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1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화연은 혼자 먹겠다는 것을 기어코 떠먹여 주는 기해의 도움을 받아 미음으로 요기를 하고 예진과 담소를 나눴다. 기해는 오후 교육 시간이 되자 시비숙소에 갔다 오겠다며 신이 나서 나가고, 예진은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교육을 받기 위해 나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자마자 화연은 한숨을 쉬면서 침상에서 일어섰다. 입고 있던 반소매 저고리 위에 두툼한 장옷을 걸치고 창을 여니 기다렸다는 듯 무영이 훌쩍 뛰어 들어왔다. 아까 예진과 대화를 하다 무심코 시선을 돌렸는데 창밖에 검은 카울을 뒤집어 쓴 남자가 우두커니 서있는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내색하지 않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더니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젠 대낮에도 마음껏 드나드시는 거예요? 정말, 어쩌시려고 이러시는지…….”
무영은 대단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화연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다 팔 부분을 턱으로 가리켰다.
“팔은? 이제 안 아파?”
화연이 다친 팔을 손으로 감싸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다친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날 밤에 왔었어.”
“어머! 여자 혼자 자고 있는 방에 맘대로 들어오시면 어떻게 해요?”
“자주 봐야 한다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영은 같이 살고 싶으면 자주 보고 정을 나누는 거라고 니가 말했잖아! 그렇게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발뺌이야! 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럼 화연이 놀라며 싫다고 하지는 않을까 싶어 말도 못하고 이런저런 고민에 빠졌다가 문득 이 여자 앞에만 서면 내 맘대로 못하고 이 여자 눈치 보느라 이런 고민까지 해야 하는지 짜증스러워 화연을 노려봤다. 나 없는 곳에서 허락도 없이 다치기나 하고 말이지…….그걸 생각하니 화가 더 울컥 치밀어 올라 심사가 뒤틀렸다.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는 아직 안색이 안 좋았다. 전에는 잘 익은 복숭아 같이 탐스럽던 뺨이 지금은 수척해져 창백했고 입술도 말라 거칠어 보이는 것이 크게 앓고 방금 일어선 사람처럼 생기가 없어 보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당장 안쓰러운 마음이 솟아오르면서 이렇게 아픈데 그녀가 기억을 못하는 것도 당연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다치고 싶어 다친 것도 아니고…….게다가 수척해 지니 그건 그거대로 청초하고 한없이 연약해 보여 저 얼굴에 대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영은 그녀를 이렇게 만든 년들에 대한 살의를 마음속에 갈무리 하고 조용히 품 안에서 천 뭉치를 꺼내 건네주었다.
“......아니야. 이거 받아.”
“이게 뭐에요?”
무엇인가 무명천에 둘둘 말려있었다. 화연이 천을 조심스럽게 풀어보니 인삼같이 생긴 풀뿌리였는데 빛깔이 노르스름한 것이 아닌 푸른 기운을 띈 하얀 색이었다. 굵은 뿌리가 사람의 팔다리 모양으로 길게 나있으며, 잔뿌리까지도 무성한 것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천을 다 풀기도 전에 약 냄새 가득했던 화연의 방안이 순식간에 청량한 향기로 가득 찰 만큼 기가 막히게 진한 향기를 내 뿜고 있었다.
“와-이거 인삼이에요? 향기가 너무 좋아요. 인삼에서 이런 향이 나는 줄은 몰랐어요.”
“그거 그냥 생으로 먹어.”
“네? 이런 귀한 건 또 어디서 나셨어요. 이런 거 볼 줄 모르는 제가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거 몇 년 안 된 거야. 더 오래된 것도 있었는데 네 몸이 약해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해서 그걸로 가져 왔어. 그냥 먹어.”
화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내 저은 뒤 들고 있던 인삼을 다시 무영에게 내밀었다.
“안돼요. 도로 가져가세요. 아! 그리고 저번에 주고 가셨던 투명한 돌도 같이 가져가세요. 왜 자꾸 그런 걸 가져 오세요. 선물은 처음에 주셨던 푸른 돌로 충분하다니까요.”
그 동안 많은 일이 생겨 주머니를 받은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문득 옷장 속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주머니를 발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열어봤는데…….화연은 기함 할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을 뿌리는 투명한 돌이 들어 있었다. 꼭 다이아몬드처럼 생겼는데 자신의 주먹보다 더 큰 것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하여튼 뭔지는 모르겠지만 값비싼 물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이런 걸 그냥 공 던지듯 주고 가다니…….이 남자 제정신인가!!
“싫으면 버리던지”
무영은 한걸음 물러서서 팔짱을 꼈다. 절대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여 화연은 한숨을 쉬면서 인삼을 천으로 곱게 감싸 탁자에 내려놓았다. 굉장히 오래된 인삼처럼 보였는데 그런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색은 왜 이런 거지? 진짜 몇 년 안 돼 아직 덜 자라서 그런 건가? 그래도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 정도는 탕약 만들 때에도 많이 넣으니까…….
“후…….알겠어요. 이건 잘 먹을게요. 너무 고마워요. 하지만 저번에 주신 건 가져가세요. 그런 건 받을 수 없어요.”
“그것도 싫으면 버려”
화연은 허리에 손을 얹으면서 무영을 노려봤다.
“......정말 이럴 거예요?”
고것 참…….
크게 앓고 난 뒤 라서 그다지 생기 있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모습은 이 모습대로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제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았다. 무영은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응, 계속 이럴 거야.”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화연은 눈에 힘을 풀었다. 그렇게 귀한 건 아니겠지…….아닐 거야…….그래, 아닌 것 같아. 화연은 자신에게 최면을 걸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리 빛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아…….그럼, 앞으로 더 이상 이런 거 가져 오지 마세요. 아셨죠?”
“싫어.”
아…….미운 6살. 말이 안 통하는 이 기분 정말 오래간 만이네. 화연은 손을 이마에 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마자 무영이 재빠르게 다가와 화연을 훌렁 안아 들더니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머!! 왜 이래요? 내려 주세요! 빨리요.”
화연의 버둥거림도 무시하고 무영은 침상에 천천히 내려 눕힌 뒤 이불을 곱게 덮어 주었다. 일어나지 못하게 어깨를 내리 누르고서는 어디서 본건 있어서 배 위를 어설프게 토닥거리기 까지 했다. 화연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저 아픈 거 아녜요. 다 나았다구요. 이 손 좀 치워 주세요.”
“안 돼. 너 아파.”
화연이 자신을 뚫어져라 내려 보는 무영의 눈길을 피하다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지금 누르시는 어깨가 더 아파요. 남자 앞에서 이렇게 누워 있는 것도 민망하고요, 배에서 손도 좀 치워 주세요…….어?”
화연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무언가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무영을 쳐다보았다.
“혹시 저 누워 있을 때 오셔서 이름 알려 주고 갔어요?”
“응. 왔었다고 아까 말했잖아”
“그럼…….이름이 무영……. 맞아요?”
“응”
“......그랬구나…….꿈 인줄 알았는데…….”
화연은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눈을 내려뜨다 풋- 하고 웃었다.
“아파서 누워있는 사람한테 이름은 왜 말해주고 갔어요? 갑자기 이름이 너무나 말해주고 싶었어요? 참, 엉뚱한 면이 있으신 것 같아요.”
당연히 무영은 울컥해서 ‘니가 물어봤잖아! 그날 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알아?!’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초췌한 모습으로 웃는 그녀의 얼굴이 한 떨기 꽃 같이 고와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냥 말해주고 싶었다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화연은 웃다가 몇 번을 일어나려고 시도 했지만 모두 실패해 계속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포기하고 몸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풀고 편하게 누워 눈을 감고 있으려니 생각보다 어색하지도 않고 잠까지 솔솔 오는 것 같았다. 화연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느리게 웅얼거렸다.
“그 붕대 계속 하고 다니시면 안 된다니까요……. 덧날 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근데…….아직도 안 나았어요?”
무영은 대꾸도 없이 한참 동안 화연의 배를 도닥거렸다. 민망해 하던 화연은 점점 긴장을 풀더니 이제 편한 표정으로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든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던 무영은 도닥거리던 손을 멈췄다.
“화연”
“......”
무영은 대답 없이 누워만 있는 화연의 얼굴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입 맞출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다 멈추고 화연의 얼굴을 살폈다.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표정에 무영의 입술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소리 없이 웃던 그는 붉은 입술을 화연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더 낮고 은밀해졌다.
“화연”
“......”
“나는 성질 급한 짐승이라 오래 기다리지 못해.”
“......”
“빨리 받아들여.”
“......”
말을 마친 무영은 화연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피식 웃었다. 이마 위에 살짝 입을 맞추고 일어선 그는 한 마디 던지고 돌아섰다.
“숨은 쉬어야지.”
창이 소리 없이 닫히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화연은 눈을 번쩍 뜨고 ‘푸하-’하고 크게 숨을 내뿜으며 일어나 앉았다.
잠 따윈 자지 않았다. 잠이 올 리가 없지. 저런 남자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잘 수 있을까. 그저 자는 척하면 빨리 나가지 않을까 싶어 그랬던 것뿐인데…….얼굴에 무영이 숨이 느껴질 때부터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괜히 숨은 멈춰서 들키기나 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있을 걸…….
화연은 침상에 앉아 울상을 지으며 터질 듯 한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입술의 감촉을 지우려 귀를 마구 문질렀다.
곰곰이 그가 한 말을 되새겨 보던 화연의 얼굴에 붉은 기가 천천히 번지더니 삽시간에 들불처럼 온몸으로 퍼져 이제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 어떻게 해…….그가 나를……조……조……조……좋아하나봐…….아, 아닌가? 아, 뭐야! 말을 하려면 제대로 하고 가던가!
때마침 들어온 기해가 온 몸이 홍당무 마냥 붉어 진 채 머리를 부여잡고 침상에 앉아있는 화연을 보고 기함하여 궁의를 데려온다며 호들갑을 떤 건 당연한 일이였다. 화연도 충분히 예상은 하고 있었던 일이였기 때문에 정신이 딴 데 가있는 와중에도 어렵지 않게 진정 시켰다.
왜 온몸이 붉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화연이 무탈하다는 것을 확인한 기해는 물을 마시며 놀란 속을 진정 시키는데 탁자 위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천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는 없었는데……. 또 예진아가씨가 주고 가셨나? 뭐지? 하며 천 뭉치를 들어 올리는데 그 안에서 청량한 향기가 확 퍼져 나오는 것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럽게 천을 풀어보는데…….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을 본 기해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넘어가는 와중에도 손에 든 것이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두 손으로 감싸 가슴 앞에 꼭 끌어안은 치밀함이 돋보였다.
“어머! 기해야!”
화연이 놀라서 침상 밖으로 뛰쳐나가 기해 옆에 주저앉아 그녀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기해야!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정신 좀 차려봐!”
기해는 화연의 손을 잡아 제 손에 들려 있던 걸 꼭 쥐어 주면서 띄엄띄엄 말했다. 적과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일격에 당해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비운의 장수처럼 그렇게 비장할 수가 없었다.
“처, 처, 처, 천년......설...삼......생으로......씹어 드세요......흙까지......몽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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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약재 도난 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추 서방(가명/31세/금위)은 자신은 약재창고를 지키다 침입한 괴한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아 기절해 있었을 뿐이라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천년설삼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고 먹었겠냐며 시종일관 억울함을 호소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오는 주말, 용의자 주장에 대한 사실조사가 약제창고에서 있을 예정이라고 하니 그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는 바이다.
제국일보 / mikaL 기자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