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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31화 (31/110)

00031  짐승, 몸을 일으키다  =========================================================================

잔치가 성황리에 끝나고 삼일 뒤 주 말.

류 가(家)의 형제들과 화연 그리고 기해는 늦은 저녁 외출 준비로 분주했다.

“아기씨! 어서 나오세요. 상이 도련님도 빨리 나오시고요!”

“......어......”

“응, 알겠어. 아휴~ 정신없어. 그렇게 좋아?”

류 가(家)의 정문 앞에서 기해가 발을 동동 구르며 화연과 류 상연을 재촉했다.

“빨리 가야지 인형극 볼 수 있단 말예요. 그거 늦으면 맨 뒤에서 서서 봐야 해요. 그럼 잘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다구요.”

화연은 쓰고 있던 나비를 들어 올리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거 꼭 써야 하니? 이 밤에 앞도 잘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도 하고.”

기해 옆에서 비단 주머니 안을 뒤져 들어 있는 돈을 세어보던 류 강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안 돼. 그건 너를 위해서라기보단 너를 보고 넋을 놓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니까 꼭 쓰도록 해. 그리고 야시장 들어가면 환하니까 보는 건 걱정하지마.”

“......”

류 상연 까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화연이 들어 올리고 있던 나비를 도로 내려 주었다.

더 고집부리다가는 저 낮 뜨거워지는 말을 계속 들어야 할 것 같아 포기하고 화연은 화제를 바꿨다.

“후, 알았어요. 근데 아버지 오시면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우리끼리 먼저 가면 화내실 것 같은데...”

류 강연이 들고 있는 비단주머니의 주둥이를 질끈 동여 묶고는 품에 넣으면서 여상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화내시겠지. 하지만 언제 오실 줄 알고 기다려. 요즘 처녀단자 문제로 시끄럽다잖아. 그거 때문에 매일 정신없이 바쁘다던데? 그러니까 오늘 입궁 안하시려다 담하에게 끌려갔지. 당분간 빨리 못 오실 테고 처녀단자 고르는 게 끝나면 연이 너도 금방 입궁해야 할 텐데 아버지 기다리다간 그 전에 야시장 못가”

기해가 류 상연의 손길에 점점 더 요상하게 변하는 화연의 나비 모양새를 보다 못해 류 상연의 손을 쳐내고 꼼꼼하게 손을 봐주다 물었다.

“어? 도련님, 처녀단자 문제는 다 내궁에서 처리해야하는 일 아니에요?”

“나도 어제 아버지께 들은 얘긴데 처녀단자 추리는 문제로 주항서에서 뒷돈을 좀 받았다는 것 같던데? 그래서 행궁에서 관여하기로 했나봐.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어떤 미친놈이 짐승에게 지 딸을 주려고 돈까지 써서 더 바쁘게 만든 건지, 누군지 걸리기만 하면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아버지께서 어제 이를 가시더라고.”

곰곰이 생각하던 기해가 손뼉을 치면서 눈을 반짝 거렸다.

“잘됐다! 그럼 저희도 뒷돈 써요! 우리는 아기씨 처녀단자를 빼내는 걸로!”

“기해야...그 생각을 안 해 봤겠니? 고위 관료의 자녀는 결격사유가 없는 한 모두 처녀단자를 들이라는 어명이 계셨다. 남들 다 찬성하는데 우리만 반대 한다면 우리 연이한테 결격사유가 있다고 다들 생각할 것 아니냐. 안 그래도 내각 쪽에서는 연이가 박색에다 머리도 모자르니 어쩌니 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문이 돈다던데 그걸 인정하는 꼴이잖아. 어차피 태자비첩지가 내려질 사람은 따로 있잖아. 괜한 짓 하다가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단자 빼돌리는 건 안하기로 했다.”

화연과 이렇게 나들이를 나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들떠 보이던 류 상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 졌다. 화연이 얼굴을 류 상연 얼굴에 가까이 들이 밀면서 팔짱을 꼈다.

“오라버니, 우리 빨리 가서 인형극 봐요. 저 너무 기대 되는 거 있죠. 오라버니는요?”

류 상연이 화연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나도......그래...”

야시장은 대낮처럼 환했다.

어두운 밤중에 나비까지 쓰고 있어 뭘 제대로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허공에 쳐진 줄에 연등이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바닥에는 두꺼운 천을 깔거나, 허리까지 오는 높이의 탁자를 놓고 그 위에 별에 별 물건이 진열되어있었다. 개나 닭 같은 동물을 파는 사람도 보이고 꼬치나 당과를 파는 사람과 화렴주를 파는 사람도 많았다.

류 가(家)의 일행이 야시장에 들어서자 야시장에 있는 행인들은 류 가(家)의 도련님들이 오셨다며 너도 나도 반갑게 아는 척을 하다가 류 상연의 머리모양을 보고는 망측하기 그지없다며 쑥덕거렸고 기해의 고개는 다시 숙여졌다.

류 가(家)의 상징인 검푸른 머리카락을 본 상인들은 물주를 만났다고 생각하고 신이 나서 너도 나도 외쳐 불렀다.

“도련님! 장신구 한번 보고 가시죠. 아기씨 드리면 아주 딱 인 물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테국에서 건너온 물건도 있으니 구경이나 한번 해보세요.”

그 소리에 언제 시무룩해져 있었냐는 듯 얼굴 가득 화색이 돌며 좌판으로 뛰어 들어간 기해가 머리에 비녀를 이것저것 가져다 대면서 화연에 물었다.

“어마! 이거 너무 예쁘다. 아기씨, 어때요? 잘 어울리죠?”

“거, 아가씨가 보는 눈이 있구만, 그려. 그거 테국에서 어제 들어온 거야. 고 비녀 끝에 박혀 있는 건 진짜 진주고. 하나 사지 그래? 잘~어울리는데? 그 물건이 오늘 임자 만났구만.”

상인이 기해의 기분을 살살 맞춰주면서 구매를 유도하니 기해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웃으면서 기해의 얼굴을 보던 화연이 앞으로 나섰다.

“응. 예쁘네. 잘 어울린다. 내가 사줄게. 아저씨 이거 얼마예요?”

“진짜 아기씨께서 사주실려구요? 정말요? 그럼 조금만 더 골라도 되요?”

옆에서 심심한 표정으로 서있던 류 강연이 눈을 반짝거리는 기해에게 면박을 줬다.

“장신구 하나 고르는데 뭐 이렇게 시간을 끌어? 내가 누누이 말했지. 줄긋는다고 수박 안 된다. 빨리 아무거나 골라. 인형극 보러 간다면서.”

“쳇! 알겠어요. 음...아, 고민된다...이거랑 요거랑 저거 중 어떤 게 제일 나아요?”

기해가 비녀 3개를 골라 하나하나 머리에 대면서 물었다.

화연이 신중하게 보면서 대답했다.

“음......난 가운데에 있는 거. 그게 제일 예쁘네. 너랑 잘 어울려.”

“강이 도련님은요?”

류 강연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연이가 고른 거”

“좀 보고......아녜요. 제가 말을 말아야죠. 상이 도련님은요?”

류 상연은 세 개의 비녀를 천천히 신중하게 비교하면서 살펴봤다.

“........”

계속 살펴보기만 했다.

“......제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네요. 죄송해요, 상이 도련님. 아저씨 요거로 주세요.”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손님”

이 후 아버지께 드릴 뮴털로 만들었다는 붓을 사고, 시비들에게 나눠줄 장신구까지 산 뒤, 한손에 당과꼬치를 하나씩 들고 인형극이 벌어진다는 중앙공터로 향했다.

중앙 공터는 공연이 벌어지는 무대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서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려다 도저히 더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너 땜에 늦었잖아! 이제 우리 연이 어디서 봐?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겠구만.”

“어...아이 참, 조금만 더 빨리 올 걸... 강이 도련님, 앞쪽으로 자서 자리 있나 좀 봐주세요. 상이 도련님도요.”

“니 눈에는 앞에 자리가 있어 보이냐?”

“그러니까 가보시라는 거잖아요. 그 앞에 가서 머리를 좀 흔들고 있으면 류 가(家)도련님인줄 알고 다들 비켜줄 거예요. 그럼 상이도련님께서 저희 데리러 오세요.”

“.........”

“...야, 그건 좀...”

“강이 도련님, 아기씨 인형극 안 보여 드릴 거예요?”

“기해야, 난 괜찮...”

단호한 표정의 기해가 손을 들어 화연의 말을 끊었다.

“아기씨 인형극 처음 보시는 거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좋은 자리에서 보여 드릴 테니까 저만 믿으세요. 도련님들 뭐하세요? 안가시고?”

류 강연은 저게 지가 보고 싶어서 저러는 것 같은데 화연에게 인형극을 편하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어, 아무 말 없이 류 상연을 끌고 인파를 헤치며 앞쪽으로 사라졌다.

“아기씨는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셔요.”

“어디 가는데?”

“찬 바닥에 자리하나 깔고 그냥 앉으실 수는 없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두툼한 방석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제가 그 생각은 못했어요. 얼른 가서 방석 하나 사올게요”

“나 혼자 여기 있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기해야”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그 사이에 상이도련님께서 오실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꼭 계셔요? 절대 딴 데 가시면 안돼요. 아셨죠?”

어디가지 말고 꼭 서있으라는 신신당부를 한 기해가 장이 서있는 곳으로 사라지고 화연은 혼자 남아 덩그라니 서있었다.

어디선가 징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하게 입은 남자들이 나와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던 연등을 하나둘씩 껐다.

그러자 마자 그때까지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서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무대가 있는 방향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서있던 화연은 갑자기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휩쓸려가다가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비틀거렸다. 그 와중에 한 손에는 당과꼬치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는 나비가 벗겨질까봐 꽉 잡고 있느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 어깨를 세게 치면서 지나갔다.

“윽-”

화연이 당과꼬치를 떨어뜨리면서 크게 비틀거리다가 기어코 넘어지려는데 뒤에서 누가 팔을 꽉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몸을 바로 하려는데 그때까지 화연의 팔을 잡고 있는 사람이 손을 놓지 않았다.

“어? 이제 좀 놓아 주세요.”

그 사람은 그 말을 듣더니 오히려 화연의 팔을 자신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헉! 이거 왜 이러...어?!”

화연의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웃음기가 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야”

남자였다.

그는 검은색 카울(발끝까지 나려오는 길이의 후드가 달린 여행자용 망토)을 머리끝부터 두르고 있었는데 모둘(카울 뒤에 달려있는 후드)을 깊게 내려 써 처음에는 누군지 못 알아 봤었다.

화연의 팔을 끌어당기고 자신의 얼굴을 보라는 듯이 혹은, 화연을 자세히 보고 싶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여 화연의 나비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검은 모둘 안에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얇은 미소를 짓고 있는 붉은 입술,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금빛 눈동자 자신을 향해 있었다. 이런 곳에서 남자를 볼 거라고 생각도 못한 화연은 너무 반가웠다.

“여기 웬일이세요? 이런데서 보다니...저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냄새”

“냄새요?”

화연이 잡혀있지 않은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옷에서 풍기는 연한 꽃냄새 말고는 아무 냄새도 안 났다.

“음...?저는 아무 냄새도 안 나는 것 같은데...풋- 개 코신가 봐요”

나비 안에서 초승달 모양으로 바뀌며 반짝거리는 화연의 눈을 내려 보던 무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은 사람의 웅성대는 소리에 이렇게 시끄러운데 그의 목소리는 아주 잘 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어? 저 다른 사람들 하고 같이 온건 어떻게 아셨어요?”

“너네집 식구들이 이런 곳에 너를 혼자 내보낼 리가 없잖아.”

화연은 조금 머쓱해 졌다.

“아...오라버니들은 앞에 자리 있나 보러 가셨고요. 기해...제 시비는 방석 구하러 갔어요. 근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정말 인형극이라도 보러 오신 거예요?”

“인형극 따위에는 관심 없어.”

“네? 그럼요? 어디 가시는 길이셨어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채로 시선을 화연의 눈에 고정시킨 남자가 조용히 대답했다.

“너 보고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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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같이 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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