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아기씨!? 아기씨! 정신이 좀 드세요? 아기씨……. 저 알아 보시겠어요?”
“…….기해야”
초간택 이후로도 이틀이나 더 고열에 시달렸던 화연은 새벽녘부터 열이 내려가더니 오전쯤 되니 약간의 미열만 남기고 뜨겁던 열은 가라앉았다. 밤새도록 옆에서 지키고 있었던 기해는 화연이 눈을 뜨자 태산 같은 걱정에 불안했던 마음이 놓이면서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아기씨, 아직도 목소리가 아직도 안 좋아요. 말씀 많이 하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미안”
미안한 표정으로 웃는 화연의 얼굴을 살피던 기해가 침상에 엎드려 눈물을 터트렸다.
“몰라요! 저 십년감수했어요. 아기씨 잘못되시는 줄 알고 겁나서 죽을 뻔 했다구요!”
화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엎드려 펑펑 우는 기해의 뒤통수에 손을 올리고 쓸어주었다. 이리 놔두면 하염없이 울 것 만 같았다.
“나…….흠, 흠. 물 좀”
“아기씨, 물이요? 물드시고 싶으세요? 잠시 만요.”
기해가 머리를 휙 들어 올리더니 소매로 눈물을 서둘러 닦았다. 침상 옆에 있는 작은 협탁에서 허둥지둥 물을 따라 화연의 입에 갖다 대었다.
화연은 그릇에 있는 물을 다 마시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나 누워있는 사이에 별일 없었지? 간택은 어떻게 됐어?”
기해는 물그릇을 탁 내려놓더니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아기씨! 지금 간택이 문제에요? 지금 전각 안에 어떤 소문이 도는 줄이나 아세요? 아휴, 폭폭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 글쎄, 그년들이 아기씨께서 오두방정 떨다가 혼자 연못에 홀라당 빠졌다고 자질이 어떠니, 성정이 어떠니…….나 참, 기가 막혀서…….교육도 이렇게 빠지는 것을 보면 게으르기까지 하다며 하루빨리 탈락시켜도 모자랄 판인데 초간택에서 통과했다고 상궁들한테 항의하고 지랄들을 떤다잖아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그러게 사실대로 말을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속이 타서 하루에도 찬물을 열두 번씩 마신단 말예요! 이제 아기씨 일어나셨으니 그년들한테 본때를 보여줘야 해요. 아주 기고만장해서 어찌나 꼴값들을 떠는 줄이나 아세요? 제가 이 시간만을 기다렸네요! 아주 눈물 쏙 빠지게 개망신을 줄 거예요!”
“그럼 나도 초간택을 통과한 거야?”
“그렇다니까요. 차라리 탈락이라도 됐다면 집으로 돌아가 어르신께서 이일을 말씀드리기라도 할 텐데, 무슨 꿍꿍이들인지 초간택에서 통과가 됐지 뭐예요.”
“예진님은? 통과하셨니?”
“그 년들도 고스라니 통과했는데 예진님께서 떨어지시면 말이 안 되죠. 통과하셨어요.”
“그럼, 아버지나 오라버니는 아직 모르시는 거지?”
“흥! 지들끼리 입 맞춰서 쉬쉬하는데 어떻게 아시겠어요. 아기씨 구해준 금위까지 입막음을 당했다던데…….가주 어르신께서 아셨으면 지금 아기씨가 깨어나신 곳은 별채 안 아기씨 침소였겠지요. 아기씨만 허락하신다면 제가 지금이라도 가서 죄다 말씀드리고 올게요. 어떻게, 지금 바로 출발할까요?”
“금위도 입막음을 당했다고?”
“네, 그렇다니까요! 예진 아가씨께서 알아보셨는데 포상휴가까지 받아 한동안 입궁도 안 한다네요. 그놈이 주항서인어르신께 뒷돈을 받은 게 틀림없어요! 내가 그놈까지 같이 싸잡아 혼쭐을 내줄 거예요! 두고 보세요. 아주.”
화연은 침상에 기대어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많은 일들이 벌어진 것 같았다. 교육도 참석 못하고 이렇게 누워만 있었는데 초간택을 통과했다니…….더더군다나 사실이야 어떻든 사람들은 내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통과된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중간택은 언제지?”
“중간택이요? 글피 아침에 한다던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지금에 와서 사실을 말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 너무 시간이 지나버렸어. 이제는 오히려 내 흉을 덮으려고 자신들한테 누명을 씌우는 거라며 딱 잡아 땔 거야. 금위가 증언을 해줘야 하는데 휴가까지 받아서 당분간은 입궁도 안한다며. 입궁을 해서도 사실대로 말해줄지 의문도 들고, 보아하니 그 사람까지도 내 잘못으로 연못에 빠졌다고 말할 가능성이 커.”
“아기씨, 그 놈이 벌써 그렇게 말하고 포상휴가 받은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가주 어르신께 말씀드려야지요! 그 일이 벌어지고 바로 말씀 드렸으면 좋았을 테지만 일이 이렇게 됐으니 지금이라도 말씀드리면 되요. 아기씨 걱정 마세요. 제가 금방 다녀올게요.”
화연의 손을 꼭 잡아준 뒤 벌떡 일어나는 기해를 화연이 붙잡았다.
“잠깐만, 기해야. 기다려봐.”
“왜 그러시는데요? 아기씨, 설마…….”
“아버지에게는 말씀드리지 말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아.”
“아기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돼요! 절대로 그냥 넘어 갈수는 없어요! 아기씨 죽을 뻔 하셨다니까요?! 사람이 착한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지…….이걸, 그냥 넘기시려구요? 아기씨! 저 속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으세요?! 전 죽으면 죽었지 절대 그렇게는 못하겠네요.”
“기해야, 나 그냥 넘긴다고는 말 안했는데?”
“…….그게 정말이셔요? 저한테만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냥 넘기시려는 거 아니셔요?”
화연은 웃으면서 기해가 분을 못 이겨 꽉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을 잡았다.
“그런 거 아니야. 정말 그냥 넘어갈 생각 없어. 나 그렇게 살지 않기로 마음먹었거든. 그건 착한 게 아니고 미련한 짓이잖아”
“아기씨 말씀 한번 시원하게 잘하셨어요. 그럼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화연이 기해의 주먹을 만지작거리면서 시간을 끌자 성질 급한 기해가 기다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재촉했다.
“아기씨, 저 뒤로 넘어가기 전에 말씀 좀 해보세요. 그 년들한테 쓴맛만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면 전 뭐든지 상관없어요. 제가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 들어가야 한다고 해도 충분히 할 수 있어요.”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내 말을 차분하게 들어봐. 지금은 사실을 말한다 해도 결국에는 분란만 일으킬 뿐이야.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어. 예진님께서 증언이야 해주시겠지만 분명히 그 사람들은 예진님 까지도 자신들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거라고 주장 할 거야. 최악의 경우, 나야 중도 탈락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되지만 예진님은 아니시잖니. 태자비자리를 원하시는데 이 일로 흠을 만들어 드릴 수는 없어.”
“그건 이미 예진아가씨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으실 거예요. 아가씨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하셨다구요. 그리고 저한테는 그 누구보다 아기씨가 훨씬 중요해요. 비교 할 수도 없다구요. 예진아가씨에게 죄송하기는 하지만…….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봐요.”
화연은 쓴웃음을 지으며 기해의 얼굴을 쓰다듬어줬다.
“알아. 기해 네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는 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지. 하지만 내 손으로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데 아버지 힘까지 빌릴 필요는 없잖아? 괜히 걱정만 하실 텐데 말이야. 나를 믿고 좀 기다려 주겠어?”
기해는 억울한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한숨을 깊게 쉬었다.
“어쩌시려고 그러시는 건데요? 저에게 귀띔이라도 해주세요.”
답답해하는 기해의 얼굴을 보던 화연이 개구지게 씩 웃었다.
“훗-어쩌긴 뭘 어쩌겠니.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서로를 방해 하게 만드는 거지.”
“어떻게요? 설마…….아기씨께서 태자비 자리에 오르신다는 말씀은 아니시지요?”
“기해야. 그 자리가 오르고 싶다고 내 맘대로 오를 수 있는 자리니? 너도, 참…….기억 안나? 그 자리에 오를 사람은 따로 있잖아”
“아! 그렇지! 제가 아기씨 문제로 정신을 놓고 있어서…….”
“간택될 사람은 행정부 관료의 여식이랬어. 그러니 그들 중에는 없는 거지. 나는 이점을 이용할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나를 좀 도와줘야 돼.”
“뭔데요? 저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요. 지금 같아서는 그 년들 머리를 죄다 밀어버리라고 말씀하셔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말씀만 하세요. 아기씨”
“훗- 그런 큰일을 할 필요는 없고, 오늘 부터 시비들의 숙소로 내려가서 짜증을 내. 그러면서 태자비에 내정되어있는 사람이 이미 정해져 있다던데 그럼 우리아가씨는 헛물켜는 거 아니냐. 너무하다. 이런 식으로 말을 슬쩍 흘려.”
“예? 아기씨……. 그건 비밀이잖아요.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확실하게 말하지 말고 그런 소문이 있다더라, 하고 두루뭉술하게 말을 흘리라고. 그리고”
“그리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내각 쪽 관료의 여식인 것 같다고 덧붙이는 것 잊지 말고.”
“내각 쪽이요? 어…….왜요?”
“네가 시비숙소에서 그런 말을 꺼내면 시비들이 각자의 상전에게 말을 전할거야. 그럼 이제까지 속으로는 경계하면서도 겉으로는 친한 척 뭉쳐있던 내각 쪽 인물들은 서로를 의심하면서 본격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하겠지. 자동적으로 우리는 그 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거야. 중과부적(衆寡不敵) 이라는 말이 있잖아. 적은수가 많은 수를 이기지 못한다면 그럼 적의 수를 줄이는 수밖에. 우리는 그들이 서로를 탈락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스스로 숫자를 줄이기만을 조용히 기다리면 돼. 그 뒤에 남은 사람들도 서로를 믿지 못해 전처럼 뭉쳐 다니지 못 할 거야. 적을 무너뜨리는 첫 번째 단계가 뭉쳐있는 적을 뿔뿔이 흩어 놓는 것이거든. 한 대 묶어둔 회초리는 부러뜨리기 어렵지만 매듭을 풀어서 하나하나 흩어놓으면 부러뜨리기 쉬운 법이지.”
기해가 눈을 반짝이면서 박수를 쳤다.
“어머나! 아기씨…….우리 아기씨는 머리도 참 좋아. 그런 건 또 언제 배우셨어요?”
화연은 순간 움찔했다. 여, 여기에도 손자병법 같은 책이 있을까?
“어……? 어, 언젠가 책에서 읽은 것 같아.”
“역시 우리 아기씨! 깨어나셔서 둘째 도련님 병서(兵書)라도 읽으신 거예요? 아휴, 부지런도 하셔라.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세요! 끼리끼리 뭉쳐 다니는 거, 아주 꼴도 보기 싫었었는데…….”
“어…….그러니까, 내가 중간택에서 탈락 할 수도 있으니 어서 움직여야해. 그 전에 그들을 흩어놓으면 굳이 내 입으로 누가 나 밀었소, 하고 말 안 해도 그들 중 한명이 나서서 말할 수도 있어.”
“흥! 그년들이 통과한다면 아기씨께서도 절대 탈락하지 않으실 거니까 고건 염려하지 마셔요. 그럼 저는 아기씨 식사 챙겨드리고 시비 숙소로 바로 내려가서 말을 흘려놓고 올게요.”
“응,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기해는 음흉한 표정으로 크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고, 내심 식은땀을 흘리며 기해의 눈치를 살피던 화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 교육이 끝나고 간식을 챙겨 화연을 보러 왔던 예진에게는 자초지종을 다 말할 수가 없어 태자비가 이미 내정되어 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거짓소문을 퍼트릴 거라고 얘기했다. 예진은 그거 참 좋은 생각이라며 발까지 구르면서 좋아했다.
**********************************************************************
부부복수단 공격개시
불의전차다님 후원 더불샷 감사합니다^^
네티님 후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