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짐승, 몸을 일으키다 =========================================================================
그 날 저녁, 류 가(家)의 가솔들은 화연의 완치를 위한 잔치중인 데다가 감감 무소식이던 류 상연까지 돌아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류 상연은 어렸을 때는 잘 울지도 않고 때를 쓰는 법 한번 없이 이리하라면 이리하고, 저리하라면 저리하는 말도 참 잘 듣는 아주 온순한 도련님이었다.
그래서 가솔들은 어린 류 상연만 보이면 너도나도 주머니에 당과니 말린 과일들을 찔러 넣어줬었다. 하여, 어렸을 때 입은 류 상연의 옷은 주머니 늘어나지 않은 옷이 없었고, 당과 얼룩이 없는 옷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끼는 도련님이 커서는 동생에게 줄 약을 구하러 다니느라 집에 잘 들어오지도 못하고 어쩌다 한 번씩 집에 돌아 올 때면 거지도 이런 상거지가 없었는데, 안 해도 될 고생을 동생 한번 살려보겠다고 묵묵히 인내하니 그가 더욱 안쓰러워 류 가(家)의 가솔들이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어 안달하는 그런 도련님이었다.
“도련님 고개를 살~짝, 아주 살~짝 비스듬하게 올려보세요.”
가운데 구멍을 낸 우스꽝스러운 분홍색 보자기를 불평 한마디 없이 뒤집어쓰고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던 류 상연이 기해의 요구대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렇죠! 고대로 가만히 계셔요”
기해는 류 상연의 머리를 자르는 중이었다.
수염은 이미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원래는 다듬기만 하려 했는데 어찌나 엉켜 있던지, 아무리 용을 써도 도저히 다듬을 수가 없자 있는 대로 성질이 뻗친 기해가 여기선 이게 유행이라며 그냥 싹 밀어 버렸다.
자신의 수염이 허락도 없이 죄다 사라져도 류 상연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꼭 붙잡고 있는 화연의 작은 손만 만지작거릴 뿐 이였다.
간간히 작게 대화를 나누며 웃는 오누이 사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기해는 가위질을 멈추고 엄격한 눈으로 자신의 작품을 신중하게 살피다가 옆에 서있던 세령에게 짧게 명령했다.
“빗”
류 가(家)에는 기해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시비들의 모임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 중 가장 과격한 성향의 모임인 기사모(기해 저년이 죽어버렸으면 참 좋겠다는 시비들의 모임)대표 세령이 작게 대답했다.
“...이 년이...”
“씁- 빗”
“나도 가위질 할 줄 알거든? 가위 내놓고, 니가 빗이나 들고 있어라. 이 년아”
가위를 뺏으려 손을 내미는 세령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던 기해가 팔짱을 꼈다.
“너,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의 계약은 없던 걸로 하는 수가 있어.”
“지랄도 풍년이다...무슨 계약? 헛소리 하지 말고 가위나 내놔. 더럽게 못자르네.”
기해가 한숨을 푹- 내쉰 뒤 류 상연의 어깨에 떨어져있던 머리카락을 살살 털면서 말했다.
“도련님, 저희가 도련님의 머리모양에 대한 작은 의견 충돌이 있어서요. 저쪽에 가서 타협점을 찾고 다시 오겠습니다. 이대로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기해가 세령의 팔을 잡아끌며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서 대화를 시작 하려는데 그제 서야 류 상연의 대답이 들렸다.
“......어......”
화연은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 기해와 세령의 뒷모습을 보다가 류 상연의 푸석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라버니...머리는 왜 이렇게 되셨어요? 색이...”
오랫동안 감지 않아서 그럴 줄로만 알았던 류 상연의 회색빛의 머리카락은 감은 뒤에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러니 가솔들이 못 알아 본 것도 이해가 됐다.
“응......새로운 약을......만들어 보려고......먹었는데......이렇게 됐어.”
“아니...무슨 약을 드셨길래 하루아침에 머리색이 이렇게 변했어요. 조심 좀 하시지.”
류 상연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제 머리를 만졌다.
“......흉해......?”
필시 자신에게 줄 약을 만들다가 저렇게 된 거겠지.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던 류 상연의 손도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생채기로 가득해 이루 말할 수 없이 거칠었다.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까...화연은 다시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아뇨, 전혀 안 흉해요. 오라버니. 너무 멋있어요. 이제 류 현(縣)의 아가씨란 아가씨는 죄다 상이오라버니만 쫒아 다니겠네요. 사실, 강이 오라버니 보다 더 멋진 것 같아요.”
자신의 귀에 대고 장난스럽게 속살거리긴 하지만 화연의 안타까운 속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류 상연은 화연의 손을 다시 잡았다.
“......난... 괜찮아......너만......건강하면......”
화연과 류 상연이 다시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말없이 오누이의 정을 나누고 있는 데 대화가 끝난 것인지 기해와 세령이 다가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풀이 죽어 뒤 따라오는 세령과는 딴 판으로 머리를 한 차례 뒤로 넘기더니 턱을 높게 치켜들면서 다가오는 기해는 아주 의기양양해 보였다.
류 상연은 화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터질듯 한 주머니를 뒤적거려 제일 예쁘고 맛나 보이는 당과를 쥐어주었다. 내가 앤가...하며 웃던 화연이 한지를 벗겨보니 섬세한 꽃 모양의 당과가 나왔다.
“와...이건 먹기 아깝네요. 너무 예뻐요.”
류 상연의 머리를 세심하게 다듬던 기해가 당과를 흘끗 쳐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사람들 눈에는 셋째 도련님이 아직도 아이로 보이나 보네요. 키가 6척이 넘는 남정네
주머니에 그런 걸 넣어주고 싶데요...? 그게 다 우리 아기씨 입으로 들어간다는 건 아는지 몰라.”
오늘도 가솔들은 항상 그래왔듯이 류 상연을 보자마자 당과니 주전부리 같은 것들을 주머니에 잔뜩 넣어 줬었다. 그리고 류 상연도 항상 그래왔듯이 웃으면서 받은 그것들을 모다 화연에게 쥐어주었다.
류 가(家)의 가솔들에게는 26년간 계속 되는 전통이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류 충은 들어오자마자 내 딸~을 부르짖다가 화연과 같이 서있는 류 상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 년 넘게 못 본 셋째가 와있어 놀라긴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너... 머리가 왜 그 모양이냐?”
류 충의 바로 뒤에 들어오면서 내 동생~을 부르짖던 류 강연까지 깜짝 놀라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어? 야! 너 머리 왜 그래? 어디다 홀랑 태웠어?”
“......”
류 상연의 머리는 아주 짧았다. 길이가 손가락 딱 한마디도 안 될 정도였다.
남자든 여자든 대부분 길게 길러서 묶거나 틀어 올리고 다녔고, 짧아도 이렇게 귀가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화연이 볼 때에는 좀 짧을 뿐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한 머리 모양 이였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쩌다 머리카락이 홀랑 타서 어쩔 수 없이 자르면 잘랐지 하고 싶어서 하지는 않는 흉측하고 해괴한 모양인 것 같았다.
기해는 말없이 웃고만 있는 류 상연의 뒤에 숨어 붉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세령이 꼬숩다는 표정으로 실실 거리면서 서 있었다. 화연이 그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류 충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아버지, 오셨어요. 시장하시죠? 어서 들어가요. 파루안 떡까지 해놨더라고요. 오라버니들도 같이 들어가세요.”
류 충의 관심은 바로 화연에게 돌아갔다. 셋째 아들의 해괴망측한 머리모양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오냐, 내 새끼...하루 종일 뭐하고 있었느냐? 심심하지는 않았고? 잔치 연다고 고생하지는 않았누?”
“제가 뭘 한 게 있어야죠. 도와주고 싶어도 기해가 손끝 하나 못 움직이게 막고 나서는 걸요”
“암, 그래야지. 기해 잘했다. 보기에도 아까운 요 고운 손, 험한 일 하면 안 된다. 안 되고말고. 연아, 그럼 하루 종일 뭐했느냐? 애비 생각 했느냐? 애비 보고 싶었지?”
“네,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화연이 눈을 반달로 만들면서 곱게 웃으며 애교까지 부리니 류 충의 애간장이 흐물흐물 녹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이 꽃보다 고운 아이가 내 새끼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화연의 초상화에다 ‘얘가 내 딸!’이라고 적은 뒤 방방곡곡에 뿌리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자랐다.
화연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내실로 향하는 류 충의 발걸음은 요 근래 들어 가장 가벼웠다.
오랜만에 화연과 같은 식탁에 앉은 류 충은 잔치 음식으로 가득 차려진 식탁에 앉아 화연이 따라주는 쥬유주(주유酒)를 마시며 화연이 골라주는 안주를 먹으니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인 것만 같고 세상 부러울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조금 있으면 한 동안 못하는 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류 충과 류 강연은 내일로 예정되어있는 간택령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내 딸, 요 예쁜 것을 한동안 못 본다고 생각하니 애비 마음이 찢어지는 구나...”
류 강연이 술잔을 들다가 내려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그럼 결정이 된 건가요?”
류 충은 술잔을 기울여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휴- 그래. 내일 방이 전국에 붙을게다.”
“아버지, 걱정 마시라니까요. 오늘도 그 아가씨 보고 오겠다며 옷까지 다 차려입고
나가더라고요. 확실하니까 제 말 믿으세요. 저, 류 가(家)의 푸른 늑대에요.”
류 충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화연에게 내밀었다.
화연은 술 냄새 때문에 아까부터 속이 울렁거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얌전히 류 충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지금 화연에게는 술 냄새 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간택령 얘기가 나오자마자 내내 웃는 얼굴 이었던 류 상연의 얼굴이 단번에 굳으면서 술잔을 꽉 움켜쥐는 폼을 보니 금방이라도 폭발 할 것만 같아 불안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래. 지금에 와서는 그 방법 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긴 하구나. 그나저나 입궁하면 우리 딸 보고 싶어서 이 애비 병이라도 나면 어쩌냐...”
류 충이 화연의 볼을 쓰다듬으면서 엄살을 피우는데 갑자기 류 상연이 술잔을 식탁에 거세게 내려놓았다.
식탁이 크게 흔들리면서 식탁위에 차려져 있던 음식들이 여기저기로 튀고 식기들이 서로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화연만이 류 상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지만 류 충과 류 강연은 살면서 셋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 놀라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심지어 말도 느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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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