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짐승, 몸을 일으키다 =========================================================================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심지어 말도 느리지 않았다.
“!!”
류 강연이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류 충을 대신해서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야......너, 너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아이고, 깜짝이야. 무슨 소리냐니...? 벌써 취했냐?”
화연이 류 상연의 팔을 잡으면서 진정 시켰다.
“오라버니, 진정 하세요. 들으시는 것처럼 그리 심각한 얘기는 아니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시구요.”
이제야 류 상연이 왜 저러는지 알 수 있었던 류 충과 류 강연은 류 상연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저놈이 생전 안하던 짓까지 할 정도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기는 하지...우리 연이 살리려고 힘들단 말 한마디 없이 그 개고생을 사서 한 걸 생각해보면 저 정도에서 그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류 충이 류 상연에게 술을 따라 주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줬고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던 류 상연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전하라 하면...예전에 집에 몇 번 온 적 있는 그 흉한 소문 자자하던 그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노ㅁ...분이 맞다.”
“륜국과의 전쟁에 참전했다고 들었는데요?”
“너는 산으로만 돌아다니느라 잘 모르겠구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궁 한지는 좀 됐다.”
“......”
“근데 그 노ㅁ...분이 전쟁터에서 한 5년 구르고 나더니 이젠 망나니가 아니라 짐승으로 변신했지 뭐냐. 그것도 아주 사납고도 잔인한 짐승으로 말이다. 글쎄 귀궁 첫날부터 내관3명을 도륙했다나 뭐라나. 그리고,”
류 충이 태자에 대한 욕을 본격적으로 꺼내려는데 류 상연이 다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류 강연은 아버지의 말씀도 다 안 끝났는데 예의 없이 일어서는 류 상연을 보고 저놈이 오늘 계속 안하던 짓만 골라하는 것이 충격을 받아도 엄청 크게 받았나 싶어 혀를 찼다.
“쯧쯧쯧, 그래. 니 마음 형이 충분히 이해한다. 자다가 날벼락 맞은 것 같겠지. 이제 우리 연이도 일어나서 우리 가족 오순도순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이게 웬 횡액인줄 모르겠다. 아버지, 말이 나왔으니까 드리는 말씀인데요, 우리 굿 한번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음...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애비 생각에는 이거 보통 굿으로는 안 될 것 같아. 어디 아는 데는 있는게냐?”
류 강연은 류 충과 머리를 맞대고 어디 무녀가 용한지 심사숙고 하는데 류 상연이 조용히 몸을 돌렸다.
“거기가 참 용하다고 하더군요......응? 너 어디 가냐?”
“가지러가게”
“뭘?”
“망태기”
“망태기?”
“응”
“무슨 망태기?”
“내 약초망태기”
“...혹시...아까 독초 들어 있으니 아무도 만지지 말고 가까이 가지도 말라고 했던 그 망태기?”
“응”
“......”
“......”
류 충과 류 상연은 셋째가 무슨 짓을 하려는 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놈은 가만히 있을지언정 허튼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셋째야!! 안 된다!”
“야! 너 미쳤어?! 야, 야!”
“어마!!”
류 충과 류 강연이 벌떡 일어나 류 상연의 팔을 급하게 부여잡고 그 서슬에 거세게 흔들리는 식탁을 화연이 부여잡느라 이제껏 조용하던 식당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 졌다.
류 상연의 양손을 부여잡고도 류 충과 류 강연은 질질 끌려갔다. 이 놈이 산에서 인삼이라도 주워 먹었는지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류 강연은 버티다가 더 이상 안 되겠던지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짐승한테는 독이 안 통해!”
류 상연의 몸이 덜컥 멈췄다.
“...안 통해?”
“그래! 전장에서 독에 한두 번 당했는줄 알아? 소용없다니까.”
“곰도 넘어뜨릴 수 있는 독인데?”
...진짜 죽일 생각이었군. 류 강연의 등에서 한줄기의 식은땀이 흘렀다.
“......야. 하려거든 연이를 다른 데로 피신시킨 뒤에 해야지. 지금은 너무 늦었어. 내일 모레가 입궁인데 지금 약을 만들어서 어느 세월에 죽이냐? 형도 그 생각 안 해본 거 아니니까 그 놈에 망태긴지 뭔지는 놔두고 차분하게 앉아서 얘기해 보자. 연이 놀라서 얼굴 하얗게 된 거 안보여?”
화연은 놀라서가 아니라 쏟아지면서 짙게 풍기는 술 냄새 때문에 그런 거였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요. 상이오라버니 앉아서 말씀하세요. 네? 어서요.”
류 상연은 화연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아 화연의 손목을 잡으며 진맥을 짚었다.
“......놀라서......체했나 보다......미안해...이따가......약 줄게......”
“아...전 이제 괜찮아요. 오라버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안 돼.....약......먹고...자”
류 상연의 말투는 다시 느려져 있었다. 그 말투를 들은 류 충과 류 강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았다. 평소에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한번 화가 나면 무섭다더니...
그 동안 내 핏줄에서 저런 순둥이가 어떻게 나왔을까 고민스러웠던 류 충은 흡족한 마음까지 들었다. 특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서슴없이 짐승을 죽이겠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참 사내대장부 같고 늠름해 보였다. 아무렴! 우리 어여쁜 연이의 오라비라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류 충은 흐뭇한 얼굴로 류 상연을 보면서 잔에 술을 가득 따라줬다. 류 상연을 보는 눈빛이 오월의 햇살처럼 그렇게 따사로울 수가 없었다.
“셋째야...”
“......네......아버지...”
저 속 터지게 느린 말투 까지도 오늘은 참 진중하고 속이 깊어 보이는 것이 역시 자신이 자식농사 하나는 잘 했다는 생각이 들어 류 충은 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졌다.
“그 생각 우리가 이미 다- 해 본거란다. 애비는 망명까지 생각해 두고 다른 나라에 장원도 계약하려고 했었단다. 때 맞춰 평화로운 방법이 생겨 둘째와 상의 끝에 결정한 일이니 너는 너무 걱정 말고 있거라. 알았지?”
“......”
그 평화로운 방법이란 것이 맘에 안 드는 류 상연의 얼굴에는 탐탁지 않은 기운이 가득했지만 옆에서 자신의 팔을 잡고 살며시 흔드는 화연을 보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류 상연을 보다가 류 충이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를 꺼냈다.
“음...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독은 만들어 둘까?”
“......네......”
“아버지!”
화연의 놀란 표정에 류 충이 “애비가 농담 한 거지, 진짜로 그러겠느냐? 걱정 말거라. 하하하하” 라고 하면서 류 상연에게 비밀스럽게 눈짓을 보냈다.
만들어. 그것도 아주 쎈 놈으로.
류 상연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얼굴에 조금 만족스러운 기운이 퍼져 있었다.
그 이후로 식당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부드러워 졌다.
알딸딸해진 류 강연이 똑 같이 알딸딸해진 류 충의 비위를 뒤집기 전까지는...
사건은 류 강연의 자랑질 에서 시작되었다.
류 강연은 사실 아까부터 파루안 떡을 맛있게 먹는 화연에게 그거 자신이 손질했다며 자랑 하고 싶었다. 류 상연만 그 난리를 안 부렸다면 했어도 진즉에 했을 터였다.
“허흠... 연아. 파루안 손질 오라비가 다 했다.”
“정말요? 그거 엄청 힘들잖아요. 웬만해서는 흠집도 못 낸다던데...오라버니 검 실력이 엄청 좋으신가 봐요.”
“뭘, 엄청 씩이나...전쟁터에서 5년이나 굴렀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바보도 아니고”
“......”
그거 손질하느라 팔이 부러지는 줄 알았는데...동생한테 생색 좀 내고 애교부리는 모습도 좀 구경하려고 했는데 그걸 못 참고 거기다 초를 치시냐...류 강연은 류 충을 노려보았다.
“아버지, 평생 한번이라도 손질은 해 보시고 말씀 하시는 거죠?”
류 충이 류 강연의 집요한 눈초리를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음......있을 걸? 한, 두 번쯤?”
실은 한 번도 없었다. 화연이 쓰러지기 전 딸에게 주기 위해 파루안 나무를 잘못 내리쳤다가 팔목이 댕겅 부러진 이후부터는 나무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피식-”
류 강연이 이쯤에서 그만두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잔을 들어 올리는데, 그 모습을 보니 자신이 진 것 같고, 지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류 충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난 문과야! 무과가 아니라고! 너처럼 무식한 칼잡이가 아니야!”
화연은 말없이 잔을 내미는 류 상연에게 술을 따라주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류 충 때문에 술병을 놓칠 뻔 했다. 그러고 보니 류 충과 류 강연의 얼굴은 어느새 벌게져 있었다.
“깜짝이야... 아버지, 갑자기 왜 그러세요?”
“어...아니, 저놈이...”
“훗- 그러시겠지요. 아 참, 미천한 무과의 칼잡이가 말씀 드렸었나요?”
“......뭘”
“저 이번 주 말에 입궁 안 합니다. 태자에게 말하고 하루 쉬기로 했습니다. 음하하하하하하하핫”
“윽! 그럼, 설마...”
“네! 주말에 연이 데리고 야(夜)시장 놀러 갈 거예요. 크하하하하하.”
류 충은 너무나 부러운 나머지 오장육부가 꼬일 것만 같았다. 나도 연이랑 야시장 가고 싶은데...식탁위에 술잔을 탁! 하고 내려놓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안 돼! 너만 그런 부러운....아니, 위험한 짓을 하게 놔둘까 보냐! 안되겠다. 나도 그 날은 입궁하지 말아야겠군...내 딸한테 그런 위험한 일이 생기지 못하게 감시하려면 입궁은 절대 못하지! 암!”
식당은 다시 시끄러워 졌다.
식탁을 두들기며 내실이 떠나가라 박장대소를 하는 둘째 오라버니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 만큼은 절대 입궁 할 수 없다며 더 크게 소리를 지르시는 아버지 사이에서 화연은 귀도 멍멍하고 혼까지 쏙 빠질 지경이었다.
밥 한번 조용히 먹기가 이리 힘들 줄이야...얼굴도 벌겋게 변한 것을 보니 두 분 다 취하신 것 같은데 무슨 남자들이 이렇게 술이 약한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다가 그나마 제 정신으로 보이는 셋째 오라버니를 쳐다보았다. 다행히 셋째 오라비의 얼굴은 눈만 약간 충혈 되어 있을 뿐 붉은 기 전혀 없이 멀쩡했다. 음? 어째 아까보다 안색이 더 하얀 것도 같은데...설마...
류 상연이 자신을 쳐다보는 화연의 눈을 마주보며 느릿느릿하게 말했다.
“......으가가......제이리야......그지......?”
“...네...”
취하셨구나...
류 가(家)의 부자(父子)들은 화연이 연우였을 때 마셨던 술보다 적은 양을 그것도 세 명이서 나눠 마시고도 나란히 취해있었다. 그들은 술이 많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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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상연이 한 말
1. 의과가 제일이야. 그치?
2. 오빠가 제일이야. 그치?
3. 의리가 제일이야. 그치?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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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 무영은 꽃을 먹고 사는 짐승, 저는 여러분의 코멘을 먹고 사는 짐승입니다.
내일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