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짐승, 몸을 일으키다 =========================================================================
류 강연은 류 충이 황제와의 오찬 중 드디어 뒷목을 잡고 쓰러지셨다는 전갈을 받고 서둘러 의궁에 갔다가 멀쩡한 류 충이 침상에 누워 이만 득득 갈고 있는 것만 실컷 구경하다가 다시 청룡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의궁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류 강연은 아무래도 조만간 아버지께서 반역죄라도 저지르시는 게 아닐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연이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 뒤 일을 도모해야 할 텐데...성정이 원체 급하셔서......
보통사람과 걱정하는 이유가 많이 틀린 류 강연은 상국이 나을지 테국이 나을지 고심하면서 청룡궁 앞에 서서 미적거리다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어제 정오, 연이와 식사를 하다 연제의 명을 받아 아버지와 대전으로 갔다가 오니, 어떻게 된 영문인지 태자가 청룡궁 앞까지 나와 우뚝 서서 한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오전 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분 좋은 상태였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경호 대원들은 동상처럼 서서 눈물만 줄줄 흘릴 뿐 말을 하지 않았다.
태자에게 물어볼까 싶기도 했는데 저 분위기로 보아하니 말이라도 꺼내는 순간, 신체 어딘가가 떨어져나가거나, 부서지거나, 으스러지거나 하는 참사를 당할 것 같다는 확신이 서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좀 괜찮아 졌겠지 싶어 아침에 청룡궁으로 들어서는데 웬일, 어제보다 더욱 심해져있었다.
일단, 오전에 한명이 죽고, 한명은 다리가 잘렸다.
요즘 한참 태자의 기분이 좋아 이때다 싶어, 오전마다 청룡궁을 정비하는 내관과 궁녀를 보내달라는 연통을 공조서에 보냈었다.
오늘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연통을 쓰고 있는데 벌써 내관과 궁녀가 전각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3층만 침소만 안 들어가면 괜찮겠지 싶어 3층을 한눈에 감시 할 수 있는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에 서서 초조하게 단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침소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칼을 든 태자였다.
기척도 없이 조용히 나온 태자를 뒤늦게 눈치 채고 2층을 담당하는 내관에게 서둘러 도망가라는 눈치를 주려는데 태자가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더니 말릴 세도 없이 그대로 칼을 뽑아 내관의 목을 잘랐다.
피가 분수같이 쏟아지면서 천정과 벽에 흩뿌려졌다. 목이 잘려 경련을 일으키는 내관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2층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얼이 빠져 숨도 멈추고 서있는데, 태자가 바로 몸을 돌리더니 옆에 주저앉아 있던 내관의 다리를 거침없이 잘라버렸다.
“꺄아아아아악!”
그제서야 궁녀들이 들고 있던 걸레를 집어 던지면서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앞 다투어 도망쳐 버리고 2층에는 다리가 잘려 실신한 내관과 얼어붙은 두 명의 경호 대원, 그리고 나와 태자만 남아 있었다.
목이 떨어져 나간 내관을 멍하니 쳐다보다 시선을 돌려보니 태자가 얼굴에 핏방울을 점점이 묻히고 서 있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휘둘러 피를 털어내더니 붉은 입술에 묻은 핏방울을 혀로 핥으면서 몸을 돌렸다.
“전하...이, 이게, 왜...갑자기...”
“발소리”
“저 내관은...”
“안 말렸잖아.”
죽은 내관은 발소리를 내서 목을 자른 거고, 다리를 자른 내관은 발소리 내는 걸 안 말려서 그런 거란다.
나에게 조차도 안 들렸던 발소리를 어떻게 들었으며 그 발소리가 누구의 발소리였는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그렇다 치고, 도대체 왜! 평소에는 살기를 잘만 날리면서, 막상 칼을 쓸 때는 살기도 없는 거란 말인가! 살기가 있어야 말리기라도 하지,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발작하는 것처럼 칼을 휘두르는 상대를 어떻게 말릴 수 있을까.
태자는 3층으로 올라가려다 나를 보고는, 아니, 얼굴이 아니라 머리 쪽을 묘한 표정으로 한참 노려보더니 침소로 들어가 버렸다.
공조서에 상황을 설명하고 당분간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연통을 쓴 뒤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한마디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3층으로 올라갔는데 침소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어찌나 독하고 짙은지 그 앞까지 가서 식은땀만 줄줄 흘리다가 돌아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의궁에 갔다 오는 사이에 태자가 없어졌으면, 아니면 죽어버리기라도, 그것도 안 되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치는 것도 괜찮고, 하고 빌었지만, 청룡궁 밖으로 뻗어 나오는 살기 여전한 것을 보아하니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봄처럼 포근한 날씨인 오늘, 청룡궁 주변에만 한파가 몰아쳤다. 류 강연은 옷깃을 여미면서 싸늘한 청룡궁 안으로 들어섰다.
허연 입김이 나오는 청룡궁 안에 들어서 발끝으로만 걸어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가니 오전에 죽은 내관의 피를 다 닦아 내지 못했는지 2층 여기저기에 피 칠갑이 되어있었다.
이젠 진짜 귀궁(鬼宮) 이군.
을씨년스러운 핏자국을 보니 마음이 더 심란해져 머뭇거리다가, 오늘은 안 되겠다 싶어 포기하고 뒤꿈치를 든 상태로 조용히 내려오려는데 침소 안에서 태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귀도 참 밝다. 들어가기 싫은데
“네...”
어두운 공간에 연초향이 가득 차 숨이 막혔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뿌연 연기가 시야를 막아 앞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깊게 들어가지 않고 문에서 최대한 가까이 붙어 도주로를 확보한 뒤, 짐승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있을만한 곳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쿨럭, 큼, 부르셨습니까. 전하.”
“궁금한 게 있어서”
“네. 말씀하십시오.”
“근데, 왜 문 앞에 서 있는 거지?”
이 어두운 곳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연기로 자욱한데...내가 보이냐?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생각보다 눈이 나쁘군. 앞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쪽으로 와. 볼 것도 있고”
아니! 그냥 여기 있을게, 너도 거기 그대로 있어. 제발
“전 괜찮습니다.”
“쯧”
갑자기 방안이 환해졌다.
태자가 창틀에 기대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한손에 가림막이 들려있는 것을 보니 내가 어두워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가림 막을 잡아 뜯었나 보다.
저 가림 막 엄청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던 건데...가림 막을 움켜잡은 짐승의 앞발에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있는 힘줄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하게 다가갔다.
겉옷을 걸치고 창틀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서서 장죽을 물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만날 바지만 걸치고 다니다가 엊그제부터 웬일로 겉옷을 걸치고 다녔다. 비록 맨발에다 매듭도 풀어 헤치고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어 감격했었다.
오늘 오전 내관의 목을 날려 버리기 전까지는.
점점 사람이 되어가나 싶었는데 전보다 더 위험한 짐승이 되어버린 것 같아 나오려는 한숨을 참고 짐승이 말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짐승이 불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 건지 솜털까지 자세하게 보는 데 그 눈빛이 너무나 무시무시했다. 한참을 말없이 주시당하기만 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어 입을 열었다.
“저...”
“이쪽으로 가까이 와”
“네? 네”
“이쪽으로 와서 고개를 좀 돌려봐”
“어...왜 그러시는지”
“쯧, 돌려”
“네”
짐승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머리카락을 지나 눈, 코, 입을 차례대로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네 집 식구들은 별로 안 닮았나 봐”
“네?”
“류 가(家)말이야. 식구들이 참 안 닮은 것 같다고”
뭘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나 했더니 우리 형제 닮은데 있나, 없나 그거 찾으려고 했단 말이야?
“저희, 닮았는데요. 무지 많이”
“별로. 쯧, 안 닮아도 너무 안 닮았잖아.”
이제 짜증까지 내는 태자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다 옛 얘기를 꺼냈다. 목소리에 억울한 심정이 잔뜩 묻어 나왔다.
“저, 저희 형제 모두 보셨잖습니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이요. 그때, 어디 가서 씨 도둑질은 못 하겠다며 시정잡배, 아니! 음...궁중예절에 연연하지 않고 평민처럼 편하게 말씀 하셨지 않습니까. 기억 안 나십니까?”
“지금 보니 아닌 것 같아. 그 머리카락 색깔 빼면 하나 닮은 구석이 없어. 아니, 그것도 별로 안 닮았고, 눈 색깔은 완전히 달라”
“에? 저희 식구 머리 색깔, 눈 색깔 모두 같은데요? 검 푸른색”
“달라”
태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류 가(家) 특유의 머리색과 눈 색깔이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다, 우리 형제는 쌍둥이처럼 모두 닮아 있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 짐승이 나한테 괜한 꼬투리를 잡으려고 이러는 구나 싶어 맞장구 쳐줬다.
“예, 예, 태자전하께서 그러시다면 그렇겠지요. 그런데 아까 궁금하다고 말씀 하신 건...”
“음, 저번에 말한 거 말이야”
“네? 어떤...?”
“저번에 말했던 그거, 생각 안나?”
“그러니까 뭘...혹시, 연심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하온데...?”
“그때 니가 잘 해볼 생각을 하라고 했잖아?”
“네, 그랬었죠...”
“어떻게 하는 건데. 그거”
“잘 해보는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거”
그렇게 말하는 짐승의 얼굴이 아주 약-간, 정말 쥐꼬리만큼 겸연쩍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눈이 믿기지가 않아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 아가씨와 잘되게 하는 방법을 물어보시는 게 맞으십니까? 정말로요?”
끄덕
아니! 그럼 아직도 그 여자랑 아무것도 못했다는 거야? 니가? 하고 싶으면 단 한 번도 참지 않고 일단 일을 저지르고 봤던 니가? 보고만 있어도 물고, 빨고, 뒹굴고 싶다던 니가? 설마...
“아무 것도 안하셨단 말씀이십니까? 아직 까지 도요?”
“......”
“혹시...저...어의를 불러야 하는 건...”
“왜?”
“조금 창피하시더라도 그런 문제는 더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의원에게 맡겨야 합니다. 나중에 대통도 이으셔야 하니까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물건이 멀쩡한지 아닌지 확인시켜 줄까? 너한테 직접?”
“......아니요.”
젠장! 아쉽게도 그건 아니군...류 강연은 곰곰이 생각하다 결국 물어봤다.
“그럼 왜...”
“......내 맘이지”
저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믿을 수 없는 얘기긴 하지만, 이미 시도는 해봤는데 아가씨가 싫어했던지 아님, 싫어할까봐 아예 시도도 못했다는 거군.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짐승주제에 다른 사람 생각도 하다니, 이거 코가 꿰어도 단단히 꿰었구나.
“어째, 잘 안되시나 봅니다.”
류 강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장죽을 빨아들이는 태자를 쳐다보았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미끈한 얼굴과 저 몸을 가지고, 거기다 태자인데도 안 넘어 가다니 그 아가씨도 보통내기가 아니구만. 대체 어떤 아가씨가 짐승과 얽히려는 미친 짓을 하나 했더니만 정말 대단한데?
“혹시, 옷도 그 아가씨께서 입으시라고 말씀하셨던 겁니까?”
“......”
아가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오. 난 거죽만 보고 홀라당 넘어간 정신 빠진 아가씨인줄로만 알고 오해했구려. 정신이 똑바로 박히신 분이셨구만. 내 사죄하겠소. 어떤 큰맘을 먹고 짐승을 사람 만들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소.
이렇게 되면 그동안 짐승이 얌전했던 것은 그 아가씨의 조련 탓이 크고, 잘 안되니까 기분이 나빴던 거구만?
류 강연은 굳게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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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제 글에 후원까지 해주시는 분들 너무나 감사합니다. 코멘에 남기기는 했었는데 못 보실 것 같아 이곳에 수줍은 감사의 인사를 올려 봅니다.
또한, 선추코 해주시는 모든 분들 사, 사, 사랑 합니다. *^^*부끄
감사의 표시로 제가 드릴것은 이것 밖에 없네요. 연참 바로 들어 갑니다~
PS. 근데 제 보물 -쿠폰- 그거 어떻게 사용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