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식사를 마치고 화연의 방에서 차까지 함께 마신 뒤, 기해는 1층 시비숙소로 내려가고 예진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내려갔다.
화연은 침상에 앉아 굳어있는 어깨를 주물렀다.
대전에서부터 뻐근했었던 어깨는 식당에서의 일로 완전히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다. 단 한 번도 누구에게 이렇게 면박을 주거나 적대적으로 대한 적이 없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장했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자신은 평생의 대부분을 누워만 있다가 이제 깨어나 애지중지 위해주는 사람들 사이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럴 일 자체가 없었다. 꿈속에서는 워낙 주위에 사람이 없어 드물긴 했지만 태형을 만나기 전까지 한두 번 정도 비슷한 일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남에게 안 좋은 말까지 하면서 지킬 것도 없었고 그렇다고 자신에게 큰 상처가 되는 것도 아니라서 싫은 소리 한번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에게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이 많았다. 그들을 생각하면 꿈에서처럼 그냥 당하고 있어서는 안 돼. 얼마나 갖고 싶었던 거였는데. 내 것을 지키려면 나부터 단단해 져야 돼.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 사람들하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크게 와 닿았다. 그 것은 화연에게 기분 좋은 안도감을 주었다. 그래, 여기가 현실이야.
톡
톡. 톡
톡. 톡. 톡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있는데 창에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점점 커졌다.
화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을 쳐다보았다. 창에 뭔가가 부딪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돌인가?
화연이 창가로 다가가 뭐지? 하고 어두운 창밖을 자세히 보는데 잠겨있지 않았었는지 창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까아...........”
화연은 심장이 떨어질 만큼 놀라 흠칫 뒷걸음질 치면서 비명을 지르려는데 검은 옷을 걸친 커다란 괴한이 한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아당기면서 동시에 다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쉿-”
괴한이 입을 막은 손 가까이 자신의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을 때어내려고 몸부림치던 화연이 괴한의 얼굴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남자였다.
화연의 눈은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화연이 자신을 알아본 것을 보고 무영은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손바닥이 화상 입은 것처럼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아 꼭 말아 쥐었다.
화연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누가 보지는 않았을까 살펴보다, 방 문 까지 열어 자신의 비명소리를 누가 듣지는 않았는지 주변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닫고 무영 앞에 섰다.
혹시 누구라도 들을까 싶어 두려워진 그녀는 발꿈치를 들어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창틀에 한쪽 무릎을 올려놓고 있는 무영의 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작게 속삭였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예요? 이 전각 주변을 금위가 지키고 서있는데.”
꼭 말아 쥔 주먹을 입에 갖다 대고 있던 무영은 화연이 가까이 다가와 귓가에 속삭이자 그녀의 숨결이 닿는 귀부터 시작해 전신의 솜털이 일어나면서 삽시간에 속이 뜨거워 져 당혹스러워졌다. 그는 그녀에게서 조금 더 멀어지도록 얼굴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왔어. 그건 걱정 마”
그가 멀어진 만큼 화연이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귓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모르게 왔다니...그게 지금 안심하라고 하는 말이에요? 당신 이러다 들키면 정말 큰일 나요! 외간남자를 만나는 것을 들킨다면 크게 경을 칠거예요. 어서 돌아가세요. 어서요!!”
그녀가 속삭일 때마다 귓속으로 그녀의 달달한 숨이 들어와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간질간질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무영은 그녀를 넘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어?! 어디를 들어오시는 거예요. 빨리 나가셔야 한다니까요?”
화연이 방안으로 들어온 무영의 팔을 다급하게 부여잡고 창가 쪽으로 있는 힘껏 끌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영은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그녀의 행동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방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왜 이렇게 좁아? 이방이 제일 좋은 방 이랬는데…….쯧”
화연은 나가지도 않고 엉뚱한 소리나 하는 남자를 어이없이 쳐다보다가 다시 팔을 끌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빨리 나가기나 하세요! 아, 빨리요!!”
화연은 불안해 죽겠는데 태연하게 방을 꼼꼼히 둘러보던 무영은 침상 옆 협탁 위에 놓여 있는 둥그스름한 비단주머니를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 바람에 팔을 잡고 있던 화연까지 질질 끌려갔다.
“저기요! 잠깐만요! 뭐하는…….”
주머니를 열어보지도 않고 무엇이 들었는지 단번에 깨달은 무영이 주머니를 들어 올리면서 묘한 표정으로 화연을 보았다.
“이거…….여기까지 가져왔어?”
화연은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잡고 있던 그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면서 딴 척을 하다가 살짝 그의 눈치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어…….그냥…….너무 예뻐서요…….밤에 보면 혼자서 빛이 나는 것이 참 신비로워 보이기도 하고…….”
무영은 자신의 소매를 잡고 자신의 눈치를 흘끗흘끗 보는 그 얼굴이 참 곱고 어여뻐 가만히 쳐다보았다.
“…….저…….손에 붕대는 다른 것으로 감으셔야지요.…….계속 같은 거로만 하고 다니시면 상처가 덧날 수도…….”
난처해진 화연은 다른 얘기를 꺼내며 주위를 돌려보려고 했지만 남자의 시선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보고만 있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리는 기분도 들고, 아까부터 얼굴도 빨개지는 것 같아 초초하기도 했다.
“그거 저 주신 거잖아요! 제 맘대로 가지고 다니는 게 뭐 어때서요. 앞으로도 제 맘대로 가지고 다닐 거예요”
화연이 붉어 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하다 좀 심했나 싶어 흘깃 그를 쳐다보니, 그녀를 가만히 보고만 있던 무영이 눈을 반달로 만들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고 눈동자 안에서 은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다.
무영이 이렇게 환하게 웃는 것을 처음 본 화연의 얼굴은 이제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무영은 그 발갛게 익은 귀를 보고 있자니 군침이 돌면서 허기가 지는 기분이 들었다.
“배고파.”
화연은 절로 숙여지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 남자는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챙겨줘야 밥을 먹는 거야!
“아무것도 못 드셨어요?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 끼니도 못 챙기셨어요! 식사 잘 하기로 약속 하셨잖아요. 정말 속상하게…….”
“속상해?”
“그럼요! 아이 참…….끼니 때울 만한 게 없는데…….”
방 안에 먹을 것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던 화연은 뒤이은 무영의 질문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네? 뭐가요?”
“왜 속상하냐고”
“에?...어…….그건…….음……. 저, 저기 당과라도 좀 드시겠어요?”
무영은 대답을 피하며 탁자위에 놓여있는 간식거리를 가리키다가 직접 가지러 가려는 화연의 손을 붙잡았다.
“왜 속상해?”
화연은 무영에게 잡힌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중요해. 그러니까 대답해 봐”
얼굴이 터질듯 붉어진 화연은 아랫입술을 즈려 물고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툭 건드리면 눈물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았다.
“......”
“어서”
“......몰라요! 저도 모른다고요!”
무영은 눈을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꿀통에 빠진 것처럼 몸 안이 온통 달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러다 어딘가가 터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잡고 있던 손을 끌어 당겼다.
무영의 입술이 화연의 물기어린 입술을 누르듯 덮었다.
방금 전 손바닥에 느껴지던 감각과는 차원이 틀렸다.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입술의 감각이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입술만 닿고 있는데도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전신의 근육이 바짝 당겨지는 느낌에 진저리가 쳐졌다.
놀란 화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 입술을 벌리고 우악스럽게 혀를 집어넣어 그녀의 타액을 마음껏 맛보고 싶은 충동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자신을 멈출 수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충동을 가라앉히느라 그녀의 볼을 조심스럽게 감싼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무영은 혀를 넣는 대신 입술을 꾹 누르면서 눈을 천천히 떴다. 얼어붙어있는 그녀가 보였다. 질끈 감고 있는 눈에 속눈썹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쏟아져 내린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화연의 얼굴을 감쌌다. 화연은 그에게 손을 잡힌 채 그대로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다른 손으로 그의 가슴을 짚었지만 달달 떨려 밀어 낼 수도 없었다. 고개를 세게 흔들거나 밀어버리면 쉽게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닿아있는 입술이 올가미가 되어 온몸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무영은 도저히 떨어지려 하지 않는 입술을 겨우 때고 화연과 시선을 맞추었다.
화연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달래는 것처럼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쓸어 주었다. 화연도 무영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황금색 눈동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가라앉아 있었고 그 위를 은빛 실이 촘촘히 박혀있었다. 헝클어져있던 머릿속이 백지로 변했다.
“왜…….왜…….”
“......”
넋이 나가 같은 말만 반복하는 화연의 볼을 말없이 어루만지던 무영은 젖어있는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훔친 뒤 뒤로 물러섰다.
“생각해봐. 내가 왜 그랬는지.”
조용하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를 내려 누르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또 거칠었다.
그녀를 가만히 보던 무영은 천천히 몸을 돌려 창으로 조용히 빠져나갔다.
“!”
그가 나가고 한참 뒤에야 화연은 크게 숨을 내뱉으면서 주저앉았다. 가슴이 미친 듯이 뛰더니 맥박에 맞춰 관자놀이 까지 욱신거렸다.
화연은 입술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아직도 그의 입술이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화연은 그 뒤로도 한참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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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어즈님 후원 감사합니다. *^^*
모두들 축하해주셔서 너무 행복하고 또 부끄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