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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28화 (28/110)

00028  짐승, 몸을 일으키다  =========================================================================

차를 마시면서 푸른 돌을 구경하던 화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저...이런 선물까지 주셨는데 죄송해서 어쩌죠? 이제 식사를 챙겨드리지 못할 것 같은데.”

“......”

“곧 있으면 태자비 간택을 위한 후보를 선별한다고 하더라고요. 궁에 계시니 얘기는 들어보셨지요?”

“응. 알고 있어.”

“아버지께서 곧 금혼령과 함께 간택령이 떨어질 거라고 하셨어요. 그럼 무조건 처녀단자를 보내야 한다나 봐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아무래도 제 처녀단자가 선택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되면 얼마 후 입궁하라는 교지가 내려 온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때까지는 시간이 있잖아.”

“그게...아버지께서 그 전까지 절대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황궁 근처로는 발걸음도 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누구 눈에 띄면 안 되는데?”

“......”

아버지는 태자전하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던 거지만 이 얘기를 그대로 해도 될지 몰라 우물쭈물 거리는데 무영이 다시 물었다.

“싫어?”

“뭐가요?”

“간택령 말이야.”

“간택령이 싫다기보다는...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혹시라도 제가 태자비 첩지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것이 좀 걱정스러웠거든요...... 근데 이젠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면, 간택령에 참여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안 되죠. 오히려 재미있을 것 같아서 기다려지기도 해요.”

“뭐가”

“입궁하면 제 또래를 많이 만날 테니까요. 집에서는 또래도 없고 다들 바쁘기도 해서 무료할 때가 많았거든요. 입궁해서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요.”

화연은 연우일 때도 30년간 친구하나 없이 외로웠었다. 들어보니 얼마간 궁에서 숙식을 함께하며 같이 지낸다고 하던데, 그것이 한 번도 못가 봤었던 수학여행 같기도 해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태자비가 될 가능성은 이제 사라졌으니 맘 편히 친구만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있던 무영이 화연에게 물었다.

“태자비가 되기는 싫은 거야?”

“네.”

“왜? 태자가 싫어서?”

화연은 연우 일 때 격은 일로 인하여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어 둘러댔다.

“아니요.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듣자하니 흉흉한 소문이 꽤 많던데요?”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사실하고 많이 달라.”

무영은 그녀가 무슨 소문을 들었을지 몰라 일단 다 잡아 때기로 했다.

“저도 그런 소문을 다 믿는 건 아니에요. 소문이란 원래 과장이 있기 마련이니 단순히 소문만 듣고 사람을 판단 할 수는 없지요.”

“그런데 왜 싫어?”

“참...제가 언제 싫다고 했나요. 그저 그런 소문을 들었다고 했지. 그런데, 황궁에서 태자전하의 옥안(玉顔)을 한 번도 못 보셨어요?”

“...봤어.”

“그럼 저보다는 잘 아시지 않나요?”

“응. 키 크고 잘생겼어. 돈도 많아...검도 잘 써...그리고...또...”

무영은 이때가 기회인 것 같아 화연에게 자신의 장점을 잔뜩 늘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 봐도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 나, 색사도 잘하는데......근데 왠지 이건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영의 어깨가 살짝 늘어졌다.

“외모가 중요한가요. 사람 됨됨이가 중요하지.”

“됨됨이도 좋......나쁘지는 않아.”

무영은 자신조차도 차마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서글프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아는 사이라고 두둔해 주려고 애쓰는 걸 보니 그 모습이 참 귀엽게 느껴져 화연은 웃음이 나왔다.

“풋- 그래요. 됨됨이도 나쁘지 않고 검도 잘 쓰는 미남자일지는 몰라도 저는 처음 보는 사람과 같이 살수는 없거든요.”

“왜? 왜 같이 못살아? 원래 다 그렇게 살아.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무영은 저 혼자만 같이 살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 지면서 억울한 기분까지 들어 저도 모르게 화연에게 따지고 들었다. 화연은 예상치 못한 격렬한 반응에 눈을 크게 떴다가 어지간히 친한 사이인가 보네...하고서 피식 웃었다.

“하지만, 저는 여러 번 자주 보면서 마음을 나누다 서로 떨어져서는 못살 것 같은 마음이 들면 그때 같이 살고 싶어요.”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혼할 용기까지는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화연은 일반론을 말했다.

“그럼 그때 같이 사는 거야?”

“뭐... 그렇겠죠?”

“.......”

화연은 언제 격분했냐는 듯 깊은 생각에 빠진 무영을 보고 있자니 당분간 이 남자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다 큰 성인인데 챙겨주지 않으면 식사도 못한다던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저 없어도 식사 잘 챙겨 드시고요. 옷도 잘 입고 다니시구요...네?”

자주 봐야 한다는 거지...라고 중얼거리던 무영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니가 해주면 되잖아”

이제까지 제가 말한 건 어디로 들으셨어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한숨으로 대신하고 화연은 침착하게 말했다.

“제가 여태 말씀드렸잖아요. 얼마동안 집에 있다가 입궁하면 한동안 그 곳에서 지내야 한다고요. 그 후 면 모를까 그때까지는 힘들다니까요.”

“잊었나본데 나도 궁 안에 있어.”

같은 궁 안에 있는데 왜 볼 수가 없냐는 그의 말이 보고 싶다고 때를 쓰는 것처럼 들려 화연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알았어요. 궁 안에 있으니 혹시라도 시간이 나면 보러 갈게요. 그래도 너무 기다리시지는 마세요. 시간을 내기가 힘들 수도 있어요.”

“시간이 나면 나한테 오는 거 잊지마.”

“...알겠어요. 식기 전에 차 드세요.”

화연은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아무 말 없이 찻잔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차는 마시지도 않고 화연만 쳐다보던 무영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조용히 일어섰다.

“? 왜 그러세요?”

“가볼게”

“궁으로... 돌아가신다고요? 이렇게...빨리요?”

“응”

“어...식사도 안하시고...”

“......”

화연은 아쉬운 마음에 잘 가라는 말도 못하고 미적거리면서 시간을 끌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던 무영의 입술이 부드럽게 올라갔다.

“그럼...가보셔야죠.”

무영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화연을 보다 충동에 못 이겨 그녀의 볼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솜털이 있는 매끄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자신이 이제껏 만져본 그 무엇보다 보드라웠다. 그 느낌이 놀라워 자신의 손을 쳐다보는데 무영이 만진 뺨을 손으로 덮은 화연이 붉어진 얼굴로 작게 소리쳤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왜 허락도 없이 처녀의 얼굴을 맘대로 만져요?!”

이제까지 우악스럽게 ‘잡기만’ 했지 이렇게 부드럽게 ‘만진 적’은 처음이었다. 화연의 얼굴에는 솜털이 바짝 일어서 있었다.

손가락 지문까지 살펴보던 무영이 고개를 들면서 피식 웃었다.

“왜, 왜 웃어요! 제 말이 웃겨요?”

“아니, 허락받으면 맘대로 만져도 되는 건가 싶어서”

“그...”

난 허락해줄 생각이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는 말을 단호하게 해줘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화연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피식 웃던 무영이 뒤 돌아 나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보아하니, 다음부터는 그냥 만져도 되겠군.”

“!! 제, 제가 언제 허락을 했다는...이봐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듣고 가셔야죠! 허락한 거 아녜요! 허락한 거 아니라고요!”

화연이 벌써 사라진 무영의 등 뒤에다 아무리 소리를 쳐봐도 한번 지나간 마차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화연은 어린여자아이처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화연이 자신의 입을 꼬집으면서 “바보야! 그때 바로 허락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어야지! 이 맹추! 답답이!”라는 말을 4번쯤 되풀이 했을 때 기해가 커다란 남자를 뒤에 달고 별채로 들어왔다.

남자의 얼굴은 덥수룩한 수염으로 절반쯤 뒤 덮여 있었고, 나머지 반은 희끗희끗하고 거칠거칠한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다. 류 가(家)의 가솔 중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화연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검푸른 빛의 온화하고 다정한 눈...자신의 셋째 오라비 류 상연 이었다.

화연은 누구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단박에 뛰어가 류 상연에게 매달렸다.

“상이 오라버니!!”

류 상연은 자신에게 안겨오는 화연을 훌쩍 들어 올리더니 꽉 끌어안았다.

“다쳐......뛰지 마......”

“응, 응. 오라버니...너무 보고 싶었어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 깨어 난지 한참 됐는데...”

“......어......산......속에 있었어......연락......늦게 봤어......미안......”

이 짧은 문장을 말하는 데도 엄청 오래 걸려 뒤에서 듣고 있던 기해가 말없이 제 가슴을 두들기는데 화연은 아무런 재촉 없이 끝까지 기다렸다가 활짝 웃으며 류 상연의 목을 꼭 끓어 안았다. 류 가(家)에서 류 상연이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마칠 때 까지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는 사람은 화연 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그래도 잔칫날에 맞춰 오셨잖아요. 이제, 저 다 나았으니 약초 같은 건 구하러 다니지 마세요. 오라버니.”

“......다......나았어?”

“응. 다 나았어요. 오라버니 동생, 이제 완전 튼튼해요.”

류 상연의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고였다.

어릴 때부터 하루도 건강한 적이 없었던 내 동생 연이가 결국에는 쓰러지고, 그런 연이를 고쳐보기 위해 약초를 구하러 다닌 지도 근 10년이 다 되어 갔다.

철들자마자 아버지를 졸라 의술과 약학을 익히고 바로 약초를 찾으러 다니느라 방방곡곡 지도까지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다.

1, 2년에 한 번씩 돌아와 그 동안 모아온 약초와 그것들로 만든 약을 건네어 주고 연이의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바로 다시 길을 떠나곤 했었다.

한 겨울에 내린 폭설로 오도 가도 못해 산 중에 갇혔다가 얼어 죽기 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도 있었고, 산짐승과 맞닥뜨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 산을 타다 다친 적은 부지기수였다.

고되고 힘들었어도 연이 하나만 생각하고 죽어라 헤매고 다녔었는데 이제야 그 보답을 받는 것 같았다. 그 아프던 아이가 이렇게 뛸 수 있다니, 얼굴에 혈색이 이렇게 좋다니...류 상연의 눈에 맺혀있던 뜨거운 눈물이 그 무게를 못 이기고 툭 떨어졌다.

“오라버니...”

류 상연은 고운 손으로 자신의 눈물을 닦아주는 화연을 말없이 꼭 끌어안았다.

여담이지만, 그 날 밤 황궁 안에서는 보물중의 보물인 ‘미리내의 별’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벌어져 발칵 뒤집혔다. 연제는 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아꼈던 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알고 이 도적놈 잡기만 하면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노발대발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화연의 침상을 정리해주던 기해는 침상 옆에 놓여 있는 푸른 돌을 발견했다. 어머, 또 첫째 도련님께서 보내 주신건가? 고것 참 예쁘기도 하다......응?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던 거 같은데? 어디서 봤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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