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5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자주색 도료를 입힌 휘황찬란한 지붕을 웅장한 기상의 두터운 기둥이 받치고 있었다. 2층으로 된 전각 중앙에는 현란한 문양의 자룡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룡문 양 옆에는 황금색용이 연꽃과 소나무 사이에서 날아오르는 형상으로 세밀하게 양각되어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면서 사람을 압도 하는 기운을 풍겼다.
모여 있는 처녀들 앞에서 명 상궁이 엄격한 눈초리로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아기님들 다섯 분 씩 들어가시되 발소리를 내시면 안 됩니다. 또한 폐하 앞에서 배례(拜禮)를 올리신 뒤 자리에 앉으시되 고개를 드시면 아니 되십니다. 폐하께서 어명을 내리신 경우에만 고개를 드시되 눈을 마주쳐서는 아니 되시고요. 아시겠습니까.”
화연은 아버지의 말로만 들어 왔던 폐하와 드디어 대면할 수 있어 마음이 두근거렸다. 아버지의 친구를 뵙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고만 있었는데 그 앞에서 지켜야 할 예가 복잡했다.
‘미리 공부를 좀 하고 올걸......’
안 그래도 아버지께 이 문제에 관하여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큰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씀 하셨다.
“허! 예는 무슨 얼어 죽을 놈에 예. 만나면 그 면상에다 발차기를......,아니지. 그러다 우리 연이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가까이 가지도 말고 멀찍이 서서 말이나 전해다오. 류 재상이 이를 갈고 있다고”
아버지, 미워요…….
다른 처녀들은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을 왜 또 말 하냐는 표정인데 자신만 모르는 것 같아 혹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마음이 불안해 졌다. 그런 자신의 표정을 보았는지 예진이 작게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예를 크게 상관하지 않으시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굴을 펴세요.”
화연은 그런 예진이 고맙고 의지가 되는지라 웃으면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조금 불안했는데…….”
화연과 예진이 작게 소근 거리는 사이 앞에 선 처녀들부터 5명씩 무리지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들어가서 나오는 속도를 보아하니 특별한 대화 없이 인사만 하고 나오는 것 같았다.
차례가 되어 예진과 화연은 자룡문 안으로 들어섰다.
자룡문으로 들어서니 큰 회랑이 나오고 그 안으로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양쪽에 시립해 있던 내관이 처녀들의 입장을 크게 알렸다.
“들어 오거라.”
화연은 예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배례를 드린 뒤 상궁이 했던 말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자리에 착석하였다.
“얼굴을 들어 보거라.”
화연은 연제께서 누구를 향해 말씀 하시는 건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다시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보래도”
모두를 향해 명하시는 것 같아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연제의 족건(足巾)이 바로 앞에 보였다.
“네가 류 재상의 넷째 자녀이더냐?”
“예. 폐하”
“흠…….”
연제가 자신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느껴졌다.
“애비가 아니라 어미를 쏙 빼닮았구먼…….하여튼 거짓말은......”
“예?”
어머니를 알고 있는 것 같은 연제의 말에 고개를 들어 연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연제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깜짝 놀랄만한 장신의 미 중년 이였다. 수려하고 단정한 검미(劍眉, 또렷한 눈썹)에 부드러운 갈색의 안정(眼睛, 눈)은 깊고 진중했으며 코는 오뚝했다. 연한 빛의 구순(口脣, 입술)은 보기 좋은 모양을 하고 있었고, 면류관을 쓰고 있는 용안은 전체적으로 굵은 주름도 없이 탱탱했다.
화연은 속으로 감탄을 터트리다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 기분이 들어 연제의 얼굴을 자세하게 보려는데 한쪽에서 시립하고 있던 내관이 고개를 숙이라는 눈짓을 보냈다. 아, 맞다! 눈을 마주치면 안 되다고 했지.
화연은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하하. 차분한 성격도 어미를 빼 닮았구나. 네 아비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이유를 알겠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연제가 한참을 웃더니 옆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예진에게 물었다.
“너는 형부상서의 둘째딸이 맞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다고 그 과묵한 이가 그렇게 자랑을 하더구나.”
“제 아비가 과장 벽이 좀 있사옵니다. 폐하”
“하하하. 너 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네가 태자비로 간택되기를 원하는 이유가 장서각(환제국의 황실 도서관, 황족만 이용가능)을 이용하기 위해서라지?”
“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사옵니다. 폐하”
예진의 당돌한 대답에 연제가 화통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대전을 울렸다.
“하하 하하하. 될성부른 떡잎에는 물을 주어야겠지. 연릉각에 머무는 동안에는 마음껏 장서각을 이용 하도록 하여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하온데……. 제 친우인 류 화연과 같이 이용해도 되는지요.”
“응? 둘이 벌써 친구가 됐누? 그래, 어차피 아무도 드나들지도 않는데 둘이 사이좋게 이용하려무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연이는 짐에게 뭐 할 말이 없느냐?”
“……. 없사옵니다.”
“있을 텐데? 류 재상이 전하라고 하는 말이 없었단 말이냐? 그럴 사람이 아닌데?”
화연은 속으로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가 이를 갈고 있다고 전하란 말을 어떻게 그대로 고한단 말인가. 화연은 대신 연제와 언젠가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기로 했다.
“전하라는 말씀은 없사옵니다만…….허락하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고픈 것이 있사옵니다.”
“음? 그게 무엇이더냐?”
“제 아비가 요즘 들어 행궁에 업무가 많아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해 많이 수척해 지셨습니다. 그러니 식사를 하는 시간만이라도 업무를 보지 않을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연제는 화연을 물끄러미 내려 보다가 갑자기 크게 웃었다.
“그러니까 식사시간에 불러대지 말라는 말 아니냐. 아비라고 걱정은 엄청 하는구나. 하하하하하. 딸 자랑을 어찌나 하던지 내가 그동안 심기가 뒤틀려서 심술을 좀 부렸었다. 알았다. 네 청대로 식사시간에는 웬만하면 부르지 않으마. 이제 마음이 놓이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화연은 다른 것 보다 이것이 제일 기뻤다.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연제의 얼굴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화연과 예진은 대전에서 나와 연릉각으로 돌아가던 길에 앞까지 마중 나와 있던 기해를 만났다.
“아기씨! 대전 잘 다녀오신 거예요? 어…….이분은 누구세요?
화연이 활짝 웃으며 예진을 기해에게 소개시켰다.
“응. 강 예진님이셔. 우리 친구하기로 했어.”
“안녕하세요. 아가씨, 저는 우리 아기씨 태어날 때부터 모셨던 기해라고 해요. 저희 아기씨께서 처음으로 사귀신 귀한 친구 분 이시네요. 우리 아기씨 잘 부탁드려요.”
“그래. 나도 잘 부탁해. 너희 아기씨 걱정 말고”
“그럼, 우리 식사하러 가요. 아까 대전에서 너무 긴장했더니 배가 다 고프네…….기해야 가자.”
기해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화연을 곤란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예진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렸다.
“아, 아기씨…….저는 시비 식당에서 먹을게요.”
“시비식당이 따로 있어? 왜? 저기 저 사람도 시비들이랑 같이 식당으로 들어가는데?”
저 시비는 웃전과 같이 밥을 먹으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식사시중을 들러 가는 건데…….정말, 우리 아기씨는 어쩌면 좋아. 신경쓸까봐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고 기해는 속이 탔다.
“아! 혹시, 예진님 때문에 그래? 예진님 잘 모르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불편하세요? 기해는 제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불편해하시지 마세요.”
예진은 잔뜩 곤란해 하는 기해와, 전혀 엉뚱한 이유를 대면서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화연을 번갈아 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저는 전혀 불편하지 않으니 걱정 마세요. 화연님과 가족 같은 사이라면 제가 불편할 일이 없죠. 저는 괜찮아요. 기해라고 했지? 화연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우리, 식사 같이하자”
“어…….그건 좀…….다른 분들 눈도 있고요.”
기해는 혹시 자신으로 인해 아기씨께서 다른 사람 입에 안 좋게 오르 내릴까봐 조심스럽게 거절하려는데 화연이 팔을 잡아 흔들었다.
“너 답지 않게 다른 사람을 왜 신경 써? 낯 가리는 것도 아니면서…….빨리 들어가자. 나 배고파. 기해야. 아, 예진님도 시비와 같이 오셨으면 오라고 하세요. 같이 먹어요.”
기해는 웃으면서 말하는 저 입을 꼭 꼬집어 주고 싶었다. 제가 설마 낯을 가리겠어요? 아기씨 때문이지…….
“진즉 먹고 숙소로 들어갔을 걸요? 오는 도중 내내 마차 안에서만 있었더니 허리 아프다고 엄살이 아주 심하네요. 지금 부르면 더 싫어 할 거예요. 우리 끼리 들어가죠.”
머뭇거리는 기해의 다른 팔을 예진이 웃으면서 잡아끌었다.
그들 셋이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식당 안이 조용해 졌다.
예진과 화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적당한 자리를 찾더니 태연하게 가서 앉았다. 기해만 얼굴이 따가워지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약간 숙이고 뒤를 따라 갔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면서 눈치를 살피던 기해가 시간이 좀 지나자 그 구성진 입담이 풀어지기 시작하는데 화연과 예진은 배를 잡고 웃느라고 밥을 못 먹을 지경 이였다.
“제가 가만히 있었겠어요? 그 라훈 이란 노…….녀석을 딱 잡고 여럿 시비들 앞에서 바지를 홀라당 벗겨버렸지 뭐예요.”
“풋!”
“아하하하하”
“그런데 잘못 벗겨서 그만 속곳까지 같이 내려갔던 거예요. 그 날 애들이 흉한 것을 봤다며 눈이 썩는다고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었잖아요. 그 다음부터 얼마동안은 그 노…….녀석은 바지를 두 개씩 입고 다녔어요. 그 무더운 여름에 말이죠. 땀띠로 고생 꽤나 했을 거예요. 훗- 저 이런 여자예요. 복수는 최대한 잔인하고 뜨겁게…….제 좌우명이죠.”
“어머나! 기해야…….”
“세상에나…….하하 하하하…….너무 웃기다…….”
화연은 어이 없어하고 예진은 배를 잡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예진의 웃는 모습을 의기양양해하며 바라보던 기해의 얼굴에 갑자기 수심이 가득해 졌다.
“그런데 말이지요…….글쎄 그 녀석이 그 뒤로 저만 보면 책임을 지라는 둥, 자기는 이제 장가는 다갔다는 둥, 얼마나 수작을 부려대는지…….그러니까 주변에서도 자꾸 걔랑 저랑 엮으려고 하고요. 아니, 8년도 더 된 일인데 그 정도면 웬만한 일은 대부분 공소시효(公訴時效)가 만료되지 않나요? 제가 살인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예요. 형부상서 어르신의 둘째자녀 강 예진 아가씨.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그 노ㅁ…….녀석을 책임 져야 하나요?”
“아, 너무 웃었더니 배가 다 아프네……. 글쎄, 그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걸?”
“어떤 사람이라뇨? 속 알머리가 밴댕이만 한가, 아닌가…….뭐, 이런 기준인가요?”
눈물을 닦던 예진이 검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지, 그 사람이 잘 생겼고, 몸도 좋고, 돈도 잘 벌면 책임을 지지 말라고 하더라도 공소시효 안 지났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우기면 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뭐, 공소시효 예전에 지난 거겠지. 안 그래?”
“어머나, 형부상서 어르신 자녀분답게 정말 명쾌하신 판결이세요. 아기씨 처음 사귄 친구신데 아주 기똥차신 분으로 사귀셨네요. 우리 아기씨는 어쩜 이렇게 보는 눈도 높으신지…….”
“기해야…….너도 참…….”
“너 정말 재미있다. 화연님이 더 부러워지는 걸? 그리고 처음사귄 친구는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어머, 참…….예진 아가씨도…….맞아요? 아기씨?”
몸을 배배꼬면서 화연을 힐끔 쳐다보는 기해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니 화연은 정말 기해가 내 친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따뜻해 졌다.
“그래. 예진님 말씀대로 기해 네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야. 내가 그걸 이제 서야 얘기해 주는구나.”
“옴마! 나 못살아…….”
기해가 제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뒤트는데, 손으로 다 가려지지 않은 얼굴과 귀까지 빨갛게 변한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화연과 예진이 기분 좋게 웃고 있는데 어디서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참…….류 가(家)에서는 아랫것들하고 겸상도 한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를 말로만 들었었는데 직접 보니 참 가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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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류 미란, 나빼고모두천한것 스킬 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