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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33화 (33/110)

00033  짐승, 우리 안으로  꽃을 들이다  =========================================================================

류 가(家)의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제발 오지 말라고 빌었던 후보자들의 입궁의 날이 밝았다.

태자비 간택에 앞서 선택된 서른 세 명의 처녀들이 각자의 가문의 인장을 단 마차들을 타고 하나 둘씩 도착해 긴 줄을 이루니 아침부터 내궁 앞은 어수선 했다. 후보들을 구경 하려고 젊은 관료들과 내관에 궁녀들까지 나와 기웃거리니 시장통이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류 가(家)의 문장을 단 마차 안에서는 기해가 화연을 붙잡아 앉혀놓고 단단히 교육을 시키는 중 이었다.

“아기씨 아셨지요? 얘기는 벌써 끝났지 만서도 원래 남정네들이란 예쁜 여인을 보면 환장하는 짐승인지라 절대 눈에 띄어서는 안 됩니다. 교육받으시는 것도 절대 앞서지 마시고요 그냥 대충 대충 받으세요. 잘하실 필요 절대로 없다는 거 아시죠? 삼간택에서는 짐...아니, 태자전하와 대면을 하게 되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삼간택 전에 꼭 떨어지셔야 해요. 아셨지요?”

“어휴...알았다니까. 난 오히려 초간택에서 떨어져 아버지 얼굴에 먹칠할까봐 겁나는데...”

기해가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을 쳤다.

“아기씨, 그럼 완전 고맙지요. 가주 어르신의 얼굴에 먹칠은 무슨...어제 어르신과 강이도련님께서 정안수 떠 놓고 기도하신 거 보셨잖아요. 상이 도련님은 치성 드리시겠다며 이 추운 날 뒷산 폭포 밑으로 들어가시겠다는 걸 겨우 말린 거 기억안나세요? 이게 다 아기씨 초간택 탈락을 기원하기 위한 거예요.”

“아버지 체면도 있는데...그건 좀...”

“그런 걱정일랑은 하지도 마셔요. 저는 오히려 걱정이네요. 재상어르신 체면 세워준다고 삼간택까지 올라가시면 어떻게 하나...요즘 불안해서 잠도 못자잖아요. 제가”

“어차피 최종적으로 태자비첩지를 받을 사람은 따로 있잖아. 그러니 그건 걱정 하지마. 내 목표는 중간택 까지 올라가는 거야. 그러면 태자전하를 대면할 일이 없으니 기해 너도 걱정할 필요 없고, 아버지 체면도 세워드릴 수 있으니 나도 좋고. 어때?”

“뭐, 초간택에서 떨어지면 제일 좋겠지마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현실적으로 제일 괜찮은 방법이네요.”

기해는 탐탁지 않게 대꾸를 하면서 태평해 보이는 화연의 얼굴을 바라보니 수심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예전에 꿨던 흉몽이 자꾸 생각나면서 불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그 사나운 짐승의 털이 붉은색이었다는 것 까지 모다 기억나면서 아마 이 일을 예지해준 모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 가주 어르신에게 아기씨께서 태자비 후보로 선택되어 입궁을 해야 하니 준비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눈앞이 아찔했었다.

“뭐...뭐라고 하신 거예요. 어르신? 아기씨께서 뭐가 되셨다고요?”

류 충은 충격을 받아 하얗게 질린 기해의 얼굴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기해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휴...너도 믿을 수가 없지? 나도 그렇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라니...쯧”

“어르신! 이건 말씀이 다르시잖아요.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소문이 도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여쭤 봤을 때는 그럴 일 절대 없다고 하셨잖아요.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테국으로 아기씨 보내실 거라면서요. 그러시면서 혹시 모르니까 저보고 아기씨 모시고 갈 준비까지 해두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헌데 내가 거짓말 한 게 아니고 진짜 테국에 장원까지 알아보고 계약도 하려고 했단다. 우리 연이하고 관련된 일인데 내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설마 짐...태자전하의 아가리...아니, 손에 우리 꽃 같은 아기씨를 집어넣어 주시려는 건 아니시지요?”

“당연하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내 딸을 그런 짐...태자전하에게 줄 리가 없지 않느냐. 걱정하지 말거라. 얘기가 잘 끝나서 태자비로 간택될 인물이 이미 선정되었단다. 우리 연이는 후보로 들어가기만 한 것일 뿐 다른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

화연이 태자비가 되는 것도 싫지만 다른 사람이 이미 선정되었다는 말도 기분이 상해 기해는 류 충에게 따져 물었다.

“누가요? 누가 태자비로 선정되었는데요? 우리 아기씨 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텐데 누가 됐다는 말씀이세요?”

“우리 딸보다 괜찮은 인물이 있겠느냐. 당연히 없지. 그게 아니고 태자한테 정인이 있다는 구나. 눈에 콩깍지가 씌었는지 정인만 보인다는데 우리한테야 잘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 정인이 태자비로 간택 될 테니 염려 말거라.”

“흠, 우리 아기씨를 보고도 그 콩깍지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을까요? 전 의문인데요...”

“나도 그 점이 걸리기는 했지만 연이를 이미 보셨단다. 자기취향이 아니라나, 뭐라나. 아무튼, 그 짐...태자전하가 여자 보는 눈이 뱁새눈이라 참 다행이지 않느냐?”

“그래요? 음...짐, 태자전하라서 그러신지 여자 보는 눈도 참 특이하시군요.”

“그래. 그러니 너는 연이와 같이 입궁할 준비를 해 놓아라. 생각 같아서는 미령이와 세령이도 같이 보내고 싶다만 같이 입궁 할 수 있는 시비는 한명까지만 가능해서 말이야. 이제 너는 어떻게 하면 연이를 초간택에서 떨어뜨릴 수 있을지 고민해 보거라. 너의 임무는 그것이다.”

기해가 어깨를 늘어트리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게 가능 할까요. 어르신? 불가능한 임무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안전을 위해서는 초간택 탈락이 제일 좋긴 한데...어렵겠지?”

“아, 당연하죠. 너도나도 떨어지려고 난리를 칠 텐데 확실한 이유가 없이 우리 아기씨 같은 분이 떨어진다면 아마, 재상어르신께서 뒷손 썼다는 누명을 받으실 겁니다.”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 짐...태자전하께서 허우대는 멀쩡하지 않겠니? 그리고 태자비인데 나중에 황후가 되는 자리이지 않느냐. 성격 결함 정도야 우습게 넘기려는 정신 나간 처자들이 많을 것이다. 쯧쯧쯧~직접 당해봐야 정신 차리겠지. 기류 가(家)만 해도 이번 태자비 간택을 위해 예전부터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모른다. 걔는 정말 권력에 눈이 뒤집힌 건지, 하나 밖에 없는 지 딸을 사지로 몰아넣고서라도 그렇게 권력을 잡고 싶을까? 태자전하를 잘 알면서도 그런다니까? 가만...혹시 진짜 딸 아닌 거 아냐?”

“기류 가(家)의 여식이라면 기류 미란 아가씨 말씀이시죠? 아닐걸요? 얼굴은 모르겠는데 성격은 대학사 어르신을 똑 닮았다던데요? 아주 엄청나다던데...”

“그런 소문이 있느냐? 그 여식도 성정이 아주 지랄 같은가 보지?”

“네. 어찌나 까다로운지 아주 시비부터 고용인들까지 죄다 들들 볶아 먹는다고, 마녀가 따로 없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더라고요. 아무튼, 태자비가 되려고 용을 쓰는 정신 나간 아가씨들이 많다면 일이 조금 쉬워지긴 하겠네요.”

“그래, 그러니 너는 연이 옆에 딱 붙어서 기회를 잘 살피다가 가급적이면 최대한 빠르게 탈락 할 수 있도록 돕는 거다. 알겠느냐? 내, 이일이 잘 성사되기만 한다면 너에게 큰 선물을 내리마.”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반대급부가 있으면 좋긴 하지요. 뭘 주실 건데요?”

“흠, 흠...담하 놈이 마음에 든다면서?”

“!!...오호호호호호...그게 어르신 귀에까지 들어갔나요?”

“틈만 나면 등짝이 넓고, 듬직하고 어쩌고 하면서 연이한테 말한다던데?”

“어머! 아기씨도 참...제가 그랬긴 했죠. 헌데...”

“너도 이제 슬슬 정혼자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기해의 몸이 류 충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그렇다면...”

“그쪽 집안에 너의 처녀단자를 넣어볼까 하는데...네 생각은 어떠하느냐?”

기해는 진지한 얼굴로 류 충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어르신! 이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더라고 이번 일은 꼭 성사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저만 믿어주세요”

“오냐. 너만 믿고 있으마. 일이 끝나면, 알지?”

“오호호호호호호, 어르신. 걱정 붙들어 매시고 매파 보낼 준비나 해주세요. 오호호호호호호~”

“오호호호호호호홋-”

화연은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기해를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정신을 차린 기해는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굳건하게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씨는 중간택 까지만 오르게 하는 거야.

갑자기 웃더니 이제는 표정을 단단히 굳히고 자신을 쳐다보는 기해에게서 뭔지 모를 굳은 결심이 느껴져 화연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아기씨. 궁에 들어가서는 무조건 모자라 보이게 행동하셔요.”

“모자라 보이게?”

“네. 아는 거라도 모르는 척, 모르는 거라면 모르는 티를 팍팍 내셔요. 어르신께 누가 된다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마시고요. 아셨죠?”

“어차피 아는 것도 없어. 교육을 미리 받았어야 알지.”

“아기씨. 그건 살아가는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건데 왜 힘들게 교육을 받으시려는 거세요. 몸도 약하시면서. 다, 가주 어르신께서 아기씨 잘 되라고 안배하신 거니까 제가 드린 말씀이나 잊지 마세요.”

화연이 생각하기에는 별일이 아닌 것 같은데 주변에서 너무 호들갑을 떨어대니 점점 부담스러워 졌다.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고 연기까지 해야 한다고 하니 답답한 마음이 들면서 걱정스러워 졌다. 사실, 황궁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으니 연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다만, 태자비가 이미 내정되어있다는 사실을 자신만 알고 있으니 다른 후보들을 속이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게다가 후보로 선정된 여식들도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고 견제하기 바쁘다고 하니, 쉽게 친구를 사귈 수도 없을 것 같아 약간 들떴던 기분도 가라앉았다.

아침에 마차에 오르기 전 자신의 손을 꼭 붙들고 놔주지 않던 상이 오라버니 모습도 머릿속에 떠나지 않아 기분이 더욱 울적해 졌다. 기해가 늦는다며 억지로 떼어 놓지 않았다면 끝 까지 놓지 않을 기세였다. ‘가지마. 아니면 나도 같이 갈래...’ 라는 말이 얼굴에 한 가득 쓰여 있어 때어 놓고 오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화연은 한숨을 내쉬다가 품속에 가지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남자가 주었던 푸른 돌이 얇은 천에 싸여 있었다. 그 남자는 지금 뭐하고 있을까. 식사는 했을까? 손은 다 나았나.... 나한테 자꾸 왜 그러는 걸까...

생각해보니 자신은 아직도 그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알고 있을까? 다음에 만나면 이름을 꼭 물어봐야지...하지만, 만날 수나 있을까?

궁에 들어가면 적어도 몇 번 정도는 쉽게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각은 금위가 지키고 서있고, 후보들은 같이 입궁한 시비 외에는 그 누구도 만날 수가 없으며 특히 남자를 만나는 것은 절대 불가한 일이라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화연의 얼굴이 시무룩해지면서 어깨가 축 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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