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7 짐승, 몸을 일으키다 =========================================================================
화연이 서있는 별채 앞 작은 연못은 장원 안팎에서 한창 잔치가 벌어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추운데 들어가 있다가 저녁때나 한 번 더 나오면 되겠다며 등을 떠미는 기해 때문에 자신으로 인한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혼자 멍하니 연못을 쳐다보면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 열 명 정도가 둘러앉으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연못은 물속에 색색의 작은 물고가 무리지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연못 옆에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무성한 붉은 잎을 자랑하는 나무가 한그루 심어져 있었는데, 이 나무는 화연과 나이가 같았다. 늘그막에 화연을 얻은 류 충이 크게 기뻐하며 화연이 태어난 날을 기념하여 직접 심은 귀한 나무였다.
이 나무는 이름까지도 화연과 비슷한 화령나무인데 붉은 잎이 사시사철 풍성하게 나있었다. 잎의 생김새가 꼭 쫙 핀 아기 손바닥처럼 보여 붉은 손바닥나무라고도 불리는데, 붉은 잎은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성질이 있어 말려서 약으로도 쓰이고, 따뜻한 차에 띄우면 그것도 별미라 기해가 화연에게 자주 챙겨주고는 했다.
단풍나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나무의 잎사귀가 신기해 들여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재미있어?”
“엄마야!”
화연은 연못 옆에 서서 나무를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면서 화급하게 몸을 돌리려는데 균형을 잃으면서 몸이 연못 쪽으로 기울어 졌다.
윽. 빠진다.
연못 쪽으로 넘어지는 와중에도 연못이 많이 깊을까? 내가 수영을 할 줄 알았었나? 하는 생각을 태평하게 하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남자가 자신의 팔을 잡아 확 끌어 당겼다.
“아!”
차라리 연못에 빠지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당겨진 팔이 너무 아팠다. 순간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화연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팔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 무영이 부서져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파?”
“아...조금요...”
소매를 걷어 보니 그새 손자국이 벌겋게 나 있었다. 그 자국을 보던 무영이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
남들에게는 무표정해 보였을 그 얼굴이 화연에게는 시무룩해 보여 서둘러 소매를 내리고 환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안 그랬으면 이 추운 날 연못에 빠졌을 텐데. 덕분에 고뿔에도 안 걸리고 다행이네요. 고마워요.”
“......응”
무영은 소매로 가려진 팔을 쳐다보다 웃음소리가 들려 시선을 들었다. 화연이 그를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던 그는 하루를 안 봤을 뿐인데 화연이 그 사이에 더 예뻐진 것 같아 가슴이 울렁거렸다.
“겉옷을 입고 있네요? 신도 신고......외출 할 때는 갖추어 입으시는 구나.”
화연의 말대로 무영은 복식을 갖추어 입고 있었다. 자기도 사람인데 이 추위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벗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겠지. 비록 매듭은 다 풀려있어 가슴팍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고, 신도 대충 구겨 신고 있었으며, 거기다 주선은 신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화연은 무영에게 다가가 매듭을 안에서부터 하나하나 묶어주면서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춥지도 않으세요? 이렇게 다 풀어 헤치고 다니면 입으나 마나겠어요. 주선은 또, 왜 안 신으셨어요? 발이 차면 건강에 안 좋아요.”
무영은 자신의 가슴팍에 매달려 풀어져 있는 매듭들을 하나씩 묶어주는 화연을 내려다 봤다. 복잡하게 보이는 머리 모양과 그것을 고정하고 있는 비녀가 보였다. 비녀 끝에 달려있는 진주가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달랑거렸다.
하얀 정수리와 동그스름한 이마, 그 아래 길게 뻗어있는 속눈썹과 그것이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 말하느라고 작게 움직이는 붉은 입술과 향기로운 꽃냄새까지 그 모든 것이 무영의 속을 뒤 흔들었다.
무영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으로 깊게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주먹을 더 세게 말아 쥐었다.
화연은 무영의 매무새를 정돈해 주고 고개를 드는데 그가 시선을 급하게 돌리는 것이 보였다. 그 얼굴에 왜 인지 모를 초조한 기색이 읽혀 고개를 갸웃 거리는데 어디선가 혈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가슴이 철렁하면서 그가 어디라도 다쳤나 싶어 무영의 몸을 살펴보니 꽉 쥐고 있는 주먹에서 피가 한 방울씩 느리게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 피! 이게 뭐에요? 왜 이래요?”
화연이 무영의 커다란 주먹을 들어 올려 펴보려는데 꽉 쥐고 있는 주먹은 도통 펴지지가 않았다.
“뭐하세요? 얼른 손 좀 펴보세요. 피 계속 나잖아요! 빨리요.”
화연이 무영의 주먹을 펴려고 세게 당겨 봤으나 꼼짝도 안했다. 화연이 힘을 주느라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변하는 것을 보고, 무영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톡톡 한 방울씩 느리게 떨어지던 핏방울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니 그것을 보던 화연의 붉었던 얼굴이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태형의 기이하게 꺾인 손가락 끝에서 떨어지던 붉은 피가 떠오르면서 눈앞이 아찔해 졌다.
무영의 주먹과 씨름을 하던 화연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무영은 비틀거리는 화연을 서둘러 안아 들고 걸음을 옮겼다. 잠깐 현기증이 났을 뿐인데 무영이 훌쩍 안아드니 화연은 깜짝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가, 갑자기 피를 봐서 그래요. 이제 괜찮으니 내려주세요... 창피해요, 어서 내려주세요”
무영은 당혹해하는 화연을 그대로 안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이 정확히 자신의 침소로 향하자 화연은 버둥거리던 것을 멈추었다.
“어? 저희 집에 오신 적 있으세요?”
“응”
“혹시 오라버니들 중 친하게 지내시는 분이 있으셨어요?”
“친한 건 아니고”
“언제 오셨었는데요?”
“예전에 몇 번, 술 마시러”
“몇 번 이나요? 그럼 친하신 거죠. 누구와 친하셨는데요?”
화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별채로 들어온 무영은 아무 말 없이 화연을 의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멀뚱히 서 있다가 화연의 앉으라는 권유를 받고 나서야 앞에 앉았다.
화연이 보기에 그는 아무래도 어딘가 아픈 것 같았다. 오늘따라 하는 행동도 이상하고 그러고 보니 얼굴이 좀 붉은 것도 같아 이마를 짚어 보려 손을 가져다 대는데 화연을 보지도 않고 있던 무영이 얼굴을 뒤로 물렸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안하기도해 가만히 있다가 아차 싶어 벽에 세워져 있던 장궤 열어 긴 명주로 된 천을 꺼내들었다.
“손 줘보세요”
무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톱자국과 핏자국이 엉망으로 얽혀있는 손을 내어주었다.
“으... 아프겠다.”
화연이 천을 물에 적셔 손바닥 위를 살살 닦았다.
무영은 허공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슬쩍 내렸다.
화연은 자신의 손을 그 반도 안 되는 크기의 작은 손으로 잡고 얼굴을 바싹 갖다 대고서 주의를 기울여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녀의 작은 숨결이 손바닥 위에 느껴지면서 여태까지 아무 느낌도 없었던 상처가 갑자기 쓰라렸다.
“아...”
“아파요? 미안해요...조금만 더 참아요.”
상처가 난 건 자신인데 자신보다 더 아픈 표정을 지으며 걱정스러워 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간질거리면서 다른 곳에도 상처를 내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칼로 팔을 한번 그어 볼까...아니야...아까처럼 가슴에 매달려있는 모습도 좋았는데... 그래, 가슴으로 하자...무영이 품에서 칼을 꺼내려는데 때마침 화연이 손을 긴 천으로 돌돌 말더니 끝을 나비모양으로 곱게 묶은 뒤 손을 놓아주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입맛을 다시는데 화연이 싱긋 웃으면서 따뜻한 차를 따라 내밀었다.
“잘 참으셨어요. 많이 아팠을 텐데.”
그녀가 손을 때니 더 이상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지만 무영은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오라며”
“그래서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신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아! 내 정신 좀 봐. 음식 좀 들이라고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화연이 사람을 부르면 일이 커질 것 같아 무영은 권유를 거절하고 품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화연에게 내밀었다.
“음식은 됐어. 이거”
“어? 뭐예요?”
그가 내민 것은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색 빛이 나는 돌이었다. 진한 푸른색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속이 투명하게 보였다. 신기한 마음에 햇빛에 비춰보려고 돌을 기울이니 은색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 넘실거리면서 눈이 부실정도로 신비로운 빛을 마구 뿌렸다.
화연의 가족들이 너도나도 앞 다투어 화연에게 진귀한 것을 가져다 안기는 지라 많은 것을 봐왔었지만 이런 것은 처음 보았다.
“와- 너무 예뻐요. 이런 건 처음 보는데...이름이 뭐예요?”
“...푸른 돌?”
“풋- 이름이 그거 예요? 푸른 돌? 진짜 푸르긴 하네요. 근데 이거 왜요?”
“가져”
“......저 주시는 거예요? 정말요? 이렇게 예쁜 걸...왜 갑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로 가져다줄게. 갖고 싶은 거 말해봐. 꽃신만 빼고. 꽃신은 안 돼.”
“아녜요. 아녜요. 저 갖고 싶은 거 없어요. 이것도 너무 예쁜데요.”
“생각나서 가져왔어. 네 눈동자하고... 비슷해 보여서”
“너무 고마워요. 침상 바로 옆에 두고 매일 봐야지.... 진짜 예뻐요.”
“그래... 예쁘다.”
예쁘다고 말하는 무영의 시선은 푸른 돌 이 아니고 화연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잖아...화연은 괜스레 부끄러워져 애꿎은 돌만 만지작거리다가 말을 돌렸다.
“...그런데 이거 비싸거나 그런 거 아니에요?”
“산거 아니야”
“그럼 어디서 나셨는데요?”
“창고에서 가져왔어.”
“창고?”
“응
화연은 조금 불안해 졌다. 혹시 이 사람이 멋모르고 잠시 거주하는 궁의 창고에서 마음대로 가져온 건가...
“저기...지금 머무시는 궁, 창고에서 가져온 거예요?”
“아니야. (미래에)내 창고에서 가져왔어.”
화연은 이 남자가 황궁 안에 왜 자기의 창고를 가지고 있는지 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안도의 한숨만 내 쉬며 돌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봐도 참 예뻤다.
“정말 고마워요. 저는 드릴 것도 없는데...음식도 마다하시고...”
“좋아?”
“그럼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예쁜걸요. 소중하게 간직 할게요.”
“그럼 나중에 내가 원하는 걸 하나 해줘.”
달란 말도 안했는데 자기가 줘 놓고 생색내는 그의 표정을 보니 화연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 내...알았어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로 말씀하셔야 해요. 아셨죠?”
“응”
무영은 화연이 눈을 반짝 빛내면서 환하게 웃으며 기뻐하니 마음이 뿌듯해지면서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창고를 통째로 주고 싶은데 너무 과하면 부담스러워 할 수 있다니까 꾹 참았다.
대신, 다음에는 아까 낮에 창고에서 본 스스로 빛을 뿜어 주변을 환하게 비추던 투명한 돌덩어리도 가져다주리라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