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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12화 (12/110)

00012  짐승, 꽃을 발견하다  =========================================================================

류 충은 오후 어전회의를 다시 생각하니 목에 핏대가 서면서 뒷목이 뻣뻣해져 왔다.

“그 망나니 놈이 무슨 쥐약이라도 쳐 먹은 게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느냐 말이다. 아니, 지가 언제부터 행궁을 걱정했다고! 언제부터 군인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고! 이건 나를 골탕 먹이겠다는 음모가 분명하다! 의전에도 미리 왕하고 짜고 나서 아닌 척 하고 나타난 것이 분명해. 윽!”

“아버지! 고정하세요.”

화연이 뒷목을 잡는 류 충을 부축했다.

류 강연은 지금 들은 말이 이해가 안됐다.

태자가 회의 중인 의전에 난입했다, 이것까지는 충분히 이해가 됐다.

근데, 그 이후부터 전혀 이해가 안됐다.

그, 태자가 청이 있다고 그랬다고? 그것도 안 들어 줄지도 모르니 그냥 말 안하겠다고 했다고? 그렇게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고?

그러다가 꺼낸 말이 어디에 나라를 따로 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세계정복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암흑마루(태국과 인접해져있는 거대한 수해. 길이가 9척이 넘는 철목(鐵木)들로 빽빽하게 이루어져 한 낮에도 그 안까지 해가 비추지 못해 항상 밤과 같이 어두움. 때문에 괴식물과 괴동물의 서식지로 널리 알려 있음. 지금까지 들어가 본 사람은 있지만 나온 사람 은 없음)를 횡단해 보겠다는 것도 아닌, 군인들 복지에 대한 말이었다고?

“아버지...혹시 꿈꾸셨습니까?”

“그치?! 너도 믿기지 않지! 아까, 그 놈이 진짜 그러고 갔다니까? 나도 아직까지 믿기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요?”

가만히 생각하던 화연이 슬그머니 의견을 제시했다.

“혹시, 진짜로 걱정이 돼서 그런 건...”

화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 상연과 류 충이 동시에 말했다.

“아니! 그건 절대 아니야.”

“내 딸. 이렇게 순진해서 어찌 살꼬...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놈이었으면 애비가 업고 다녔을 거다. 밥도 떠먹여 줬을 걸?”

“...그럼 갑자기 왜 그럴까요?”

화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류 충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깨물어 주고 싶은 이 모습도 한동안 못 보겠구나...

“글쎄다...미친 짐승이 하는 일을 사람인 내가 알 리가 있겠니...그나저나 이제 집에도 잘 못 들어 올 텐데 우리 연이 보고 싶어서 이 애비 어떻게 하나...”

“아버지...이제 잘 못 들어오세요?”

“한동안 인력 차출 때문에 비상 걸릴게다. 그럼,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있어야지...어휴...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졌길래...”

시무룩한 류 충의 얼굴을 화연이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럼, 아버지. 제가 갈게요. 아버지 속곳도 챙겨드리고 식사도 챙겨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안 된다. 그 늑대소굴에 너를 오라고 할 수는 없지. 내가 아무리 급해도...”

“맞아. 연아, 거기는 근처에도 가지마. 그런데는 가는 거 아냐.”

류 강연까지 행궁에 가는 것을 말렸다.

“나비 쓰고 다니면 되요. 오늘도 갔었는데 아무도 신경도 안 쓰던데요?”

“뭐? 연이, 네가 오늘 궁에 들어왔었다고? 아니, 언제?”

“네, 오늘 점심때 쯤 갔는데 아버지가 오찬에 초대받으셨다고...”

“윽! 어쩐지 가기 싫더라니! 애비 없어서 그냥 돌아 갔던게야... 으이구, 내 새끼. 이쁘기도 하지...추운데 고생했겠구나.”

“아니에요. 전혀...어...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나비를 쓰니 아무도 신경을 안 썼다는 거예요. 오히려 자기에게 말 걸 까봐 눈도 안 마주 치던데요?”

“음...그놈들은 그럴 놈들이긴 하지. 요즘, 지 얼굴 볼 시간도 없을 텐데, 누구 쳐다보고 다닐 시간도 없는 건 맞긴 하다만...그럼, 괜찮을 거 같은데? 강이, 네 생각은 어떠하냐.”

“제가 태자의 호위대 수장으로 발령이 났으니, 연이 올 때마다 태자에게 말씀드려서 시간을 잠깐씩 내겠습니다. 연이가 저와 같이 있으면 그래도 아버지 마음이 놓이시겠지요. 저도 그렇고요.”

“참 나...그놈이 호위가 필요하기나 하냐? 짐승 놈한테 무슨... 오히려 그 주변사람에게 호위를 붙여도 모자라겠구만...어휴~ 너도 고생이 많구나. 그럼, 그러겠느냐? 근데, 그 미친놈이 네 말을 들어주겠느냐?”

“제가 옆에서 춤을 추던, 술을 마시던, 연무를 하던 별 상관 안 할 겁니다. 제가 옆에 없으면 더 좋아하실 거고요. 그건, 걱정 마세요.”

“그래,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럼, 연이야 애비 만나러 만날 오련?”

“호호호, 아버지만 괜찮으시다면 그럴게요. 저는 걱정 마시고, 아버지 건강을 좀 챙기세요. 과로 하시면 큰일 나요.”

“오냐, 오냐. 어이구, 내 딸. 이 애비는 너와 천년만년 살 거야. 과로 같은 거 절대로 안하마. 이 애비 걱정 말거라.”

화연은 식사 후 기분이 다시 좋아진 류 충과 차까지 같이 마시고 기해와 같이 자신의 별채로 걸어오는데 문득 점심 때 본 그 남자가 생각이 났다.

태자전하와 관련이 있는 남자인가? 그럼, 태자전하에게 부탁이라도 한 건가? 아니지...밥 먹여 줄 사람 구하자고 그런 일을 태자전하에게 부탁했다고? 에이...말이 안 되잖아...나도 참...

“기해야. 내일부터 아버지가 바빠지실 거야. 집에도 잘 못 들어오실지 몰라. 그래서 내가 직접 행궁으로 뵈러 가기로 했어.“

“헉!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 어르신 정말! 제가 그렇게 말씀 드렸는데! 저, 당분간 아기씨 잔치 준비 때문에 바빠서 따라 다니지도 못 한다 구요!”

“괜찮아. 걱정 하지마. 저번에 나비 쓰고 가니까 아무도 아는 척도 안하더라고”

“그 나비가 더 요상한...암튼, 안돼요! 제가 어르신께 가서 말씀을 드려야겠어요. 식사나 의복은 다른 사람보고 챙기라고 할게요.”

“아냐. 그러지 마. 그럼 의미가 없지. 내가 챙겨드리고 싶어서 그런 건데... 그리고 어차피 궁에 들어가면 강이 오라버니가 같이 다녀 주실 거야.”

“흠...둘째도련님이요? 강이 도련님 이면...그럭저럭...뭐, 크게 믿음직스럽지는 않지만...어휴...요즘 제가 꿈자리도 뒤숭숭 한 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요”

“왜?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아, 글쎄, 저번에 꿈을 꿨는데 동굴 안에 아기씨께서 홀로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것도 홀딱 벗고 말예요.

제가 화들짝 놀라서 겉옷을 벗어들고 동굴 안으로 막 뛰어 들어가려는데 어디서 나타난 건지, 갑자기 집채만 한 맹수가 떡! 허니 나타나서는 잠들어 있는 아기씨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곁에 떡! 허고 드러눕지 뭐예요.

그러고 드러누워서는 아기씨 얼굴에 그 큰 대가리를 마구 비벼대더니 팔뚝만한 크기의 씨뻘건 혓바닥을 내밀어 아기씨 얼굴을 여기저기 마구 핥는데... 아우, 소름끼쳐...

아기씨가 잡아먹히는 줄 알고 제가 얼마나 놀랬는지 아세요. 옷으로 펄럭거리면서 겁을 줘 봐도, 돌을 마구 던져 맞춰 봐도 꿈쩍도 안하고 오히려 제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도 으르렁 거리면서 겁을 주는데 그 큰 이빨이 어찌나 날카롭고 끔직 하던지...

제가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동굴 입구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꿈을 꿨지 뭐예요. 그 맹수가 호랑이도 아닌 것이 사자도 아닌 것이 아주 사납고 잔인해 보이는 게 여간 무서운 게 아니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을 정도였다니까요.”

“풋- 개 꿈 같은데?”

“그 뒤부터 아주 불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예사 꿈은 아닌 것 같아요. 아기씨 혹시 궁에 들어가셔서도 산속으로 놀러 가신 다 던지 동물을 만지신 다 던지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마셔요. 아셨죠?”

“궁 안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안전 때문에 내궁 안에는 나무도 없는데...너도, 참...”

“아 참, 그렇죠? 그래... 개 꿈 이었구만. 어휴, 그럼 저는 둘째 도련님만 믿고 있어야겠네요.”

“그래. 괜한 걱정하지 말고, 빨리 들어가자. 춥다”

“네, 아기씨”

기해는 꿈속의 그 불길한 맹수의 털이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색이었다는 것까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아기씨를 곱게 지켜야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예지 몽까지 꾼 기해는, 정작 자신이 꾼 꿈이 예지몽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나중에서야, 이 꿈이 예지몽이였구나, 하고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어있었다.

류 강연은 아침부터 바빠서 정신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씻지도 않았는데 기해가 기다렸다는 듯 득달같이 달려왔다.

“도련님 뒷마당에 묻혀있는 독 좀 꺼내 주세요.”

아침부터 상전에게 노동을 요구하는 기해의 얼굴은 아주 당당했다.

류 가(家)는 그 옛날, 류 가(家)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아랫사람 윗사람 구분 없이 모두 가족처럼 지냈다.

물론, 신분의 위아래는 있었지만, 그건 가족 구성원 중 아버지와 어머니를 구분하는 것과 같을 뿐 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지만 둘을 차별하는 일은 없고, 자식과 부모 또한 그 구분은 있지만 이 또한 차별하는 일은 없듯,  류 가(家)에 사는 아랫사람들은 가주를 비롯하여 류씨 성을 가진 직계를 자신의 부모 또는 형제 또는 자식이라고 생각했고, 류씨 가문의 사람들 또한 아랫사람을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던지 그 일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위, 아래 구분 없이 모두 동원 되서 함께 일하는 것도 류 가(家)의 전통이었다.

아니, 류 가(家)뿐 아니라 류 현(縣)의 전통이었다. 아마, 기해는 이 일에 가주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면 가주까지도 깨웠을 것이 분명했다. 화연 이였다면 안 깨웠겠지만.

“뭔데?”

“작년 아기씨 생신 때 쥬유(환제국의 겉이 검고 딱딱한 열매, 달콤새콤한 맛이 난다. 말려서 차에 넣어 우려 마시거나 누룩에 섞어 술을 만들기도 한다)를 섞어 묻어둔 누룩이에요. 이번 잔치에 쓰려고요.”

류 강연은 파헤쳐진 바닥에 반쯤 드러나 있는, 제 몸만 한 항아리의 귀를 잡아 올렸다. 가득차서 땅에 묻힌 항아리는 너무나 무거웠다. 아침부터 있는 힘을 다 짜내느라 이 차가운 날씨에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허리도 지끈 거렸다.

“윽!...으...”

“아휴~ 도련님, 그렇게 힘을 못 쓰셔야 되겠어요? 이봐요, 장씨 아저씨! 이거 주방에 갔다 놔주세요.”

도끼를 들고 지나가던 장씨가 다가왔다.

“어이고...이거, 그거지? 쥬유 섞은 누륵. 이제야 먹어보는구만? 여기 지나다닐 때마다 먹고 싶어 안달이 났었는데...흐흐흐...이보게, 라훈! 이것 좀 같이 드세.”

이 날씨에도 웃통을 까고 조끼만 입은 채 마당 한쪽에서 도끼질을 하던 건장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가슴이 땀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예, 형님. 도련님도 나와 계시네요. 어! 이거 그거군요? 형님 좋으시겠어요. 소원 푸시겠네요.”

기해가 눈을 후다닥 돌리며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야! 넌 좀 옷 좀 입고 다녀! 춥지도 않냐? 내가 남우세스러워서..,원”

어쩐지 이쪽으로는 시비들도 하나 안 보이는 게, 뒤에 우물이 있어 자주 오고 가는 길인데 왜 그러나 싶었는데 저게 저러고 있어 이쪽으로는 오고가지도 못 했었나 보다.

라훈은 기해와 같은 나이로, 류 가(家)에서 태어나 함께 자랐다.

평소에도 오누이처럼 투닥거리면서 그럭저럭 잘 지내는 사이였는데, 특히 도끼질만 하면 웃통을 벗는 저 고질병을 기해는 평소 질색을 하며 싫어했다.

“너 그러고 있으니까 이쪽으로는 아무도 못 오잖아! 볼 것도 없구만 좀 가리고 다녀라! 그거 민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라훈은 정색을 하는 기해를 대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듯 듯 씩 웃으며 의뭉스럽게 대꾸했다.

“자꾸 옷이 찢어지는데 어떻게 해. 덥기도 하고...니가 꿰매 줄 거야?”

“어머! 얘 말하는 거 보게. 내가 왜 니 옷을 꿰매 주냐?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꿈도 꾸지마! 웃겨, 정말...흥!”

여자가 남자의 옷을 꿰매 준다는 건 남자의 벗은 몸을 본다는 의미이고 그런 건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나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기해는 가차 없이 콧방귀를 날리며 획 돌아 주방 쪽으로 가버렸다.

“거, 참...앙칼지기는...쩝”

라훈은 뒤돌아 가는 기해의 통통한 엉덩이를 쳐다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는 그의 어깨를 장씨가 두들겨 줬다.

“기해, 쟤는 너무 드세. 내가 몇 번이나 말 했잖아. 주방 쪽 눈길을 돌려보라고. 여기 여자 중 드세지 않은 여자가 없긴 하지만 서도, 그래도 주방 쪽이 좀 나아, 쟤는 너무 심하지 않냐?”

라훈은 턱으로 떨어지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씩 웃었다.

“그게, 기해의 매력이에요”

“어이구...이 불쌍한 놈...”

가만히 서있던 류 강연은 이제 자기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  화연에게 가보려는데 저쪽에서 기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이쪽으로 와서 파루안 나무(대나무처럼 곧은 대에 실처럼 가는 잎이 자라는 나무. 줄기는 은색이며 나뭇잎은 청색) 좀 잘게 잘라주세요. 이거 도저히 안 되겠어요.”

“...나 입궁해야 하는데...”

“빨리요!”

터덜터덜 걸어 주방으로 가는데 뿌리가 잘린 파루안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 나무의 은색줄기는 땅 속에 뿌리가 잘 박혀있는 동안에는 다른 나무처럼 잘 잘리지만 뿌리가 땅밖으로 드러나거나, 잘리기만 하면 줄기의 겉껍질이 돌덩이처럼 굳어져 웬만한 장정이 칼을 휘둘러도 여간해서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독이 있는 뿌리를 자르지 않고는 쓸 수도 없어 참 손이 많이 가는 나무였다.

일단, 단단한 줄기를 잘게 잘라 결대로 껍질을 벗겨 내기만 하면 그 안에는 꿀처럼 달콤한 진액이 흐르는 속살이 나왔다.

류 가(家)에서는 특별한 일이 있거나 한해가 지날 때마다 이 나무의 줄기를 곱게 갈아 고소한 맛과 향긋한 향기를 풍기는 그 잎과 섞어서 떡을 해 먹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 떡은 파루안 떡이라고 불리는데, 한해를 시작할 때 먹기도 해 해살이 떡이라고도 불렸다. 만들어 놓으면 은색으로 빛나는 눈송이에 윤기 흐르는 청 녹색의 가는 실을 섞어 동그랗게 뭉쳐 놓은 것처럼 아주 예뻤다.

예쁘긴 예쁘지...만드는 게 너무 어려워서 그렇지...

“이거 꼭 만들어야 돼? 다른 떡 많잖아. 좀 쉬운 걸로 하지? 어차피 한 그루 가지고는 많이 만들지도 못하잖아”

기해가 눈을 세모로 뜨고 노려보았다.

“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기씨께서 이 떡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기억 안 나세요? 어렸을 때 아기씨께서 시름시름 앓으면서 아무것도 못 드실 때도 요거만 만들어 가져다 드리면 그래도 한입씩은 드셨단 말예요. 진짜 기억 안 나세요?”

아...그랬지...그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작게 베어 먹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구경하고는 했었는데.

그때, 파루안 떡은 류씨 형제들도 참 좋아하는 떡 이었는데 화연이 먹을게 부족할까봐 손도 대지 않았고 류 가(家) 장원 내 모든 남자들은 파루안 껍질 벗기느라고 손에 물집 안 잡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후...알았어.”

류 강연은 그 뒤로 손목이 끊어질 정도로 칼을 휘둘러 파루안 나무를 잘게 토막 냈다. 줄기와 칼이 닿을 때마다 쇳덩어리를 내리치는 것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이러다 칼날 다 상하는 거 아냐? 전쟁 중에도 이렇게 열심히 칼을 휘둘러 본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아침부터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둘째아들의 모습을 보던 류 충은 말했다.

“파루안 나무 오후에 한그루 더 도착할거다.”

그 말을 들은 기해가 반색을 하면서 기뻐했다.

“어머! 어르신 정말이에요? 이 겨울에 구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어디서 구하셨어요?

“셋째가 어디서 구했는지 보내왔더라. 뿌리는 못 잘랐다고 하니, 둘째 네가 퇴궁하면 손질 좀 하려무나.”

“아휴, 다행이다. 이걸 누구 코에 붙이나 했는데. 우리 아기씨 넉넉하게 드실 수 있겠네요.”

“고걸 우리 연이가 참 좋아했지. 어렸을 때도 그것만 주면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그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한입씩 먹었었는데...”

“저도 기억나요! 몇 입 못 드시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건 꼭 드실 정도로 좋아하셨죠. 못 드실 때에는 그냥 봐도 예쁘다면서 침상 옆에 올려 두고 보시기도 했잖아요.”

“그렇지. 생각난다. 참 귀여웠어.”

그때를 사이좋게 회상하는 류 충과 기해 사이에서 류 강연은 팔이 끊어져라 칼을 휘둘렀다. 그의 관자놀이에 맺혀있던 땀이 굴러 턱 끝에 매달렸다.

파루안 나무를 넝마로 만든 뒤 헉헉 거리고 있는데 결과물의 상태가 매우 맘에 들었는지 류 충이 그의 어깨를 두들겨 주면서 전쟁터에 가서 놀고 있지는 않았구나, 하며 칭찬해 주었고, 기해는 콩이 들어간 주먹밥을 쥐어주면서 오후에도 이정도만 해주시면 되겠다는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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