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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60화 (60/110)

00060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같이 찾아오던 그가 아무 말도 없이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하루, 이틀까지는 무슨 바쁜 일이라도 생겼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라도 또 다친 건 아닌가. 그래서 못 오는 건가? 운신이 힘들 정도로 심하게 다친 걸까? 어디가 얼마나 다쳤기에 이렇게 감감무소식일까.

화연의 얼굴은 이제 누가 봐도 걱정이 가득해 보여 기해도 무슨 일 있으시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물어볼 정도였다.

“아기씨, 일어나셔요. 오늘 점심에는 어르신들하고 도련님들 방문 하시는 거 아시죠?”

“응…….”

화연은 서둘러 표정을 감추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소세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들어오던 기해는 화연의 얼굴을 보자 한숨을 푹 쉬더니 대야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기씨,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셔서 여기 앉아 보세요. 어서요.”

“응? 어......”

화연이 일어나 탁자에 앉자마자 기해가 맞은편에 앉더니 화연의 손을 잡았다.

“아기씨, 요즘 왜 그러신지 저는 알아요.”

“어? 뭐, 뭐가…….”

“요즘 계속 표정이 어두우셨잖아요. 안 그런 척은 하셨지만 속일 사람을 속이셔야죠. 제가 아기씨 하루, 이틀 모셨나요? 안 그래도 한번 말씀 드리려고 했어요.”

화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기해가 누, 눈치 챈 건가?

“나…….아무렇지 않은데…….”

“거짓말은 하지도 마셔요. 척보면 딱 인데 뭘 그리 숨기려고 하셔요. 괜찮아요. 사람이라면 다 한번 씩 그래요. 아기씨만 그러신 거 아녜요.”

“......”

말없이 가만히 있는 화연을 보던 기해는 괜찮다는 듯 잡고 있던 손을 한번 두드렸다.

“마음이 그렇게 쓰이시면 제가 한번 알아봐 드릴까요?”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럼요. 말씀은 안 드리고 있었지만 제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걸요. 요즘 그거 때문에 잠도 잘 못 주무시잖아요.”

“......응”

“아휴…….제가 아기씨 마음 여리셔서 이런 일 한번은 있을 줄 알았네요. 그렇게 속 답답하셨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저에게 말씀을 하지 그러셨어요. 그럼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너 걱정할까봐…….”

“이렇게 어두운 얼굴로 아무말씀 없으신 게 더 걱정스럽네요. 어떻게 할까요? 알아봐 드릴까요?”

화연은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쳤다는 소식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다친 것이 아니라는 소식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는데 발길을 뚝 끊었다는 것은 마음이 변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런 화연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기해가 긴 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는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알아봐 드릴게요.”

기해가 언제 궁 안에서 그를 봤나 싶어 화연이 놀라 급하게 물었다.

“봤어? 언제? 어디서?”

“어디서 봤긴요. 여기서 봤죠. 아기씨도 만날 보시잖아요.”

“뭐? 여기서……? 난 못 봤는데?”

기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손을 다시 두드렸다. 정신 차리라는 듯 아까보다는 힘이 실려 있었다.

“아기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제도 봤잖아요.”

화연은 대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어째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누구…….”

“아, 누구긴 누구예요. 그 녀ㄴ, 아가씨들이죠. 그 아가씨들 일 때문에 요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으신 거잖아요.”

그럼 그렇지…….괜히 놀랐네. 아무리 기해라도 그 일까지는 알 수가 없겠지. 화연은 기해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게 걱정되시면 처소궁녀에게 물어는 볼게요. 하지만, 아기씨 괜한 걱정하시는 거예요. 치도곤이 났다면 지금 그렇게 얼굴 들고 다닐 수 있겠어요? 분명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는데 아기씨께서 사주신 이 비녀를 걸겠어요.”

화연은 힘없이 웃으며 물을 따라 마셨다.

“그거 네 보물 1호 라며”

기해는 싱긋 웃으며 침상 끝에 놓여있는 낮은 탁자에 대야를 올렸다.

“그러니까 절대 그럴 일은 없다는 거지요. 주항서인어르신 여식과 중서사인어르신 여식이 연관되어 있는데 징계를 내렸겠어요? 처녀들이 그렇게 개 싸우 듯 싸웠는데 누가 알까 두려워 덮기 바빴으면 바빴지 절대 그러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그런 사람들 같았으면 아기씨께서 그 화를 당하셨을 때 그렇게 처리는 안했겠지요. 안 그래요? 그러니 이제 어두운 얼굴은 하지 마셔요. 예진아가씨도 무슨 일 있냐고 저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셨는지 아세요? 아기씨께서 마음이 원체 여리셔서 그러신 건 이해하지만 걱정할 사람을 걱정하셔야지요. 에휴- 우리아기씨 마음이 너무 약하셔서 탈이네요.”

화연은 완전히 헛짚은 기해의 말에 안도감과 허탈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기해는 나를 천사쯤으로 생각하는 걸까.

“…….알았어. 걱정 안할게”

“잘 생각하셨어요. 아니, 근데 요즘에는 기류 미란아가씨까지 왜 그러신데요? 아주 코끝이 하늘을 찌르는 거 보셨지요? 중간택 후 하루 이틀은 죽어지내는 것 같더니 요즘에는 아주 기고만장해져서 거만한 표정으로 요렇-게 내려 보는데 어찌나 꼴 보기 싫던지. 쯧…….아기씨, 박하수(薄荷水, 양칫물)는 여기에 올려 둘게요.”

“어…….”

수건을 가지러 가는 기해의 뒷모습을 보다가 화연은 대야에 가득 차있는 물로 시선을 돌렸다. 물에 비추는 제 모습을 멀뚱히 내려 보다가 갑자기 손을 담가 잔잔한 표면을 흩뜨려 놓더니 급하게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그의 얼굴이 보인 것 같았다.

오전 교육을 마치고 식당으로 내려가니 미리 와있던 가족들이 웅성거리며 처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연과 기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머리하나는 더 큰 류 상연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류 상연은 자신의 몸통만한 보따리를 등에 매고 두리번거리다 자신에게 뛰어오는 화연을 발견했다.

“상이오라버니!”

“......연아......”

화연은 류 상연을 보자마자 뛰어가 널찍한 품에 폭 안겼다.

류 상연은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화연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느릿하게 말했다.

“.......보고...싶었어......”

화연은 류 상연의 품에 얼굴을 부비며 특유의 약초냄새를 들이마셨다.

“오라버니 저두요.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음…….오라버니 냄새 좋다.”

“......얼굴...좀 들어봐......”

류 상연은 화연의 얼굴을 들어 올려 볼을 쓰다듬었다.

“......아픈 데는...없었어......?”

“아픈 데 하나도 없었어요. 여기 밥도 아주 맛나고, 처소도 편해서 잠도 잘 자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화연이 죽을 뻔 한 적도, 크게 앓은 적도, 요즘에는 잠도 잘 못자는 것까지 모두 다 알고 있는 기해는 입을 삐죽거리면서 다가왔다.

“뭘 이렇게 바리바리 싸오셨어요. 황궁인데 밥이 라도 시원찮게 나올까봐서요? 봇짐 좀 내려놔 보세요.”

“......응...이거......연이가......좋아하는 거......”

기해는 류 상연이 가져온 보따리를 뒤적거리더니 파루안떡을 꺼내들었다.

“안 그래도 이것 좀 싸올걸 그랬다고 후회했었는데. 이건 잘하셨어요. 이건 뭐야?...... 어머! 아기씨 베개잖아? 이런 것 까지 가져오셨어요? 도련님도 참…….”

뭘 얼마나 싸왔기에 보따리가 저렇게 큰가 했더니 다 이유 가 있었다. 기해는 음식냄새가 배지 않도록 천으로 돌돌 말려진 베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가만 보면 안 그런 것 같으면서도 상이도련님이 가장 유난이시라니까…….

화연은 류 상연에게 안긴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아버지와  강이 오라버니는요? 오늘 못 오시는 거예요?”

기해의 면박에도 굴하지 않고 그때까지도 화연을 꼭 부둥켜안고 있던 류 상연은 느리게 말을 꺼냈다.

“......회의가...길어져서.......나 먼저...가라고......”

“회의요?”

기해가 보따리에서 꺼낸 음식 통들을 식탁위에 하나둘 늘어놓으면서 말했다.

“전쟁협상 때문에 바쁘다고 하더니 그거 땜에 늦으신가 보네요. 그럼 먼저 드시겠어요?...아, 도련님! 아기씨 좀 놔 주세요! 누가 보면 한 100년 만에 보는 건줄 알겠네요. 여기 앉으세요.”

“......응......”

화연은 아쉬움에 미적거리는 류 상연의 등을 한번 쓸어주고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그런데, 전쟁 협상이라니? 전쟁 다 끝난 거 아니었어?”

보따리에 들어있던 음식은 다 꺼낸 것 같아 기해도 의자에 앉았다.

“끝나서 협상하는 거라던데요? 보상금 뭐 어쩌고 하던데 저도 호림이한테 들은 거라서 잘 몰라요.”

“호림이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다 듣고 오는지 모르겠어. 참 신기해.”

“아기씨,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걔는 시비를 할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첩자로 보내야 돼요.”

그때 까지 가만히 있던 류 상연이 화연의 손을 잡으면서 물었다.

“......누구......”

“여기 와서 사귄 친우 예진님의 시비예요. 오라버니, 기회 되면 소개해 드릴 게요.”

때마침 식당 입구가 소란스러워 지더니 빨갛고 파란 관복을 입은 신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내 딸~’을 부르짖으며 딸을 찾아 부둥켜안거나 들어 올리거나 하는 통에 식당은 단숨에 소란스러워 졌다.

화연이 류 충과 류 강연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

“연아!!”

류 충은 화연을 보자마자 체통도 잊고 호들갑을 떨며 달려와 화연을 끌어안았다.

“어이구, 내 새끼…….우리 예쁜 연이 얼굴 좀 보자. 내 딸 얼굴 좀 봐…….응……? 어째, 내 새끼가 더 고와진 것 같은데? 강아, 너도 그렇게 보이지?”

같이 온 류 강연이 옆에서 화연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연아, 뭐 좋은 거라도 먹었니? 황궁 밥이 입에 맞든?”

화연이 먹은 그 좋은 게 무엇인지 혼자만 알고 있었던 기해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유…….그만 하시고 앉으세요. 상이 도련님께서 음식을 잔뜩 싸가지고 오셨어요. 글쎄, 아기씨 베개까지 가져오신 거 있죠? 어차피 내일모레면 집에 돌아갈 텐데.”

너무 유난스럽지 않냐 는 의미로 말한 기해의 의도와는 다르게 류 충은 류 상연의 어깨를 두들겨 주며 칭찬했다.

“응? 그래? 상아, 잘했다. 사람은 하루를 자더라도 편하게 자야하는 법이지. 자, 앉자. 기해야 너도 같이 먹자.”

류 강연은 자리에 앉으면서 말을 꺼냈다.

“아버지, 그렇게 죽마고우처럼 지내시던 중서사인 어르신과 주항서인 어르신 사이가 요즘에 아주 안 좋다면서요? 서로 헐뜯고 다니다가 결국에는 멱살까지 잡았다며 궁 안이 그 소문으로 시끌벅적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다. 걔들 요즘 왜 그러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첩지 때문에 그런가 했는데…….저번에 너한테 물어봤던 거 말이다. 그거 확실하게 아니라며?”

“네, 절대 아니에요. 분명히 행궁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다시 확인해 본 걸요.”

“그러게 왜 태자전하께서는 사람 헷갈리게 해서 말이야…….쯧……. 암튼, 다들 헛물켜고 있던가, 아님 다른 이유가 있겠지. 아휴- 그러던가 말든가. 지금 내가 걔들 사이 나쁜 거 고민할 때냐. 하여튼 이 도적놈 잡히기만 하면 연제보다 내가 먼저 주리를 틀어 주겠어!”

류 강연이 파루안 떡을 조금씩 떼어 먹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요즘 황궁 안에 도둑놈들이 왜 이렇게 들끓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도난사건이 벌어졌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내가 요즘 피가 마른다. 연제께서 매일 마다 얼마나 닦달을 하는지 이대로라면 도적놈 잡기도 전에 내가 먼저 죽겠어. 성과가 없는 걸 왜 나한테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내각감찰서장을 잡던가! 그것도 싫으면 대학사를 잡던가! 궁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내각에서 처리해야 하는데 왜 행궁까지 와서 난리냐고!”

화연이 류 충이 즐겨먹는 반찬을 앞으로 끌어주며 물었다.

“아버지, 일이 잘 안되시는 거예요?”

류 충은 흐뭇한 미소를 띠우며 화연의 볼을 아프기 않게 살짝 잡아 흔들었다.

“연아, 애비가 누구냐. 황궁 안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애비다. 손가락 하나로도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이니 걱정 말거라.”

류 충의 농땡이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기해는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돌리고 류 강연은 대놓고 풋- 하고 웃었다. 류 충은 그런 둘을 나란히 째려봐 주고 화연에게는 활짝 웃는 낯으로 물었다.

“연아. 내일이 삼간택 날이지?”

“네, 아버지. 아침에 궁녀가 당락을 고하러 처소로 방문할거예요.”

“그럼, 바로 대면식이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게야?”

“제가 삼간택을 통과한다면 그러겠지만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절대 통과할 일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후- 여튼, 대면식 끝나면 하루 이틀 뒤에 최종간택을 할게다. 그러면 바로 집으로 갈수 있으니 조금만 더 참 거라. 애비가 맘이 안 놓여서 준비해 둔 것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았지?”

삼간택을 통과할거란 말씀이신가? 화연은 류 충의 얼굴에서 지친 기색을 읽고 질문하려던 마음을 지웠다.

“......네”

“집으로 돌아가면 애비도 휴가를 받아 볼 테니 날 풀리면 저기 남쪽으로 여행이나 갔다 오자구나.”

류 충은 이제 며칠이면 이 지긋지긋한 일도 끝난다며 찻잔을 술잔처럼 들어 올려 류 강연, 류 상연의 잔과 경쾌하게 부딪쳤다.

기분 좋아진 그들과 중간에 인사를 드리러온 형부상서 강 두균과 예진 그리고 호림까지 둘러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와장창!

식기가 떨어져 산산 조각나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주항서인 남궁 평이 벌떡 일어나 비대한 몸을 흔들며 중서사인 공 형문에 대고 삿대질을 했다. 무엇을 먹던 중이었는지 입주변이 온통 기름으로 번들번들 거렸다.

“자네! 말이면 다인 줄 아나? 내가 듣자 듣자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구만! 다시 말해보게!”

공 형문은 앉은자리에서 다리를 꼬더니 남궁 평 옆에 찰싹 붙어있는 남궁 진류를 가리키며 비꼬기 시작했다.

“흥! 내가 뭐 못할 말 했나? 자네 여식은 먹을 때 빼면 고자질 할 때나 그 입을 벌린다며? 저번 역사시간 노 상궁의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하던데. 내가 틀렸나? 틀렸으면 말을 해보게. 아니, 말하기 전에 거, 주둥이나 닦고 말하시게. 채신머리없기는…….”

관복 소매로 주둥이를 쓱 훔친 남궁 평은 붉어진 얼굴로 공 혜민을 가리키며 인신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누구에게 그따위 망발을 하는 건가? 우리 진류가 앞으로 어떤 자리에 오르게 될지 내가 직접적으로 말해줘야 알겠나? 남의 여식은 신경 쓰지 말고 자네 여식이나 신경 쓰시게! 그런 짓거리를 저지르고도 아직도 이곳에 붙어있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우리 진류 같으면 벌써 자진해서 물러나고도 남았을 것이네! 낯짝이 두꺼워도 유분수지……. 두꺼비를 닮아서 그런가.”

두꺼비 아빠가 눈을 부릅뜨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너야말로 누구한테 그따위 때려죽일 소리를 하는 게냐!! 우리 혜민이야 말로 최고의 자리로 올라갈 것을 모른단 말이냐! 그런 분에게 뭐? 두꺼비? 두꺼비라고?! 아니, 이놈이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그러는 니 딸은 돼지 아니더냐! 내가 이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다만 걔 살 좀 빼라고 해라! 이 겨울에 조금만 움직여도 땀을 질질 흘리는데 그게 정상이냐? 나중에 니 꼴 되는 거 보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바싹 굶겨라. 이놈아! 석 달 정도는 물 한 모금 안 먹여도 되겠다!”

“이 놈이!!”

돼지 아빠가 두꺼비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류 충은 돼지와 두꺼비의 싸움을 잠깐 보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다.

“쟤들은 여기까지 와서도 저러네…….저 내용은 변하지도 않아. 아주 지겨워 죽겠다. 저렇게 창의력이 없을꼬…….”

류 상연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위에 얌전히 놓더니 화연의 귀를 양손으로 감싸 막았다. 커다란 손에 화연의 얼굴이 반 이상 가려졌다.

“......저런 거......듣는 거...아냐.......못 써......”

류 상연의 모습을 훔쳐보던 예진이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예진은 류 상연을 살금살금 훔쳐보기 바빴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고, 누가 싸우던지 관심도 없었다. 듬직하고 과묵하게만 보였었는데…….어쩜, 너무 자상하시잖아. 머리 모양도 너무 미래지향적이고 멋있으시다. 예진의 눈은 점점 몽롱해 졌다.

류 강연은 파루안 떡을 손으로 떼어 먹으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기 바빴다. 잘 안 보이는지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것을 보니 여차하면 의자위로 올라설 기세였다.

“아버지, 전 처음 보는데요? 이것이 요즘 개싸움 다음으로 가장 볼만하다는 하저투쟁(蝦豬鬪爭, 두꺼비와 돼지의 목숨 건 싸움)이군요? 역시 밥 먹을 때는 싸움구경이 제일이네요. 아주 꿀맛이 따로 없는데요? 전 매일 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식탁 한쪽에서 싸움을 감상하던 호림의 눈이 조용히 류 강연에게 돌아갔다. 그 거무죽죽한 눈은 동류를 만났다는 기쁨과 알 수 없는 설렘으로 인하여 기묘하게 번들 거렸다.

그들 중 화연만이 얼굴에 그늘이 가늑했다.

맞아. 그 생각을 못했네. 황궁을 나가면 그를 예전처럼 볼 수 없을 지도 모르잖아. 그럼 안 되는데…….아니, 이 남자는 오지 말라고 그렇게 말할 때는 죽어라 오더니 보고 싶을 때에는 왜......!!

화연은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성이 나올 것 같아 입을 가렸다.

어, 어떻게…….나…….그를 좋아하나봐…….

초점 없이 허공을 바라보던 화연의 눈에 급속도로 눈물이 차올랐다. 때늦은 깨달음으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데 멈출 길이 없었다.

갑자기 소리 없이 눈물만 펑펑 흘리는 화연을 본 류 가(家)의 식구들은 단숨에 난리가 났다.

화연은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냐고 아무리 물어도 말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것이 눈물이 아니고 핏물인 양 안타까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곁에서 안절부절 서성이던 류 충은 아직까지 싸우고 있던 돼지와 두꺼비에게 사자후를 버럭 내질렀다.

“야!!!! 닥치지 못해!!!! 니들 때문에 내 딸이 놀래서 울잖아!!!!! 여기서 그 지랄 떨지 말고 짐승우리에나 가서 쳐 싸우던지!!!”

“......”

화연 옆에서 말없이 눈물만 닦아주던 류 상연의 눈초리가 대번에 살벌해 지더니 그 들을 쏘아 보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돼지와 두꺼비는 류 상연의 살기어린 눈빛과 그가 꽉 움켜쥐고 있는 젓가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류 상연은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이 젓가락을 누구의 눈알에 꽂아줄까.

그들은 잡고 있던 서로의 멱살을 슬그머니 놓았다.

가족들이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화연은 그때까지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비비며 갑자기 무서워져서 그랬다고 얼버무렸다. 류 충과 오라비들은 걱정스런 얼굴로 몇 번을 확인하면서 전전긍긍 하다가 여러 번 재촉하는 궁녀로 인해 마지못해 연릉각을 나갔다.

화연은 처소로 돌아와 협탁을 열어 주머니를 꺼내보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 돌이 들어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불안감과 왠지 모를 서러움이 다시 치밀어 올라 눈물을 흘리다 새벽녘쯤 겨우 잠이 들었다.

이윽고 소리 없이 창이 열리더니 무영이 들어왔다.

지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화연을 내려다보더니 발갛게 부어있는 눈가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손을 넣어주려다 말고 혀를 내밀어 손끝을 살짝 핥으니 눈물의 짠맛이 느껴졌다.

무영은 가슴속이 진탕이 되는 것 같아 한숨을 삼키고 손을 이불안으로 넣어주었다.

다음 날 아침, 깨우러 온 기해가 화연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기함을 해 찬 수건을 얼굴에 대주며 무슨 일이냐고 추궁했다. 기해는 벙어리 마냥 입을 꾹 다물고 침상에 앉아있는 화연을 노려보다가 몸을 던져 공격을 퍼부었다. 간지럽다며 몸부림치는 화연의 옆구리를 집중적으로 간질이고 있는데 명 상궁이 찾아왔다.

“흠흠…….아기님, 경하 드리옵니다. 삼간택을 통과하셨습니다. 대면식은 오늘 정오 도화정(桃花亭)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아침 식사는 궁녀를 통해 처소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이후 처소 밖 출입을 삼가 주시고…….몸을 정갈하게 해주십시오. 간택과는 상관없이 지체 높으신 댁 자제분이라면 혼자 계실 때에도 흐트러지는 일 없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침상을 구르느라 산발머리를 하고 헐떡거리던 화연과 기해는 얼굴이 벌게져서 간신히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시간이 되면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그 둘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명 상궁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처소를 나가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던 기해가 양손을 들어 올리더니 새 발톱처럼 구부렸다.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화연에게 한발자국씩 다가가더니 씩-하는 웃음을 던지면서 몸을 날렸다. 침소 밖으로 화연의 웃음소리와 비명소리가 번갈아 가며 다시 터져 나왔다.

그 소동에 협탁 위에 놓여 있던 비단주머니가 사라진 것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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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young636님, 구월의 사과님 후원 감사 합니다~

뭘 또 이렇게 많이...전 드릴 것이 없어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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