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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57화 (57/110)

00057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무영은 의전 가운데 폭탄을 던지고도 태연자약 했다. 신료들 모두가 남궁 평을 쳐다봤다. 이제는 모든 신료까지 류 충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건 뭔가가 있다! 분명히 그냥 하는 말은 아니야!

기류 명률과 공 형문은 무영의 말을 듣자마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남궁 평의 여식인가...?정말 그 아이를 태자가 마음에 뒀다는 말인가?!

공 형문이 민머리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관복 소매로 훔치며 무영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자전하…….왜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앞으로 가까운 사이가 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맞구나! 이런 세상에!!

도대체 그 뒤룩뒤룩 살찐 새끼 돼지가 어디가 맘에 들어서…….이건 눈이 낮아도 너-무 낮은 것이 아닌가! 기류 명률과 공 형문은 눈은 질끈 감고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남궁 평은 흥분되는 마음을 도저히 감출수가 없었다. 어이구야! 내 딸이구나!! 우리 진류 구나!! 심봤다-!!! 화색 만발한 얼굴은 이제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콧구멍까지 벌렁거리면서 숨을 헐떡거리는데 발정 난 돼지와 똑 닮아 있었다.

신료들은 모두 저 짐승 태자가 어떻게 봤는지는 몰라도 남궁 평의 여식을 보고 마음에 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막을 모두 알고 있는 연제와 내막을 일부 알고 있는 류 충은 미심쩍은 얼굴로 무영의 생각을 읽어보려 노력했으나 마찬가지로 도통 읽을 수가 없었다.

저 놈에 무표정! 진짜 짐승도 아니고 사람이 어쩌면 저렇게 표정이 없다는 말이냐!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잖아! 혹시 강이 이놈이 잘못 안거 아니야? 류 충은 속이 터져 가슴을 두들겼다.

“커흠! 그, 그럼 그러셔도 됩니다. 저야 가까운 현(縣)의 안 된 사정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태자전하께서 그러시고 싶다면 그러셔야지요.”

분홍 돼지가 된 남궁 평이 인자한 얼굴로 웃으면서 무영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장인어른이라고 부르게. 사위.

무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남궁 평을 마주 보았다.

죽어, 돼지.

남궁 평은 무영의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던 연제는 별다른 내색 없이 신료들의 소요를 가라앉히고 다음 안건을 꺼냈다.

“태자 네가 그러고 싶다면 네 뜻대로 하거라. 그리고 전쟁 보상금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전쟁 보상금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가람지방으로 사절단을 파견해야 하는데 아직도 결정하지 못해 시일이 코앞에 닥쳤소. 누가 갔으면 좋겠소?”

류 충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폐하, 관례대로 예부상서(禮部尙書, 환제국의 외교와 교육을 관장하는 부서의 장)가 가야하지요.”

한자리 걸러 앉아있던 환한 얼굴의 예부상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중간택에서 탈락한 딸을 둔 몇 안 되는 고위관료였다.

“그건 당연하지. 헌데 그 쪽에서는 륜국의 둘째 황자가 나온다고 해서 하는 말이오. 예부상서만 덜렁 보낼 수는 없지 않겠소. 우리도 구색은 맞춰야지.”

아, 그렇다면 뭐 고민할거 있나. 류 충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태연히 말했다.

“그럼, 우리도 태자…….”

…….를 보낼 수는 없지…….류 충은 연제의 고민이 충분히 공감 되었다. 왜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는지 알겠군. 그러게 하나 더 낳지 그랬니. 그럼 모두가 평화로웠을 텐데…….

“음…….생각을 해봐야 하겠군요.”

“그러게 말이오. 경들의 생각에는 누가 좋겠소?”

다들 고민하는 척은 하고 있지만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태자가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쪽에서 황족이 나오는 이상 이쪽도 황족이 가야만했다.

태자가 가야하는 건 맞는데 보냈다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으니 쉽게 보낼 수도 없고, 또, 가라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았는데 의외로 한 가지는 쉽게 해결됐다.

“제가 가겠습니다.”

“......”

자진해서 간다고 하니 걱정 하나는 덜었지만…….신료 들은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네 소문이 륜국에 어지간히 퍼졌어야지! 니가 가면 협상이 아니고 전쟁이라도 다시 시작 하자는 거냐고 할 텐데, 그런데 거기에 너를 어떻게 보내겠냐!

무영이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신료들에게 물었다.

“그쪽에서 황자가 나온다면 저희도 그 정도에는 맞추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안이 있습니까?”

그래, 니 말이 맞긴 한데…….저쪽에서 황자가 나오니 우리도 최소 황자정도는 나가줘야 맞는 건데…….틀린데 하나 없이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모두가 할 말이 없어 침묵만 지키고 있는데 무영이 갑자기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헌데 남쪽이라면 중서사인의 사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까?”

중서사인 공 형문은 희희낙락한 남궁 평을 노려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질투심을 도저히 가눌 길 없어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고 있다가 무영의 갑작스런 질문에 놀라 더듬거렸다.

“예? 아, 예…….태자전하. 소, 소신의 사가가 그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만…….”

“잘됐군요. 이번에 내려갈 때 한번 들리겠습니다.”

“예?!”

모든 신료들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무영의 의중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남궁 평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무영에게 물었다.

“태자전하…….이유를 여쭈어도…….”

“중서사인과도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누구를 먼저 선택해야 할지…….”

!!!

보아하니 28대 황제는 황후에 이어 후궁까지 두겠구나.

하나로는 성에 차지 않나보지? 짐승이라서 정력도 남다른 모양이었다. 일부일처의 법에서 벗어나 있는 황족이니 비빈 두 셋 정도야 큰일도 아니었지만 신료들은 속이 터져 외치고 싶었다.

여자 보는 눈이 왜 그 따위야! 돼지에 이어 두꺼비냐!!

놀란 표정이던 공 형문의 얼굴에는 화색이 점점 짙어지면서 남궁 평을 오만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반면 남궁 평은 그래서 도대체 누구를 먼저 선택하겠다는 건지 묻고 싶어 안달을 하다 공 형문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돌렸다.

그들은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연제는 옥좌를 두드려 웅성거리는 신료들을 진정시켰다.

무영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저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만이 느낄 수 있는 감이 왔다. 저거는 좋아서 저러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장담할 수도 있었다. 이거, 머지않아 주항서인에 이어서 중서사인의 자리까지 공석(空席)이 될 수도 있겠군. 한 번에 두 자리가 비면 골치는 아프겠지만 별로 아깝지는 않았다. 그 동안 좀 해먹었어야지. 빗발치는 상소에 파 묻혀 죽을 뻔 한 적도 하루 이틀이지 그렇지 않아도 날 잡아서 갈아치우려고 했는데 손안대고 코 풀 수도 있겠군.

“조용히들 하시오! 태자, 간택이 아직 남아 있는데 그 먼 곳을 언제 다녀오려고 하느냐. 말로 달려도 십 수 일은 넘게 걸리는 곳이라 얼마 후면 바로 출발해야 할 터인데.”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잘 할 수 있겠느냐.”

“네.”

“그래. 어차피 네가 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니 잘 해 보거라. 필요한 것은 따로 요청하도록 하고.”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대신, 청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청......? 또?”

류 충은 눈을 부릅떴다. 이것이구나!

그래, 아까 이놈을 보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건 다 이것 때문이었다. 오늘 따라 왜 그렇게 엉뚱한 소리만 잔뜩 늘어놓나 싶었는데 사람 홀려놓고 방심한 사이에 뒤통수를 치겠다 이거지? 흥!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거다. 류 충은 무영이 무슨 말을 꺼내든지 말이 끝나자마자 결사반대를 외치기로 마음먹고 소리 지를 준비까지 하고 있었다.

“황궁 안에 모든 연못을 없애 주십시오.”

“......응? 뭐?”

의전 내 모든 신료와 결사반대를 외치려던 류 충까지 모두 입을 떡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궁 안 99개의 연못을 다 없애주십시오.”

“연못? 그게 99개나 돼? 아니, 이것이 아니지…….태자! 그게 무슨 말이냐! 멀쩡하게 잘 있는 연못을 왜 없앤단 말이야! 그것은 단지 조경을 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 필요한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 놓은 것이란 말이다.”

“그럼, 다른 사람을 보내시죠.”

“!!”

이제는 신료들뿐 아니라 연제까지 입을 떡 벌렸다. 이럴 때 보면 태자는 정말 사람 같지가 않았다.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게 딱 짐승 같았다.

연제가 한숨을 쉬며 무영을 달랬다.

“태자야, 말이 돼야 들어줄 것 아니냐…….청이 그거 하나밖에 없느냐? 다른 것으로 말해 보거라.”

“없습니다.”

“태자!”

싫다는데 억지로 보냈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몰라 강제 할 수도 없고…….정말 상전도 이런 상전이 따로 없었다.

답답한 연제와 신료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었다. 이딴 식으로 니 멋대로 할 거면 태자고 뭐고 집어치워!! 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 거렸다. 정말 황자가 하나만 더 있었으면 폐위(廢位)됐어도 벌서 폐위됐을 텐데. 연제에게 어디 숨겨둔 아들 같은 거 없을까…….하지만, 황후가 살아있을 때 업고 다니면서 침소까지 같이 썼었던 연제를 생각해 보면 그런 행운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것만 보면 다른 건 몰라도 태자는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무영이 연제의 얼굴을 보더니 많이 봐줬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황궁 안에 있는 보물 중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십시오.”

신료들을 포함한 연제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즉에 그럴 것이지. 아마 그 보물을 가지고 싶어서 괜한 연못 얘기를 먼저 꺼낸 것 같았다.

“오호- 뭐, 맘에 드는 것이라도 있는 게냐?”

“네.”

“뭔데 그러누?”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다른 신료들도 동의하는 가?”

연못이야기에 비하면 이건 청에 끼지도 못하는 수준이었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통과시켜야 했다.

“예, 폐하. 뜻대로 하시옵소서.”

고개를 숙여 화답하는 무영의 붉은 입술은 살짝 올라가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의전을 나가려는 무영을 붙잡고 신료 중 누군가가 물었다.

“전하…….실례지만……. 어떤 유형의 처녀를 좋아하십니까?”

의전을 나가면서 웅성거리던 신료들이 조용해지며 모두 무영의 입을 주목했다. 그들은 아까부터 이게 엄청나게 궁금하기는 했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거, 왜 있지 않습니까. 예쁜 처녀라든지…….고운 처녀라든지…….아리따운 처녀라든지…….”

결국에 그는 남궁 진류와 공 혜민은 전혀 예쁘지 않다는 말을 에둘러서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무영은 피식 웃더니 한마디 던졌다.

“먹음직스런 여자”

신료들의 머릿속에 남궁 진류의 몸매와 공 혜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물을 좋아하시는구나…….

태자는 정말 식성까지 짐승 같았다.

의전 입구에는 신료들의 입에서 터지는 탄식소리로 요란했다.

텅 빈 의전 안에는 기류 명률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남궁 평과 공 형문이 양쪽에서 굽실거리며 밖으로 모셨을 테지만 지금 그의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늘한 기운이 가득한 눈으로 의전 입구를 응시하던 기류 명률은 이내 차갑게 웃었다.

“그래. 즐길 수 있을 때 실컷 즐겨두어라.”

*

환제국 28대 황제 광제(光帝)는 백성들을 위한 수많은 선정을 펼쳐 환제국의 전성기를 절정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광제는 제위 중 남다른 행보를 자주 보이고는 했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을 꼽자면 보위에 오르자마자 황궁 안에 있는 연못이란 연못은 죄다 없애버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황궁의 재정 낭비와 인력 낭비를 줄이기 위해 황궁에서 솔선수범하여 행한 일 중 가장 적극적이며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훗날 일부 학자들은 이 업적을 포함한 광제의 모든 업적은 대부분 황후 류씨를 위한 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지만 학계에서는 이를 어불성설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 경찬 <환제국의 역사와 향기> 中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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