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2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류 충은 팔목이 끊어져라 서류에 도장을 찍다가 담하가 없는 틈을 타서 이면지에다 화연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붓을 세심하게 움직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소리가 들렸다. 담하가 돌아왔다 싶어 서둘러 종이를 숨기고 신중한 얼굴로 서류를 읽는 척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화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응?”
류 충은 의자가 뒤로 나뒹굴 정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집무실로 들어오는 화연을 부둥켜안고 얼굴을 어루만졌다. 꿈에서나 나오던 내 딸 화연이 맞았다.
“아니, 이게 누구야!!! 연이 아니냐?! 연아!! 내 새끼! 어디보자 내 딸…….애비가 우리 연이 보고 싶어서 밥 한술도 못 뜨고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다.”
류 충의 얼굴은 희끗희끗한 수염도 정리되지 않은 채 덥수룩하게 나 있었고 피곤했던 모양인지 눈 밑도 거뭇한 것이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고단해 보였다. 화연은 류 충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미간을 모았다.
“왜 이렇게 수척해지셨어요. 속상하게…….일이 많아서 식사도 잘 못하신 거예요? 잠은요? 잘 주무시는 거예요?”
“어이구, 내 딸…….누구 딸인지 착하기도 하지. 애비는 걱정 말거라. 그렇게 보고 싶던 우리 연이 이렇게 봤으니 이제 힘내서 밥도 먹고 일도 해야지.”
한 300년 만에 상봉한 듯 호들갑을 떠는 류 충과 아버지의 얼굴을 부여잡고 어루만지는 화연이 부녀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은 무슨…….”
담하였다.
류 충은 화연의 얼굴이 안보이도록 부랴부랴 가슴에 감싸 안아 숨기고 그를 노려봤다.
“…….너 아직도 안 나갔냐?”
담하는 류 충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화연의 뒤통수에 눈을 고정시키고 태연하게 말했다.
“결재는 다 하셨습니까?”
“…….연이 가면 할 거야”
“기다리겠습니다.”
“내 딸 가면 하겠다고!”
“그러세요.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류 충이 담하가 뚫어지게 보고 있는 화연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감싸 숨기며 핏대를 세웠다.
“그러니까 나가있다가 그때 들어오라고 굳이 말을 해 줘야 알아듣겠어? 옛날에는 빠릿 빠릿 잘만 알아듣더니 요즘에는 왜 그래?”
화연의 뒤통수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담하 눈길은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의 눈에서 광채가 흘러나왔다.
“재상어르신. 아까 전, 재상어르신께서 그리시던 초상화 말입니다.”
…….그건 또 언제 봤담. 그 짧은 시간에 자신이 농땡이를 치면서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이 초상화란 것까지 알아채다니 저 귀신같은 놈.
“......잠시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그렸을 뿐, 절대 놀려고 그렸던 것은 아닐세. 오해하지 말게, 비서실장”
“오해한 적 없습니다. 마음껏 그리시다가 뒤로 돌려보시면 장문의 글이 나올 겁니다.”
“글? 무슨 글?”
“사직서입니다.”
“......전(前) 비서실장 거?”
“현(現) 비서실장 거”
“......”
“전 여기서 조용히 있을 테니 말씀들 나누시지요.”
류 충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개처럼 일만하는 행궁의 동지로써 이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 찰거머리를 때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우리 밥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 갈 거야. 오늘 콩밥이라던데? 너 콩만 보면 구역질 나온다며.”
예쁜 여자를 향한 담하의 광기는 식성까지 이겨냈다.
“콩 사랑합니다. 같이 내려가실까요?”
류 충은 담하를 한껏 노려보다가 이러면서 시간을 다 보내도 나는 상관없다는 담하의 표정을 보고, 하는 수 없이 화연의 손을 꼭 잡고 식당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희 번득한 눈으로 사방을 경계, 주시 하면서 식사도 잘 못 하시는 아버지와, 자신만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밥을 입에 넣고는 콩만 골라 뱉어버리는 담하라는 남자 사이에서 화연은 도저히 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적응 할 만하면 아버지가 주변을 향해 발작적으로 “고개 쳐 안돌려?! 모가지 잘라버린다!!” 라며 고함을 지르셨고,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은 그대로 두고 손만 움직여 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집어넣고는 오물오물 거리다 콩을 “퉤-”하고 뱉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콩이 자신의 밥그릇 바로 앞까지 포물선을 그리며 튕겨 나오는 것을 보고 화연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었다.
다 먹었으면 얼른 돌아가라는 아버지와, 차라도 느긋하게 한잔 하시다가 늦으면 자고 가셔도 된다는 정신 나간 말을 하는 담하 사이에서 화연은 인사를 하고 전각으로 돌아왔다.
기해는 정말 저 남자가 맘에 든 걸까...좀 이상한 사람 같은데...
착잡한 표정으로 전각을 들어서는데 1층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예진이 화연에게 급히 다가왔다.
“화연님! 아휴...늦으실 줄 알고 마음 졸였었는데 다행이네요.”
“무슨 일이신데요? 벌써 교육 시작했나요?”
예진이 다짜고짜 화연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후원으로 가보셔요. 기해가 거기 있어요.”
“네? 무슨…….”
“시비숙소에서 도난당했던 물건이 기해의 짐에서 나왔데요. 저도 지나가면서 들은 거라 잘 몰라요. 일단 빨리 가셔야 해요.”
화연은 얼굴을 굳히고 예진과 함께 후원으로 달려갔다.
후원 연못 옆에 기류 미란과 공 혜민, 남궁 진류가 서 있었고 그들 뒤에 시비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모여 있었다. 기해는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기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화연은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기해, 일어서”
기해가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그때까지 무표정을 힘들게 유지하던 얼굴이 화연을 보더니 삽시간에 일그러지면서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아기씨…….”
예진이 기해에게 다가가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는데 기류 미란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참, 그 주인에 그 종이라더니...이래서 위를 보면 아래를 알 수 있다는 소리가 있나 봅니다. 쯧쯧쯧”
“훗-그렇지요. 위가 맑아야 아래도 맑다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진류님?”
공 혜민의 말에 남궁 진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저는 아랫것들에게 엄하게 대하지요. 그래야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호호호~”
그들 셋이 북 치고 장구 치면서 하는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화연은 기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뺨이라도 한 대 맞았는지 한 쪽 뺨이 붉게 부풀어 있었다.
화연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더러워진 치마를 털어주었다. 뺨에 살며시 손등을 갖다 대보니 열감이 느껴지는 게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많이 아파? 참을 수 있겠어? 아니면 지금 의궁에 라도 갈까?”
“아기씨…….”
화연이 기해의 뺨을 조심스럽게 만지면서 묻는데 기류 미란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허! 참! 가관입니다. 아랫것을 그따위로.”
화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닥치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걸 겨우 눌러 참았다.
“그 입 다무십시오.”
“뭐요?!”
화연은 몸을 돌려 기해 앞을 막고 섰다. 기류 미란을 마주보는 화연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화연의 말에 기류 미란이 당황해 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공 혜민이 발끈하면서 대신 소리를 질렀다.
“이보세요! 지금!”
“입 다물라고 했습니다.”
“하! 내가 왜,”
“누굽니까?”
화연은 기류 미란과 공 혜민의 말을 끊고 그녀들을 한명한명 노려보았다.
“누가 이 아이의 뺨을 때렸습니까.”
그들은 당황스러워 하다 앞 다투어 말을 꺼냈다.
“지금, 시비 뺨 한 대 때린 거 가지고 이러시는 겁니까?”
“상황을 알아보실 생각은 없는 겝니까? 이래서 못 배운 것들은…….”
“참…….어처구니없다는 것은 이런 때를 두고 말하는 거였군요. 네. 제가 때렸습니다. 때릴 만해서 때렸습니다. 제가 한 일은 생각도 안하고 바락바락 대들어서 교육 좀 시켜 줬습니다.”
화연은 자신이 때렸다고 말하는 기류 미란을 쳐다보았다.
“제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기를 원하시나요?”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시비가 무슨 잘못을 해서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알아보셔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일 텐데 어찌 그리 경우 없는 행동을 하십니까? 깨어 나 신지 얼마 안 되어 경우가 뭔지 모르시나 본데요, 그럼 옆에 계신 예진님 에게라도 물어보셨어야지요. 참으로 딱하십니다.”
화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기해를 돌아보았다. 기해는 아직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뚝 그쳐. 니가 뭘 잘못했다고 울어? 울지 마. 너 잘못 한 거 없잖아.”
“그래. 기해야 그만 울어. 응?”
옆에서 기해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예진도 기해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주었다.
기해가 눈물을 닦고 화연의 손을 다급하게 부여잡았다.
“아기씨, 아기씨! 저 잘못한 거 없어요. 저 사람들이 잃어버렸다는 물건이 어째서 제 짐에서 나왔는지는 몰라도 저 절대로 그런 짓 안했어요. 정말이에요. 아기씨…….”
“그만. 더 말할 필요 없어. 니가 안 했다는 거 알아. 다른 무슨 일이 벌어졌어도 너는 절대 그 일을 안했다는 거 내가 잘 아니까, 날 설득할 필요 없어. 눈물이나 닦아. 무릎은 안 아파?”
화연이 자신을 의심할까봐 마음을 졸였던 기해는 무슨 일이 있었던지 자신을 믿어주겠다는 화연의 말에 그제 서야 얼굴을 펴고 안심 할 수 있었다. 기해는 눈물을 마저 닦으면서 활짝 웃었다.
“괜찮아요. 아기씨만 믿어주신다면 무릎 좀 꿇는 건 별거 아니에요.”
이 모습을 보던 기류 미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시비라고 편드시는 겁니까? 정말 자질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시군요! 아랫것이 잘못을 했으면 혼쭐을 내야지 무조건 감싸기만 한다고 되시겠습니까. 이제 보니 혹시 화연님도 알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시키신 게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 말에 기해가 맞서 소리를 질렀다. 화연만 자신을 믿어준다면 더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기씨가 시키긴 뭘 시켰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말씀을 하다니 아가씨 제정신이세요?”
공 혜민이 혀를 차며 기해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저, 저, 저 방자한 행동 좀 보세요. 상전이 제 편을 든다고 기고만장해서 말하는 본세하고는…….어쩌면 저리 천하단 말입니까.”
“윗물이 어디 가겠습니까. 보기가 다 민망하군요. 쯧쯧쯧”
그들의 말에 기해가 얼굴이 벌게져 씩씩거리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화연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묻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