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4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마차에서 내린 화연과 기해는 궁녀의 안내에 따라 화려한 4층 높이의 전각 앞에 멈춰 섰다.
“이곳이 바로 연릉각(蓮踜閣)입니다. 예로부터 아기님들께서 간택 받으시기 전, 거(居)하시던 곳이지요. 저는 이곳을 관리하는 명 상궁이라고 합니다. 이제 아기님들의 방을 배정하여 드릴 테니 나누어드린 표에 적혀있는 숫자와 같은 숫자가 적혀있는 방으로 드시면 됩니다. 간택기간동안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저나 처소 궁녀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오늘은 입궁 첫날이오니 아기님들께서는 몸을 정갈하게 단장 하신 뒤, 웃전을 뵈러 가시면 됩니다. 원래대로라면 황후마마를 비롯한 내정 어르신들을 뵈어야 했겠지만 모두 승하(昇遐)하셨으니 황제폐하께 예를 드리러 가시겠습니다. 본격적인 교육은 내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연릉각 앞에서 후보들을 기다리고 있던 깐깐해 보이는 명 상궁의 말이 끝나자마자 궁녀들이 표를 나누어 주었다.
30여명 정도의 처녀들은 각자의 표를 받아 배정된 방으로 들어섰다.
화연과 기해가 들어선 방은 3층 끝에 있는 방이었다. 작은 방안은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침상이 하나뿐이었다.
“기해야 침상이 하나뿐이야. 아무래도 여기서 같이 자야 할 거 같은데? 조금 좁겠다. 그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우리 아기씨께서 기거할 만한 수준의 방인가를 매의 눈으로 살피던 기해가 화연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아이고 배야...우리 아기씨 이렇게 순진하셔서 어떻게 할까... 세상에 시비랑 같은 침상을 쓰려는 아기씨는 우리 아기씨 밖에 없을 거예요. 시비는 침소가 따로 있어요. 저는 밤이 되면 거기로 가서 자야해요. 아기씨. 아마 1층에 있을 거예요”
“정말? 어...같이 있으면...”
“그건 안 되죠 아기씨. 아기씨가 뭐가 모자라서 시비랑 같이 주무신다는 거예요? 그런 건, 밤에 보살핌이 필요한 몸이나 마음이 불편한 아가씨들이나 하는 일이라고요. 전 아기씨께서 간택에서 빨리 탈락하시는 것은 바라지만, 다른 아가씨들에게 우습게 보이는 것을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알았어...”
화연은 어차피 입궁한 이상 기해 말대로 빨리 탈락하는 수밖에는 없겠다고 생각하면서 품에 지니고 있던 주머니를 침상 옆에 내려 두었다.
“아기씨 목욕하셔야지요? 물은 이미 받아놔 있더라고요. 제가 꽃잎을 뿌려뒀으니 이제 들어가시기만 하면 되요.”
화연은 자신이 목욕할 때 자주 쓰는 꽃잎을 여기까지 챙겨왔다니 참 철두철미 하다고 생각하면서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목욕물에 들어가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잔뜩 긴장했었던 몸이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해가 어깨도 슬슬 주물러주니 잠까지 솔솔 오는 것이 우울하던 기분도 좀 나아졌다.
“음...폐하께 인사드리면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는 거지?”
“그렇겠지요. 일이 있어도 아기씨께서는 그리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그냥 편하게 계시다 여기서 빨리 나갈 생각만 하셔요. 아셨지요?”
“아휴...알았다니까. 귀에 못 박히겠어.”
“어머나. 그럼 안 되죠. 우리 귀한 아기씨 요 예쁜 귀에 못이 박히면 큰일 나지요.”
아이를 타이르는 듯 한 기해의 말투에 뾰로통해지려다 진짜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목욕을 마치고 지급받은 옷을 입고 기해가 머리를 만져주기 편하게 앉아 있는데 궁녀가 찾아왔다.
“아기님, 단장이 끝나셨으면 1층으로 내려 오셔요.”
“네. 그럴게요.”
궁녀가 나간 뒤 기해가 화연에게 엄격한 말투로 말했다.
“아기씨. 아랫것들에게는 절대 존대하지 마셔요. 반말 쓰시거나 적어도 하오체를 쓰셔야지 존대하시면 우습게 보이실 수 있어요.”
“어휴...정말 복잡하기도 하다. 우습게 보이면 좀 어때? 어차피 빨리 나갈 텐데.”
“아기씨. 고거랑 고거는 틀린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지요? 제 말씀대로만 하시면 주무시다가도 떡이 나올 테니 제 말 명심하셔야 해요.”
“후...알았어.”
화연이 1층에 내려오자 많은 처녀들이 이미 내려와 있었다.
화연이 내려오니 소란스럽던 처녀들이 조용해 졌다. 무안해지는 기분이 들어 처녀들이 서있는 끝부분에 조용히 들어가 서있으려니 옆에서 갈색머리를 곱게 땋은 똘똘하게 생긴 처녀가 말을 걸어왔다.
“저...혹시 류 재상 어르신의 자녀분 맞으신가요?”
“네. 맞아요. 헌데 누구신지...”
“저는 강 예진 이라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니 참 반갑네요. 원래 알던 분 같은 거 있죠.”
“어머, 저도 반가워요. 저는 류 화연 이라고 합니다. 저,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이제 18세 됩니다.”
어색해 하던 화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도 18세 에요. 우리 동갑이네요.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저는 북쪽 끝에서 오느라고 시일이 오래 걸렸어요. 하마터면 늦게 도착할 뻔 했지 뭐예요”
“아, 그러시구나. 여정이 고되셨겠네요.”
“류 가(家)는 황궁과 가까이 있죠? 편하셨겠어요. 부럽네요.”
“네. 그래서 몸이 힘들지는 않았어요. 저... 제가 피로를 풀어주는 찻잎을 가지고 있는데 좀 드릴까요?”
화연은 예진이 거절할까 조심스럽게 물었으나 예진은 말이 나오자마자 눈까지 동그랗게 뜨면서 반겼다.
“어머! 정말요? 그럼. 제가 집에서 간식거리를 몇 가지 가져왔으니 차를 같이 하시는 건 어떠실까요? 특히 꿀에 절인 앵두조림이 정말 맛이 좋아요.”
“그러면 저야 좋지요. 지금 인사드리고 나면 예정되어있는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저녁식사 후에 같이 마셔요.”
“그러지 말고 우리 저녁도 같이 먹을까요?”
“네!! 좋아요.”
예진이 웃으면서 크게 기뻐하는 화연을 가만히 보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시네요.”
“네? 무슨...”
“사교성이 없으실 줄 알았거든요. 깨어나신지 얼마 안 되어서 집안에서 애지중지 하신다는 소문이 제가 있는 북쪽에까지 퍼졌어요. 밖으로 잘 나가시지도 않는다고...그래서 이곳에 올 때부터 어떤 분인지 참 궁금하지 뭐예요.”
“아...제가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건 사실이에요. 집안에서 과보호를 하는 것도 맞고요. 사교성은...그건 잘 모르겠네요. 친구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서”
“사교성 없지 않으신데요? 저와 사귀면 되니까요. 저 눈 높아서 아무랑 친구 되지는 않아요.”
예진의 으스대는 듯 한 표정에 화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하고 있었는데 일시에 풀렸다. 그 얼굴을 보고 예진이 덧붙였다.
“그리고 그거 아세요? 여기에 모여 있는 처녀들과 인사를 나눠봤는데 아버지가 뭐하시는 분인지 묻지 않은 분은 아가씨 밖에 없었어요. 그게 참 맘에 들어요. 우리 친구하는 거죠?”
하며 손을 내미는 예진의 손을 화연이 맞잡으면서 웃을 때 모습을 흰 눈으로 노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사 기류 명률의 고명딸 기류 미란을 중심으로 한 내각소속 고위관료들의 여식들 이었다.
차가운 표정의 기류 미란을 가운데 두고 중서사인(中書舍人, 환제국의 대학사의 비서실의 장)공 형문의 둘째자녀 공 혜민과, 주항서인(呪恒瑞人, 환제국의 예법, 종교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 남궁 평의 셋째자녀 남궁 진류가 기류 미란의 눈치를 살피면서 화연을 마음껏 헐뜯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류 재상의 막내딸을 보게 되어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이미 기류 현(縣)에서는 류 재상이 막내딸을 싸고도는 이유가 엄청난 박색 인데다 머리도 모자라서 차마 밖으로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쫙 깔려 있었다. 따라서 내각 신료들은 그들 뿐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 막내딸이 예뻐 죽겠다는 류 재상을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다.
아이였을 때야 꽤 예쁘장하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12년간을 가꾸지도 않고 누워만 있었다는데 그 미모가 계속 됐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하늘을 울리는 절색이라 하더라도 병상에 1년만 누워있으면 박색으로 변한다는데 제깟 게 뭐라고 그걸 피할 수 있을까 싶어 오늘 그 면상 보고 실컷 웃자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기류 미란의 눈에서 한기가 흘렀다.
마차에서 내리는 화연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었다. 여자인 자신이 봐도 너무 아름다웠다. 특별하게 꾸미지도 않은 수수한 모습 이였는데도 한껏 꾸민 자신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정말 믿기 싫었지만 그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보니 류 가(家)의 넷째 딸이란 것을 인정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후보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큰 키에 도도한 표정의 냉 미녀 기류 미란은 불안한 마음에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비틀어 쥐었다.
13살 때 처음 본 태자전하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 지지 않았다. 아름다운 얼굴과 늠름한 모습, 그 금빛 눈동자. 당시 태자는 16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다른 남자들과는 달랐다. 비교 할 수도 없었다. 그 뒤로 태자전하의 안곁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아가면서 참고, 인내하며 이 날을 기다렸는데...
태자전하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들렸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옆에서 바꿔 주면 된다. 그는 지금 마음을 못 잡았을 뿐. 내가 잡아주면 돼. 나를 사랑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거야. 그의 옆에 있을 사람은 나 밖에 없어.
그래...미색만으로 태자비에 오를 수는 없지. 기류 미란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가라 앉혔다.
통통한 볼 살을 자랑하는 남궁 진류가 작은 눈을 부릅떠 예진과 얘기중인 화연을 노려보면서 험담을 늘어놓았다.
“뭐, 그럭저럭 박색은 아니네요. 허나, 얼굴이 밥 먹여 준답니까? 우리 미란님께서 여기 있는데 먼저 인사도 안하고 저러고 있는걸 보면 참 예의 없는 아가씨네요.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지 않습니까?”
남궁 진류와 같이 화연을 쫙 찢어진 눈으로 째려보는 공 혜민 또한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요. 당연히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인데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맞다니 까요. 듣자하니 기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누워만 지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저런 자격도 없는 아가씨까지 후보로 오르다니...아무래도 아비 덕 좀 본 것 같네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대화하는 그들의 목소리가 회랑에 울렸다. 화연을 훔쳐보면서 작게 소곤거리던 처녀들의 대화소리가 딱 끊기면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의 대화소리를 듣긴 들었지만 설마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는 몰랐던 화연은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지는 것에 영문을 몰라 상궁이라도 오셨나 싶어 두리번거렸다. 반면, 그들이 정확하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아챈 예진은 고개를 돌려 그들을 노려보았다.
예진이 자신과 얘기하다 말고 왜 저들을 노려보는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던 화연이 무슨 일 이냐고 물어보려는데 명 상궁이 전각으로 들어와 자룡궁으로 출발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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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이런 애들은 꼭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