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짐승, 꽃을 발견하다 =========================================================================
지들끼리 쑥덕쑥덕하더니 태자가 제일 많이 받기로 했는지 연제가 헤벌쭉한 입을 가리고 내 눈치를 살짝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꼴이 얼마나 얄밉던지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리는데 의전으로 누군가가 입장한다는 출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아니, 회의 중 누가 들어온다는 거야?
예의도 없이...그럴 사람이 없는데...
“태자전하 납시오~”
그래, 한명 있었구나...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아니, 저 망나니 놈이 의전에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지가 들어오고 싶으면 안에서 회의가 진행되던지 말든지 신경 안 쓰고 제 멋대로 하는 놈이라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저 놈은 정말 예의가 없는 놈이었다.
예의가 약하다는 게 아니고, 원래, 놈의 미끈한 몸 안에는 예의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저놈 몸 안에는 색욕, 살인, 방탕 뭐 이런 것들만 있겠지. 겉보기만 미끈하면 뭐해? 안이 썩었는데...쯧쯧쯧...
류 충이 어이없는 눈으로 연제를 쳐다보니, 연제는 이제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눈치였다.
태자가 의전 가운데로 걸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태자, 무슨 일이냐. 의전이 시작되면 아무도 들어 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알고 있습니다.”
“그럼, 무슨 일로 중간에 난입을 한 것이냐”
“청 할 것이 있습니다.”
“응? 청? 부탁? 짐에게, 태자 네가 부탁을 하겠다고? 응? 부탁?”
연제는 깜짝 놀라며 몇 번을 확인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의전 내에 있는 모든 신료들은 깜짝 놀랐다.
저 망나니태자가 누구한테 부탁을 한다니... 자신의 힘으로 이루지 못 할 일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어 부탁은커녕 아쉬운 소리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태자가 부탁을 하다니...모두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네”
부탁을 하겠다는데도 저 오만한 자세 좀 보라지...얼굴에 좀 비굴한 기색이라도 비추던가! 저런 거 보면 참 제왕 감은 제왕 감인데...그 짐승 같이 본능적인 성격만 좀 어떻게 하면... 신료들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무, 무슨 청이 있어서...어서, 말해 보거라.”
태자가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그 모습을 본 연제는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데 갑자기 무슨 부탁이 생겼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말도 못하고 머뭇거리는걸 보니 마음이 안타까워 졌다.
“......”
“어허, 어서 말해보래도”
“......”
“태자! 말을 해야 애비가 들어볼 것이 아니냐...”
“들어주실 겁니까?”
“응? 말을 해야 들어주지”
“그러니까, 말을 하면 들어 주실 거냐는 말입니다.”
“들어보고 들어줄만하면 들어주겠지”
“......”
“태자!”
“...그럼 말 안 하겠습니다.”
...지금 장난 하냐!
의전 안에 있는 모든 신료들과 연제는 생각했다.
평소에는 그러지도 않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해서 그것도 회의 중인 의전에 까지 난입해서 사람 잔뜩 궁금하게 해 놓고는 정작 말을 안 하겠다니...몇몇 성격 급한 신료들은 자신의 가슴을 탁탁 두들겼다.
“아니, 태자. 말을 일단 해보래도. 말을 해야지 들어줄지 고민을 해볼 것 아니냐”
“......”
한참을 고민하던 태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그의 입에 주목했다.
“흠...그냥 됐습니다.”
“컥!”
평소 혈압이 높았던 신료 중 하나가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이보게! 공부상서(工部尙書, 환제국의 행정부 중 건축, 자연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 괜찮으신가!”
쓰러진 신료가 공부상서였는지 바로 옆자리인 형부상서(刑部尙書, 환제국의 행정부 중 법률을 담당하는 부서의 장) 의 처절한 외침이 의전에 울려 퍼졌다.
태자는 그 소란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연제에게 예를 올렸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태자, 거기 서 보거라! 말은 해주고 가야지. 말이라도 해보려무나. 웬만한 건 다 들어줄 터이니”
일어서려던 태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생각에 빠졌다.
의전 내 모든 사람들이 태자의 입만 주시하고 있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의전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생각에 잠겨있던 태자가 말을 안 하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서 버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류 충은 저 놈이 생전 처음 청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은 신기했지만 저놈이 나한테 말하는 것도 아니고, 말 한다고 해서 내가 들어줄 것도 아니라, 저 놈의 청이 무엇인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쑤시면서 말을 빨리 하던지 아니면 그냥 닥치고 꺼지던지, 어쨌거나 저 놈이 빨리 가버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자꾸 옆에서 옆구리를 찔러대고 연제까지 눈치를 줘, 가만히 있으려니 귀찮기도 하고 이러다 저 놈 때문에 퇴 궁 까지 늦어질 것 같아 하는 수 없이 말을 꺼냈다.
“폐하, 이번 전쟁에 대한 공으로 태자전하에게 상을 내리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상으로 태자전하의 청을 들어드리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연제가 반색을 하면서 기꺼워했다.
“오오, 그렇지. 그런 수가 있었구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에 대한 상으로 태자의 청을 한 가지에 한하여 무조건 들어주도록 하는데 경들도 다 동의 하시오?”
누군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의문을 제기했다.
“혹시...누군가를 죽여 달라고 한다던가...아니면... 죽여 달라고 한다던가...또... 죽여 달라고 한다던가...”
그 소리를 들은 태자가 피식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걸, 굳이 청할 필요 가 있을까요.”
아! 맞다.
생각해보니 태자가 그런 걸 일일이 청을 해서 허락을 받았다면 지금, 궁 안의 손 쓸 수도 없는 미친 야생짐승이라는, 그 어마어마한 명성 까지는 올 수도 없었겠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거나, 재산을 빼앗거나, 아니면 가족을 빼앗거나 하는 건 저 혼자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부탁은 아니니 걱정 마시죠.”
신료들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런 것만 아니라면야...
류 충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의전을 갈랐다.
“아, 그럼,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씀해 보십시오! 태자전하. 폐하께서 뭐든지 다 들어 주신다 하지 않습니까. 저희 아직 회의할 거 많이 남았습니다!”
“크흠...태자, 그래 말해 보거라. 청이 도대체 무엇이냐?”
“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고개를 한번 숙이고 다시 들어 올린 태자는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붉은 입술을 슬쩍 들어 올린 채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눈은 기분이 매우 좋은 듯 한껏 가늘어져서 눈동자 안에 은실이 마구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의전 내의 연제를 비롯한 모든 신료들은 등골이 오싹했다.
갑자기 추워지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저 요사스러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어준다면 뭔가 엄청난 일이 시작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연제가 화급히 태자의 말을 막으려는데 태자가 말을 꺼냈다.
“군을 교육시킬 교육담당자를 행궁에서 파견해 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안!...뭐?”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게 행궁 내 부서에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기본적인 교육을 담당해줄 사람들을 행정부에서 뽑아 파견해 주시면 군에서 열의가 있는 군인들 위주로 교육 한 뒤, 성과에 따라 행궁의 입궁시험을 볼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달라는 말입니다. 그 동안 행궁에도 항상 사람이 부족하지 않았습니까? 조금만 기다린다면 이제 인력부족은 면하겠네요.”
의전 안의 모든 신료들이 입이 쫙 벌어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류 충은 기가 막혔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현재도 인력이 부족해서 과로사로 죽을 것 같은데, 미래에 생길지 안생길지 모르는 인력을 만들기 위해 여기서 인원을 더 빼달라는 말이야? 이제부터 나한테 집에도 들어가지 말고 개처럼 일하다가 과로사로 뒈지라는 말이지, 이거
...이게 말이야? 똥이야?...
저 미친놈이!
“아니! 이, 미ㅊ...”
얼굴이 시뻘게진 류 충이 벌떡 일어나서 쌍욕을 퍼부으려는데 연제가 한발 빨랐다.
“윤허하겠다. 나라를 생각하는 태자의 깊은 심성이 짐의 가슴을 울리는 구나. 그러하니, 재상은 이를 위하여, 행궁의 각부에서 교육담당자를 뽑아 군총부(軍摠府, 환제국의 군 총괄기관) 로 보내도록 하시오. 자세한 것은 알아서 상의하도록 하고, 자, 오늘은 회의가 길어졌으니 이만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연제는 숨도 안 쉬고 빠르게 말한 뒤, 말이 끝나자마자 옥좌에 벌떡 일어서더니 뒤도 안돌아 보고 빠르게 의전을 빠져나갔다.
돌아서 빠져나가는 연제의 뒤통수에 발차기를 날리기 위해 책상을 밟고 올라서려는데 주변에 앉아있던 상서들이 일제히 팔다리에 매달려 말렸다.
“재상어르신! 제발, 고정 하세요!”
“놔! 이거 안 놔? 놔!”
“어르신! 고정하세요. 따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니까 더 못 참아! 놔! 놓으라고, 좀!! 헉헉헉...아이고...”
네 명을 매달고 거세게 움직였더니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앞이 캄캄해 졌다.
류 충은 책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건너편을 바라보니 내각 인간들은 어느새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었다.
의전 안은 행정부 관료들의 한숨소리로 가득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