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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13화 (13/110)

00013  짐승, 꽃을 발견하다  =========================================================================

류 강연은 화연의 얼굴도 못보고 아침도 못 먹은 채 주먹밥하나 달랑 들고 류 충과 같이 마차에 올랐다. 몸 상태는 입궁을 하는 것이 아니고 퇴궁을 해야 할 만큼 녹초가 되어있었다. 땀내도 살짝 나는 것 같았다.

류 강연은 내궁 앞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려 류 충에게 힘없이 인사한 뒤 청룡궁으로 향했다. 팔이 욱신거리는 것이 찜질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청룡궁의 입구 앞을 지키던 경호 대원들이 경례를 했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저...대장님...그런데...”

“왜, 또”

“공조서(供造署, 환제국의 궁의 단장을 전담하는 부서)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청룡궁을 단장해야 하는데 태자전하 때문에 아직도 못하고 있다고...연통 좀 주시라던데요.”

“...후...알았다.”

류 강연은 썰렁한 청룡궁으로 들어갔다. 다른 궁 같았으면 궁녀부터 내관까지 북적거렸을 텐데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여기를 누가 태자가 거하는 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누가 목이라도 매달고 죽은 귀신 붙은 궁이라고 하겠지.

터덜터덜 무거운 발을 끌면서 올라가 삼층 태자의 침소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방안에는 연초 연기로 자욱했다. 콜록거리면서 창으로 다가가 창을 덮고 있는 가림막을 들어 올려 옆에 고정시키고 창을 열었다. 찬바람이 들어오니 좀 살 것 같았다.

“후유...”

그때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는데 목에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전하”

태자 무영(無影)이었다.

기척도 없이 다가와 칼을 류 강연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류 강연은 기척은커녕 칼을 뽑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 살기도 느끼지 못했다. 하긴, 태자는 살기를 드러내지 않고도 사람을 아주 잘 도륙내고는 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류 강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고 칼끝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진짜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칼끝은 쉽게 밀렸다.

“전하...왜 이러고 사십니까! 짐승도 아니고! 궁도 단장을 하고 이제 슬슬 태자로서 정무도 보셔야 지요. 궁에 무슨 소문이 도는 줄은 아십니까? 사나운 짐승이 궁에 어슬렁거리면서 내관들을 습격해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궁에 파다합니다!”

태자인 자신을 사나운 짐승에 비교하는데도 무영은 심드렁했다.

“흠...”

“휴...공조서 소속 내관들은 왜 또, 다 내 쫒으셨습니까.”

“시끄러워서”

“궁녀들은요!”

“걔들은 내 쫒은 적 없는데?”

류 강연은 무영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풍기는 기운만 해도 사람을 압도시키는 패도적인 기운이 흐르는 데다, 6척을 훌쩍 넘는 장신에 황족을 나타내는 붉은색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여기저기로 뻗어 있었다.

그것만 해도 흉포한 맹수 같아 무서울 지경인데 특히 저 황금색의 눈동자는 환한 곳에서 봐도 오싹하지만 어두운 곳에 서라도 보면 눈만 번쩍이는 게 짐승의 그 것과 매우 흡사 했다.

황금색 눈동자 속에 아주 가끔 기분 좋을 때 나타나곤 하는 은색 실이라도 보일 때면 진짜 맹수 같아, 그 눈으로 주시 당하면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쟁터에서 저 눈을 빛내면서 적들의 사지를 도륙하는 것을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같은 편인 것이 참 다행이라고 느껴지면서 오히려 적들이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아무 행동 없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했는데도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는 병사들이 한둘이 아니었지...

저런 날 것 그대로의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남자가 복식을 다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닌 반쯤 헐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는데 어떤 궁녀가 버티겠는가.

안 그래도 어두운 곳에서 짐승의 눈을 봤다며 소변을 지리며 혼절하는 궁녀와 내관이 한둘이 아니라 태자 좀 어떻게 해달라는 공조서의 항의를 한, 두 번 받은 게 아니었다. 그런 소문이 아무런 이유 없이 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영이 배연에 기대며 게으른 사자처럼 비스듬히 누었다.

장죽을 깊이 들이 마시자 그의 단단한 가슴이 부풀어 오르면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흉터가 꿈틀거렸다.

“전하...복식도 좀 제대로 갖추십시오. 지금이 한여름인줄 아십니까? 그러고 계시니까 궁녀들이 못 버티고 다 나가는 거 아닙니까. 창은 또 왜 죄다 가려 놓으셨습니까.”

“답답하고, 눈부셔”

그러니까 옷은 답답해서 못 입겠고 창을 가린 건 눈부셔서 가렸다는 거다.

무영의 눈은 그 색 때문인지 빛보다 어둠이 더 편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전쟁터에서도 밤에 대낮처럼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는 했었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짐승 같았다.

“그렇다고 햇빛이 불편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여기가 청룡궁입니까? 폐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무영은 눈을 감고 장죽만 깊이 빨아들였다. 그 모습을 보는 류 강연은 속이 답답해  지면서 괜히 이 직책을 맡았나...짐승 한번 사람으로 만들러 보려고 했는데...후회가 막심했다.

“손은 왜 다치셨습니까.”

“......”

또 뭔가를 때려 부쉈겠지. 당연히 화나서도 아니고 짜증나서도 아니었겠지. 걸리적  거리면 다른 곳으로 치우면 될 것을 그냥 눈앞 에서 없애버린 거겠지...

류 강연은 한숨을 내쉬며 가지고 있던 서책을 폈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어떻게 지내는지, 밥은 잘 먹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을 궁금해 하는 연제를 위해서 매일 올리는 태자 일지였다.

오늘은 또 뭐라고 말을 지어내야하나...이러다 글쟁이 되겠다...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여기 가져다놓은 탁자랑 의자 어디로 갔습니까?”

“.....”

“...그래서 손을 다치셨군요...”

아...진짜 자신의 상관이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짐승 같은 짓만이라도 좀 안했으면 좋겠다. 짐승 같이 생겨서, 짐승처럼 행동하며, 짐승 수준으로 말이 안 통하는 자신의 상관을 생각하니 지금이라도 연제에게 가서 직책을 바꿔달라고 매달려볼까...하는 고민에 빠졌다.

“훗...”

하는 수 없이 구걸하는 거지처럼 바닥에 엎드려 일지에 쓸 내용을 고민하고 있는데 어디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드니 배연에 기대어 나른한 얼굴에 붉은 입술을 살짝 들어 올려 미소 짓는 무영이 보였다.

살짝 입술을 핥고 들어가는 붉은 혀와 육감적인 입술을 보는데 왠지 오싹하면서 뒷머리가 바짝 섰다.

왜 이러지? 아침부터 찬바람 맞으면서 땀을 흘렸더니 고뿔이라도 걸리려나...? 류 강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오늘은 웬일로 기분이 좋으신가 보다.

여렸을 때부터 봐 왔지만 무영이 저렇게 만족스럽게 웃었던 적은 손가락에 뽑힐 정도로 드믄 일이였다.

그것도 거의 다 전쟁터에서였는데. 그때 한 1~200명 정도는 죽이고 나서야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고는 했는데...뭐지? 오늘 또 누구를 죽이시려나? 아니면...이미 죽인 거 아냐?

“전하...혹시,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으십니까?”

“왜”

“기분이 아주 좋아보이시는데요? 이제껏 처음 봅니다.”

전쟁터에서도 이렇게 기분 좋아 보였을 때는 없었는데.

“별로”

“...설마... 누구 죽이셨습니까?”

“......”

“제가 첫날에 아무나 그렇게 죽이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이미 누굴 또 죽였구나...류 강연은 머리가 아파왔다.

무영은 청룡궁에 입궁하자마자 내관 3명을 도륙하고 한명의 팔을 잘랐다.

첫날 청룡궁에 있는 내실 중 하나를 치우러 들어간 궁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면서 바로 혼절을 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무슨 일인가 깜짝 놀라 서둘러 들어가 보니 목욕통이 놓여있는 방안에 목이 떨어진 시체 몇 구가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사방에 피 칠갑이 되어있고 피 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신을 수습하다 보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내관 하나가 숨을 쉬고 있어 서둘러 의궁으로 보냈다.

그 난리가 벌어졌는데도 침소에서 배연을 끓어 안고 뒹굴 거리며 태연히 장죽만 태우고 있는 태자에게 다가갔다.

생각 같아서는 저 벌건 머리통이라도 한데 후려치고 싶은데 그러지는 못하고, 너무 오래 전장에 있어서 기억이 안 나시나 본데 궁에서는 사람을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고 어르고 달랬다.

그러면서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자신을 만져서 그랬단다. 그때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그럼 목욕을 시키고 의관을 정제시키려는데 어떻게 몸을 안 만지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싫으면 만지지 말라고 미리 경고라도 하던가! 가만히 있으면서 제 몸에 손대기만을 기다렸던 거야, 뭐야?

윽...머리야...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진짜 고뿔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이따가 의궁에 들려 약이라도 타가야겠다.

“후...시체는 어디다 두셨습니까. 저번처럼 아무 방에나 쑤셔 박아둔 건 아니시겠지요?”

“안 죽였어”

“네?”

“아무도 안 죽였다고.”

그렇게 말하는 무영의 표정은 원한다면 이제라도 누구 하나 죽여줄까, 하는 표정이었다. 누구도 안 죽었다니 쓸데없는 일은 안 해도 되니 좋긴 한데...

“그럼, 왜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가요?”

“불만이야?”

가늘어지는 황금색의 두 눈을 쳐다보니 더 이상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목숨에 위협을 느낀 류 강연은 이쯤하고 화제를 바꾸려 입을 여는데 무영이 대뜸 물었다.

“재상께서 바쁘신가?”

“네? 아, 네. 안 그래도 바쁘셨는데, 오늘부터는 아주 눈 코 뜰 새 없으실 겁니다. 인력 차출 때문에 행궁에 비상이 걸려서요.”

말하다 보니 어제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던 일이 생각났다.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던 류 강연은 궁금해 하던 차에 무영이 말을 꺼내줘서 잘 됐다 싶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전하, 어제 의전에서 왜 그런 청을 드리신 겁니까? 진짜 전하께서 말씀하신 건 맞으십니까?”

“어”

“아니, 왜요? 진짜 군인들의 복지를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실 테고... 혹시... 아버지께서 전하께 뭔가 실례 될 만한 행동을 하셨습니까?”

그래서 보복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는데...가만...아니지...이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만한 사람이 아닌데...수틀리면 먼저 죽이고 보는 이 사람이 골탕을 먹이려고 머리를 썼다고? 그 자리에서 목을 날리면 날렸지 그럴 사람이 절대 아닌데...

“맞아”

“네? 정말 아버지께 보복하시려고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지가 뭘 그렇게 잘못하셨는데요?”

“그게 아니고, 복지. 그거 맞다고.”

“복지가 맞다 고요? 복수가 아니라? 보복도 아니고? 복지?”

“응. 복지”

“......”

“그리고, 나 류 재상 좋아졌어. 이제 친하게 지내려고”

그렇게 말한 뒤 슬쩍 웃는 무영을 보는데, 그 웃음이 어찌나 요사스럽고 스산한지 버럭 외치고 싶어졌다. 그럴 거면 좋아하지 마!

“......네”

아버지에게 미리 경고를 해둬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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