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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46화 (46/110)

00046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류 강연은 창틀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아니면 잠을 자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무영을 흘끔흘끔 관찰하면서 일지를 작성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아무 것도 안하는데 일지에 뭐라고 쓸 말도 없고 더 이상 지어내기도 힘들어 며칠 전 쓴 일지를 짜깁기해서 연제께 갖다 드렸다가 집어던지는 일지 모서리에 머리를 얻어맞고 이딴 식으로 하면 태자의 날인을 받아오게 하겠다는 협박을 들은 뒤 다시 쓰는 거였다.

아…….쫌 뭐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저러고 가만히만 있으니 쓸 말이 없잖아. 류 강연은 자신이 작성하던 일지를 다시 읽어 보았다.

모(某) 월 며칠

사시 초(9시 이후) : 배연에 기대어계십니다.

사시 초와 사시 정(10시) 사이 : 배연에 누워 계십니다.

사시 정 : 눈을 뜨고 저를 한번 쳐다보시더니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사시 정과 사시 말(11시) 사이 : 엎드리셨습니다.

사시 말 : 몸을 돌리셨습니다.

오시 초(11시 이후) : 다시 눈을 뜨시고 저를 보시더니 계속 보면 눈깔을 뽑아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안전을 위해 잠시 기록을 쉬겠습니다.

어휴…….이게 뭐냐…….남들은 이 시간에도 바쁘게 움직이면서 능력을 발휘해 업무를 처리하고 있겠지. 이렇게 허송세월 보내는 사람은 황궁에서 나밖에 없을 거야. 우리 연이라도 보고 있으면 시간이라도 빨리 갈 텐데…….시간도 더럽게 안가고. 한번 멀찍이서 보기만 해 볼까?

류 강연이 연이를 어떻게 하면 몰래 볼 수 있을까 연릉각을 지키고 서있는 금위의 근무 교대시간과 동선을 머릿속에서 그리며 전략을 짜고 있는데 무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스승님을 불러와”

머릿속에선 벌써 자신이 짠 전략으로 화연을 성공적으로 만나 기쁨을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무영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네? 누구……?”

창에 앉아 눈을 감은채로 팔짱을 끼고 있던 무영이 눈을 떠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내정소속 교육 담당 노 상궁을 불러오라고”

“네. 헌데, 왜…….”

“당장”

“…….네, 알겠습니다.”

더 물어보려던 류 강연은 무영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여 질문을 포기하고 자리에 일어섰다. 분명히 살기는 없었는데 화난 것 같기도 하고…….아닌가? 뭐지? 워낙 무표정해 긴가민가했다.

류 강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1층으로 내려갔다. 무영이 낸 칼자국이 길게 새겨져 있는 기둥을 벌벌 떨면서 손보고 있던 공조서 소속 내관에게 노상궁을 모셔오라는 명을 전했다.

청룡궁 앞에서 노 상궁을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안가 바늘하나 안 들어 갈 것처럼 꼬장꼬장한 모습의 노 상궁이 내관의 뒤를 따라 청룡궁에 도착했다.

“마마님, 어서 오십시오.”

“오래간 만입니다. 류 대장님. 여렸을 때 교육 받으신 뒤로는 처음이지요?”

“예, 그 동안 무탈하셨습니까?”

“대장님과 태자전하의 교육담당에서 벗어나니 모든 일이 쉬워지더군요. 탈이 날 리가 없지요”

류 강연은 뒷머리를 긁으면서 겸연쩍게 웃었다.

“하. 하. 하…….흠, 흠. 네…….”

류 강연은 지금의 연이 나이쯤 됐을 때 무영과 함께 교육을 몇 번 같이 받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역사교육 스승이 노 상궁 이었다. 그때 무영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어찌나 말썽을 피웠는지 지금 노 상궁의 반백의 머리는 그때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재 노 상궁은 무영이 궁 안에서 예를 갖추며 정중하게 대하는 황궁 안에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노 상궁은 따뜻한 눈으로 쑥스러워하는 류 강연을 보다 청룡궁으로 들어갔다. 류 강연이 그 뒤를 따라가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마마님. 태자전하께서 기분이 언짢으신 것 같았습니다. 혹시…….무슨 일이신지 아십니까?”

“글쎄요…….가보면 알겠지요.”

“저…….음…….우리 연이는 잘 있지요?”

노 상궁이 앞서가다 류 강연을 돌아보았다. 류 강연 얼굴에 겸연쩍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쯧쯧쯧…….그렇게 궁금하십니까? 그럼 슬쩍 가서 한번 보고 오시지 그러십니까?”

노 상궁이 던진 미끼를 류 강연이 덥석 물더니 꼭꼭 씹어 꿀꺽 삼켰다.

“안 그래도 그럴까 생각중입니다. 근데 걱정되는 게 보면 말 걸고 싶고, 얘기하다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결국엔 헤어지기 싫어서…….읍! 아, 아닙니다. 제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금지하고 있는 일인데요. 저, 저, 절대 안 할 겁니다. 마마님”

방금 전까지 금위대의 위치를 생각하면서 최적의 침입 경로를 그리고 있던 류 강연이 두 손을 내저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나저나, 누가 들으면 연인이라도 만나러 가나 싶겠습니다. 그려…….그러다 아기님께서 태자비로 간택되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하하하 하하하하-마마님…….아, 이거 참…….말할 수도 없고…….마마님께서도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당연히 후보들 중에서는 우리 연이가 으뜸이지요. 하지만 뭐, 보는 눈이야 다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태자전하의 보는 눈이 엄-청, 특이하셔서 우리 연이한테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관심 없다고 하셨다고요?”

“네! 그럼요! 마마님도 믿어지지 않으시죠? 그러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연이가 태자비에 간택될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아하하하하하하핫-”

그렇게 말하는 류 강연은 안타까워하는 얼굴이 전혀 아니었다. 노 상궁은 그런 류 강연의 얼굴을 미묘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기님은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른 남자의 품으로 떠나게 될 테니 동생만 보고 있지 마시고 좋은 처녀를 만나 연애를 하세요.”

“저희 아버지를 보시면 그런 말씀 못 하실 걸요? 지금이야 꼭 성혼은 해야 한다고 하시지만, 그 데릴사위라는 걸 못 구한다면 아마 우리 연이, 죽을 때까지 끼고 사실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시면 제가 끼고 살 거구요. 하하하하하하”

“쯧쯧쯧…….재상어르신의 따님 사랑이야 유명하지요…….허나, 그건 두고 봐야합니다. 한창 때의 아름다운 처녀를 누가 가만히 놔둔 답니까? 딸이 좋다는데 재상어르신이라도 반대하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때 가서 충격 받지 마시고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혹시 압니까? 그 시기가 바로 코앞에 닥쳐 있을지…….”

“하하하하. 마마님도…….아직 10년은 멀었습니다.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 하하하”

크게 웃는 류 강연을 딱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노 상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게 웃던 류 강연이 문 앞에 서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고 하려는데 무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마마님 들어가시죠.”

노 상궁을 먼저 들여보내고 따라 들어가려는데 무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너는 나가”

“네?”

“나가”

“…….네”

무영의 음산한 목소리를 듣자하니 더 버티고 있다가는 한 대 얻어터질 것 같아 류 강연은 조용히 나와 문을 닫았다.

류 강연이 문을 닫고 나가고 창밖을 보던 무영이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노 상궁은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무영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어제 일을 알고 있었다.

무영은 태자비 후보자들이 입궁하기 전 자신을 뜬금없이 찾아와서 자신이 선택할 여자는 정해져 있으니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도우라는 부탁도 아닌 명령을 했었다.

“전하, 그것이 어인 말씀이신지……. 태자비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건, 예ㅂ”

“예법에 어긋난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죠. 그녀가 아니면 태자비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첫날밤에 목이 떨어진 태자비의 시신을 치우고 싶지 않다면 제 말에 따라 주십시오.”

“후…….누구 입니까.”

“류 재상의 여식 류 화연입니다.”

“깨어 난지 얼마 안 되었다던 그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네”

“깨어 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던데,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재상께서는 이 일을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그 쪽에서는 제가 선택할 여자가 다른 사람이라고 알고 있을 겁니다.”

“어허…….이 일을 어떻게 매듭지으시려는 겁니까. 류 재상이면 딸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아시잖습니까. 나중에 이일을 안 다면 그 성정에 궁에 불이나 안 지르면 다행입니다.”

“그 애지중지하는 딸이 제가 좋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아가씨도 전하를 확실하게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말씀이시지요?”

“......”

노 상궁이 이마를 짚었다.

“맙소사…….”

무영이 어이없다는 기색이 가득한 노 상궁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 그렇게 만들려고…….”

“전하! 그게 그렇게 쉽게 된다면 이 세상에 외 사랑이란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하십니다. 그럼, 전하께서는 그 아가씨를 마음에 두신 건 확실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곁에 두고 싶습니다.”

노 상궁은 무영의 얼굴을 보는데 당혹스러운 마음과는 별개로 감개가 무량했다. 그 무엇을 봐도 무관심 하고 그 누구에게도 마음 주지 않던 태자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 사랑이란 것을 하나 보다 싶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를 줄 알았는데……. 꼭 말썽쟁이 아들이 어느새 자라 성혼한다며 짝을 데려온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내가 성혼을 해서 아들을 낳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껴 봤겠지…….

“전하, 아가씨와 상의는 하신 거지요?”

“......태자비 간택에 언제부터 후보의 의견을 물었습니까.”

“전하, 아가씨와 사랑을 나누시려는 것이 아닙니까? 거짓이 포함 된 관계는 정상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남녀관계에서는요. 지금이라도 말씀을 하세요. 그리고 설득을 하셔야 합니다.”

“어차피 태자비 간택 아닙니까. 먼저 양해를 구하고 설득을 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노 상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전하, 태자비를 얻으시려는 겝니까? 아니면 평생의 반려자를 얻으시려는 겝니까. 단순히 태자비를 얻으시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무영은 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무표정으로 보이는 그 얼굴이 노 상궁의 눈에는 복잡해 보였다.

말없이 서있던 무영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제가 누구 인지 모릅니다.”

“그게 어인 말씀이신지…….설마, 태자전하 라는 것을 모르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그 머리를 보고도요?”

“네”

“허…….참”

황족을 나타내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고도 태자인 것을 모르다니…….그 아가씨도 참 너무 한다 싶었다.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만…….”

“어휴…….”

말을 하고 싶어도 못했겠지. 류 가(家)에서 태자를 어떻게 말했을 것이 뻔 한데 거기다 대고 사실 내가 ‘그’ 태자라고는 말 못했을 것이다.

“삼간택 때 할 겁니다.”

“전하! 그 전에 말하셔야 합니다. 그 아가씨가 얼마나 놀랄지도 생각해보셔야지요.”

“나에게 연심을 품는 것이 먼저입니다.”

“왜요, 아가씨가 사실을 아시고 도망가기라도 할 것 같으십니까?”

“......”

“그러게 평소에 성정을 좀 다스리시지 그러셨습니까!”

“.....”

일견 무표정해 보이지만 그 속에 숨겨진 시무룩한 기운을 눈치 챈 노 상궁은 오늘 몇 번째인지도 모를 한숨을 내 쉬었다. 이 망나니가 진짜 사랑을 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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