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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20화 (20/110)

00020  짐승, 상태가 수상하다  =========================================================================

두 사람이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집무실을 나가버린 뒤 화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류 충의 집무실에 홀로 앉아 있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슷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 반복 되는 게 데쟈뷰 라도 격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폐하께서는 오라버니가 태자전하 대신 군총부로 가야 할 때에는 아버지만 부르시거나, 오라버니와 같이 있을 때에는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같이 부르셨다. 문제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이러시는데...이쯤 되니,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폐하께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면서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생겼다.

어떻게 매번 이렇게 식사를 방해하는지...아버지는 집에도 못 들어오시고 일만 하시느라 얼굴도 수척해 지셨는데...오늘은 또 무슨 일이 길래 두 분 다 저러시는지...한숨을 쉰 화연이 속곳을 싼 보자기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약밥을 담은 통과 화렴주(식후에 후식으로 자주 마시는 붉은 빛깔의 도수가 매우 약한 술, 새콤하며 톡 쏘는 맛)를 담은 통을 류 충의 책상 한쪽에 놔둔 뒤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남자가 있는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연은 전각 입구 양쪽에 서있는 문지기에게 다소곳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오셨네요.”

매번 지나갈 때마다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보기만 하고 인사는 한 번도 받아준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문지기 두 명 모두 인사를 받아주었다.

“네, 오늘은 인사를 받아주시네요. 저 기억하세요?”

“그럼요. 방문하는 사람도 없는데 기억 못하는 게 더 이상하죠. 근데, 매번 이런 무서운 곳에 뭐 하러......”

웃으면서 활발하게 말을 하는 갈색머리 남자, 민 결에게 수염 덥수룩한 남자, 제갈 명이 눈을 부라렸다.

“입 조심해. ‘중랑결의’ 잊었어?”

“내가 뭘......음, 아가씨, 어서 들어가시죠.”

“네? 네. 아! 아직 식사 전 이시면 고기 전을 좀 싸왔는데, 드릴까요?”

민 결이 제갈 명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렸다.

“아직 식전이기는 한데...”

“씁-”

“아, 왜! 주신다는데! 넌 먹지마!”

제갈 명이 화연을 흘끔 보며 작은 소리로 빠르게 말했다.

“야! 너, 짐...알면 곱게 죽지는 않을 걸? 먹이 빼앗기고 가만히 있는 짐... 봤어? 빼앗긴 만큼 널 갈아 마실지도 몰라. 이게 겁 대가리 없이...”

경비대원들은 이 아가씨가 며칠 째 방문해 짐승의 먹이를 챙겨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이 아가씨가 최고의 화제였다.

어디의 아가씨인데 그런 무섭고 소름끼치는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대범하기도 하다며 모이기만 하면 이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이 아가씨가 드나들기 시작한 초기에는 짐승의 상태가 아주 불안정 한 것이, 종잡을 수가 없어 청룡궁 안의 모든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점점 안정을 찾더니 이제는 아가씨가 왔다 가면 짐승의 기분이 최고로 좋아 진다는 것은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기분 좋아진 짐승은 아가씨가 돌아간 후에도 몇 시간 동안은 얌전히 있으면서 웬만한 일은 눈감아 주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짐승은 저 아가씨를 꽤 맘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이 아가씨는 어느 집안의 아가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철없이 짐승의 겉 거죽에 속아, 자신의 행동이 맹수의 아가리에 스스로 머리를 집어넣는 정신 나간 짓인 줄도 모르고 드나드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아가씨가 그 겉가죽만 매끈한 짐승이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하며, 정상이 아닌지, 부디 끝까지 알아채지 못하고 오래오래 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비대원 중 주 해랑 이란 놈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 아가씨도 어느 집안 귀한 자식 일 텐데 저러다 큰일이라도 당하면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면서, 얼른 짐승의 본 모습을 말해주고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아가씨의 절대적인 효용가치를 알아 버린 그들은 겨우 찾은 짐승 조련사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경비대원 전원은 조용히 일어나 주 해랑을 이불로 덮고 발로 밟았다. 그의 쌍둥이 동생 주 아랑까지 합세해서 마구 밟아줬다. 살아있어야 죄책감도 갖지! 그럼, 이제 니가 조련할 거야? 1:1로? 이게 고생을 덜했지. 아주 빠져가지고...

기절한 주 해랑을 가운데 두고, 사실을 발설하는 자는 단매에 처 죽이기로 맹약을 맺은 그들은 기왕이면 아가씨가 끝까지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고 살아남아 오래오래 방문해 줬으면 하는 내용으로 치성까지 들였다. 이 사건이 바로 중랑결의(기절한 해랑을 가운데 두고 맺은 결의)이다.

재물에 눈이 멀어 청룡궁 종신계약을 해버리는 바람에 순식간에 궁 내 최고의 동정남(童貞이 아니고 同情)이 된 그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퇴역 후 그 노른자 땅에 있는 저택을 내 명의로 돌리고 말거라는 일념으로, 멀쩡한 아가씨를 사지로 밀어 넣었다는 죄책감은 접어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고기 전을 받네, 마네, 하며 투닥거리고 있는데 금속성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

귀신이 뒷머리를 잡아챈다고 하다라도 이 정도로 놀라고 무섭지 않을 것 같은데... 제발, 기척 좀 내라! 그들은 각자의 심장을 움켜쥐고 얼어붙었다.

화연은 크게 놀라지 않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가 전각 입구 안쪽 어두운 공간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두워서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눈은 선명하게 빛나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데 연우였을 때 봤던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는 흡혈귀가 인간을 짝사랑 하는 코미디 영화였는데, 흡혈귀인 남자주인공이 어두운 곳에 서서 두 눈을 빛내며 밝은 곳에 서 있는 여주인공을 훔쳐보던 장면이 있었다. 딱 지금처럼.

태자를 가만히 쳐다보던 화연이 갑자기 웃었다. 나비를 쓰고 있어 웃는 얼굴을 본건 아니지만 웃음소리는 분명히 들렸다.

민 결과 제갈 명이 화들짝 놀라며 간이 콩알 만해져서 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 아가씨도 이제 못 보겠군...그런데, 틀림없이 태자가 특유의 싸늘한 기운을 풀풀 풍기면서 아가씨의 목을 가로로 자를까 세로로 자를까 고민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잘 보이지는 않지만...웃고 있는 것 같았다.

심지어, 비웃는 것도 아닌 기분 좋은 웃음 같았다. 응? 잘못 봤나? 그들은 사이좋게 눈을 비볐다.

“이리 와”

“그럼, 수고하세요.”

태자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들리자 화연은 경비 대원에게 양해를 구하는 미소와 함께 살짝 목례를 하고 궁 안으로 들어갔다.

셋 중에 운 좋으면 하나, 보통이면 둘, 재수 없으면 셋 다 죽어 나갈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짐했다. 저 아가씨가 이곳에 오래오래...좀 미안하긴 하지만 가능하다면 자신들이 퇴역할 때까지 드나드실 수 있도록 오늘부터 정성을 다해 치성을 드려야겠다고.

여자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는데도 들어주지도 않는다. 화연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휴...그런 기본 상식도 못 배웠구나...

“찬합 좀 들어주세요. 무거워요.”

앞서가던 무영이 쓱 돌아보더니 아무 말 없이 찬합을 들어준다. 그 고분고분한 태도에 화연의 마음이 흐뭇해 졌다. 말썽만 피우던 아이도 잘못된 일이라고 계속 가르쳐 주면 언젠가는 고친다. 그래...하나하나 가르쳐 주면 되는 거야.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까. 생각해보니 점점 말도 잘 들어주고 때도 안 쓴다. 아직까지 편식은 못 고쳤지만...오늘은 편식고치기를 다시 시도해 볼까.

3층에 도착해 창가에 찬합을 놓은 무영이 화연에게 머리를 들이 밀었다. 화연은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지만 감추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의 눈이 가늘어지며 은색으로 빛났다.

그가 내 말을 잘 들어 주는 건 이 반대급부 때문이 컸다.

몇 번을 드나드는데도 제대로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적이 없어. 엊그제 옷을 좀 입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었다.

“싫어. 답답하고 기분 나빠.”

“계속 그러고 있으면 궁녀들이 들어 올 수가 없어요. 궁을 관리해 줄 사람은 있어야지요.”

“너는 오잖아”

“저는...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은데, 저도 처음에는 많이 놀랐어요.”

“그럼 됐네.”

“그게 아니고요. 저는 그런데, 다른 궁녀들은 안 그럴 거란 말 이예요.”

“상관없어. 내가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니야”

“뭐가 상관없어요. 궁을 청소해주고 당신을 도와줄 사람이 궁녀인데.”

그는 배연에 등을 기대더니 고개를 뒤로 약간 젖히면서 눈은 살짝 내려뜨는...그러니까 엄청나게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궁녀 따위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야된단 말이야?”

오만하기 짝이 없는 그 말에 화연은 인상을 쓰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이 큰 궁 안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지낼 거예요?”

“바라는 바야. 시끄러운 건 질색이거든. 너만 오면 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보고 여기에 매일 같이 와서 청소를 하라는 말씀이세요?”

“아니. 하지마.”

“네? 뭘요?”

“청소”

“그러니까요. 제가 할 수 없으니까 다른 궁녀라도...”

“됐어”

“그럼, 계속 혼자 계실 거예요? 이 썰렁한 궁 안에서? 외롭게?”

“너 오잖아”

“......”

아...또...화연은 피곤해 졌다.

아까부터 대화가 계속 도돌이표로 돌았다. 화연은 이성적인 대화로 설득시킬 생각을 버렸다. 이 남자는 말 안 듣는 6살 꼬마고, 애들한테는 채찍보다 당근이지.

“옷 입으면 그거 해 줄게요.”

“......뭐”

“머리 만져 주는 거요.”

“그냥 지금 해.”

“어머! 제가 말씀 안 드렸어요? 그거, 이젠 안 해 줄 건데...”

그의 눈이 싸늘한 기운을 풍기기 시작하자 시침을 때며 눈을 돌려 손톱을 들여 다 보는 시늉을 했다.

“왜?”

무영의 낮은 목소리에는 니가 나를 만지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 좋은 말로 할 때 하라는 협박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자신의 몸에 손끝이 닿았다고 내관 세 명을 도륙한 일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졌다.

“예뻐야 해주죠. 별로 어렵지도 않는 일일 텐데, 그런 것도 안 들어 주고...저도 별로예요”

“......”

“만날 저 무거운 거 들고 여기까지 오는데...음...생각해보니 더 섭섭하다...”

말을 하면서 힘이 빠졌다는 듯이 어깨를 푹 내리고 슬쩍 그의 눈치를 봤더니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묻어있었다. 남들이 볼 때는 무표정해 보였겠지만 화연의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다.

“정말 안 들어 줄 거예요? 난 들어줬으면 참 좋겠는데.”

“......걸치기만 할 거야.”

이 정도에서 한걸음 물러나 줘야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화연은 고른 이를 드러내 보이면서 활짝 웃었다.

“정말요? 그래요. 너무 답답하면 그냥 걸치기만 해요. 사실 날씨도 추운데 그 동안 너무 추워보였어요. 지금 입을까요?”

“......”

화연의 웃는 얼굴을 보던 그가 아무 말 없이 일어서더니 벽에 세워져 있던 장궤에서 화려한 비단 저고리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비단으로 된 저고리는 등판에 날아오를 듯 꿈틀거리는 용이 황금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지만 그냥 쑤셔 박아 뒀던 건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다.

이 옷은 무영이 며칠 전 의전에 들어갈 때 입은 옷이었는데 궁에 돌아오자마자 벗어 바닥에 내팽개친 옷을 다음날 류 강연이 주워 장궤에 쑤셔 넣어 둔 것이었다.

“...이거 밖에는 없어요?”

“싫으면 말던가.”

던져 버리려는 무영의 손짓에 화연이 다급하게 옷 끝을 붙잡았다.

“누가 만들었는지 정말 예쁘네요. 아깝게 왜 안 입고 다녀요. 이제 꼭 입고 다니셔요. 아셨죠?”

무영은 아무 말 없이 저고리를 화연 손에 들려주고 등을 돌렸다. 고개를 갸웃하던 그녀는 아...하며 무영에게 저고리를 입혀주었다.

저고리를 걸친 그는 온 몸으로 ‘나 기분 나쁘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옷 입는 것이 뭐라고 그렇게 기분이 나쁠까?

“그렇게 싫어요?”

“응. 미끌미끌한 뱀 비늘 같아”

“어휴...뱀 비늘이 뭐예요. 이렇게 좋은 옷인데...만들어 준 사람이 참 섭섭하겠네요.”

“알 바 아냐. 뱀 비늘 맞아.”

화연은 누가 뭐래도 이것은 뱀 비늘이라고 주장하는 고집 센 그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어렸을 때 부모님 속 엄청 썩였겠구나.

“후......그럼 저번에 저한테 나비 벗지 말라고 하셨던 거 기억해요?”

“응”

“저는 그 뒤부터 밖에서는 절대로 나비를 벗지 않아요. 당신 부탁을 기억하고 들어준 거죠. 당신은 어때요? 내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있어.”

“저는 당신이 옷을 입으면 참 좋겠어요. 이게 제 부탁이에요. 들어줄 수 있어요?”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엉뚱한 질문을 꺼냈다.

“옷을 입은 남자가 좋아? 벗은 남자는 싫고?”

이상한 질문이었지만 화연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두 팔을 들어 올려 원을 크게 그렸다.

“네! 그럼요. 저는 입은 남자가 훨-씬, 이만-큼 더 좋아요.”

남자는 화연이 그린 원의 궤적을 눈으로 쫒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하고 중얼거리다가 못이긴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화연이 기뻐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그는 머리를 화연에게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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