있는 담은 꽤 높아 안쪽은 보이지 않았지만 수많은 나무들의 머리꼭지가 보였다. 전각의 출입문 위에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도화각(桃花閣)]

금위가 열어주는 문안으로 들어서자 고즈넉한 전경이 펼쳐졌다.

가운데 있는 작은 연못 주변으로 나무들이 빼곡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비록 계절이 겨울인지라 메마른 가지만 무성할 뿐 이었지만 날이 조금 풀리면 장관일 것이 분명했다. 연못 앞에는 작은 정자가 놓여있었는데 편액에 도화정(桃花亭)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바로 이곳이 대면식을 할 장소인 것 같았다. 화연은 다른 전각처럼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아담하고 소박한 분위기에 마음이 다소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궁의 안내에 따라 정자 안으로 들어가자 뒤 따라 들어온 상궁이 사방에 발을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돌면서 발을 꼼꼼하게 내린 상궁이 마지막으로 벽에 결려있던 금줄을 잡아당기자 정자 중앙에 얇은 면사로 된 가림막이 축 내려왔다.

상궁이 가림막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을 때 앳돼 보이는 궁녀가 들어와 교자를 화로 앞에 놓더니 상궁과 함께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나갔다

어두워진 정자 안에서 두리번거리던 화연은 목례를 하고 물러나가는 상궁과 궁녀를 붙잡지도 못하고 멍하게 서 있다가 조금 서늘한 기분이 들어 화로가 놓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무슨 정자에 발이 이렇게 많은 거지? 이렇게 가리면 밖이 하나도 안보이잖아. 가운데 이 천은 뭐야? 화로 앞에 앉은 화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정자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내려져 있는 천을 눈앞에 들어 만지작거렸다. 손이 비춰지는 것 보면 아예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라면 생김새의 뚜렷한 구분은 힘들 것 같았다.

기해 말로는 서로 얼굴을 본다고 했는데…….아무래도 아버지께서 마련해 두셨다는 것이 이 가림막 인 것 같았다.

아버지도 참 유난이셔.

천을 내려놓고 작게 웃은 화연은 교자위에 올려져있는 옥주전자위로 손을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긴장했는지 아까부터 목이 마르던 참이라 찻물을 따라 잔을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자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풍겼다. 굳어있던 몸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긴 숨을 내쉬며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면서 다과 위를 덮고 있던 덮개를 들었다.

“어?”

큼직한 옥사발에 한입크기의 파루안 떡이 예쁘게 놓여있었다. 다과상에는 대부분 과편이나 강정을 놓지 않나? 웬 파루안 떡이지?

화연은 떡을 집으려다 말고 별안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분명히 그 냄새가 맡아졌다. 화연의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곧 가림막 너머로 인기척이 들리더니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자전하 납시었습니다.”

화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서둘러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전하. 인사드리옵니다.”

검은 가림막 사이로 커다란 남자의 신형과 그 보다 작은 남자의 신형이 아른아른 보였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내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제가요? 어…….아기님, 편하게 앉으시랍니다.”

“…….감읍하나이다.”

원래 이런가? 왜 내관을 통해 말씀을 전하시는 거지? 의문스럽긴 했지만 화연은 깊이 생각할 상황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는데 내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과를 드시라고 하십니다.”

“감읍하나이다.”

“화로 가까이 앉으시라고 하십니다.”

“…….감읍하나이다.”

“다리를 쭉 뻗고 편하게 앉으셔도 된다고 하십니다.”

“감읍…….예?”

“불편하시면 누우셔도…….전하... 이건, 좀......”

“......”

그 뒤로 계속되는 하명 같지 않은 하명에 화연은 가림막 넘어 비치는 신형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기분이 점점 이상해지더니 귀에 맥박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막 안으로 앉아있는 남자의 형태가 보였다. 화연과 마주보는 위치에 정 자세로 앉아있는 남자는 검은 색의 가림막 때문에 색깔까지는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를 깔끔하게 묶었거나 틀어 올린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옆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있는 내관에게 귓속말을 하는 듯 했다.

남자를 자세하게 살펴보던 화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소리를 죽이느라고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손에는 무언가가 두툼하게 묶여 있었다. 흐릿하지만 희끗한 뭔가가 분명히 보였다. 밝은 색의 그것은 가림막이 검은색이라서 더 잘 보였다. 화연은 남자의 무릎에 올려져있는 다른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입을 가리고 있는 저 손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인기척이 나기 전 부터 화연의 가슴을 뛰게 만들던 그것.

이 풀 내 진동하는 특유의 연초 냄새.

화연의 입이 벌어졌다. 설마…….

“무영......?”

귓속말을 하던 남자가 멈칫하더니 손을 내리고 화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연은 그 얼굴을 마주보다가 조용히 일어서 앞으로 다가갔다. 가림막을 들어 올리려는데 남자가 동시에 잡아 내렸다.

“먼저 설명을 하게 해줘.”

“!!”

무영의 목소리가 틀림없었다. 화연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를 악물고 가림막을 위로 확 끌어올렸다.

머리를 깔끔하게 묶고 검은색 정복을 갖춰 입은 무영이 화연을 올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화연…….내가 설명을,”

화연이 무영의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진주 같은 눈물이 툭툭 떨어졌다.

“태자전하세요?”

무영이 화연의 눈물을 닦아주려 손을 뻗었지만 화연은 한발자국 물러서 그 손길을 거부했다.

“화연…….”

“태자전하시냐고요.”

“......”

“하긴, 제가 멍청한 소리를 했네요. 당연히 태자전하실텐데 말이죠…….”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치던 화연은 눈을 꼭 감아 눈에 고인 눈물을 떨어뜨리더니 곱게 절을 올렸다. 바닥에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소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무영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대로 화연이 돌아 가버리면 다시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영은 절을 하고 일어서는 화연을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화연은 누가 봐도 애절하고 처연해 보였다. 무영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무시하고 화연에게 절실하게 말했다.

“화연! 연아! 내 말 좀 들어봐! 우선 내 말 먼저 듣고,”

화연은 눈물은 닦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명령하시는 건가요?”

“……뭐……?”

“들으라는 명령이시냐고요.”

“연아…….”

“명령이시라면 경청 하겠습니다.”

“명령하는 거 아니야. 아닌 거 잘 알잖아.”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이 손 놓으세요. 그리고 연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태자전하. 그건 저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 부를 수 있습니다.”

차가운 말을 남긴 화연은 팔을 휘둘러 붙잡고 있던 무영의 손을 털어내고 정자 밖으로 나가버렸다.

도화각 문을 힘껏 밀치고 뛰쳐나온 화연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는 금위를 지나쳐 연릉각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아기님! 잠깐 걸음을 멈춰주십시오. 아기님!”

당황스런 표정으로 뒤 따라오는 상궁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흐느낌이 새어나올 것 같아 손으로 입을 막았다.

며칠간을 밤잠을 설치며 가슴을 졸였었다. 끼니는 제때 먹고는 있는지, 챙겨주는 사람은 생겼는지 밤마다 걱정을 하며 애를 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망하게 죽어버린 태형이 생각나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이 한순간에 얼마나 쉽게 죽어버릴 수 있는지 그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다. 이 사람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크게 다친 것은 아닐까…….설마, 죽은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닐 거야. 하루에도 수 백 번씩 떠오르는 불안감을 내리 눌러야 했다.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태연하게 앉아 있다니. 게다가 태자전하라고……? 맘에 둔 정인이 있다는 그 태자전하란 말이지…….

그가 어떻게 됐을까봐 벌벌 떨며 걱정했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제야 겨우 내 마음을 인정 할 수 있었는데.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그 동안 나를 얼마나 비웃었을까.”

화연은 자조의 웃음을 띠우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연릉각으로 향했다.

무영은 냉정하게 돌아서 나가는 화연을 붙잡지도 못했다. 전신이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도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머릿속이 백지로 변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달래면 금방 풀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옆에 있어달라고, 내가 원하는 사람은 너라고 말해주면 화를 내다가도 곧 풀려 예전처럼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줄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차가운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우선은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화연을 따라 나가려는데 다리가 휘청 거렸다. 무영은 털썩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통증이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가슴을 누군가 난도질 하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윽!!”

가슴을 움켜쥐면서 식은땀을 흘리던 무영은 고통을 억지로 참고 힘겹게 일어섰다.

서둘러 화연을 쫒아가서…….그 눈물을 닦아줘야 하는데…….

이를 악물고 발을 떼려 애를 쓰던 무영은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멀찌감치 서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내관이 사색이 되어 무영에게 달려왔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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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연이 좀 차갑게 굴었다고 죽는다고 난리치는 너란 짐승. --;;;

어제의 질문 -> Rohahs님 정답!! 축하드립니다!!

짐승은 짐승일 뿐.

대례식 날까지 기다려 줄 거라 생각하신 분 손들어 보세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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