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같은 시각 상궁처소
“어흐흐흐흑...아기씨...어르신...우리아기씨 좀 살려주세요...제발, 부탁드려요...흑흑흑흑...어떻게 해...”
“어르신...어떻게 되는 건가요? 화연님...흑흑...”
길 가다 다짜고짜 상궁처소로 끌려온 노 궁의(老弓醫)는 순탄했던 의궁 생활 50년 만에 처음으로 궁 안이 떠내려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목구멍까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했다.
“후-”
어떻게 해서 상궁처소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아가씨의 상태는 얼음장 같은 물에 푹 젖어있는 데다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있고 입술도 퍼런 것이 아무리 봐도 위중해보였다. 보자마자 치료를 시작하긴 했지만 내심 아까운 목숨 하나 잃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침을 찔러 놓고 전신을 마사(摩挲,몸을 주물러 혈맥의 순환을 도움)하니 어찌나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지 자신의 의술이 갑자기 일취월장 했나 싶어 놀라울 정도였다.
연못으로 떨어지면서 팔을 어디에 긁혔는지 길게 찢어진 것을 빼면, 갑자기 차가운 물에 들어가 전신의 혈맥이 놀라 혼절한 것일 뿐, 이 날씨에 얼음물에 빠져 죽을 뻔 한 것 치고는 회복이 빠른 편이었다.
그보다는 더 큰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이 아가씨와 같이 있던 두 명의 처자들이었다.
이 아가씨의 시비로 보이는 처녀와, 지체 있는 댁 아가씨로 보이는 처녀 둘이서 옆 바짝 붙어 울고불고 난리를 쳐 대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옆에서 이러면 정신 사나워서 침 못 놔! 라고 엄포를 놓으니 침놓을 때만 잠깐 조용해지더니 침을 놓고 나니까 다시 저렇게 난리를 쳤다.
잠시 기절하신 것뿐이라고, 조금만 있으면 일어나실 거라고 했더니 진짜 조금 기다려 보고 -일각(15분) 정도- 다시 울고불고 지랄들을 떠는데 아무리 달래보아도 들어 처먹지를 않았다. 치료는 반시진도 안 걸렸는데 벌써 한 시진 넘게 이 처자들 달래고 있는 중이었다. 노 궁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이 나이에는 특히 혈압 조심해야 돼.
“어흑흑흑흑...아기씨...일어나 보셔요...흑흑흑...우리 아기씨 잘못되는 거 아니죠? 어르신 그렇지요?”
“흑흑흑...어르신...화연님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정말이죠? 흑흑”
아...진짜...우는 처녀들한테 욕을 할 수도 없고,
노 궁의는 이제까지 총 예순 여덟 번쯤 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 해줬다.
“아가씨 몸에는 전~혀, 아~무 문제가 없네...팔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아물 것이고...”
“흑흑흑흑흑. 그럼 아기씨가 왜 정신을 못 차리시는 거예요. 흑흑흑...어디가 잘못되신 거 아니에요?”
“후......차가운 물에 갑자기 들어간 데다 그 속에서 기력을 너무 소진하여 기절한 것 일뿐! 니네 아기씨 멀쩡하다! 조금 있으면 일어난다고 몇 번을 말하냐! 그러니 그만 좀 울어 싸! 정신없어 죽겠어!”
노 궁의는 한숨을 싶게 내쉬고 이제까지 총 쉰다섯 번쯤 했던 말을 되풀이 해주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엎어져 울던 기해가 노 궁의의 고함소리에 눈을 크게 뜨더니 노 궁의의 발목을 부여잡고 서럽게 통곡을 했다.
“흑흑흑...어르신 왜 고함은 지르고 그러세요...저희에게 뭔가 말씀 못하시는 게 있으신 거죠? 아흐흐흑...아기씨 어디가 잘못되신 거죠? 그렇죠? 흑흑흑흑흑...저희 아기씨 좀 살려주세요. 어르신...”
예진까지 울면서 노 궁의의 소매를 잡고 흔들었다.
“말씀 못하신 게 뭔데요...흑흑흑...화연님이 어디가 크게 다치신 게 맞죠? 어흑흑. 안 돼...”
말 못한 게 있긴 하지. 욕...
궁의생활 50년 만에 이런 식으로 위기가 닥쳐올 줄이야.
노 궁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발목을 잡은 기해의 손과 소매를 잡은 예진의 손을 각각 때어낸 뒤 앉은뱅이 탁자위에 있던 지필묵을 가져와 글을 적었다. 그리고 문 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 문지방에 서서 그 종이를 엎어져 울고 있는 시비 쪽으로 집어 던졌다.
“혹시라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글을 보시게. 나는 의궁으로 속히 가봐야 해서. 이만”
그리고 옷깃이라도 잡힐까 무서워, 관복이 휘날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휘감아 잡고 잽싸게 상궁처소를 빠져 나갔다
“아!! 안돼요!! 어르신! 어르신! 흑흑흑...저희 아기씨는 어쩌라고요...흑흑흑”
“흑, 기해야...그건 뭔데? 훌쩍”
종이를 움켜쥔 채 울던 기해가 콧물을 훌쩍이면서 잔뜩 구겨진 종이를 조심스럽게 폈다.
一. 살려 주세요. -> 이미 살아 있음
二. 잘못된 곳 있나요. -> 없음
三. 말 안한 거 있나요. -> 있지만 아가씨 상태와는 전혀 상관없음
四. 일어나지 않아요. -> 기절했을 뿐
五. 괜찮으신 건가요. -> 아주 말짱함
六. 그런데 왜 안 깨어나세요. -> 四항 참고
七. 이제 어떻게 하나요. -> 一항, 五항 참고
八.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 二항, 五항 참고
노 궁의의 말대로 기절한 화연이 얼마 되지 않아 깨어나 연릉각으로 돌아 올 때쯤에는 태자비 후보들 중 한명이 연못에 빠졌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궁 안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소문은 나지 않았다. 연릉각 후원 바로 옆 상궁처소로 옮겨져 목격자도 없었을 뿐더러 사안이 사안인지라 쉬쉬하는 것 같았다.
화연은 소문이 다 퍼졌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한명의 입만 단속하면 됐다.
“기해야, 알았지? 내말 꼭 명심해야해? 절대 아버지나 오라버니들 중 그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돼”
“......”
화연의 목소리는 물에 빠져 잔뜩 들이켰던 얼음물 때문인지 듣기 힘들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화가 더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서 있는 말 없는 말 죄다 일러바치고 싶은 마음 굴뚝같던 기해가 입을 삐죽이 내밀었다.
“기해야!”
“......아, 왜요! 그 년들 모두 다 가만히 안둘 거예요! 아기씨 돌아가실 뻔 했다 구요! 제가 얼마나 기함했는지 아세요?”
다시 눈물을 글썽거리는 기해의 손을 잡으면서 화연이 달래주었다.
“알아. 너 얼마나 놀랬을까 생각하면 나도 마음이 안 좋아. 하지만 이 일이 아버지나 오라버니 귀에 들어가면 나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할 거야. 아직 초간택도 안 치렀는데 이런 일 때문에 중도 탈락 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재상의 딸인데. 응? 기해야, 내 맘 이해하지?”
“...이해 못해요...”
앵 돌아져 입을 한자나 내밀고 있는 기해가 지금은 그렇게 말은 해도 아버지나 오라버니에게 이 일에 대해 말을 안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기해야”
“칫...웃기까지 하고 속도 참 좋으시네요. 누구는 속에서 천불이 나 죽겠구만...팔에다 고약 발라 놨으니 오늘은 속곳만 입고 주무세요. 붕대로 감아 놓으면 상처에 안 좋데요. 많이 추우셔요?”
“아니, 추울 것 같았는데 하나도 안 추워. 속에서부터 열도 나는 것 같아. 아까 그 궁의어르신께서 용하신 분 이셨나봐.”
“용하기는 무신...그거 좀 물어봤다고 내빼기나 하고. 흥!!... 이거 쭉 들이키세요. 잠을 오게 하는 약제가 들어있어서 졸릴 거래요... 큰일 당한 거라서 아직은 모르지만 잠을 못자거나 악몽에 시달릴 수 있어서 넣었다던데 마시고 푹 주무세요.”
“응. 알았어. 기해야. 내말 꼭 명심해야한다.”
“으이구! 알겠어요. 그만 말씀하시고 누우세요. 목소리가 더 안 좋아 지셨어요. 알겠다니까요. 명심할게요! 아유, 속 터져...당과 드려요?”
가슴을 두들기면서 화연이 탕약을 쭉 들이키는 것을 보던 기해가 당과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부시럭 거렸다.
“아니. 별로 안 쓴데? 너도 놀랐을 테니 어서 가서 자. 그리고 이제는 다른 시비들이 건들이지 않을 거야. 아, 친구도 없어지려나?”
“그런 엉뚱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저는 친구 다 필요 없고요 아기씨만 잘 계시면 돼요. 친구는 무슨 놈에 친구! 아무나 건드리기만 해봐, 아주. 머리털을 죄다 뽑아 놓을 테니......아기씨 졸리세요? 억지로 눈뜨려고 하지 마시고 푹 주무세요. 저는 잠드시는 것 보고 나갈게요.”
“응...”
깜짝 놀랐던 몸 상태에 약까지 들어가니 잠을 이길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처럼 기해가 가슴을 토닥거려 주는 것을 느끼며 화연은 잠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기해는 잠이 든 화연의 모습을 보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겨주고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준 뒤, 혹시나 해서 침상 옆에 있는 호롱불은 켜두고 야명주만 덮개로 가려두고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창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리다 멈췄다. 그리고 창이 조용히 열리면서 검은 신형이 방안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검은 신형, 무영은 어스름한 방안을 둘러보다가 침상에 누워있는 화연을 보고 다가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풀냄새가 나서 향이라도 피웠나 했는데 가까이 가면 갈수록 냄새가 이상했다. 약초냄새 같긴 같은데 어찌된 일인지 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 냄새를 어디서 많이 맡아봤는데...어디였지?
침상으로 가까이 다가간 무영은 화연을 내려다보았다.
파르라니 창백한 얼굴은 지쳐 보였고, 입술의 혈색도 옅었다.
이불 바깥으로 내밀고 있는 오른쪽 팔위에는 묵처럼 생긴 퍼런 고약이 길게 덮여있었는데 냄새는 거기에서 풍기고 있었다.
기억이 났다.
이 냄새는 전장에서 부상병들을 돌봐주던 막사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다. 훨씬 흐리긴 하지만 거의 동일했다.
“...이게... 뭐야.”
무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이 가늘어 지면서 칼날 같은 기운이 줄줄 흘러나왔다. 방안은 삽시간에 살기로 가득 찼다.
“으응......”
화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뒤척거리자 휘몰아치던 살기가 일순간에 흔적 없이 사라졌다.
무영은 침상 옆에 놓여있던 의자 위에 소리 없이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찌푸려져 있는 미간이 마음에 걸려, 엄지로 슬슬 문지르니 미간이 곱게 펴졌다.
무영의 살기 때문이었는지 손길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잠에서 깨어나려는 사람처럼 화연의 속눈썹이 마구 떨렸다. 감겨있는 눈꺼풀 안으로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더니 이내 화연이 눈을 살짝 떴다.
무영은 가까이서 그 눈을 바라보았다.
잠이 잔뜩 묻어있던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 화연이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입을 작게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아 무영이 귀를 화연의 입가로 가져다 댔다.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목에 사포질이라도 한 것 마냥 잔뜩 갈라져 있었다.
“...이름... 뭐...예요?”
“...무영”
“응......무영.....무영.....무영......”
그녀는 잊지 않으려는 듯 이름을 몇 번을 되 뇌이다가 힘없이 웃더니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무영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짓누르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막혔다. 누군가 자신의 심장을 꽉 움켜쥐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오장육부가 그악스럽게 움츠러들면서 통증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저절로 이가 악물렸다.
긴 숨을 내쉬며 눈을 뜬 무영은 화연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미열이 느껴졌다. 손을 내려 팔에 발라져 있는 고약을 살짝 걷어내니 찢어져 부풀어 올라 붉은 속살을 내보이는 상처가 드러났다.
그 상처를 자세하게 보다가 고약을 조심스럽게 다시 덮어주고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무영은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미동하지 않고 화연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벽이 끝나갈 무렵 어의 박 준명은 자다가 봉변을 당했다.
한참 단잠에 빠져 있는데 카울을 뒤집어 쓴 거대한 괴한이 침소의 문을 때려 부수면서 들어와 난데없이 미래의 황후가 지금 다 죽어 가게 생겼는데 너는 어의가 돼서 잠이 오냐며 발로 자신의 두툼한 배를 마구 밟는 것이 아닌가! 너는 도대체 누구 길래 이런 막돼먹은 짓을 하냐고, 넌 애비애미도 없냐며 손가락질을 하면서 집이 떠나가라 쌍욕을 퍼붓고 있는데 남자가 자신의 배에 발을 올려둔 채 모둘을 뒤로 넘겼다. 밝아 오는 아침 해에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과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 본 박 준명은 조용히 입을 닫고 찌를 듯이 쭉 뻗고 있던 손가락을 얌전히 접었다.
그리고 내궁 입구를 지키던 금위는 아침이 되자마자 봉두난발을 하고 허둥지둥 입궁하는 어의 박 준명을 보고 밤새 폐하께서 어디 다치시기라도 한 건가? 하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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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코멘 달다가 신공발휘했던 분들!!얼릉 마저 다시오!!!!~궁금해 죽는줄 알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