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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32화 (32/110)

00032  짐승, 몸을 일으키다  =========================================================================

“인형극 따위에는 관심 없어.”

“네? 그럼요? 어디 가시는 길이셨어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채로 시선을 화연의 눈에 고정시킨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너 보고싶어서.”

“......”

화연은 나비를 쓰고 있지 않았다면 두 손으로 가려야 했을 정도로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눈가 까지 화끈 거리는 것이 얼굴 뿐 아니라 전신이 다 빨갛게 변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둘을 힐끔 힐끔 보면서 지나갔다.

나비를 쓴 여자와 시꺼먼 카울을 걸치고 모둘을 깊게 뒤집어 쓴 장신의 남자. 그냥 봐도 눈에 띠는데 그 둘은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었다. 여자가 나비를 쓰고 있어 그런 남우세스러운 일이야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괜히 보는 사람의 얼굴이 뜨거워 지는 묘한 분위기를 솔솔 풍겼다.

화연은 고개를 숙였다. 남자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발끝만 꼼지락 거리고 있는데 무영이 손을 잡고 끌어 당겼다.

“어...어디 가시려고요. 저 여기에 있어야 해요. 어? 잠깐만요!”

“모두 너를 쳐다보잖아. 기분 나빠.”

나비까지 쓰고 있는데 좀 쳐다보면 어떤가...그리고 그걸 왜 자기가 기분 나빠 하는가...화연은 입을 벙긋 거리다 그냥 다물었다.

“이봐. 거기 젊은 남녀-점 한번 보고 가는 건 어떤가? 내가 애정운 하나는 아주 기가 막히게 제대로 보는데.”

무영이 화연의 손을 잡고 사람들이 별로 없는 좀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검은 카울을 걸치고 바닥에 앉아있던 노파가 손짓하며 그들을 불렀다.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던 무영이 걸음을 멈추더니 노파에게 다가갔다.

무영이 잡고 있는 손에 이끌려 화연은 노파 앞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기해가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화연이 돌아가야겠다고 말을 꺼내려는데 무영이 노파에게 물었다.

“젊은 사람인지는 어떻게 알았지?”

노파가 주름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클클클...어떻게 알긴...손을 그렇게 꼭 붙들고 사람 없는 곳으로 가려는 남녀 중 젊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당연한 소리는 입 아프니 물어보지 말고 거기 앉게. 계속 올려다보다가 늙은이 목 부러지겠네.”

무영에 간이 의자에 먼저 앉더니 손을 끌어내렸다. 화연도 그 힘에 못 이겨 자리에 털썩 앉았다. 노파의 말을 들어보니 조금 흥미가 생기는 터였다. 기해가 오기 전에 얼른보고 다시 돌아가면 되겠지.

“할머니, 저는 나비를 쓰고 있는데도 점을 봐 주실 수 있으세요?”

“어이구, 색시 목소리가 아주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네 그려. 나비는 안 벗어도 되니 오른손 한번 내놔 봐.”

화연은 노파의 말대로 오른손을 내 밀려고 했지만 무영이 꽉 잡고 놔주지를 않았다. 손을 쫙 펴고 탈탈 떨어내도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아, 이것 좀 놔 보세요. 좀 놔주시라고요.”

그 꼴을 보던 노파가 혀를 찼다.

“하여간 요즘 젊은것들은...쯧...아, 됐어. 그냥 왼손 내놔.”

민망해진 화연이 왼손을 내밀자 무영을 향해 혀를 차던 노파는 화연의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손바닥을 한참 들여다보던 노파는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눈 바로 앞까지 가져다 대면서 다시 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처음부터 화연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것이 참 맘에 안 들었던 무영이 싸늘하게 말했다.

“뭐야, 할멈. 손만 계속 주물럭거릴 거면 집어 치워”

“!”

화연은 무영의 이 버르장머리 없는 언사에 놀라 잡혀있던 손으로 무영의 다리를 철썩 때렸다. 비록 무영이 손을 놔주지 않아 손등으로 때린 거긴 하지만 꽤 세게 때렸으니 아팠을 것 같은데 무영은 미동도 없었다.

“......왜”

“어르신에게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얼른 사과 하세요!”

“......싫은데”

“어서요!”

“......”

“씁-”

“......”

화연은 입소리 까지 내며 눈을 부라렸다. 크게 치켜떠진 두 눈이 나비 안으로 보였다. 제 딴에는 위협을 한답시고 저러나 본데......아, 미치겠네.

심장이 간질간질 했다. 무영은 그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 화연은 무영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하자 그거 좀 혼냈다고 남자가 토라지냐...하면서 노파에게 대신 사과를 건넸다.

“할머니 죄송해요. 이 남자가 뭘 잘 몰라서...”

노파가 화연의 말을 끊더니 따지듯이 물었다.

“아, 그건 됐고...처자, 몇 살이야? 생각보다 나이가 많네?”

“네?... 18세인데요?”

“뭐? 그럴 리가 없는데......거, 나비 좀 올려봐.”

“안 돼”

무영의 단호한 말에 노파가 성을 냈다.

“아, 자네는 좀 가만히 있게. 왜 자기가 그런담? 자네 모둘이나 좀 걷고 있던지... 그렇게 푹 눌러쓰면 앞이나 보이겠나? 보는 사람까지 답답해지니 원....처자는 나비를 살짝 들어올리기만 해봐...응. 살짝만 올려봐”

화연은 어리둥절해하며 나비를 살짝 들어 올렸다. 어스름한 곳에서 달에 비친 화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무영은 이 늙은이가 미쳤나 싶어 저도 모르게 품안에 있는 칼로 손을 뻗는데 드러난 화연의 얼굴을 보고 행동을 멈췄다. 이 어두운 곳에서 화연 혼자만 빛나보였다.

노파가 화연의 얼굴을 자세히 보다가 고개를 다시 갸웃 했다.

“허, 참......그것 참 이상하구먼...손금으로만 보자면 처자의 나이는 서른도 훌쩍 넘은 걸로 나오는데, 얼굴을 보니 아니고...허, 이거 참...내가 점사를 본지 60년이 넘었지만 이런 일은 또 처음이구만...처자 생년월일은?”

화연은 노파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화연이 생년월일을 말해주자 눈을 감고 가만히 있던 노파는 긴 숨을 내 쉬면서 눈을 떴다.

“한 사람 팔자에 두 사람이 들어가 있으니 하나가 둘이 될 수도 있고 둘이 하나가 될 수도 있구나...그거 참 해괴한 일이로다...이런 팔자는 신 내림 받은 무녀에게서나 가끔 나오는 건데...아무튼 당분간 물 근처에는 절대 가지마. 강, 호수, 연못 이런 데 갔다가 큰일 나는 수 있어.”

“...하, 할머니...그게 무슨...”

화연이 그게 무슨 뜻인지 자세히 물어보려는데 무영이 찬물을 끼얹었다.

“이봐, 돌팔이. 아까 말하던 거나 보지?”

“아니, 이 새파랗게 젊은 놈이...내가 용하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돌팔이란 소리는 60년 만에 처음 듣는다! 그런 돌팔이한테 연애운은 왜 봐?!”

“잔말 말고 보란 거나 봐”

화연은 지금 자신의 궁금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연장자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이 남자의 말투에 기가 막혀 화연은 다시 한 번 손등으로 무영의 허벅지를 내려쳤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는 따끔하게 혼쭐을 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정말 계속 그렇게 말씀 하실 거예요? 이번에도 사과 안 드리시면 앞으로 저 볼 생각 하지 마세요. 밥이고 뭐고 절대 안 챙겨 드릴 거예요. 흥!”

“......”

아...귀여워.

나비를 들어 올리고 있으니 그 엄격한 척 하는 얼굴이 잘 보였다. 화난 표정을 하고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을 보니 속이 찌릿 거렸다. 참 보기 좋긴 한데 이러다 정말 화를 내면서 자신을 안본다고 할지도 몰라 무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순순히 대답했다.

“......미안”

“어휴...저한테 말고 이 할머니한테 하셔야지요!”

노파가 손 사례를 치면서 콧방귀를 뀌었다.

“엎드려 절 받기 싫으니 일 없어. 내 60년 점쟁이 생활 통 틀어 이렇게 싸가지 없는 놈은 처음 보는 구먼. 처자가 잘 틀어잡고 살아야겠어. 앞으로 물가만 조심하면.....응? 가만...”

화연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노파가 화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배를 잡고 킬킬거리면서 마구 웃었다.

“클클클...알고 싶은 게 연애운이라고?”

“네? 아, 아뇨...저는,”

“맞아.”

화연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려는데 무영이 선수를 쳤다. 노파는 무영의 대답을 듣더니 이를 어쩌나 하면서 불쌍한 시선으로 무영을...아니 무영이 뒤집어쓰고 있는 카울을 쳐다봤다.

“어이구, 이놈아. 이 아가씨 짝은 보통 사람이 아닌데 이거 어쩌냐? 아가씨 얼굴에 용의 기운이 뻗어있는 걸 보니 대단해도 여간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거, 내가 웬만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미래는 바뀌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만. ..쯧쯧쯧...이 아가씨 뒤에 있는 것이 여간 엄청난 것이 아니라서 말이야...아가씨가 예뻐서 쫒아 다니는 건 알겠다만 하루 빨리 정신 차리고 다른 처녀나 알아보는 게 어떠냐? 시간되면 그 싸가지 없는 성격도 좀 고치고”

다른 사람 같았으면 죽었어도 벌써 골백번은 죽었을 노파의 말이 무영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용이라면...”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는 모양이네? 그래, 곤룡포 말이다. 이놈아! 허이구...꼴에 눈은 높아서 어디서 이런 귀한 아가씨는 만났나본데. 여자 만나는 재주는 있어 보이니 이 아가씨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하루 빨리 다른 여자로 갈아타라 이놈아. 답답하면 거 모둘 좀 걷고 얼굴 좀 내밀어 보던가. 불쌍하니 내가 네 연애운은 공짜로 봐주마.”

“할머니...곤룡포요? 그게,”

화연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 더 물어보려는데 무영만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로 일어섰다.

“흠...좀 볼 줄 아나본데?”

“뭬야?”

무영의 말에 노파가 발끈해서 벌떡 일어서려는데 무영이 주머니를 던졌다.

“다음에 다시 오지”

화연을 끌고 뒤돌아 가는 그 뒷모습에 노파가 손가락질을 했다.

“다시 오긴 뭘 다시와? 다시는 오지 마라 이놈아!......에잉, 어제 꾼 그 꿈이 예사롭지 않아서 일부러 예까지 와봤더니 아주 일진이 더럽구만 그래. 이 짓도 이제 못해먹겠네. 아휴.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라고...이건 뭐야?”

노파는 씩씩거리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무영이 던지고 간 주머니를 발로 툭툭 차다가 주워들었다. 동전 몇 푼 들었나 보다 했던 그 주머니는 예상외로 너무 무거웠다. 노파는 저 놈이 여기에다 돌이라도 한 가득 넣어놨구나 싶어 열불이 뻗혀 신경질 적인 손길로 주머니를 확 풀었다.

“컥!!...”

노파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안에는 돌도 아니고 은화도 아닌 금화가 한 가득 들어 있었다.

무영은 화연이 처음에 서있던 그 자리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곤룡포? 그건 황제께서 입으시는 거잖아요. 저랑 그게 무슨 상관인데요?”

“간택령 때문에 입궁한다며.”

“네. 그런데요?”

“태자비첩지 때문에 입궁하는 건데 당연히 그런 점사가 나오겠지.”

“...아닌 것 같은데...”

“점쟁이가 하는 말을 다 믿어? 그들이 미래를 다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저렇게 살겠어?”

세상 그 누구보다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무영이었지만 화연에게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부터 웃음이 나오려는데 참으려니 그게 가장 고역이었다.

화연이 노파가 처음에 한 말을 생각해 보면 예사롭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무영의 말대로 미래를 알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그래, 내가 언제부터 점을 그렇게 믿었다고, 점은 좋은 것만 믿고 나쁜 건 믿지 말라잖아...화연은 마음속에 조그맣게 튀어나온 의혹을 무시하기로 했다.

무영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화연의 얼굴을 나비위로 살짝 쓰다듬었다. 화연이 놀라 생각을 멈추고 무영을 쳐다보니 눈에 웃음기가 실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심술이 났다. 이 남자가 이제는 틈만 나면 얼굴을 만지네.

“그때 허락한 거 아니었는데요.”

“흠, 난 허락한 줄 알았는데”

“아닌데요.”

“아니야?”

“...아닌데...”

“정말?”

“......”

무영은 아무 말 없는 화연의 볼을 만지다 살짝 삐뚤어져있는 나비의 모양새를 잡아주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가 만졌던 볼 부터 점점 뜨거운 기운이 번지는 것 같았다. 화연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어도 제 얼굴이 붉어 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저번에...”

남자가 무슨말을 하려고 했는지 운을 띠우자마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기씨! 어디 계셔요! 움직이지 마시라니까! 아저씨, 좀 비켜주세요. 어떻게 하지? 아기씨! 아기씨! 대답 좀 해보셔요......아!! 아저씨! 좀 비켜달라니까!!”

자신을 애타게 찾는 기해의 목소리에 화연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피다 다시 쳐다보니 무영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헉헉...아기씨! 왜 여기에 계세요! 제가 움직이지 마시고 고대로 서 계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아이고...숨차.”

“어...그게... 사람들이 갑자기 움직여서”

“아! 맞다! 제가 그 말씀을 드린다는 것을 깜빡했네요. 놀라셨죠? 인형극 시작하기 전에 종이 울리면 사람들이 가까이서 보려고 무대로 모여들거든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응...”

“저기 상이 도련님 보이시죠? 아기씨 찾다가 상이 도련님 울 뻔 했잖아요. 얼른 가서 안심시켜 드리세요. 앞쪽에 자리도 만들어 놨데요. 불도 다 꺼졌으니 이제 종 한 번 더 치면 바로 시작할거에요.”

“어...”

잠시 뒤 시작한 인형극을 보면서 사람들은 즐거워했지만 화연은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떠오르는 건 오늘 나비를 쓰고 오기를 백번 잘했다는 것이었다. 인형극이 유쾌한 내용인건지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리는데, 자신의 얼굴은 술이라도 잔뜩 마신 사람 마냥 붉으니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남자는 왜 자꾸 나를 들쑤시나...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날 아침, 류 가(家)에는 태자의 대례를 위해 소집한 처녀단자 중 최종 서른세 명에 화연이 선별 되었으니 앞으로 삼일 후 연릉각(蓮踜閣)으로 입궁하라는 내용의 교지(敎旨)가 도착했다.

교지가 내려질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류 충과 류 강연은 막상 교지를 받고 나니 침통한 마음 달랠 길 없어 그날 밤 류 가(家)에서는 탄식소리만 가득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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