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짐승, 꽃을 발견하다 =========================================================================
류 강연이 들어오면서 화연의 이름을 크게 외쳐 부르는 소리에, 류 충은 오찬 때 자신에게 벌어졌던 천인공로 할 사건에 대한 회상이 멈췄다.
“어머! 강이 오라버니!”
류 충을 말리던 화연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자신의 둘째오라비였다. 화연은 얼굴을 보자마자 뛰어 그에게 안겼다.
“어이쿠...하하하...어렸을 때 안아보고 처음이구나. 조금 무거워 졌는데?”
“오라버니! 너무 걱정했어요. 전쟁터에 계셨다고 들었는데.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죠?”
화연은 눈물을 글썽이며 혹시라도 다친 데는 없는지 류 강연의 얼굴을 이리저리 만지다가, 팔다리도 들여다보고, 손가락도 다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보았다.
오라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화연이 류 강연의 품으로 다시 안겼다.
류 강연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보면서 그녀가 하는 데로 다 맞춰주다가 품에 안겨오는 동생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녀가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본적이 없었는데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연이...내 동생, 이제 아픈 데는 없는 거지? 다 나은 거지?”
“응. 다 나았어요. 이제 건강해. 나 아픈데 없어요.”
류 강연은 화연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볼을 감싸 안았다.
말로만 전해 들었을 때에는 믿을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봐도 믿기기 않았다. 꿈만 같았다. 그 애가 아픈데 없이 이렇게 걷고 말하다니...하늘님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내 동생...연아, 이제 아프지 말아...오라비 가슴 찢어져 죽는 꼴 보기 싫으면 이제, 절대 아프지 말아라. 알았지?”
화연이 눈물을 닦으며 환하게 웃었다.
“네. 이제 절대 안 아파요.”
화연과 류 강연의 화기애애한 모습에 류 충은 애석하게도 전혀 동참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자식 둘이 좋다고 웃고 있으니 내장이 더 꼬이는 것 같았다.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둘 다 들어와 보거라!”
류 충, 화연과 류 강연이 식탁에 앉자마자 음식이 식탁위에 가득 차려졌다.
식탁위에 있는 나물반찬을 누군가라고 생각하며 잘근잘근 씹던 류 충은 그래도 분이 안 풀리자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연제, 그 놈이 나한테 복수를 하는 것이 틀림없어!”
류 강연이 한숨을 쉬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버지, 듣는 귀가 많습니다.”
“뭐! 뭐! 듣는 귀가 많은 게 뭐 어떻다고! 누가 듣고 연제한테 일러바치기라도 한다는 거냐? 흥! 웃기는 소리! 우리 집에서 그런 배신자는 너밖에 없다.”
“후~아버지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아까 니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느냐? 우리 연이가 태자비로 뽑힐 일은 없다며! 태자가 그럴 일은 없다고 호언장담 하더구나! 아주, 누가 보면 니 동생이 연이가 아니고 태자라고 생각할 정도던데. 왜? 전쟁터에서 같이 구르다 보니 고세 정이라도 든 거냐?”
류 충의 배배꼬인 말투에 류 강연은 한숨을 길게 내 뱉었다.
“후- 아버지...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연이가 모자라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태자전하께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한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살다가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지만 태자가 조건으로 본다면 환제국 일등 신랑감인건 맞지 않겠느냐. 성격은 뭣 같지만, 제국의 태자에다, 얼굴도 뭐...몸도 꽤...돈도 좀...하여튼 연이한테는 한참 못 미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나라 제일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니냐.”
“아버지, 그건 객관적인 부분만 생각 하실 때 그런 겁니다. 제가 태자전하와 5년간 같이 전장을 구르면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그는 감정이 없습니다.”
“......”
“따라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동화되지도 못합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모르거든요. 저는 그가 슬퍼하는 것도, 기뻐하는 것도, 심지어 화를 내는 것조차 본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태자전하께서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진다는 건 불가능 하다고 말씀드렸던 겁니다.”
“...그런 뜻 이였던 게야?”
“네. 만약 태자전하가 다른 사람의 반만 이라도 비슷했다면 아까. 저도 반대를 했겠지요.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난봉꾼에게 우리 연이를 줄 수는 없지요. 죽으면 죽었지.”
“그럼! 아주 속이 시원하구나. 난 또...오해해서 미안하구나. 아들...”
“괜찮습니다. 아버지”
아까까지 100년 원수와 같았던 둘의 사이가 다시 강력한 동맹을 맺은 아군으로 변하니 식탁위의 분위기가 화사해 졌다.
화연은 그 둘의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그 태자전하라는 사람이 말로만 듣던 바로 싸이코패스 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연우일 때 TV를 틀면 그런 사람들이 저지른 잔인한 범죄들로 뉴스가 떠들썩하기도 했는데...머지않아 제국의 황제가 되실 텐데 참 걱정스러웠다. 누군지는 몰라도 부모님께서 참 속상해하시겠다.
류 충이 나물을 오물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그 놈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아니...거, 참...”
류 충은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없었던 오후 어전회의(御前會議) 때를 회상했다.
오찬 때의 그 분노가 이제 겨우 갈무리되는 중이었는데 또, 그 느물느물한 연제의 상판을 봐야 한다니 심기가 매우 불편한 상태로 회의에 참석을 했다.
연제가 도착하기 전 의전(議戰, 환제국의 신료들이 회의를 하는 장소)에 모인 신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가, 류 충이 들어가니 그를 둘러싸고 오늘 환궁한 태자와 둘째 아들에 대한 질문을 해댔다.
류 충은 둘째아들의 귀환에 대해서는 약간의 관심은 있었지만 태자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심드렁하게 둘째아들에 관한 질문에만 대충 대답해 주고 있었는데 연제가 들어왔다.
연제는 들어오자마자 류 충을 짧게 노려본 뒤 태연하게 옥좌(玉座)에 앉았다.
연제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각자의 좌석에 착석한 뒤, 회의는 시작되었다.
“짐의 영토이자 대륙 최대의 곡창지대인 가람지방을 침입한 륜국과의 기나긴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면서 가람지방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소. 이에, 이번 전쟁에 참여한 장수들에게 적절한 보상금과 직책을 내리려 하는데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류 충은 별 관심은 없었지만 재상의 예의로 왕의 질문에 일단, 동의를 해줬다.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공이 있으면 상도 있어야 지요.”
“맞습니다. 특히 류 재의 둘째 아들인 류 대군(大軍, 환제국의 군인의 직책, 전쟁 시 부대 통솔권한을 갖는다)의 군사작전이 아주 적절하게 맞아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적들이 아주 정신을 못 차렸다고 하더군요.”
병부상서(兵部尙書, 환제국의 행정부 중 군사에 대한 사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장)의 셋째아들도 이번 전쟁에 참여를 했었다 던데, 그래서 그런지 류 충에게 눈웃음을 보내며 편을 들었다.
그 외 몇 몇 행정부의 수장들이 동의를 하고 나섰지만 내각에 속하는 수장들은 말이 없었다.
이번 전쟁의 승리에는 군 통솔 권한을 가지고 있던 류 충의 아들 류 강연의 공이 제일 컸다.
때문에 류 가(家)에게 또 막대한 보상금과 전리품이 쏟아져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권력의 정점에 서있는 류 가(家)에 날개를 달아줘도 아주 쌍으로 달아주는 형국이라 내각신료들은 섣불리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각의 대학사(大學士, 환제국의 내각 총 수장)인 기류 명률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는 젊은 사람들이 대거 참여하였기 때문에 너무 상을 남발한다면 그들의 미래를 생각할 때 별로 좋은 일은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기류 명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신료들이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고 류 충을 쳐다보았다.
기류 명률과 류 충은 앙숙 관계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류 충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은데 기류 명률 혼자 류 충을 너무 싫어하고, 질투하고, 시기했다. 얼마나 싫어하는지 기류 가(家)가 위치하고 있는 기류 현(縣)에 거주하는 주민들까지 아무 이유 없이 류 현(縣) 주민들을 싫어할 정도였다.
기류 명률이 뭐라고 짖던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류 충은 코웃음을 한번 날려주고 다시 심드렁해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행궁의 인력을 늘려 자신이 조금이라도 딸과 같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 이었다.
류 충의 그 관심 없다는 표정에 발끈한 기류 명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전쟁의 가장 큰 공은 태자전하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지부진해 질수도 있던 전쟁을 태자전하께서 끝을 맺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 륜국이 태자전하의 태산 같은 강건한 기세에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우리에게 백기를 들어 올렸다는 사실은, 이제 우리 환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 까지 널리 퍼져있지 않습니까.”
기류 명률의 말을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연제가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턱수염을 쓸었다. 아주 흡족한 표정이었다.
“음...그렇긴 하지...태자가...”
“풋-”
류 충이 급하게 입을 막았다.
연제와 기류 명률이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너무 웃기잖아...잔뜩 겁을 집어먹고 백기를 들었다고? 태산 같은 기세?
명률 쟤도 참...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륜국의 사절단이 태자보고 그 놈, 피에 미친놈이라면서 우리보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하루빨리 잡아 죽이라며 거품을 물던 모습을 분명히 같이 봐놓고선 어떻게 저렇게 미화시켜 말할 수가 있지?
그래, 겁을 집어먹었긴 먹었더라, 미친놈한테 언제 물려 병이라도 걸릴까봐 겁을 잔뜩 집어먹었더라고, 나 보고도 조심하라던데...류 충은 그때 그 사절의 모습이 생각나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풋-”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뻔한 얘기를 뻔하게 나누던 연제와 기류 명률이 다시 류 충을 노려보았다. 기류 명률이 연제의 눈치를 슬쩍 보니 연제의 미간사이가 잔뜩 찌푸려져 있는 것이 이때다 싶어 호통을 쳤다.
“어허! 재상! 어전 앞에서 그 무슨 망측한 태도란 말이오! 아랫사람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뭐, 부끄러울 것까지야...근데, 내가 굉장히 궁금한 것이 있는데 좀 물어봐도 되겠소. 대학사?”
“어전회의가 한참이 와중에 무슨 사적인 질문을 한단 말이오! 자중 좀 하시오. 재상!”
“이번 일에 연관된 내용이라서 말이오.”
“어흠,흠...무슨 질문이시오”
“거,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물가물해서 말이오. 그때, 륜국의 사절단이 방문한 자리에 대학사와 내가 같이 있었지 않았소.”
“맞소. 같이 있었지...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이오?”
“그럼 그때 사신이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하시오? 내가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분명히 태자전하가 미ㅊ”
“커흠! 흠! 크흠, 흠! 거, 거 사적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잘 기억이 안 나신다니 내가 자세하게 필서 해 드리겠소. 지금 말고! 나중에!”
붉어진 기류 명률의 얼굴을 보니 봐줄까 말까 고민되었다.
“흠...”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탁탁 두들기면서 오늘 기분도 안 좋은데 저 놈을 한번 잡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연제가 그만하라는 눈치를 줬다.
흥! 내가 누구 때문에 기분이 나쁜데!...류 충은 고개를 획 돌렸다.
연제가 눈치를 줘서 살아난 것도 모르고 기류 명률은 류 충이 더 물고 늘어질 줄 알았는데 이정도로 끝나서 기분이 좋아졌다.
“폐하. 결론을 말씀드리면, 소신은 상을 내리신다면 태자전하께서 가장 많이 받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류 충은 관심이 없었다.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해서 전리품이든 보상금이던 자신에게 한 푼도 안 준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둘째아들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둘째도 그런 거에 연연하는 성격이 아니다. 너 돈 한 푼도 못 받는대, 하면, 돈 받으려고 한 일 아닙니다. 라고 하던가, 그렇습니까. 하고 말 성격이었다.
니들끼리 다 노나 가지던지, 아니면 개나 고양이한테 던져 준다고 해도 반대 안 할 테니 빨리 좀 정했으면 좋겠다.
오늘은 정시에 꼭 퇴 궁 하고 말거야.
아직 한창 회의 중이지만 류 충의 마음은 벌써 퇴 궁을 향하고 있었다.
지들끼리 쑥덕쑥덕하더니 태자가 제일 많이 받기로 했는지 연제가 헤벌쭉한 입을 가리고 내 눈치를 살짝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꼴이 얼마나 얄밉던지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리는데 의전으로 누군가가 입장한다는 출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