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아기씨! 웬일이래요? 이 시간 까지 늦잠을 다 주무시고? 얼른 일어나셔요. 아침식사 후에 바로 교육 진행 한데요.”
“어…….알겠어…….기해야, 나 물 좀”
“여기요. 아기씨, 어제 잠 못 주무셨어요? 눈도 조금 부은 것 같기도 하고…….어? 입술도 조금 부은 것 같은데요?”
어제 밤 내내, 입술에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던 그 감각이 참을 수 없어 쥐어뜯었더니 부었나 보다. 화연의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아기씨……. 열나시나 봐요. 얼굴도 빨갛고 혹시 고뿔드신 거 아니에요?”
“어? 아, 아냐. 괜찮아. 나 씻어야겠다. 물 좀.”
“힘드시면 교육 빠지신다고 제가 말씀드리고 올까요? 뭐 좋은 교육이라고 몸까지 힘드신데 꾸역꾸역 받겠어요. 굳이 안 받으셔도 되니까 그냥 누워계셔요.”
“아냐, 정말 괜찮아. 어제 밤에 창을 좀 열고 잤더니 그런가봐. 소세 하게 물 좀 가져다줄래?”
화연의 이마를 짚어보던 기해는 열은 없는 것 같지만 화연의 몸이 워낙 약한지라 물을 대령하는데도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어휴…….드리긴 드리는 데요, 혹시 조금이라도 이상 있으신 것 같으면 바로 저 부르셔야 해요? 아셨지요?”
“응”
단장을 하고 아침식사를 할 때까지도 화연은 정신이 멍했다.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같이 식사를 하던 예진까지도 무슨 일 있냐며, 어디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할 정도였다.
교육관에 들어서서도 자신의 자리를 못 찾고 헤매다 예진의 인도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앉아서도 멍하니 있는 그녀를 예진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면서 말을 걸려는데 교육담당 노 상궁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잔털 하나 없는 반백의 머리를 틀어 올리고 발소리조차 없이 미끄러지듯 들어온 노 상궁은 교육관에 앉아있는 처녀들을 한명씩 날카롭게 쳐다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내정소속 훈육 상궁입니다. 아기님들의 문예 교육을 맡고 있지요. 과거, 태자전하의 역사교육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잘만 따라오신다면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사료되오니 모쪼록 정성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 상궁마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처녀들을 흐뭇하게 보던 노 상궁은 처녀들이 고개를 들자마자 얼굴을 차갑게 바꾸었다.
“여기 모이신 아기님들은 사가(私家)에서 문예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은 다 받고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해서 기초적인 것은 넘어가도록 하고 중급의 문예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상궁의 말이 끝나자마자 공 혜민이 손을 들었다.
“아기님, 질문 있으십니까?”
“예, 마마님. 저희들 중에 기초도 배우지 못한 아기님이 한분 계십니다. 그 분은 따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수준 차이가 너무 커 교육을 따라오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공 혜민이 앉아있는 곳에서 부터 작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보던 노 상궁은 한숨을 작게 쉬었다.
“그 분이 어느 아기님이십니까?”
“......”
자신의 얘기가 나오는 줄도 모르고 정신을 딴 데 놓고 있는 화연을 보고 옆에 앉아있던 예진이 붓 머리로 화연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넋을 놓고 있던 화연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드는데 그 쪽을 주시하던 노 상궁과 눈이 마주쳤다.
“아기님이십니까?”
“에?”
“사가에서 문예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못 받으신 분이 아기님이시냐 물었습니다.”
“아…….네, 맞습니다.”
노 상궁은 그녀를 자세히 보았다. 검푸른 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누군지 알만했다. 이 분이였군.
“류 가(家)의 아기님이시군요.”
“네. 그러하옵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신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교육받을 시간이 없으셨겠지요. 그럼…….혹시, 환제국실록은 읽어 보셨습니까?”
“아니요.”
“음…….건국론은요?”
“…….아직…….”
“소학(小學)은 읽어 보셨겠지요?”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소학이라면 어린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기 전 글자를 익히기 위해 읽는 책이었다.
“네…….그런데, 기억이 잘…….”
화연의 얼굴이 불게 타오르고 그 얼굴을 노 상궁이 딱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12년간을 혼수상태로 계셨으니 기억이 잘 안날 수밖에요. 하지만, 아기님 한 분 때문에 소학부터 시작 할 수는 없는지라 원래 계획대로 하겠습니다. 제가 하려는 교육은 그런 것이 크게 필요 없기도 합니다. 하오니 아기님께서도 따라오시기 그리 힘드시지는 않을 것 입니다. 혹시 잘 모르 시겠으면 주변 아기님께 물어보거나 교육이 끝난 뒤 저에게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아시겠습니까?”
“에. 알겠사옵니다.”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화연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노 상궁이 얼굴을 다시 차갑게 굳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노 상궁이 하고 있는 교육의 내용은 시조와 서예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거 시조를 사용해 나라 안에서 벌어지던 파벌간의 다툼을 막고, 남녀 간의 사랑을 전하며, 애국의 기상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를 설명하였다.
“그럼 시조를 한번 적어보시되, 아기님들께서는 태자비가 되실 몸 이시오니 연정이나 그리움, 남녀 간의 애틋함에 관한 주제로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화연은 노 상궁이 사례를 말해줄때까지만 해도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랑에 관한 시조를 적어보라니…….갑자기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겨우 가라앉혀 놓은 열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느껴졌다.
시조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손부채질로 얼굴의 열기를 바쁘게 가라앉히고 있는데, 예진이 옆자리에서 소근 거렸다.
“화연님! 뭐하세요…….잘 모르 시겠으면 적는 시늉이라도 하세요...”
“아…….알겠어요.”
이 하얀 종이에다 무엇을 적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붓을 들었는데 갑자기 번개처럼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화연은 종이위에 붓을 올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음을 먹고는 신중하게 써내려갔다.
노 상궁은 화연의 모습을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설명은 흥미로워 하며 잘 따라 오고 있었는데 시조를 직접 쓰라고 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이내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는 하는 것 같았다. 노력은 하시는 아기님이시군…….그래야지. 노 상궁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자, 다 쓰셨으면 붓을 내려놓으십시오. 적으신 시조는 제가 걷어가겠습니다.”
노 상궁의 말에 화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차! 실수했다. 자신이 지금 적은 것은 자신이 지은것이 아니라, 유일하게 외우고 있던 시였다.
어떻게 하나…….이제라도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까, 아니면 못썼다고 말할까 고민하고 있는 참에 기류 미란과 공 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쓰긴 쓴 모양입니다. 글자나 다 알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그래도 글자는 깨우친 모양이지요? 호호호호”
“그러게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림이나 그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조가 뭔지나 아시겠습니까? 소.학. 도 기억 안 나신다는 분인데요. 호호호”
들으라는 듯 커다란 그들의 목소리에 화연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하는데 궁녀가 다가왔다.
“아기님, 적으신 시조를 주시겠습니까?”
화연이 종이를 선뜻 주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예진이 종이를 덥석 잡더니 궁녀에게 건네주었다.
“어!......”
“왜 그러세요. 화연님?”
화연은 예진의 뭐가 잘못 됐나는 천진난만한 얼굴에 대고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노 상궁은 궁녀가 걷어온 시조를 하나씩 살펴보다가 교육이 끝났음을 알린 뒤 교육관을 나갔다.
노 상궁이 화연이 적은 것을 보고 한마디 할 줄 알고 잔뜩 기대했던 기류 미란과 그 일행들은 김이 팍 센 얼굴을 하다 화연을 노려보면서 다가왔다.
“어디서 시조는 운 좋게 배워가지고 왔나 본데…….다른 교육도 그렇게 넘어 갈수 있을까요? 금방 바닥을 드러내기만을 기대하겠습니다. 화연님”
화연은 아직까지 양심을 콕콕 찌르던 일말의 가책까지 흔적 없이 싹 사라지게 만드는 그녀의 말을 듣고 자신도 뭐라고 대꾸해주고 싶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저…….그런데, 성함이?”
“.....”
뒤에 있던 예진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기류 미란의 얼굴이 귀신처럼 일그러지더니 홱 돌아 교육관을 나가버렸다. 그 뒤를 공 혜민과 남궁 진류가 무수리처럼 따라 나갔다.
‘진짜 무수리 같구나…….근데 저 분들은 뉘 집 자식들이지?’
이제야 저들이 누구인지 궁금해진 화연이 갸웃거리다 알게 뭐냐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자신에게는 이보다 훨씬 중요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 남자…….
화연은 어제부터 계속 중얼거리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어떻게 하지…….”
“뭘 어떻게 해요? 화연님?”
웃다가 뒤집어져 이제야 정신을 차린 예진이 너무 웃어 삐져나온 눈물을 닦으며 화연에게 물었다.
“아, 아니에요…….”
“아까, 웃겨 죽는 줄 알았네요. 정말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친구하나는 아주 잘 사귄 것 같아요…….기분도 좋고, 날씨도 좋은데 우리 후원으로 산책 나갈까요?”
아…….모르겠다. 고민해서 뭐 하나, 당장 해결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화연은 코앞에 닥친 문제를 일단 외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럴까요? 그럼 기해 불러서 같이 가요.”
“그래요.”
화연과 예진은 후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
시조와 시는 분명히 다릅니다.
수정하기 전에는 화연이 시조는 아니지만 시 흉내 정도는 냈다는 말이 들어가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족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잘라버렸습니다. 시조와 시의 차이는 형식의 차이일 뿐 근본적으로는 한 줄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점 이해해 주세요~^^
화연이 적은 시
은밀히 감겨 간 생각의 실타래를
밖으로 풀어내긴 어쩐지 허전해서
날마다 봄 하늘에 시를 쓰는 민들레
앉은뱅이 몸으로는 갈 길이 멀어
하얗게 머리 풀고 얇은 씨를 날리면
춤추는 나비들도 길 비켜 가네
꽃씨만한 행복을 이마에 얹고
해에게 준 마음 후회 없어라
혼자서 생각하다 혼자서 별을 헤다
땅에서 하늘에서 다시 피는 민들레
- 이해인 < 민들레의 연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