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궁녀가 향한 곳은 연릉각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상궁들의 처소였다.
회랑에 들어서니 열두 폭 거대한 병풍 앞에 엄한 표정의 노 상궁이 이마를 손으로 감싸며 골치 아픈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그 앞에 공 혜민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는데 내내 억울한 표정이었던 얼굴이 화연과 예진을 보더니 이내 사색이 되어 버렸다.
“아기님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궁녀가 안쪽으로 손짓을 하더니 고개를 숙이고 뒤로 물러서서 나가고 화연과 예진은 노 상궁 앞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노 상궁은 화연과 예진을 번갈아 보면서 차갑게 말을 꺼냈다.
“이 노모(老某)가 아기님들을 예까지 불러들인 이유가 짐작이 가십니까.”
화연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에게 생긴 일로 부르신 줄 아옵니다.”
“그럼 어찌된 일인지 사정을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마마님”
노 상궁은 앞에 놓여있는 앉은뱅이 탁자위에 하얀 종이를 올려놓더니 그 위를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하실 말씀이 없으면 안 되지요. 오늘 새벽 제 처소 앞에 이 문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내용을 보니 참 가관이더군요. 이런 문서까지 받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
화연이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답답해진 노 상궁은 예진에게 시선을 돌려 대답을 재촉했으나 예진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만 숙이며 묵묵부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노 상궁이 탁자를 다시 내리치며 호통을 쳤다.
“어허! 왜 말씀들을 안 하십니까. 벙어리라도 되신 겝니까! 그럼 공 혜민 아기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이것이 모두 공 혜민 아기님을 모함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내용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화연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하며 앉아 있던 공 혜민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화연은 침착하게 대꾸했다.
“마마님, 저는 그 문서의 내용을 알지 못합니다.”
“뭐라 말씀 하셨습니까? 내용을 모르신다고요? 아니, 그럼…….이 문서는…….”
“제가 보낸 것이 아니옵니다.”
노 상궁은 틀림없이 화연이나 예진, 둘 중에 한명이 이 문서를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할지언정 중간택을 하루 앞두고 이제 와서 이런 방법을 쓰다니 내심 실망스러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는데 문서를 보낸 사람이 화연이 아니라고 하니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았구나 싶어 굳어있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아기님께서 보내지 않으셨다니 제가 대신 말씀드리지요. 사람들에게 알려진 내용과는 달리 화연아기님께서 혜민아기님에게 떠밀려 그 화를 당했다는 내용입니다. 자, 그럼 이제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화연은 공 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불안한 표정으로 화연을 주시하던 공 혜민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화연은 노 상궁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오나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휴......”
화연의 담담한 말에 노 상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예진도 화연이 무슨 생각인지 몰라 궁금한 표정으로 화연을 쳐다보았다.
좌불안석이던 공 혜민 조차도 놀란 표정으로 화연에게 시선을 보냈다. 저 문서를 보낸 사람이 화연이 아니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침묵을 지키는 것에 더욱 놀랐다. 얼씨구나 잘됐다 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있는 말 없는 말 죄다 끄집어내어 자신을 궁지로 몰아세울 줄 알았는데…….흥! 그런다고 내가 고마워 할 줄 알고? 어림없는 소리! 공 혜민은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신경질 적으로 미간을 모았다.
“마마님, 저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는 하나 보시다 시피 제가 어디 크게 다친 것도 아닙니다. 또한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걸고 넘어져 일을 크게 키울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중간택 날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으니 더는 문제 삼지 않고 이쯤에서 일을 조용히 덮는 것이 좋을 듯 하온데 마마님 의중은 어떠십니까?”
노 상궁이 화연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말없이 앉아있는 예진에게 물었다.
“예진아기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화를 당한 분은 제가 아니라 화연아기님이십니다. 당사자가 넘어 가시겠다는데 제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있겠습니까. 화연아기님의 의견을 따를 뿐입니다.”
노 상궁은 화연과 예진의 됨됨이에 크게 흡족하여 옅은 미소를 띠우다 헛기침을 하며 엄하게 말하였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은 제가 연릉각 교육을 맡은 이후로 처음 발생하는 일입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일벌백계(一罰百戒)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본보기를 단단히 보여주고 싶습니다만, 두 분 아기님께서 조용히 묻어두고 싶다 하시니 이 노부도 더는 문제 삼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앞으로는 더욱 몸가짐을 조심히 하고 자중하셔야 할 것입니다. 지체 높은 가문의 자녀들께서 이 무슨 경거망동 이란 말입니까. 지금 아기님들께서는 태자비간택을 위해 입궁 하셨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특히 공 혜민 아기님, 알아 들으셨습니까?”
공 혜민의 잔뜩 수그러진 고개가 더욱 내려갔다.
“예, 마마님”
“그럼 모두들 처소로 돌아가십시오.”
노 상궁은 축객 령을 내리고 뒤돌아 나가는 화연의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연못에 빠진 뒤로 아프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걱정을 했었는데 생각보다는 괜찮은 듯싶어 그나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전하, 이제 그만 나오시지요.”
벽에 세워져 있던 병풍 뒤에서 검은 장옷을 걸친 무영이 걸어 나왔다.
“전하, 아기님 말씀은 들으셨지요? 더 이상 문제 삼지는 않으신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도 지나간 일에 대한 노여움은 그만 가라앉히시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시는 것이 어떠시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하는 무영을 보고 노 상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나갈 수는 없겠군.
“전하…….”
“내일이 중간택 날입니까.”
“그렇습니다. 폐하와 상의해 보시고 명단을 내려주시면 내일 아침에 통보하겠습니다.”
무영은 품안에서 둘둘 말려진 교지를 꺼내 노 상궁에게 툭 건넸다. 의아하게 보던 노 상궁은 서둘러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교지를 받아들었다.
“전하…….이걸 이렇게 전해주시면…….”
“오는 길에 제가 가져왔습니다.”
황제의 모든 교지는 내리고 받는 것까지 모두 기록에 남기기 때문에 절차를 거처 내려져야 하는 법인데…….노 상궁은 한숨을 쉬면서 교지를 읽었다. 명단을 살피던 노 상궁은 눈을 부릅뜨면서 교지를 바로 눈앞까지 들어올렸다.
“전하, 명단이…….이 명단이 확실 합니까? 여기에 연루된 아기님들 이름이 죄다 들어가 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이옵니까?”
“확실합니다. 내일 아침 그대로 통보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공 혜민 만큼은 무조건 탈락시킨다고 하실 줄 알았는데…….노 상궁은 마음이 두근거리면서 불안해 졌다.
“전하…….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번 일을 묻어두는 것과는 별개로 저런 고약한 성정을 가지신 아기님까지 그대로 통과시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달리 생각해 두신바가 있으신 겝니까”
무영은 대답하지 않고 장죽을 들어 어깨를 툭툭 치다가 말했다.
“쉽게 풀어줄 수는 없지요. 멀어지면 귀찮아 집니다. 그냥 제 뜻에 따라 주십시오. 스승님.”
“휴…….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허면, 지금 연릉각에 떠도는 예사롭지 못한 소문은 미리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
무영이 이채를 띤 눈빛으로 노 상궁을 묵직하게 주시했다.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났는지는 몰라도 태자비가 이미 내정되어있다는 소문이 돌더군요. 이것에 대해 아셨습니까?”
“몰랐습니다. 그런 소문이 났습니까?”
“네, 어찌된 영문인지 밤사이에 그런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지금 연릉각 분위기는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영은 장죽으로 어깨를 툭툭 치면서 생각에 잠겼다.
“헌데 이상한 것이, 그쯤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내각관료의 여식 중에 한분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소리도 같이 들리더군요. 혹시…….전하께서 안배해두신 일이 아니십니까?”
무영은 붉은 입술을 들어 올려 피식 웃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만…….그렇다면 더 잘되었군요.”
“예? 무슨…….”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신경 쓰지 마시고 제가 말씀 드린 대로만 따라주시면 되십니다.”
노 상궁은 앞으로 파란이 일어날 조짐을 감지하고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더. 교육시간을 줄이십시오.”
“전하…….지금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교육시간이 줄었습니다. 여기서 더 줄이다니요. 아기님들께서 황궁으로 놀러 오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그런 거 없이도 잘 살아 왔지 않습니까.”
“후유…….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그리고 전하…….”
“말씀하십시오.”
“엊그제 있었던 약제창고 도난사건은 전하께서 하신 일이시옵니까?”
“......”
“삼의 향내가 여기까지 나더군요. 안색에서 옥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니 보통 귀한물건이 아닌 듯싶습니다만…….무엇을 가져다 드리셨습니까?”
“......별거 아닙니다, 창고에 가보니 비슷한 게 몇 개는 더 있던데요.”
“아기님께서 몸이 편찮으시어 심려가 크신 그 마음은 충분히 동감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창고에 난입하여 귀한약제를 강제로 탈취해 가셔야 되겠습니까? 차라리 말씀을 하시고 가져가시면 될 것을요.”
“반출 하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게다가 그 약제는 누가 어떻게 사용했는지 낱낱이 기록에 남기지 않습니까.”
노 상궁의 눈이 찢어질듯 커졌다. 기록을 남겨야 할 정도의 귀한 약제라면…….
“전하......!!”
“......몇 개 더 있었다니까요.”
“연인이 좋으면 제 집 기둥뿌리가 뽑히는 줄도 모른다더니…….딱 그 짝이군요. 연제께서도 그러시더니 그 혈통이 어디 가겠습니까. 반려만 나타났다 하면 어쩌면 그렇게 요란들을 피우시는지…….”
무영은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려 한심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노 상궁의 시선을 피했다.
“너무 과하시면 안 하니만 못하십니다. 아기님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 제 말씀 꼭 새겨들으세요.”
“흠…….”
무영은 알았다는 대답도 없이 노 상궁에게 고개를 숙여 스승에 대한 예를 표 한 뒤 전각을 떠났다.
그런 무영의 뒷모습을 보는 노 상궁의 얼굴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했다.
그날 저녁.
누군가 화연의 방문을 두드렸다.
복도에 서서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그녀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숨어들어갔다. 품에 가지고 있던 것을 적당한 곳에 숨기기 위해 방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침상 옆에 놓여있던 협탁 서랍을 열어보니 딱 알맞은 크기의 비단 주머니가 들어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녀는 주머니를 열고 그 속에 들어있던 물건과 가지고 온 물건을 바꿔 놓으려다, 순간 멈칫하고 눈을 부릅 떴다.
잠시 후 그녀는 방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
<외전 2 -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는 없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비밀. ㅎㅎㅎ
커피쵸아님 후원을 또 해주셨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