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3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눈을 반짝거리며 흥미진진해 하던 예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화연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들이 제 잘못을 뉘우치지도 않고 그런 작당을 하는데도 그런 말씀이 나오세요? 쓰러지시기 전에 하셨던 당부에는 일단 따라 드렸지만 그들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더는 안 되겠어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훗- 오해가 있으셨던 모양이네요. 저는 그때 윗분들에게 알리지 말자고만 했지 그냥 묻어두겠다고는 단 한 번도 말 한 적 없습니다. 다들 저를 너무 착하게만 보시나 봐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기는 하지만…….”
“예진님, 그들이 저한테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해서 똑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마 아버지께 말씀드린다고 해도 당장은 화를 내시며 펄펄 뛰시겠지만 결국 별 다른 수는 없을 겁니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기해가 툭 끼어들었다.
“아기씨, 제 생각은 틀린데요. 재상어르신의 힘을 너무 과소평가 하시는 거 아녜요?”
“기해야. 절대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야. 그럼 내가 한번 물어볼게. 나에게 벌어진 일을 아버지께서 아시면 어떻게 하실 것 같아?”
“당연히 그 년 놈들을 싸잡아 치도곤을 내시겠지요.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래, 내가 생각해도 아버지께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러실 것 같아. 힘도 있으시니 분명히 그렇게 하시겠지……. 그 후에는? 대학사를 비롯한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
“예? 그럼 지들이 잘못해서 아기씨께서 화를 당하셨는데 닥치고 있어야지요!”
“아니. 그 중에 누구 하나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걸? 행궁을 견제하는 내각에서는 좋은 빌미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뭉쳐서 아버지를 공격할 거야. 아버지는 졸지에 자식 좀 건드렸다고 권력을 마구 남발하는 성호사서(城狐社鼠, 오랫동안 권력에 기대어 악행을 일삼는 사람)가 되시겠지. 재상이라는 자리가 정치적 명분도 아닌 자신의 딸을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내각의 수장들을 죄다 물갈이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자리였던 거야?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이라도 말씀드릴게. 사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느꼈던 고통을 그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던 참이었어. 나 착하지 않다고 했잖아. 그렇게 할까?”
“......”
기해는 할 말이 없었다. 제가 생각해 봐도 황제가 아닌 이상 그건 힘들 것 같았다.
“기해야. 아버지는 최고의 자리에 계신다고 해도 재상일 뿐 황제는 아니시잖니. 정치는 명분 싸움이라고 하잖아. 내가 크게 다치거나 죽었으면 모를까 아버지에게는 명분이 없어. 그들이 태자비를 배출하려고 혈안이 되 있는 것도 황궁 내 권력을 장악하려고 그러는 건데 재상의 딸이 돼서 그들에게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 해줄 수는 없지.”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듣고 있던 예진이 풀 죽어있는 기해를 대신해 물었다.
“그럼 어쩌실 요량이세요?”
예진이 자세히 물어보려 하는데 기류 미란과 남궁 진류가 화연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화연을 노려보는 기류 미란의 눈초리가 날이 잔뜩 서있는 것이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머리채라도 휘어잡을 것처럼 살벌해 보였다.
“아파서 누워계신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봅니다. 새벽녘에 바쁘게 움직이시느라 시장하시겠지요. 많이들 드십시오. 운이 좋아 어떻게 초간택은 통과 하셨지마는 중간택이란 운이 통하지를 않거든요. 오호호호홋, 이거 아쉬워서 어쩌죠? 오늘이 연릉각에서 드실 수 있는 마지막 식사일 텐데 많이 드십시오. 아! 짐도 미리 꾸려 놓는 것이 좋겠네요. 내일 바로 떠나시려면.”
화연은 자세를 바로하고 태연하게 응수했다.
“저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 다른 사람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것이겠지요. 헌데, 새벽녘에 제가 움직였다는 소리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남궁 진류가 콧방귀를 귀면서 비웃었다.
“흥! 속일 사람을 속이셔야지요. 우리 중에 그런 비겁한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제 와서 무슨 생각으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비를 시켜서 그런 괴문서를 노 상궁의 침소에 가져다 둔 거 다 압니다. 그러니 발뺌할 생각은 마시죠.”
조용히 먹고만 있던 호림이 음산하게 말했다.
“그런데요…….”
남궁 진류는 이제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걸어서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어머!! 뭐야? 이 귀신같은 애는!”
기류 미란도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며 호림에게 호통을 쳤다.
“너, 너는 뭐냐!! 누구 길래 웃전들 말씀하시는데 예의도 없이 함부로 끼어드는 것이냐!”
호림은 기류 미란의 호통을 들은 척 하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투서를 받은 상궁이 노 상궁이라는 것은 궁녀들도 잘 모르던데…….어떻게 알았을까…….”
식당에 정적이 흘렀다.
화연의 일행 뿐 아니라 기류미란과 식당에서 소리죽여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던 다른 처녀들까지 일제히 남궁 진류를 쳐다보았다.
남궁 진류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걸 재빠르게 수습하고 당당하게 소리를 높였지만 속으로는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고 생각했다. 명 상궁에게는 말 해봤자 또 쉬쉬 할 것 같아 일부러 대쪽 같은 노 상궁에게 보냈던 건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흥! 다, 당연히 노 상궁 마마겠지. 다른 상궁일 턱이 있나! 바보도 아니고 그런 짐작도 못한단 말이냐?......미란님!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설마…….저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화연은 물을 마시다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당연히 연릉각 총괄상궁인 명 상궁 인줄로만 알았는데 교육담담인 노 상궁님이라구요? 그것 참, 특이한 선택을 하셨군요. 왜 그러셨습니까?”
남궁 진류의 얼굴은 시뻘게질 대로 시뻘게져 당장이라도 귀에서 연기라도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뭐, 뭐라고?! 내가 언제,”
화연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남궁 진류의 말을 끊고 평온한 태도로 여상스럽게 말했다.
“흠…….주항서인인 아버지를 통해서 입을 막아뒀긴 했지만 이렇게 잘 수습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하셨나 봅니다? 공 혜민님 정도는 내쳐질 줄 알았는데 말이죠…….제가 빨리 일어나지 못해 원하시는 대로 일이 안 풀려 화가 나신 건 이해 갑니다만 그렇다고 자신이 한 일을 저에게 뒤집어씌우면 되겠습니까? 어차피 있는 일을 그대로 전달했을 뿐 잘못 한건 아니지 않습니까? 잘 하셨는데 뭘 그리 정색을 하고 발뺌을 하십니까? 자신이 한 행동에 자신감을 가지셔야지요.”
기류 미란이 질린 표정으로 남궁 진류의 곁에서 한걸음씩 떨어졌다.
“미, 미란님!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말 이에요. 저것들이 저를 모함하는 겁니다.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화연이 남궁 진류의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천천히 감상하다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게…….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공 혜민님과는 친하게 지내셨던 거 아니셨나요? 그것 참 이상하네요. 예진님, 왜 그랬을까요?”
예진은 턱을 손으로 받치고 나물반찬을 뒤적거리면서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실제로는 별로 안 친했는데 친한 척 한 걸 수도 있고요, 친하긴 했지만 태자비첩지를 받고 싶은 나머지 친구고 뭐고 물불 안 가리고 그냥 제거 한 걸 수도 있고요. 어느 쪽이라도 참 무섭고 독하네요.”
의심스러운 얼굴로 남궁 진류를 보던 기류 미란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애를 썼다. 이들의 말을 믿기는 싫었지만 정황을 따져보니 남궁 진류가 한 일이 틀림없어 보였다.
“진류님…….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남궁 진류가 손 사례를 치면서 울먹거리며 억울하다고 소리를 질렀다.
“미란님! 아니라니까요! 제 말은 안 믿고 저들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예진은 남궁 진류가 참 딱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제가 기류 미란님이라도 남궁 진류님 말은 못 믿겠네요. 거 어지간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쯧쯧쯧”
“이!!......네년들이 언제까지 기고만장 할 수 있을지 내 두고 보겠다!”
남궁 진류는 상황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성난 돼지처럼 얼굴을 잔뜩 구기면서 씩씩 거리더니 치마를 움켜쥐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가버렸다. 기류 미란은 남궁 진류의 뒷모습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오해했다면 실례’ 라며 도도하게 말한 뒤 식당을 나갔다.
기해가 고 것 참 쌤통이라는 표정으로 작게 키득거리다가 혼자서 꾸역꾸역 먹고 있는 호림에게 말을 걸었다.
“와…….너 대단하다. 어떻게 그 생각을 다했어? 난 또 그거까지 우리 아기씨께서 덮어쓰는 거 아닌지 조마조마했지 뭐야.”
“흐…….제일 친한 친구를 위한 일인데 뭐…….흐흐흐흐흐”
그러면서 낯 색 하나 붉어지지 않은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몸을 비틀며 스산하게 웃는데……. 그것을 보는 기해의 얼굴에 일제히 닭살이 돋았다.
“그, 그래…….친구야…….고맙다…….”
그때, 식당 안으로 처소 궁녀가 들어와 처녀들을 주목시켰다.
“아기님들, 오늘 예정되어 있던 교육일정은 모두 취소되었으니 식사를 마치신 후 각자의 개인시간을 보내셔도 괜찮습니다. 허나, 불미스런 사건으로 인하여 앞으로 당분간 후원 출입은 금 하오니 한 분도 빠짐없이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간택에 있어 불이익을 당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궁녀는 돌아 나가지 않고 화연 쪽으로 다가오더니 목례를 했다.
“화연아기님과 예진아기님께서는 식사가 끝나셨으면 저를 따라 오시기 바랍니다.”
화연과 예진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기해도 따라나서려 했지만 화연의 만류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예진님과 갔다 올 테니 기해 너는 호림씨와 같이 있어. 내 방에 가서 같이 차라도 마시고 있으면 되겠다.”
화연을 혼자 보내기 불안해 기해가 얼굴을 굳히고 화연의 팔을 잡았다.
“네!? 저도 그때 같이 있었잖아요! 저도 가서 말할 수 있어요. 그게 안 된다면 밖에 서있기라도 할게요. 그 녀ㄴ…….아가씨들이 이번엔 무슨 소리하며 잡아 땔지 어떻게 알아요!”
걱정스런 기해의 마음도 모르고 호림은 기해의 소매를 잡아 흔들었다.
“난 차 별로…….당과 같은 건 없어?”
“야!! 지금 당과가 문제! 어……어, 없는데…….”
호림이 씩 웃더니 일어서서 잡고 있던 기해의 소매를 끌었다.
“나한테 있어. 이럴 줄 알고 여기 올 때 집에서 잔뜩 가져왔어. 같이 먹자.”
“…….난 당과는 별로......”
“근데…….화연님에게 뭘 드렸는데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 꼭 귀한 삼ㄴ”
기해가 호림의 입을 서둘러 막더니 어설프게 웃었다. 호림의 차가운 입술에 닿은 기해의 손등에도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아차차! 당과 좋지! 가, 같이 먹을까? 하.하.하.하...차, 참 맛나겠다. 그치?”
화연은 불쌍한 얼굴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해를 못 본 척 하고 웃으며 등을 밀었다.
“어서 가. 그 당과 먹어보고 얼마나 맛있는지 내게도 얘기해 주렴.”
울상을 한 기해가 호림에게 끌려가고 화연은 예진과 함께 궁녀를 따라 식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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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나는 딱 한명만 손봐줄 수 있다면 얘를 선택하겠다.
1. 화연을 연못으로 민 두꺼비, 공 혜민
2. 구해주지 말자고 나섰던 돼지, 남궁 진류
3. 한발자국 물러서 있다가 숟가락만 올린 기린, 기류 미란
4번 있었는데 삭제. 표가 너무 몰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